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95화 (1,162/1,205)

1194화

뭔가 문제라고 있어?

그런 의미로 디아나를 쳐다보자, 디아나가 갑자기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가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니, 제대로 인사는 하고 가게."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일단 시치미를 떼 봤지만, 너무 갑자기 허를 찔린 바람에 제대로 대처가 안 됐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아니. 그게 말이지. 당연히 나도 얼굴 보고 인사는 하고 싶지.

하지만 전에 사라를 필두로 바프라에 있는 삼인방이 끈질기게 매달렸던 걸 생각해보라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어디 못 가게 감금당해도 이상하지 않을지 몰라.

"레이아 양이 동행한다면 지난번처럼 크게 붙잡는 이는 없을 걸세. 바프라에 보낼 때도 실비아 양을 동행시키는 것으로 다들 넘어가 주지 않았는가."

디아나도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거겠지. 다시 한번 포옥하고 귀엽게 한숨을 내쉰 다음, 디아나는 그렇게 말해줬다.

"그렇게 티 났어?"

"음! 이 몸의 눈을 속이려면 아직 천 년은 이르네."

스케일 엄청 크네. 그럴 땐 보통 백 년이라고 하지 않아?

그야 디아나한테는 천 년도 스케일 작게 줄여 말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 몸에게도 천 년은 짧지 않네!"

우왓. 깜짝이야. 뭐야 이 토닥토닥 어택은!? 속마음을 읽고서 하지도 않은 말에 태클 거는 건 너무하잖아!?

"크윽!? 커헉!"

"아픈 척도 하지 말게! 자네가 무릎까지 꿇을 정도로 아플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 몸의 주먹이 더 아프네!"

아니. 난 그저 분위기 맞춰준 것뿐인데, 이것까지 혼내는 건 진짜 너무하지 않아?

뭐, 눈물 글썽이면서 주먹을 호호 부는 모습이 귀여우니까 봐줄 거지만.

디아나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나는 비스행을 미루고 일단 우리 애들한테 인사부터 하기로 했다.

인사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비스에 가는 걸 미루기까지 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디아나가 인사하고 오라고만 했다고 해서 정말로 다녀오겠다는 말만 하고 갈 리가 없잖아?

어차피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급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세이지가 우리에게 붙잡힘으로써 비스와의 연락이 끊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스가 곧장 이변을 알아채고 대응해오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어차피 비스 공략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플리투스를 공략한 미리엘과 합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바프라 때처럼 어중간하게 국경 지대만 장악해서 적당히 말을 맞추는 것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

비스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바프라처럼 플리투스에 자연스럽게 합병되는 형식으로 전쟁을 멈출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불사할 테니까.

즉, 내가 비스를 장악하는 것보다도 더 먼저 플리투스를 완전히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미리엘에게 하루라도 더 시간 여유를 주기 위해 쉬는 거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쉬어가는 것도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뭐, 그냥 내가 우리 애들이랑 같이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다는 것이, 아무래도 제일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레이아와 중2병을 대동하고 일단 위로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디아나도 같이 오고 싶었지만, 누구 한 명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디아나는 나중에 따로 인사해야지.

우선은 위에 있는 넷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겠지.

"어머, 빨리 돌아왔네?"

제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건 역시나 길드의 안내 데스크에 있는 레이첼 누님이었다.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안내원으로서 영업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봤던 만큼, 나만을 위한 미소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고 할까.

"응. 생각보다 일이 훨씬 잘 풀려서."

설마 나도 세이지를 그렇게 빨리 추적해내고, 또 세이지가 그렇게 가까이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최소 한 달은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플리투스로 가기 전에 우리 애들을 설득시키는 것에 그렇게 애를 먹었던 건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는 했지.

"그럼 한동안은 여기에 있는 거니?"

"아니. 그게…얘기하자면 조금 길어지니까. 그 얘기는 이따가 집에 가서 하자."

혼자 안내 데스크를 독차지하고 앉아서 하루 종일 떠들 수도 없는 일이니, 나는 일단 그렇게만 얘기했다.

내 뒤에서 줄 서 기다리는 모험가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거기에 레이첼 누님의 일을 방해하는 꼴도 되어 버릴 테고.

"그러니…응. 그러면 오늘은 빨리 돌아갈게."

반차라도 쓰려는 걸까?

아무튼 누님과는 일단 그렇게 말 그대로 간단한 인사만 하고, 우리는 길드를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구원 씨. 저희는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

그리고 길드를 나와서는 레이아가 내 신경을 써줘서 중2병을 데리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준 덕분에, 혼자 남은 나는 곧장 다음 인사를 하러 갔다.

그렇군. 우선은….

***

"으하응!? 자, 자기. 돌아오자마자 너무…흐응…격렬해애!"

"네가 섹스에 집중 못 하고 이상한 말이나 하니까 그렇잖아. 성욕 과다 체질에서 벗어났다고 벌써부터 이러기야?"

"이상한 말이 아느햐앙!?"

"네가 섹스할 때 섹스 말고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한 거야."

"너무해애…."

펠리시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잠깐 멈추자 빨리 더 움직여달라는 듯 허리를 은근슬쩍 움직였다.

뭐, 그런 느낌으로 점심까지 펠리시아와 인사 겸 섹스를 즐기고 나서, 나는 이번에는 마틸다를 찾아 신전으로 갔다.

말해두지만, 신전에서는 섹스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평범하게 마틸다의 곁에 있기만 했다.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 신전에서 섹스하다가 그대로 여신 강림 되면서 난리가 났었는데, 연이어서 또다시 섹스로 소동을 일으킬 용기는 아무리 나라도 없으니까.

그래서 마틸다가 성기사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오랜만에 소피아 대사제와 차를 마시면서 대화도 나누면서, 정말로 저녁 시간까지 조용히 있다가 왔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돌아온 저택에서는, 식사 전까지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집사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얘기를….

"구원 님."

계속 따라다니는 내게 살짝 짜증이 난 건지, 드디어 걸음을 멈춘 바넷사가 날 돌아봤다.

"한마디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하?"

바넷사야. 농담 좀 했다고 분위기 너무 험악해지는 거 아니니?

너도 내 성격 잘 알잖아. 그냥 이유 없이 너와의 대화를 거부할 내가 아니라는 것 잘 알면서 그래? 당연히 이 뒤에 이어질 말이 있지.

"또 집사로서 충고하려는 거라면, 안 들을 거야. 난 지금 집사 바넷사가 아닌, 내 애인 바넷사하고 얘기하고 싶은 거니까."

"후우…."

표정 자체는 무표정에서 변하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질렸다는 반응이었다.

야.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면 나 진짜로 상처받는다? 일단 나도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내가 무슨 괜히 네 일을 방해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뭐, 이런 얘기를 무시하지 않고 이렇게 걸음을 멈춰 세워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넷사로서는 장족의 발전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 가면 또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잖아?"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의 눈썹이 꿈틀하고 한차례 움직였다.

이유가 어찌 됐든 한창 일하는 도중에 내 애인으로서 대화하자고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포기할 수….

"구원 님의 여자로서 할 말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어, 어? 어엉…."

어라? 이건 내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닌데?

너무 갑자기 허를 찔리는 바람에 바보 같은 목소리를 내고 말았잖아.

"무슨 문제라도?"

"아니. 내 애인으로서 말한다는 거 맞지?"

"네."

내가 재차 그렇게 확인하자, 바넷사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확인시켜줄 셈인지 손에 끼고 있던 흰 장갑을 벗어서 자기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 단정히 매고 있던 자신의 넥타이를 쭉 잡아당겨 풀더니, 자신의 목까지 단단히 채워진 셔츠 단추까지 하나 풀었다.

"이렇게 하면…으읍!?"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정신을 차려 보니 바넷사를 벽에 밀치고 그 몸에 바짝 밀착해서는 그대로 그 입술을 훔쳤다.

"지금은 내 여자지?"

"…네."

갑자기 이렇게 밀어붙여서 또 차가운 시선을 보낼 줄 알았는데, 바넷사는 의외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줬다.

일하던 중에 갑자기 내 여자로서 행동하겠다는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오늘의 바넷사는 행동 패턴이 평소와 너무 다른데?

뭐, 좋아. 모처럼 이렇게 바넷사가 고분고분 행동해주는 거다. 나는 생각하는 건 뒷전으로 미루고 우선 욕망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럼 지금부터 같이 내 방에 가자고 하면, 따라올 거야?"

"그전에 한마디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은 즉, 얘기만 다 들으면 따라오겠다는 거야?

아니. 그전에 우선은 얘기를 듣자.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뭔가 할 얘기가 있다고 했었지.

이렇게 내 여자로서 얘기하겠다는 모습을 보면, 평소처럼 ‘디아나 님의 이름에 먹칠이 되지 않도록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닌 모양인데.

"당연하지. 내 여자와의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야. 무슨 얘긴데 그래?"

"이것으로 마지막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 자제해주십시오."

"으, 응?"

가볍게 건넨 말에 돌아온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내용이었다.

나는 가슴속에서 타올랐던 욕망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바넷사와의 대화에 임하기로 했다.

"바넷사. 확실히 난 좀 들떴을지도 몰라. 너도 알다시피…."

"알고 있습니다. 구원 님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사람이니, 분명 이번에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뿐이겠지요."

어? 지금 나 칭찬받은 거야? 갑자기 이러니까 적응 안 되잖아. 오늘 진짜 왜 이래? 칭찬 맞지? 내가 착각하는 거 아니지?

뭐, 그런 것보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쳐흐른다는 부분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일단 뒷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야 그렇잖아? 좋든 싫든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럴 거면 괜히 지레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보다, 완벽하게 끝낼 각오로 부딪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은 구원 님과 다릅니다. 이 일은 신까지 관여된, 수천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대업입니다. 그런 일이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의식하게 하시면, 저희는…이런 곳에서 그저 구원 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저는…."

그 얼굴을 덮고 있는 무표정의 가면은 깨지지 않았지만, 바넷사가 얼마나 분해하고 있는지는 나한테도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피가 안 통해서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잖아.

아마 지금도 무표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건, 단순히 저 표정 외에는 표정 짓는 방법조차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겠지.

하여간 이 녀석은…어쩐지 오늘따라 상태가 이상하다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런 곳에, 기다리는 것밖에 인가. 이거 진짜 우리 집사님이 한 말 맞아? 집사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건…."

"적어도 나는 계속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어야 더 힘낼 수 있다는 말도 있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바넷사가 여기에서 내가 돌아올 곳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나도 안심하고 아래에 내려갈 수 있는 거야. 그런 걸로는 부족해?"

"……."

저기, 바넷사씨? 저 지금 멋들어진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시면, 상당히 쪽팔…아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데 말이지요.

에, 에잇! 바넷사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난 나대로 강제로라도 대답을 듣고야 말겠어!

"뭐, 조금 진부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긍정했어!? 이 녀석 지금 긍정한 거야!?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해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솔직해서."

"전혀 위로가 안 돼…아니! 잠깐만! 지금 그거 위로도 아니잖아!? 너 말이야! 솔직한 게 언제나 미덕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큰 착각이야! 때로는 상냥한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네 농담은 농담으로 안 들린다니까! 적어도 표정이라도 좀 바꾸면서 농담을 해라!

아니. 그보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이었다는 거야!?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하겠네!

"진정하셨습니까?"

억울해서 어깨까지 들썩이며 씩씩거리고 있자, 바넷사가 내 어깨에 사뿐히 손을 얹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나는 그 손에서 떨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숨을 고르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아무튼. 네 말이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는 거지?"

바넷사에게 지적당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확실히 바넷사뿐만 아니라 다들 모습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 섹스 좋아하는 서큐버스 공주님이 섹스 도중에 갑자기 "그런데 자기, 그거 알아? 이 도시는 모험가들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이 약하다는 건 절대 아니야. 오히려 강한 모험가가 난동을 부려도 제압할 수 있게,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야. 자기가 원한다면, 그 군대를 지원해 주는 것도…아흐응!" 같은 얘기를 해댔으니까 말이야.

그때는 그냥 허리를 더 강하게 흔들면서 섹스에나 집중하라고 말하고 말았지만, 생각해 보니 펠리시아도 어떤 식으로 끝나든 이걸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불안해서 그랬던 건지도.

그 펠리시아가 그런 감정을 품다니 믿기지 않았지만, 역시 날 때부터 여신을 믿고 자란 애들과 난 여신의 사명이 끝을 향해간다는 것에 대한 감정이 전혀 다른 걸까?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곧바로…지금부터 내 방에 같이 갈래?"

경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말투로, 바넷사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의 입에서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그렇게 보란 듯이 한숨을 쉬어도, 아까보다 표정이 훨씬 나아졌다는 건 숨길 수 없다고. 뭐, 여전히 무표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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