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3화
레이아의 제안은 반대할 이유도, 그리고 반대할 생각도 들지 않는 제안이었다.
나도 레이아가 험한 일을 당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반대한 것뿐이지, 그런 문제만 없다면 같이 가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아까 말했던 난 레이아가 곁에 있어 줘야 한다는 건, 결코 빈말로 한 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레이아는, 존재만으로도 내게 도움이 되니까.
비록 내 마음을 더욱 보듬어주고 치유해줄 그 가슴은…가슴…레이아의 가슴이 없다니….
"아, 지금은 이러고 있을 필요 없었네요."
대체 얼마나 티가 났던 건지,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천사님은 황급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셨다.
치유된다. 특히 공중제비를 돈 반동으로 묵직하게 출렁이는 움직임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여자의 가슴을 자주 보는 남자일수록 평균 수명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걸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레이아의 가슴을 보고 있자니 알 것 같아. 그 연구 결과는 사실이야.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레이아의 가슴만 신경 쓴다는 얘기는 절대, 절대 아니지만!
"크, 크흠. 레이아.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아요. 오히려 기쁜걸요. 구원 씨가 제 원래 모습 그만큼 그…애착이 있으시다는…뜻이죠…?"
"당연하지이이!"
진짜 천사님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있지!?
평소의 가련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물론, 지금도 말하면서 살짝 자신 없어져서는 내 눈치를 살짝 보며 마지막을 의문형으로 끝내는 모습까지, 진짜 모든 게 전부 다 사랑스러워!
"꺄악! 구, 구원 씨. 진정하세요."
내가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자, 레이아는 너무 정열적인 대답에 오히려 자기가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날 밀어내기는커녕 손으로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진짜 천사님은 최고야.
아무튼 이렇게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되어주시는 천사님의 동행은, 나로서도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일이라는 거다.
게다가 천사님이 도움 될 만한 일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바프라나 플리투스를 공략할 때와는 다르게, 저쪽에 가서는 전투도 종종 일어날 예정이니까 말이야.
물론 이쪽 세계의 평균 실력과 내 지금 실력을 생각해 보면, 전투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별문제 없이 끝나겠지만.
그래도 역시 강력한 힐러가 한 명 동행하는 건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레이아의 마음은 잘 알았어. 혼자서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었다니. 지금껏 몰라줘서 미안해. 같이 가자, 레이아!"
"아니요. 제가 숨긴 거니까요. 구원 씨가 미안해하실 이유는…정말인가요!?"
여느 때와 같이 따뜻한 말을 해주며 날 다독이던 레이아는, 같이 가자는 말을 듣자마자 하던 말까지 멈추고 꼬리를 좌우로 맹렬히 흔들며 기뻐했다.
"응! 물론!"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게 환한 미소를 앞에 두고 실은 농담이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비정한 인간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게 해서 결국 비스 행에는 레이아도 동행하게 됐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중2병 앞에서 레이아와의 거리감을 얼마나 조절할 수 있냐는 건데.
아니. 모처럼 여자 위에 서는 남자 컨셉으로 그렇게 분위기를 잔뜩 조성해놨는데, 이제 와서 레이아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치유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될 우려가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으려나. 중2병도 눈치가 없는 녀석은 아니니까. 위쪽 세계에서의 내 여자와 내게 굴복한 여자는 취급이 다르다는 걸, 그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겠지.
위에서 감금되어 있었을 때, 이미 우리의 알콩달콩 한 모습을 몇 차례 보기도 했고.
"돌아왔군. 그럼 이제 편지를…."
빨리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걸까? 중2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녀석은 저러면 자기가 수상해 보일 거라는 자각이 없는 걸까.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서로의 입장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 일단 나도 어느 정도 경계는 하고 있는데 말이야.
"응? 그 사람은…?"
아무튼 그렇게 방안을 서성이던 중2병은, 다시 방으로 들어온 우리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이라니. 아까까지도 방에 같이….
"후훗. 모르시겠나요?"
레이아. 또 어느새 변했었어? 수인족 특유의 사뿐사뿐 한 발걸음 때문일까? 분명 또 변신하려고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았을 텐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그 말투…서, 설마 가슴 큰 사제!?"
"가, 가슴 큰…."
아무리 천사님이라도 이번에는 살짝 충격을 받았는지, 천사님은 살짝 비틀거리며 내 팔에 몸을 기댔다.
…천사님이 몸을 기댔는데 팔에 풍요로운 감촉이 느껴지지 않다니. 진짜 적응 안 되네.
"너도 무성별자였어!? 하지만 구미호는 여자밖에 없는 게…아니. 혹시 여자밖에 없다는 뜻이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고 팔에 느껴지는 위화감에 내가 잠깐 반응하지 못한 사이에, 중2병은 또 특유의 망상을 부풀리면서 이상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런 오해를 하는 건지. 무성별자라는 게, 여자가 돼도 다시 무성별자 때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였어? 아니잖아?
진짜 저 녀석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꼭 저렇게 이상한 망상을 한단 말이야.
아무튼 저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또 폭주하겠군. 그렇게 되기 전에….
"바보냐. 그럴…."
"그, 그럼 혹시 나도 여자가 되면…가슴이 그렇게 커질 수도 있다는…건가?"
좋아. 그냥 내버려 두자. 왠지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자신의 평평한 가슴을 슬쩍 내려다보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 중2병의 모습에, 나는 빠르게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리고 그냥 내버려 두는 걸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서.
"그럴지도 모르지. 흔히들 주무르면 커진다고 하니까 말이야."
이렇게 맞장구까지 쳐줬다.
옆에서 레이아가 "구원 씨. 그러다가 정말로 믿으시겠어요." 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여줬지만, 괜찮아. 믿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뭐, 저 녀석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가슴을 달고 싶어지는 게 아닌 이상, 이 오해가 뭔가 커다란 사건으로 발전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재미있잖아?
"그러고 보니 네 여자는 다…그 마법사는 가슴을 안 만져줬어?"
쟤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너 진짜 이 자리에 디아나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디아나는 엘프족이라 성장이 느린 거야. 다 크면 레이아한테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질걸."
우리 디아나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나는 있는 힘껏 디아나의 가슴을 두둔해줬다.
사실 내가 한 말이 딱히 거짓말도 아니잖아?
"그런 거야?"
"그런 거야. 그런데 묘하게 여자 가슴에 관심이 많잖아? 아직 남자도 못 된 주제에, 여자한테 성욕은 느끼는 건가?"
"어!? 그, 그게…다, 당연하지! 난 언젠가 남자가 될…!"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도, 중2병은 있는 힘껏 허세를 부렸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다는 게 보이는, 그런 허세를.
성욕은 느끼지 못했지만, 성욕을 느끼는 남자가 되고 싶다. 라는 걸까?
내가 그런 식으로 여자를 굴복시키는 걸 봤으니,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저 녀석으로서는 그런 것에 동경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성욕을 느끼는 건 본능이니까 상관하지 않겠지만, 내 여자한테 성욕을 드러내지 마라. 네가 주제넘게 내 것을 넘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장난스러운 분위기에서 갑자기 돌변해서,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하며 중2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다리 사이를 향해, 주저 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히극…!?"
당연히 중2병은 다리를 황급히 오므렸지만, 이미 내 손은 다리 사이에 제대로 파고들어 간 후였다.
바지 위로도 정확히 중2병의 음부 위치를 파악해낸 나는, 입구 쪽을 손끝으로 강하게 누르면서 중2병의 귀에 속삭였다.
"넘볼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 흐읏…알겠으니까아…."
살짝 겁만 준 건데도 다리를 심하게 떨면서, 중2병은 거의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으면 됐어. 나도 약속은 깨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조심하자고."
"흐아앗…하앗…하앗…."
내가 떨어지고 나서도, 중2병은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그저 숨을 고르기에 바빴다.
아무리 그동안 한 게 있다지만, 보통 저렇게까지 흐트러질까? 진짜 저런 모습만 보면 언제 내게 다리를 벌리고 애원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보면 볼수록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뭐, 어찌 됐든 잘 됐지. 저 모습을 보아하니, 저 녀석 앞에서 레이아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쟤가 날 만만히 보거나 딴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사실 이걸 확인하려고 일부러 화난 척을 한 거였다.
그렇잖아? 어차피 무성별자라느니 남자가 되느니 하는 건 다 헛소리고, 이 녀석은 결국 여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내가 얘가 우리 애들 가슴에 관심 좀 가진다고 해서 그렇게 갑자기 화낼 리가 없잖아?
이 녀석의 반응을 살피고 덤으로 가볍게 경고해줄 생각이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구원 씨…."
레이아에게 맛보기를 보여줄 생각도 있었다.
이 녀석한테는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경각심을 일깨울 일이 있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 동행하게 될 레이아 역시고, 그 모습을 종종 보게 될 거다.
나도 내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상대로 이러는 모습 같은 건 웬만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이것만큼은 앞으로의 계획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만약 레이아가 지금 내 모습을 못 견뎌 하는 것 같으면….
"줄리안 씨라면 분명 괜찮을 거에요. 성실한 분이신걸요. 그렇죠, 줄리안 씨?"
뭐, 그럴 리가 없었지만 말이야.
우리 천사님은 이래 봬도 내가 다른 여자와 자는 걸 처음 허락해준 사람이자, 다른 여자들과의 하렘 플레이도 처음으로 주도했던 사람이니까 말이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겉모습과 행동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우리 천사님도 마냥 연약하기만 한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거다.
"으, 응…."
레이아에게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그러는 것처럼, 중2병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시선에서 남자가 여자한테 품는 것과는 또 다른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뭐, 우리 천사님이니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나.
"그리고 하나 더 조심할 게 있어. 앞으로 레이아도 우리와 같이 다닐 거야. 이 모습으로, 너와 마찬가지로 남자 동료로서. 무슨 말인지 알지?"
"아, 아아. 아예 여자 취급하지 말라는 거지? 알겠어."
"그래."
진짜 이런 걸 보면, 눈치가 없는 녀석은 절대 아닌데 말이야.
아무튼 대충 얘기는 일단락된 것 같으니, 이제는 정말로 움직이어야 할 때다.
"자, 그러면 곧장 비스로…가기 전에, 우선 디아나한테 얘기해야겠네. 마을에 내려가 있다고 했지?"
"네. 제가 다녀올게요."
그렇게 레이아가 데려온 디아나에게, 나는 다시 한번 레이아와의 동행 경위를 설명했다.
뭐, 설명이라고 해도, 레이아가 그동안 구미호 마을에서 변신술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걸 디아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라, 얘기는 상당히 간단하게 끝났지만 말이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려는 겐가?"
"응. 그럴 생각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