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93화 (1,160/1,205)
  • 1192화

    앨리시아와의 대화를 마친 후, 우리는 다음 계획을 위해 헤어져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앨리시아는 아라크네 간부 및 발가스 휘하 군사들과 함께 플리투스의 수도로. 그리고 나와 중2병은 일단 구미호 마을로.

    "조금 더 글씨를 흘려 써봐. 급박한 사람치고는 너무 또박또박 쓰고 있잖아."

    "흐, 흘려……이렇게?"

    그리고 그 구미호 마을에서, 나는 중2병을 시켜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의 수신인은 비스의 수장. 내용은…….

    "그래. 나쁘지 않네. 하려면 잘하잖아."

    "후, 후훗! 당연하지! 이 나한테 걸리면 이 정도쯤은……!"

    아니. 기껏해야 사기 편지 한 통 쓰는 것뿐이잖아. 그게 그렇게까지 우쭐할 일이야?

    세이지가 굴복한 그날 이후, 중2병은 묘하게 이런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중2병답게 원래부터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망상하는 일은 자주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망상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걸 남이 알아주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묘하게 날 향한 어필이 늘어난 것 같단 말이지.

    아마 세이지의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서, 자기 딴에는 ‘난 이렇게 대단하니 앞으로도 약속을 깨지 말고 협력 관계를 유지하자!’ 라는 뜻으로 하는 것이겠지만……중2병아. 네가 그렇게 유능하면, 나같이 언제든 여자를 굴복시킬 수 있는 남자는 그냥 편하게 널 자기 여자로 만들고 평생 부려 먹으려 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거니?

    아니. 뭐, 그렇게 안 할 거지만 말이야.

    "다 썼다!"

    "잠깐 보여줘."

    나는 혹시 빠뜨린 점은 없는지 편지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지금까지 도피 생활을 하느라 연락을 할 틈이 없었다. 적의 허를 찔러 겨우 틈을 만들어 편지를 쓴다. 적은 다수.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보법을 꿰뚫어 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비스의 비수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걸음걸이나 사용하는 무술이, 그리고 그 강력함이 바프라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스에서 파견된 자일 가능성 있음. 만약 이 이후에 더 편지가 없다면.

    뭐, 간단히 말하자면, 비스의 대장이라는 자의 의심을 증폭시킬만한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비스 내부에 비수를 더 많이 둘 정도로 의심이 많은 성격인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 의심을 이렇게 살짝 더 부추겨주면, 어떻게 행동할지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아?

    "마지막 글자는 펜을 떼지 않고 옆으로 죽 그어서 긴박감을 나타내 봤어! 어때!?"

    "좋네. 응용력이 괜찮은데?"

    "그, 그렇지!?"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이냐?

    이 녀석, 사실은 위기감이고 뭐고 대단한 꿍꿍이 같은 거 없이, 단순하게 칭찬 듣는 게 기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세이지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이 녀석 비스에서 친구 하나 없이 지냈던 것 같으니까.

    "그럼 당장……!"

    "잠깐 기다려. 그렇게 서두르지 마."

    곧장 전서구를 날리려고 하는 중2병을 나는 황급히 제지했다.

    이걸 보내면 비스의 수장은 반드시 뭔가 액션을 취할 거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기 위해서는…….

    "가시는 건가요?"

    중2병과는 다르게, 역시 척하면 척이로군.

    내 다음 행동을 금방 알아챈 천사님에게,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응. 미안해. 오자마자 금방 이렇게 가게 돼서."

    오늘도 성실하게 이 구미호 마을에서 언제 올지 모를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천사님한테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하지만 천사님은 오늘도 그저 천사 같은 미소만을 지어 주셨다.

    내 두 손을 한데 모아서 살포시 포개 잡은 천사님은, 끝까지 배웅해주시려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럼 구원씨. 갈까요?"

    응? 처, 천사님? 지금 뭐라고?

    "……텔레포트 마법진까지 같이 가자는 거지?"

    "아니요."

    아니.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니라고 해도 말이야.

    하아……. 하긴. 플리투스로 향할 때도 중2병이랑 둘이서만 가는 걸 엄청 반대했었지.

    금방 돌아올 거라는 얘기로 어떻게든 무마시키고 간 거였고, 그래서 이번에도 이대로 은근슬쩍 가려던 거였는데.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대화는 불가피한가.

    "레이아. 우리는 지금부터 비스로 갈 생각이야. 하지만 레이아도 알다시피 비스는 여자가 함부로 돌아다니기에……."

    "구원씨."

    그렇지 않다는 거, 구원씨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눈속임 같은 말은 하지 말기에요.

    그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도, 천사님의 목소리는 그런 말이 되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게 되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할까, 진짜 우리 천사님은 진짜 천사보다도 더 천사 같아서 가끔 곤란하다니까. 진짜 여신 상대로도 이런 기분은 절대 되지 않는데.

    "잠깐 둘이서만 얘기할까?"

    천사님을 설득하려면, 제대로 상황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얘기는, 중2병한테 들려줘서 그다지 좋을 게 없는 얘기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잠시 중2병을 기다리게 하고 천사님과 둘이서 방을 빠져나왔다.

    "그래. 레이아 말대로, 내게 굴복된 여자인 척하면서 돌아다니면 비스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어. 하지만 레이아. 생각해 봐. 그런 세계잖아. 아무리 남의 여자라고 해도, 다른 놈들이 레이아한테 어떤 시선을 보낼지는 뻔하잖아? 그것도 레이아처럼 매력적인 여자라면 더더욱 그래."

    "매, 매력적이라니……구원씨도 참……."

    "아니. 레이아는 자각이 너무 부족해. 위에서도 레이아가 내 여자라는 걸 모두가 알고, 이제는 성녀이기까지 하니까 아무도 안 건드리는 것뿐이지. 레이아는 사실 남자라면 눈이 안 돌아가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매력적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 레이아가 남자에게 굴복한 여자라는 신분으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놈들만 있으면 다행이지, 혹시 자기들한테 빌려달라고 하는 개……그런 놈들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꼴은 절대로 못 봐!"

    상상한 것만으로도 욱해서 나도 모르게 욕까지 튀어나올 뻔했잖아.

    "구원씨. 진정해주세요."

    내가 화를 주체 못하고 씩씩대면서 말하자, 레이아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날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보니, 내 말이 상당히 와 닿긴 한 모양이다.

    사실 이걸 노리고 감정적이 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같군. 이대로 살짝만 더 강하게 나가면, 레이아도 분명 내가 중2병과 둘이서만 가려는 이유를 알아줄 거야.

    "이게 진정할 일이야!? 심지어 레이아는 남장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레이아가 나랑 같이 비스에 갈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그래. 차라리 다른 애들이 같이 가겠다고 했으면, 어떻게든 남장을 시도라도 해봤을 거다.

    하지만 레이아만큼은 안 되잖아? 우리 애들 중 남장이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아마 만장일치로 레이아가 꼽힐 거다.

    이유는 물론……말 안 해도 알잖아? 저 존재감을 지울 수 있는 남장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은걸요."

    응? 레이아? 뭔가……같이 안 가겠다고 하는 말 앞에 덧붙이는 말치고는 말투가 묘하지 않아?

    "후훗. 이걸 봐주세요."

    내 감정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는지, 레이아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장난이 성공한 것 같은 표정. 저런 표정마저도 아름다우시지만,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에잇!"

    묘하게 힘 빠지는 기합성과 함께 펄쩍 점프해서 뒤로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도는 레이아. 그러면서 그 황금빛 꼬리가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고, 좁은 복도에서의 공중제비에도 균형을 잃는 일 없이 사뿐하게 착지한 레이아는 그 거대한 가슴을 출렁……어? 어라? 이상하다?

    믿기지 않는 눈앞의 현실에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봤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눈을 비벼대도 눈앞의 광경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후훗. 어때요? 이렇게 하면……꺄악! 구, 구원씨!?"

    아니야. 이럴 리 없어. 이래선 안 돼.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속으로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며 손을 뻗어서 직접 만져보기까지 했지만, 손안에 느껴지는 건 그저 한없이 평평한 감촉뿐이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손이 쫙 펴지는 거지? 손안을 가득 채우던, 그러고도 넘치던 그 압도적인 감촉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레, 레이아아아……!"

    "꺄아악!? 구, 구원씨? 울지 마세요! 자, 여기요. 여기에 있어요."

    다리부터 힘이 풀려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자, 레이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공중제비를 돌더니 황급히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안아 줬다.

    이건……이 넘치는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은…….

    "훌쩍. 레이아……?"

    "네. 구원씨. 저에요. 제 가슴……아응! 거, 거기에 있어요."

    쥐어짜듯이 가슴을 꽉 붙잡혀도 불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을 더 내밀기까지 하면서, 레이아는 차분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진정하셨나요?"

    당연히 진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아의 가슴에 이렇게 얼굴을 파묻고 레이아가 뒷머리까지 쓰다듬어주고 있는 거다. 이러고도 진정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신과의 상담이 필요한 인간뿐일 거다.

    하지만 이렇게 진정하고 나니까, 조금 전 내가 보여준 행동이 엄청나게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당황했지만, 아무리 상실감이 컸다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버리다니.

    "……응. 미안. 일단 변명 좀 하자면 말이지, 난 결코 레이아한테 가슴만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야. 단지 말이지. 단지 난……."

    "구원씨. 괜찮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내가 생각해도 조금 구차한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레이아는 그런 변명마저도 전부 포용해줬다.

    크흐흑……진짜 사랑합니다, 천사님.

    "어머어머. 구원씨, 그사이에 어리광이 늘어나셨나요?"

    "그럴지도. 역시 난 레이아가 곁에 있어줘야 하나 봐."

    "후훗. 그러면 허락해주시는 거죠?"

    허락?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지. 아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잠깐 잊고 있었어.

    "진짜로 같이 가려고? 아니. 그보다 아까 그거는 대체……?"

    "후훗. 이것 말인가요?"

    내게서 살짝 떨어진 레이아는, 다시 뒤로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아서 아까의 그 모습으로 변했다.

    그 압도적인 가슴이 완전히 사라진,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슴이 제일 눈에 띄어서 그렇지, 잘 보면 가슴 말고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일단 머리카락이 짧아져 있었고, 구미호 특유의 귀와 꼬리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왠지 평소보다 조금 각이 지고 옷 위로 보이는 몸선도 왠지 모르게 튼실해 보이는 것이…….

    "남자?"

    "네! 남자로 변했어요!"

    목소리까지도 살짝 중성적인 느낌으로 변했잖아!? 설마 아래쪽에 달려있기까지 한 건……아, 아니. 그런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아무리 천사님이라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후훗. 실은 구미호의 능력 중에는 모습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어요!"

    내가 아까처럼 당황하지 않는 걸 보자 안심했는지, 레이아는 장난이 성공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신 나게 설명해줬다.

    아마 꼬리가 있었다면 좌우로 열심히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건 그렇고 변신 능력인가. 확실히 구미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능력 중 하나지.

    그러고 보니 레이아의 종족 스킬 창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스킬 활성화가 아예 안 되어 있어서 적당히 넘어가 버렸지만 말이다.

    아, 그럼 설마 요즘 들어서 천사님이 틈만 나면 구미호 마을에 내려왔던 것도……?

    생각해 보니까 레이아가 구미호 마을에 자주 내려온 시기가, 내가 돌아오고 나서 이제 비스를 공략하러 갈 차례라고 밝힌 시기와 딱 겹치잖아? 이렇게 대놓고 힌트를 줬는데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니.

    "네! 이곳에서는 필요 없는 능력인 만큼, 능력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 로엘씨 뿐이셔서……."

    역시 이걸 배우러 다닌 거였나.

    나와 함께 다니기 위해 레이아가 뒤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뭉클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뭐, 저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레이아는 그냥 날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몰래 연습한 것뿐이겠지만.

    "하지만 그거, 오래 유지할 수는 있는 거야?"

    "네! 2, 3일은 문제없이 견딜 수 있어요!"

    뭐, 그야 그렇겠지. 종족 스킬도 일종의 고유 스킬 같은 거니까. 일반적 스킬과는 효율이 차원이 다를 거다.

    디아나도 단신으로는 오래 쓸 수 없는 폴리모프를 바넷사는 꾸준히 유지하는 걸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다는 얘기는…….

    "저도 구원씨와 함께 비스로 가고 싶어요! 남자 동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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