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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85화 (1,152/1,205)
  • 1185화

    성도 제대로 모른다는 얘기는, 그 세이지라는 이름도 가명일 수 있다는 얘기가 되겠군.

    애널라이즈를 확인해 본 결과 눈앞의 장군의 이름은 확실히 린하르트였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믿고 의심을 풀 수는 없다는 얘기다.

    "구원 님? 아까부터 대체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비수라는 건 대체…?"

    슬슬 우리의 무례함에 얼굴을 빨개지면서도 존댓말은 해주는 눈앞의 신사의 모습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진짜 웬만하면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제일 빠르고 간편하게 확인할 방법이 이것뿐이니 어쩔 수 없지!

    나는 각오를 다지고, 남자에게만은 절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 스킬을 발동시켰다.

    나에게 이 자의 모든 성감대를 알려줘! 섹스 애널라이즈!

    "끄아아악! 내 눈! 이거 남자잖아!"

    바지 아래에, 바지 아래에 웬 개불이! 그것도 핑크빛으로 영롱하게! 젠장! 이 망할 섹스 애널라이즈는 왜 보여줘도 하필 핑크빛으로 보여주는 거야!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

    알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세상에 이런 콧수염을 기른 느끼한 아저씨가 실은 여자가 남장한 모습이라니,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있어서는 안 되잖아!

    그런데도, 그런데도 나는 대체 왜 그런 짓을…!

    "그저 잠깐의 판단 미스일 뿐이었어! 그 잠깐의 미스가 이런 결과를 낳을 거라고는 난, 난…! 그러니까 내 안에서, 내 기억 속에서 이제 그만 사라져!"

    핑크 개불!

    젠장!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도저히 잊히지 않아! 가능하다면, 누군가에게 안 본 눈을 사고 싶을 정도야.

    "성자님. 우선 진정하자."

    한순간의 판단 미스가 부른 후폭풍에 내가 눈을 감싸 쥐고 괴로워하고 있자니, 미리엘이 린하르트를 살짝 뒤로 물리고 자기가 대신 내 앞에 섰다.

    여전히 발동되어 있는 섹스 애널라이즈는 그런 미리엘의 성감대를 적나라하게 보여줘서….

    "후우. 아니. 미안."

    나는 곧바로 멘탈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여자 성감대 좀 보는 것으로 회복될 거면 처음부터 난리 치지 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단순히 성감대를 본 게 아니다. 말했잖아? 성감대가 핑크빛으로 빛나 보인다고.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미리엘은, 내게 철저한 조교를 받은 끝에 전신이 성감대가 되어 버린 여자다.

    아무리 그래도 서큐버스인 펠리시아만큼 온몸이 균일하게 핑크빛으로 빛나는 건 아니지만, 섹스 애널라이즈로 옷 아래의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뭐, 이렇게 말해도 결국 여자 알몸을 보고 진정한 게 되어 버리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애초에 남자 거기를 보고 받은 충격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란 원래 그런 생물이야.

    거기에 미리엘의 몸은 묘하게 사라를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어서, 괜히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정신 공격에 당하고 말았군. 방심하고 있을 셈은 아니었지만, 무서운 상대야."

    아무튼 그런 것보다, 지금은 저 장군 앞에서 갑자기 추태를 보인 것의 뒷수습을 해야 할 때였다.

    그러니까 중2병아. 그렇게 초롱초롱한 눈으로 ‘너도 나와 같이 어둠을 품고 있는 자였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은, 동류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은 그만둬.

    그야 나도 한때 붉은 발의 구원을 자칭하면서 중2병이 폭발했던 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세계에서 피를 보고 흥분한 나머지…아, 아무튼!

    아무튼 지금까지 보인 추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는 남 탓을 하기로 했다.

    "그건…줄리안과 같이 이런 곳에 왔다는 건, 그런 뜻이야?"

    "그래. 비스의 비수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보인 추태의 모든 책임을 비수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했다.

    비수 본인이 들으면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만, 헹. 억울하면 어디 한 번 나와보라지.

    "흠. 잠깐 괜찮겠습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비스라는 단어가 들린 것 같습니다만."

    "아아. 그렇게 말했어. 린하르트 장군. 장군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우리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야."

    "자세히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대체 그사이에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 미리엘의 당돌한 말에도 장군은 불쾌한 기색은커녕 경청하겠다는 듯 자세를 바로잡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묘하게 말투가 공손했지.

    아무리 리리안 플리투스의 후손이라고 해도, 보통 이렇게까지 하나? 진짜 타고난 카리스마라는 게 있는 건가?

    아무튼 보면 볼수록 무협지 주인공 같은 녀석이야.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이곳에 비스의 첩자가 있어. 그리고 그자는…."

    미리엘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뒷말은 내가 이어달라는 듯 힐끔 눈치를 줬다.

    "조금 전 이 방에서 비스로 향하는 밀서를 가진 전서구가 날아가는 걸 발견했어."

    "이, 이 방에서…!? 그럼 설마…!"

    "장군도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군."

    방에는 현재 장군과 미리엘 두 사람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아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노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문 앞에는 경비병조차 세워두지 않고 있다.

    이곳까지 이어지는 짧은 복도의 앞에는 경비병이 서 있었으니, 아마 미리엘과의 밀담을 위해 일부러 일부러 사람을 물린 거겠지.

    그러니 그 세이지라는 비수는, 조금 전 중2병이 이곳으로 올 때 그랬던 것처럼, 특유의 투명해지는 보법을 사용해서 여기까지 잠입해 있을 확률이 크다고 봤는데.

    장군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장군뿐만 아니라, 미리엘과 중2병 역시도 모습이 보이지 않는 비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큭!?"

    미리엘이 허공을 향해 재빠르게 검을 휘두르자,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갑자기 사람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온몸을 새까만 천으로 된 옷으로 감싸고 있는 인물. 레이가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그 암살자 코스프레 같은 복장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암살자의 정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비밀 호위인 줄 알고 내버려 두고 있었는데, 아니었어?"

    "알고 계셨습니까. 그 말대로입니다. 혹시 모를 암습을 대비하여 가장 은밀하고 실력 있는 자를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만…설마 자네가 비스의 첩자였을 줄이야."

    "……."

    이런 상황이 오면 보통은 일단 오해라고 잡아떼겠지만, 방금 날린 전서구라는 확실한 물증이 있는 상황에서는 그마저도 어렵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줄리안 네놈…!"

    이렇게 아는 얼굴이 있어서야 말이지.

    "미안해, 세이지. 나로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입으로는 매번 정의다 뭐다 떠들어대던 놈이! 매일매일 이상한 소리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뭐가 흑염룡이냐! 뭐가 용의 피냐! 이 정신이상자 같으니라고!"

    우와…아무리 얘가 배신자고, 아무리 그게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그렇지. 말이 좀 심하지 않냐?

    그리고 중2병 얘, 저쪽에서도 중2병 취급이었구나. 어쩌면 저쪽에서는 얘 같은 게 보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뭐, 진정해. 그렇게 줄리안을 쏘아붙인다고 해서 너한테 도망갈 길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도망쳐? 이 내가?"

    내 말이 상당히 거슬렸는지, 비수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날 쏘아봤다.

    "응? 그럼 순순히 잡혀줄 거야? 설마 이기고 갈 생각은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너 계속 이 방안에 있었잖아. 미리엘이 용사라는 말 들은 거지? 딴짓하다가 못 들은 거 아니지?"

    "흥. 뭐가 용사냐. 진짜인지도 의심스러운 그깟 검을 빛냈다고 해서 용사면, 나는 리리안 플리투스다. 저런 것에 총사령관이라는 놈이 홀랑 넘어가다니. 플리투스의 수준도 알만하군."

    …너 말이야. 자기가 날카롭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큰 오산이야.

    미리엘이 들고 있는 검은 진짜 리리안 플리투스의 유품이고, 미리엘 본인은 진짜 리리안 플리투스의 손녀니까.

    각각 바프라와 비스를 담당하는 플리투스의 총사령관이 괜히 넘어갔겠어? 그 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이면, 저게 진짜라는 걸 알아볼 심미안이 있다는 거겠지.

    오히려 수준이 알만한 건 네 녀석이라는 얘기다.

    뭐, 미리엘이 용사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진짜였지만, 그래 봤자 더 큰 진실 앞에서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미리엘. 저렇게 말하는데?"

    "재미있는 의견이군. 내가 사칭이라고 말하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미리엘은 들고 있는 검에 마나를 잔뜩 불어넣었다.

    내 눈에는 사라나 쓰레온이 보여줬던 빛 덩어리와의 차이점을 전혀 알 수 없는 찬란한 빛이 매끄러운 검신을 휘감으며 방 안을 비추자, 지금까지 강한 척을 하던 비수도 침음성과 함께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럼 직접 상대해 보겠어? 가짜 용사의 힘을."

    항상 짓고 있는 시원스러운 미소도, 저렇게 보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섬뜩하게 보일 뿐이었다.

    뭐, 나는 우리 편이니까 든든하기 그지없지만 말이야.

    사실 이렇게 되기 전까지 비수는 내가 상대하고 그 공적만 미리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는데, 아예 비수도 미리엘이 상대한다면 나로서도 이보다 더 편할 수가 없었다.

    미리엘의 공적으로 만들기 위해 뒤에서 공작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큭! 과거의 망령이나 떠받들며 사는 플리투스의 개들이…! 죽어라!"

    미리엘의 검에 기죽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내뱉은 말이 있으니 도망갈 수도 없겠지. 뭐, 도망가려고 해도 도망갈 길도 없지만 말이야.

    비수는 몸을 검은 투기로 감싸며 미리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크허억! 서, 설마 이렇게나 강하다니…!"

    뭐, 검광을 보고 기가 죽은 것만 보더라도 둘의 격차는 확실했다.

    미리엘은 딱히 어렵지도 않게 비수를 제압해 버렸다.

    사실 전에 봤던 중2병의 실력을 생각해 보면, 아무리 미리엘이라도 제압하는데 애 좀 먹을 줄 알았는데.

    너무 깔끔하게 제압돼 버렸기 때문인지, 녀석의 실력은 중2병이 전에 보여줬던 실력의 절반도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때의 중2병은 내 성자 스킬에 한참을 시달려서 광인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아니. 그냥 그때 중2병이 광인 상태였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했던 건가?

    레벨은…어? 중2병보다 훨씬 낮네? 게다가 이 녀석, 마인도 아니잖아?

    비스의 비수는 전부 비슷한 실력에, 전원 마인인 거 아니었어?

    아니. 물론 중2병을 포함해서 아무도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없지만 말이야, 그래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잖아? 지금까지 용사의 핏줄 이외의 마인이라고는 중2병밖에 없었다고. 보통 비스의 비수는 전원 마인일 거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잖아?

    "그럼 잠시 잠들어 있어."

    "끄윽…."

    "이것이, 용사의 힘…."

    내가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미리엘은 간단하게 비수를 기절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미리엘을, 장군이 아까보다 훨씬 더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치 홀린 것 같은…아저씨가 저런 눈을 하고 있으니 진짜 기분 나쁘군.

    "린하르트 장군. 우선은 이 자를 내가 심문…."

    "물론 그러십시오! 미리엘 님이 혼자서 해결하신 공훈을 가로챌 만큼, 이 린하르트, 욕심 많은 사내가 아닙니다."

    아저씨. 미리엘한테 홀린 건 알겠는데, 말은 좀 끝까지 하게 해주자.

    그리고 혼자서 해결했다니 무슨 소리야. 확실히 저 녀석을 제압한 건 미리엘이지만, 저 녀석이 첩자라는 걸 밝혀낸 건 나라고. 오히려 내 공훈이 더 큰 거 아니야?

    그야 뭐, 여기서 내가 공훈을 챙겨봤자 이득 되는 일도 없으니, 그냥 전부 미리엘 혼자 해결한 걸로 해버려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아니. 오히려 그러는 게 나도 더 좋지만 말이야.

    "고마워. 그리고 나중에 사정을…."

    "네. 얼마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린하르트, 숨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청렴결백한 것이 린하르트 장군의 최대 장점, 이라는 말까지 듣는 이 린하르트니까 말이지요! 후하핫."

    대체 얼마나 자기 이름을 미리엘한테 각인시키고 싶은 거야. 이 린 어쩌고 장군.

    "고마워. 나 같은…."

    "그런 표현은 삼가주십시오! 비록 대화를 나눈 시간은 짧았지만, 이 린하르트, 미리엘 님을 본 순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플리투스를 이끌어 줄 분이라고. 드디어 리리안 플리투스 님의 진짜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우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하면 반역…아니. 그러고 보니 플리투스는 누구 하나가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형식이 아니라, 리리안 플리투스를 받드는 여러 제후가 힘을 합치고 모여 있는 형식의 세력이라고 했던가?

    "그렇게까지 말해주다니. 고마워. 린하르트 장군의 말은 사람에게 큰 힘을 주는군."

    "하핫! 고맙습니다! 미리엘 님의 힘이 되었다니, 이 린하르트…!"

    이 대화, 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셈인 걸까?

    "그럼 성자님. 심문을 도와주겠어?"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미리엘한테 아첨하는 린하르트와 한참 더 얘기를 주고받은 끝에, 미리엘은 겨우 대화를 끊고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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