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84화 (1,151/1,205)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84화

"계속 묻고 싶은 게 있었어. 너, 예전에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했던 건…."

"맞아. 거짓말이었어. 미안해. 그런 모습을 봤으니 알겠지만 난…줄리안이라면 이런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식당으로 내려가니, 중2병과 미리엘이 머리를 맞대고 뭔가 긴밀히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이른 아침부터 떨어진 발가스의 소집 명령 때문에 식당이 텅텅 비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데서 주고받을 얘기는 아니지 않아?

뭐,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말인지 짐작도 못 할 정도로, 둘 다 애매한 표현만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 그게 무슨 뜻이야!?"

"응? 줄리안도 나와 같잖아? 성자님의…."

미리엘 저 녀석, 뭔가 묘하게 오해하고 있지 않아?

하긴 그렇게 반항적이었던 중2병이 갑자기 협조적이 되어서는 나랑 둘이서 같이 다니고 있으니, 그렇게 착각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아, 아니야! 그딴 마음 몰라! 애초에 난 아직 여자가…!"

하지만 이해가 되는 건 나뿐이었는지, 중2병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흥분하며 반박했다.

"그런가. 그랬구나. 미안해. 난 틀림없이… 아직 이었구나."

"아, 아니야!"

"응? 아니야? 역시…?"

"그 말이 아니야! 아직! 아직 아니라는 거야! 난 앞으로도 여자 따위 으읍…!"

"거기까지."

흥분한 나머지 남들에게 들려주면 안 될 선까지 넘어 버리려고 하는 중2병의 입을, 나는 재빨리 다가가서 틀어막았다.

이런 데서 ‘여자 따위 될 생각 없어!’라는 말을 했다가는, 나 비스 사람이오 하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이 녀석은 그게 싫어서 나한테 협력하고 있는 거야."

"싫어서…? 그랬군. 미안해.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군."

내 말에 뭔가 걸리는 게 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리엘은 중2병에게 순순히 고개 숙여 사과했다.

"아, 아니. 나야말로…."

그리고 여자가 된 사람 앞에서 여자 따위 될 생각 없다는 말을 하려 했던 중2병 역시도 미안한 마음은 있는지, 자기도 똑같이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걸 보면, 중2병 얘도 완전히 비스의 사상에 물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보통 비스 사람이면 여자를 철저하게 무시할 텐데, 얜 그냥 자기가 되기 싫어하는 거지 여자를 무시하는 건 아니니까.

미리엘을 용사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아니면 한동안 바프라에서 지내서?

하지만 내 물건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면 또 완전히 비스의 사상에 물든 애 같고. 진짜 종잡을 수가 없는 녀석이야.

"그러면 서로 잘못한 걸로 하지. 그런데 성자님. 아까 앨리시아가 루티아와 같이 밖으로 나가는 걸 봤는데."

아무튼 나도 내려왔고 얘기도 대충 마무리됐으니, 중2병과의 얘기는 이쯤에서 그만하려는 거겠지.

미리엘은 적당히 중2병의 말을 받아주고 나서, 시원스럽게 웃으며 정문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같이?"

"하핫. 정확히는 쫓아가고 있었지."

"…뭐, 배고프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아예 건물 밖까지 나갔다는 걸 보니, 루티아의 목숨이 살짝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건 그렇군."

나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낸 미리엘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으니, 분명 괜찮을 거야.

나는 둘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 다른 간부들과 같이 착석한 후, 아침 식사나 주문하기로 했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발가스가 도적들의 아지트와 피해자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에만 족히 하루라는 시간이 소비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 후 곧장 우리가 비스의 비수를 잡으러 출발했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모처럼 용사 미리엘의 이름으로 선행을 펼친 거니, 용사단이니 뭐니 하는 이상한 집단에 맡기지 말고 뒤처리도 우리가 꼼꼼히 떠맡아서 하자는 얘기가 나와서 말이야.

그 용사단이 전부 미리엘의 클랜원들이지만, 그걸 발가스한테 대놓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어?

결국 우리는 피해자들을 원래 지내던 마을로 돌려주고 도둑맞은 물품을 돌려주는 등 시간을 보내며 나흘을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다.

그동안 비스의 비수를 잡아낼 계획에 관해서도 의견을 활발히 주고받은 끝에, 우리는 결국.

"곧 전선에 도착할 겁니다."

플리투스와 비스의 전선까지 오게 됐다.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할 생각은 없지만, 비스와의 전선에 용사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건 플리투스 어딘가에 숨어 있는 비스의 비수를 자극하기에 좋은 소재가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오오! 발가스 장군! 그리고 이분이 소문의 그…! 반갑습니다!"

발가스 장군의 인품은 부하들에게서만 두터운 신뢰를 받는 것이 아닌지, 비스와의 전선에 있는 총사령관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린하르트 장군. 전선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여전하오. 밀지도 밀리지도 않는 고착 상태. 이런 상황이 계속되니 최근에는 병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져, 이제는 이쪽도 저쪽도 제대로 된 대규모 전투를 엄두도 못 내고, 서로 적당히 병력만 소모하는 소규모 전투만 반복되고 있고. 뭔가 계기가 있다면…."

그렇게 말하면서, 장군은 미리엘의 얼굴을 힐끔 엿봤다.

아마 "소문으로 들은 용사의 힘이 진짜라면, 그 힘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불어놓고 전쟁을 이길 계기를 만들어 주시오!" 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미안하게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금 이 상태가 언제까지고 쭉 계속되는 게 우리한테는 최고의 상황이라서 말이야.

"린하르트 장군. 미안하지만…."

"아아. 그렇군. 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텐데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할 수는 없지. 방은 이미 마련해뒀소. 오늘은 우선 푹 쉬시도록 하시오."

미리 합을 맞춘 대로 발가스가 입을 여니, 총사령관 아저씨도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흔쾌히 그렇게 말해 줬다.

생긴 거나 하는 행동이나 조금 느끼하기는 하지만, 눈치도 제법 빠르고 좋은 사람 같군.

"아, 하지만 그, 리리안 플리투스 님의…."

"알았어. 안내해 줘."

"네, 네?"

"나와 얘기가 하고 싶은 거지? 궁금한 점이 많은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셈이야."

내가 누구한테 이런 말 할 처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미리엘 쟤도 초면부터 반말을 깔고 가는구나. 그러고 보니 발가스 장군한테도 은근슬쩍 반말하고 있었지.

뭐, 이 나라를 세운 전설의 용사의 후손이니, 저 정도는 해주는 게 어울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허, 허어…그럼 제 집무실에서 같이 차라도 한잔하시죠."

린하르트 장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지, 자기보다 훨씬 손아래의 여자가 시원스럽게 반말하는데도 딱히 불쾌한 기색도 없이 앞장서서 집무실로 안내했다.

"자, 그럼…."

총사령관이 직접 나서서 이렇게 환영해 준 거다. 아마 용사가 전선 근처에 왔다는 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겠지.

그렇다면 당연히 잠입해 있는 비스의 비수도 뭔가 움직임을…뭐, 그것도 비수가 이 근처에 잠입해 있을 때의 얘기지만.

"어떻게 생각해?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한가롭게 음식 탐방이나 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전직 비스의 비수 씨. 진짜로 이 근처에 있을 것 같아?"

안내받은 방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성벽 위로 올라와 있는 나는, 마찬가지로 같이 빠져나와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2병에게 넌지시 물었다.

"바, 바프라는 특수해! 정면 대결보다 뒤에서 뭔가 꾸미는 걸 좋아하는 치사한 녀석들이었으니까, 나도 그에 맞춰서 전선보다는 다른 쪽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뿐으로…!"

아무래도 얘는 자기가 농땡이 친 게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군. 하지만 말이야.

"그런 것치고는 전쟁이랑 하나도 관계없는 평화로운 마을에 있지 않았냐?"

"원래 그런 조용한 마을일수록…!"

"마을일수록?"

"비, 비밀 병기라든가…음모를 꾸미는 비밀 조직이라든가…그런 게 숨어 있는…."

야. 그냥 자신 있게 말해. 왜 그렇게 갈수록 음량이 줄어들어?

어쩐지 얘가 왜 그런 곳에 있었는지 쭉 궁금했는데, 그냥 임무 중에 사심이 들어가서 그런 거였다니.

심지어 자기 자신도 중2병이 폭발해서 엄한 곳을 들쑤시고 다녔다는 자각이 있는 모양이다.

뭐, 근처에 있는 산에 구미호들이 숨어 살고 있으니, 비밀 조직이 숨어 있을 거라는 짐작이 아예 틀린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아니. 구미호들은 바프라와 일절 관계가 없으니, 역시 아예 틀린 건가.

"뭐, 아무튼 플리투스에 잠입해 있는 녀석은 너와는 달리 착실히 전선 근처에 있을 거라는 얘기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착실하지 않은 것처럼…아. 찾았다."

투덜투덜 대면서도 시선은 하늘 위로 고정시키고 있던 중2병은, 갑자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머리 위로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새하얀 비둘기가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였구나. 비둘기한테 투명해지는 날개 짓을 익히게 했다는 말. 솔직히 말해서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거, 그렇게 잡아도 괜찮아?"

이쪽의 정보가 비스로 넘어가기 전에 저지해내는 건 좋지만, 전서구를 날린 비수한테 들키는 거 아니야?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중2병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앞장섰다.

"괜찮아. 어디서 왔는지도 제대로 확인했어. 이쪽이야."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쪽지를 회수하고, 나는 중2병의 뒤를 쫓아서 전서구가 날아왔다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바로.

"…진짜 여기라고?"

나와 중2병이 도착한 곳은 바로 플리투스 군이 주둔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오늘 묵게 될 전초 기지의 내부. 그것도 꽤나 심부에 위치한 곳이었다.

정확한 건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자리 잡은 위치만 보더라도 중요 인물이 머무르는 장소라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이는 장소.

그런 곳에 비스의 첩자가 숨어 들어가 있다고? 이거 너무 대놓고 사건을 암시하는 거 아니야?

그야 미리엘에게 용사로서 실적을 챙겨준다는 목적도 있는 만큼, 어느 정도 사건이 일어나는 건 나도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여기는 아무리 봐도 필요 이상의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장소잖아?

"그래. 확실해."

차라리 아니라고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흔들림 없는 중2병의 눈빛에, 나는 하는 수 없이 문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전초 기지 안에 있다는 건, 비스의 비수도 플리투스 군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찾아왔다고 해서 다짜고짜 도망가거나 공격해오거나 하는 짓은 못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노크부터 하자, 안에서 문이 열리며 나타난 건 바로.

"성자님?"

"미리엘!? 네가 여기에 왜 있어!?"

"왜라고 말해도…성자님도 아까 봤잖아?"

그야 보기는 했지. 네가 린…어쩌고 장군이랑 같이 집무실로 가는 모습은.

"린 어쩌고…."

시, 시끄러워! 남자 이름 따위 일일이 기억하는데 할애할 정도로, 내 머릿속 용량은 넘쳐나지 않는다고!

뭐, 이제 와서는 진짜 남자인지도 의심스러워지지만.

"미리엘 님. 대체 누가…흠. 당신은 분명…구원 님, 이라고 했던가요?"

미리엘이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자 의문스럽게 여긴 건지, 방 안에서 장군도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나에 대해서는 성자라는 직업은커녕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걸 보니, 발가스가 사전에 미리엘 얘기만 엄청 해댔던 모양이군.

뭐, 상관없어. 어차피 나도 플리투스에서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줄리안. 여기에 있는 비수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장군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나는 옆에 있는 중2병에게 말을 걸었다.

"세이지. 성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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