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83화 (1,150/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83화

    이쪽과 이렇게 합류하는 건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생각해 볼수록 잘된 일 같았다.

    나와 중2병 둘이서만 다니는 것보다 속도는 조금 느려지겠지만, 길 안내라든지 이동이라든지 전부 발가스가 도맡아서 해주면 우리로서도 훨씬 편해질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미리엘이 플리투스를 빨리 장악하면 장악할수록 나한테도 좋으니까. 그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쯤은 감수해야지. 그게 설령 우리 애들과 만나는 날이 더 늦어지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이렇게 생각하니까 또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아니지 아니야. 우리 애들도 분명 합류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해 줄 거야.

    "우선은 기다리기인가."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잡념을 털어 버리듯 머리를 한차례 흔든 다음, 나는 황급히 뛰쳐나간 발가스 장군의 뒤를 쫓아 느긋하게 방 밖으로 나갔다.

    "하핫. 벌써부터 좀이 쑤신다는 표정을 짓다니, 성자님은 성실하군. 하지만 성자님이 알려준 곳을 확인하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하루는 걸릴 거야. 오늘 하루는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게 어때? 바쁘신 성자님한테는 이런 기회가 자주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니. 딱히 뭐가 하고 싶어서 못 참겠는 건 아닌데. 난 그렇게까지 성실한 놈이 아니야.

    그야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만큼 우리 애들과 얼굴 볼 날이 늦춰진다는 생각에 살짝 초조하기는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어찌 됐든 미리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여기부터 아라크네 삼인방이 있는 마을까지의 거리는, 나랑 중2병이 저녁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달려올 만한 거리니까. 좋든 싫든 오늘 하루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왕이면 여유를 즐기는 게 좋다는 말에는 나도 백번 동의했다.

    그렇군. 우선은 아침부터 먹을까. 결국 한 번 하고 나서도 해가 뜰 때까지 미리엘에게 빨리다가, 해 뜨는 걸 보자마자 이쪽으로 왔으니까 말이야.

    "그래. 그럼 우선 식당…."

    "후아아암. 뭐야,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미리엘과 중2병. 둘과 같이 식당으로 향하려고 했던 바로 그 순간, 우리 뒤에서 여자치고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밖에서 발가스가 내리는 지시에 따라 큰 호령과 함께 움직이는 병사들의 소리에 잠이 깬 거겠지.

    저건…잠옷용으로 입고 자는 건가? 쇼트 팬츠에 탱크톱이라는 상당히 아슬아슬한 차림새를 칠칠치 못하게 걸치고 있는 앨리시아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힘껏 크게 하품을 했다.

    진짜 생긴 건 야성미 넘치는 섹시한 누님이고,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옷도 남자들 눈 돌아가게 할 만큼 섹시한데, 정작 본인의 행동거지가 저래서야….

    아니. 저런 모습도 내 눈에는 귀여워 보이기도 하고 털털해 보이기도 해서 좋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나타난 앨리시아는, 반쯤 감긴 눈으로도 용케 미리엘의 뒷모습을 포착해낸 모양이었다.

    "미리엘. 아침부터 이게 무슨…."

    하지만 앨리시아야. 너희 클랜장님 모습만 보이고, 클랜장님 바로 옆에 있는 남자친구 모습은 보이지도 않니?

    그야 난 지금 약자 태세를 쓰고 있으니 평소와 많이 다르게 보일 테고, 무엇보다도 내가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테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서운하다.

    "안녕. 앨리시아. 잘 잤어?"

    자고 일어나서 살짝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미리엘을 향해 말 거는 앨리시아를 향해,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먼저 인사를 건네줬다.

    "……."

    아마 지금 이 현실이 믿기지 않는 거겠지.

    머리를 긁고 있는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린 앨리시아는, 입을 벌린 채 한참 동안 멍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야. 아무리 그래도 반응이 너무 격한 거 아니냐? 하여간 쟤도 날 어지간히 좋아한다니까.

    그래. 자, 원한다면 당장 내 품에 뛰어들어 안겨도 돼! 원래 중2병이 있을 때는 여자 앞에서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지만, 상대가 내 여자라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우…."

    앨리시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자, 드디어 그 눈에 살짝 초점이 돌아오면서 앨리시아가 뭔가 말하려고 했다.

    "우?"

    "우와아아아아아아!"

    "으악!?"

    쟤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죽을 뻔했잖아! 아니. 그보다 이건 대체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검집째로 순식간에 날아온 대검을 코앞에서 간신히 잡아낸 다음 항의하기 위해 다시 앨리시아 쪽을 바라보자, 앨리시아의 모습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대신 앨리시아가 나왔던 방 안쪽에서, "우와아아아!" 하는 비명과 우당탕탕 뭔가가 넘어지는 소리만 연달아 들려올 뿐이었다.

    나름대로 방음이 철저하게 되어 있을 여관에서, 문을 닫고도 비명이 들릴 정도라니. 대체 목청이 얼마나 좋은 거야?

    "…미리엘. 줄리안이랑 같이 먼저 식당에 가 있어."

    저거, 내가 케어 해 줘야 하는 거겠지?

    뭐, 앨리시아의 털털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가만히 내버려 둬도 알아서 풀고 내려올 테니까, 굳이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하핫."

    잘 알겠다는 듯이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 미리엘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중2병의 등을 떠밀며 아래로 내려갔다.

    "윽!?"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기는. 미리엘의 손이 닿자마자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몸을 떨었으면서.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일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었던 걸까?

    일단 전에도 쟤 눈앞에서 미리엘과 해댄 적이 있으니, 저렇게까지 효과가 클 거라고는 나도 생각 안 했었는데.

    뭐, 아무튼 지금은 저쪽보다 이쪽이다.

    "앨리시아. 들어가도…."

    "드, 들어오지 마! 들어오면 죽여 버린다!"

    아직 문고리에 손도 가져다 대지 않고, 그저 노크만 한 것뿐인데.

    그것만으로도 안쪽에서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다가오더니, 문고리 쪽에서 철컥철컥 소리가 났다.

    잠그는 거 잊었구나. 그냥 노크하기 전에 확 열고 들어갈 걸 그랬나?

    뭐, 그랬다가는 십중팔구 앨리시아가 지금보다 더 폭주했겠지만.

    "죽여 버린다니…그게 오랜만에 본 남자친구한테 할 소리냐?"

    "시, 시끄러워! 아무튼 들어오지 마! 들어오기만 해봐! 진짜 가만 안 둔다!"

    아니. 어차피 이제 문 잠갔으니까 못 들어가거든?

    "그러지 말고 문 좀 열어 봐. 어차피 평생 거기에 있을 것도 아니잖아? 자고 일어나서 부스스한 모습을 보인 게 부끄러워서 그래? 괜찮아. 이제 와서 뭘 그런 걸 가지고. 지금 모습보다 너 예전에 술 취해서 나한테 매달렸을 때가 훨씬 더…."

    "그걸 지금 위로라고 하냐, 새끼야!? 그 얘기를 지금 왜 해!? 너 진짜 죽는다!?"

    "죽이려면 나와야 하는데?"

    "마, 말빨만 좋은 새끼가…."

    아니. 지금 건 내가 말빨이 좋은 게 아니라 네가….

    "그러니까 빨리 문 열어 봐."

    "이…기, 기다리라고 했잖아 새끼야!"

    아니. 한 적 없거든.

    하지만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기다리면 열어줄 생각인 모양이다.

    뭐, 앨리시아도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 정도는 필요하겠지. 어쩔 수 없지. 기다리기로 할까.

    앨리시아의 소동을 듣고 깨어난 건지, 하나둘 방에서 나온 아라크네 간부진들이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날 묘한 미소와 함께 지켜보는 게 엄청나게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특히나 저 사람이 제일.

    "응후후훗."

    "기분 나쁘게 웃지 마시죠."

    "숙녀한테 기분 나쁘다니. 나 너무 충격받았어. 누나도 방에 들어가서 소리 지르면 꼬마가 위로해 줄 거야?"

    도적 계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답게 발소리도 내지 않고 사뿐사뿐 다가온 루티아는, 손을 등 뒤에서 마주 잡고 몸을 살짝 숙여서 가슴골을 강조하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며 날 올려다봤다.

    이 누님이 또 누굴 유혹하려고.

    "…앨리시아. 아직 멀었어?"

    "어머, 무시당해 버렸네."

    당연하지. 내가 댁 같은 타입을 한두 번 상대해 본 줄 알아? 댁의 상위호환이라고 해도 좋을 펠리시아한테 내가 얼마나 시달렸는데.

    덕분에 깨달았지. 이런 타입은 어떤 식으로든 말을 받아주면 그걸로 끊임없이 말장난하면서 사람을 가지고 노는 타입이라는 것을.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아무튼 쏟아지는 시선을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앨리시아의 방문 앞에서 기다리기를 수 분, 겨우 앨리시아가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의 그 잠이 덜 깬 칠칠찮은 모습이 아닌, 평소의 야성미 넘치는 앨리시아의 모습이.

    "……."

    "무, 뭐야, 새끼야. 기분 나쁘게 말도 없이 가만히."

    "아니."

    솔직히 말해서, 조금 놀라고 있었다.

    얜 그냥 타고난 미모가 좋은 거지, 외모에는 전혀 신경 안 쓰는 타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하지만 아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 보니, 얘도 얘 나름대로 외모에 신경을 쓰기는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게 당연한 얘기지만 말이야.

    "그냥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왠지 모르게 말이지."

    그리고 아까의 그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런 건지,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앨리시아의 야성미 넘치는 미모가 괜히 더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냥 세수하고 부스스한 머리에 물 묻혀서 적당히 손질한 것뿐일 텐데.

    하지만 그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면, 또 앨리시아가 부끄러워하며 폭주할 위험이 있었다.

    뭐, 나 역시도 부끄럽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서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니,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아니면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건지 또 옆에서 루티아 누님이 끼어들었다.

    "어머, 우리 성자님도 아직 관찰력이 부족하네. 기분 탓이 아니야. 평소보다 훨씬 꾸미고 온 거니까. 피부 뽀송뽀송한 것 좀 봐. 저 보습 크림, 평소에는 내가 바르라고 그렇게 보채도 귀찮다면서 절대 안 바르…."

    "야! 루티아! 너 죽을래!?"

    그 말에 당연히 앨리시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분노했고.

    "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을 앨리시아에게 돌려줬다.

    "에!?"

    훗. 진심으로 당황했군. 꼴 좋다. 그러니까 그렇게 맨날 장난만 쳐대면 언젠가 한 번 크게 혼쭐날 날이 있다니까요. 경험자의 말이니까 새겨들으세요.

    뭐, 이제 와서 말해 봤자 늦었나.

    "오우!"

    대검을 받아든 앨리시아는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면서 루티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고.

    "자, 잠깐. 앨리시아!? 난…."

    "시끄러워!"

    "꼬, 꼬마…성자님! 얘 좀 말려…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거야!? 그거 무슨 의미…꺄아악!?"

    결국 대검을 휘두르며 덮쳐오는 앨리시아를 피해, 루티아는 도적 계열 특유의 빠른 발을 살려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망간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고 놔줄 앨리시아가 아니지만 말이다.

    "너 거기 안 서!"

    "싫어! 잡히면 그런 짓을, 그리고 그런 짓까지 할 거잖아!"

    "뭐가 그런 짓이야! 오해받을 말 하지 마!"

    그렇게 쫓고 쫓기면서도 끊임없이 말싸움하는 둘은, 결국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침부터 술래잡기라니. 하여간 저 둘도 참….

    "소란스러운 녀석들이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둘의 뒤를 쫓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뒤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지니. 안녕."

    "음. 오랜만이군."

    "미리엘은 먼저 식당으로 갔는데, 같이 갈래?"

    원래는 저 둘을 쫓아갈 생각이었지만, 지니의 얼굴을 보고 나니 그럴 생각이 사라졌다.

    아니. 왠지 엄청나게 익숙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말이야. 이 무뚝뚝한 사람이 이렇게 반응할 정도라면, 나도 굳이 쫓아갈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앨리시아의 뒤를 쫓지 않아도 괜찮은가?"

    "내버려 두면 알아서 돌아오겠지."

    "그것도 그렇군."

    "아, 그럼 저도 같이 가죠!"

    "그럼 저도. 실은 성자님한테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 레이아 님과 마틸다 님이 성녀가 되었다는 얘기를…."

    "아, 나도! 나도! 텔루나 님 얘기가 듣고 싶어요!"

    "리아! 얘기는 내가 먼저…."

    "혹시 텔루나 님이 저희 얘기 안 하셨나요!? 특출난 재능이 엿보인다든가! 제자로 삼고 싶다든가!"

    "레아까지…!"

    거기에 음유시인 힐다나 성기사 릴리, 그리고 쌍둥이 마법사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식당에 내려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내 판단이 맞았음을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하지만 이 사람들, 이렇게 동시에 다 같이 모였다는 건, 사건을 시종일관 지켜보고 있었다는 얘기잖아? 내가 앨리시아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부터 루티아가 끼어들어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까지 전부.

    그래놓고 참견조차 안 한 거란 말이지.

    게다가 지금은 그 둘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자기들 할 말만 하고 있고.

    이걸 방임주의라고 해야 할지, 동료의 성격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다고 해야 할지.

    새삼 느끼는 거지만, 하여간 이 아라크네 간부 파티도 참 개성적인 녀석들의 모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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