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79화 (1,146/1,205)
  • 1179화

    아무리 무안해도 자기가 귀하게 자랐다는 주장을 꺾을 생각은 없다는 건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서 고집이 강한 녀석이군.

    "아무튼 계속 이런 식으로 움직이면 가도 가도 끝이 없겠어."

    도적 아지트에서 곧장 비스 방향으로 출발만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칸나 그 녀석만 안 만났어도, 아니. 칸나 그 녀석이 길만 제대로 알았어도.

    뭐, 이미 지난 일을 후회해 봤자 소용없지만.

    "일단 밤이 되기 전까지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자. 따라올 수 있지?"

    "그쪽이야말로 처음 만났을 때 날 놓쳤던…어? 어디 간 거야?"

    속도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다는 듯 코웃음 치며 되받아친 중2병이었지만, 내가 그림자 이동을 써서 사라지자 당황해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쪽이야!"

    "어, 언제 거기까지…기다려!"

    그렇게 우리는 밤이 될 때까지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스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이래서는 이동하면서 하늘에 뜬 전서구나 비스의 숨겨진 검의 흔적을 찾을 여유는 없어지게 되겠지만, 어쩔 수 없지.

    그걸 일일이 확인하면서 가는 것보다는, 그냥 빨리 비스 근처에 가서 전서구가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더 효율적일 것 같아.

    뭐, 효율을 따져서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도, 밤을 새워가면서까지 무리하게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단거리라도 그림자 이동을 이렇게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면 마나가 부족해지게 마련이니까.

    플리투스에 숨어 있는 비수를 찾아낸 이후의 계획을 생각해 보면, 마나는 항상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고 있는 게 좋았다.

    마침 슬슬 시야도 어두워지고 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슬슬 야숙 준비를 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니, 내 뒤를 필사적으로 쫓고 있던 중2병도 내 옆에서 다리를 멈췄다.

    "흐엑…헥…헥…너하악…그…!"

    엄청나게 숨찬 모습으로.

    그, 그 정도로 힘들었냐? 속도에 자신이 있다고 하니까 나도 일부러 안 기다리고 빠르게 움직였는데.

    아니. 나도 이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면 어느 정도 조절을 해줬을 텐데, 그 특유의 보법인지 뭔지 때문에 이 녀석이 빠르게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그냥 따라올 수 있겠거니 하고 그림자 이동을 연발한 건데, 덕분에 중2병은 지옥을 맛본 모양이었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날 노려보며 입을 여는 그 모습에서, 하고 싶은 말이 엄청 많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괜찮냐? 숨을 쉴 건지 말을 할 건지 둘 중 하나만 해라."

    "흐아아! 하아…하아…."

    그렇다고 진짜 말하는 걸 포기하고 숨만 쉬기로 하는 거냐. 하고 싶은 말 많은 거 아니었어?

    아예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2병의 모습은, 누가 봐도 귀하게 자란 아가씨로는 보이지 않았다.

    "야."

    "으응! 흐아아…하아…!"

    쪼그려 앉아서 옆구리를 콕콕 찔러봐도 꿈쩍도 안 하는 걸 보니, 진짜 힘들기는 힘든 모양이니까 이해는 되지만 말이야.

    하는 수 없지. 어차피 얘는 한동안 이러고 뻗어 있을 것 같으니, 그사이에 난 텐트라도 설치할까.

    "하아…그거, 하앗, 사기잖아…."

    바닥에 퍼질러져 있던 중2병이 부활한 건, 텐트 설치가 다 끝나고 모닥불까지 피웠을 무렵이었다.

    "응? 뭐가?"

    "그거! 사라지는 거!"

    "사라지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야! 제대로 내 발로 뛰었어! 그런 치사한 기술이 있다니…역시 여신의…."

    아니. 이건 여신이랑 별로 상관없는데. 애초에 이게 그런 말까지 들을 정도야?

    그리고 그렇게 여신을 악으로 취급하는 주제에, 결국 도망 안 가고 끝까지 잘 쫓아왔네.

    사실 조금 전까지는 도망가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진짜로 내 눈에 안 보였으니까.

    "알겠어. 내일부터는 적당히 조절하면서 갈게. 그러면 됐지?"

    어차피 오늘은 밤이 되기 전에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겠다는 생각으로 마나 부담 없이 막 쓴 거니까 말이야.

    내일은 아침부터 밤까지 이동하려면 마나 소모도 적절히 생각해가면서 움직여야 하니, 오늘 같은 속도는 나오지 않을 거다.

    물론 밤이 되어서 움직인다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만, 그러면 얘가 못 쫓아올 테니까 의미가 없지.

    "그런 문제가…."

    "사죄의 의미로 오늘은 3계층의 명물 눈과자를 하나 주지."

    "3계층?"

    아, 하긴. 얜 모르겠구나.

    "그런 게 있어. 자. 먹어 봐."

    "음? 오오. 이건…차가운 밤바람과 어울리는 풍미의…."

    아까의 그 억울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눈과자를 한 입 베어먹자마자 눈을 빛내며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중2병이었다.

    진짜 얘는 컨셉으로 이러는 건지 진심인 건지 종잡을 수가….

    "응음!?"

    황당한 눈으로 보고 있자니, 중2병이 갑자기 이상한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기분은 회복됐어도 빠진 힘까지 회복된 건 아니었는지, 중2병은 다리가 풀려서는 그대로 내 품에 안기고 말았다.

    "뭐 하는 거야."

    "아, 아니야! 그게 아니라…!"

    "거기 누구냐!?"

    과연. 그런 거였군. 어제의 납치 사건에 이어서 오늘은 밤 중의 습격인가.

    아무리 이 근처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지역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치안이 너무 나쁜 거 아니야?

    "사람한테 누군지 묻기 전에 먼저 자기가 누군지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니냐?"

    이런 귀찮은 일은 그냥 중2병에게 맡기고 싶지만, 다리가 풀려서 전투력을 상실한 애한테 그런 걸 바라는 건 너무한 거겠지.

    나는 품에 안긴 중2병을 옆으로 치워서 앉혀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여유롭게 다가갔다.

    어차피 또 내가 성자 스킬을 쓸 필요도 없는 잔챙이 몇 놈이 몰려온 거겠지.

    "뭣이!? 수상한 놈! 끌고…어? 서, 성자님!?"

    내 말을 도발로 받아들였는지 목소리에 노기를 품으며 다가온 인기척은,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우뚝 멈춰 서서는 예상치도 못했던 단어를 내뱉었다.

    성자라니. 여기서 갑자기 그 단어가 왜…응? 저 갑옷은? 플리투스의 정규군 갑옷 아니야? 그렇다는 말은….

    "발가스 장군의 부하인가?"

    "넵! 그렇습니다! 기억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니. 난 아저씨 얼굴 같은 거 일일이 기억 안 하는데. 뭐, 착각해주는 걸 굳이 정정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대로 놔둘 거지만.

    "발가스 장군의 부하가 왜 여기에?"

    "성자님이야말로 이런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질문을 질문으로 되받아치다니. 무례…아니. 경계하는 건가.

    성자님이라고 하면서 존칭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난 ‘용사 미리엘이 인정해 준 용사 중의 용사’ 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직접 같이 행동하며 신용을 쌓은 미리엘과는 다르다는 거다.

    그런 놈이 갑자기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의심부터 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단 이쪽의 사정부터 설명해서 의심을 푸는 게 좋겠군.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친 나는, 일단 한 번 접어주기로 했다.

    "수상한 정보를 얻어서 확인하러."

    뭐, 그렇다고 해서 이런 말단한테 모든 정보를 다 얘기해 줄 생각은 없지만.

    "그런데 그쪽은? 발가스 장군은 미리엘과 같이 수도로 향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 원래는 비스의 숨겨진 검이 플리투스에 숨어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얘기를, 미리엘한테도 전해 줄 예정이었잖아?

    그런데 미리엘은 이미 국경 지대를 벗어나 수도로 향했다는 정보가 반지를 통해 전해져서 말이야.

    그 너머에 누가 더 듣고 있는지 모르는 만큼 중요한 정보를 함부로 전해 줄 수도 없어서, 결국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하고 이렇게 우리끼리 행동하고 있었는데.

    "네! 실은 그게…."

    말단인 자기가 말해도 좋은 정보인지 모르겠다.

    그런 표정을 지으며 어물쩍거리는 병사의 모습에, 나는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얼굴까지 같이 있으니, 더 망설여지는 거겠지.

    "그쪽 입으로 얘기 못 할 말이라면 직접 가서 듣고 싶은데, 미리엘과 발가스 장군은 이 근처에?"

    "네. 조금 걸어야 합니다만…."

    이런 때는 윗사람한테 판단을 맡긴다는 선택지를 주는 게 제일이다.

    내 제안을 덥석 문 병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를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까지 안내해주기로 했다.

    병사의 말대로 조금 걸어간 끝에, 우리는 제법 규모가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역시나 아라크네 클랜의 간부들과 발가스 장군 휘하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뭐, 시간이 시간인 만큼 다들 자는 건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건 한 명뿐이었지만.

    "성자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고 있었는지 가벼운 차림으로 나타난 미리엘은, 설마 이런 곳에서 날 보게 될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기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웃지 마라. 정든다.

    "거기에 그쪽은…."

    그리고 중2병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살짝 미묘한 표정을.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중2병한테 작업해뒀었지. 중2병의 입에서 정보를 더 듣고 싶으면 날 통해서 들으라고.

    그런데 갑자기 중2병이 나랑 붙어 있는 걸 보게 됐으니, 손에서 카드 한 장이 사라진 기분일지도 모른다.

    "그래. 기억하지? 이 녀석한테 조금 재미있는 정보를 들어서 말이야."

    정보라면 너 없이도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중2병의 머리 위에 손을 척 얹고 말하자, 미리엘의 얼굴이 또 특유의 감정을 읽기 힘든 시원스러운 미소로 변했다.

    "역시 성자님이야."

    "그렇지? 그래서,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그렇군. 방으로 안내하지."

    발가스의 양해도 구하려 하지 않고 그냥 데려가려고 하다니. 게다가 주변 병사들도 그 행동에 딱히 의문점을 느끼지 못하는 건지, 당연하다는 듯 길을 비켜줬다.

    미리엘이 제일 먼저 나타난 것부터 살짝 위화감이 들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미리엘 이 녀석, 그 짧은 시간에 발가스의 휘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한 모양이군. 하여간 능력 하나만큼은 진짜 확실한 녀석이야.

    "그럼 성자님이 어째서 여기에, 그것도 줄리안과 같이 있는 건지 묻고 싶지만, 그전에 성자님은 왜 내가 여기에 있는지 궁금하겠군."

    "잘 아네."

    "하핫.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하지 말아 줘. 그때 수도로 간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어."

    이렇게 성자님에게 조교 된 내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거겠지.

    말하면서 내 앞으로 다가온 미리엘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천천히 내 벨트를 풀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설명이나 해라.

    평소라면 그렇게 말하며 미리엘을 제지했겠지. 실제로 그러려고 하기도 했지만, 그때 문득 내 옆에 있는 중2병에게 시선이 갔다.

    그러고 보니 전에 중2병은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지.

    ‘미리엘은 아직 내게 완전히 굴복한 게 아니다. 내 곁에서 기회를 엿보며 힘을 기르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 나도 언젠가….’ 라고, 미리엘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심어놓은 헛된 희망을 믿고 버틴 적도 있었다.

    그래 봤자 결국 중2병은 내게 굴복했고, 그 실낱같은 희망도 미리엘도 무성별자였지만 내가 여자로 만들었다는 식의 언급을 하면서 완전히 깨부숴 버렸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잖아? 어쩌면 중2병의 마음 한구석에 그런 희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설령 남아 있지 않았더라도, 미리엘의 얼굴을 보고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났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면 지금은 이대로 놔둬서 그 희망의 불씨까지 완전히 꺼트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후훗."

    미리엘을 제지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옆으로 축 늘어뜨리자, 미리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내 물건을 뿌리부터 귀두 끝까지 길게 날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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