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78화 (1,145/1,205)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78화

"숫자만 많았지 별거 없었네."

안 그래도 전투력만 놓고 보면 손에 꼽히는 녀석이 신나서 날뛰니, 도적이나 하는 녀석들이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도적들을 전부 해치운 중2병은 아직 더 날뛰고 싶은 건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냐."

원래라면 이 녀석을 어르고 진정시키는 게 내 역할이겠지만, 아쉽게도 난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니. 그렇잖아? 여기가 다 정리됐다는 건, 이제 남은 건…젠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말이야. 그렇다고 해서 중2병한테 시키자니, 그건 그거대로 중2병이 여신 쪽 사람들은 다 저런 거냐면서 오해해도 곤란하고.

진짜 저 녀석은 왜 이런 데에 있는 거야.

"야. 슬슬 그만해."

"아? 어떤…어? 네가 여기에 왜 있어?"

아마 마차 안에 있던 도적 중 하나가 말을 건 거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이젠 아예 정신을 잃은 건지 축 늘어져 있는 남자 위에서 허리를 흔들던 칸나는, 내 목소리에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쟤가 "하룻밤 만에 레벨을 그만큼이나 올리는 건 무리에요!" 라면서 울던 걔랑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군. 앨리시아는 대체 애를 어떻게 굴렸던 거야?

"계속 있었어. 그쯤 했으면 됐잖아? 슬슬 마차에서 나와."

"어? 우왁!? 보, 보지 마! 고개 돌려!"

다행이다. 그래도 지금 자기 모습이 남들한테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이라는 자각은 있는 건가. 만약 그런 것도 없었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차 뒤를 덮는 천막을 다시 내리고 나서, 나는 칸나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렸다.

"모르는 사람인 게…."

"아니. 살짝 얼굴만 아는 사이야. 진짜로. 응."

중2병의 의문을 필사적으로 얼버무리면서.

"그래서,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너야말로 여기에 있으면 안 되잖아. 담당 구역은 어떻게 했어?"

이 녀석의 담당 구역은 여기에서…아니.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마차를 얻어탔던 곳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이 녀석 담당 구역이랑 그렇게 멀지도 않네?

"내버려 둔 거 아니야. 계획에 따르면 대장…."

"잠깐!"

이 자식, 뭘 아무렇지도 않게 전부 말하려고 하는 거야!?

칸나의 입을 틀어막고 나서, 나는 옆에서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중2병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손바닥으로 귀 팡팡 두드리면서 소리 지르고 있어."

이 녀석 옆에서 마음 편하게 잠까지 잘 정도로 신뢰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계획을 전부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으, 응?"

갑자기 그런 짓을 시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중2병은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키면서 되물었다.

뭘 그런 걸 되묻고 그래. 당연히 너지. 그러면 지금 내 시선 끝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다는 거야.

나는 중2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빙글 돌려서 뒤로 돌아서게 한 다음, 직접 그 손목을 잡아서 귀로 가져가 줬다.

"자. 빨리."

"이, 이렇게? 그런데 소리는 어떻게…."

시키는 건 뭐든 하겠다는 약속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 이걸 하네.

손바닥으로 귀를 팡팡 두드리면서 내 눈치를 살피는 중2병의 모습에, 나는 왠지 뿌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냥 아아아 하고 있으면 돼."

"아, 아아아아…?"

그래. 그거면 된 거야.

흡족한 미소와 함께 중2병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준 다음,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해 봤다.

"들려?"

"아아…응? 뭐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들리냐고."

"들리는…데?"

그래. 그거면 된…으, 응? 아니. 그게 들린다고? 대체 왜? 그거 우리 대마법사님한테도 인증받은 전통의…서, 설마! 디아나가 안 들리는 척한 것뿐인가!?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뒤늦게 깨달아 버린 진실에 배신당한 기분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뒤에서 칸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쳇. 하는 수 없지. 이런 탁 트인 곳에서 쓰면 마나 소모가 엄청 심한데.

나는 물과 바람의 정령을 각각 불러서 칸나의 몸을 씻기고, 칸나와 내 대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공기의 차단막을 펼쳤다.

"으, 으응! 고마워."

고마운 건 알겠으니까 이상한 소리 내지 마라.

"그래서 넌 왜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까. 대장들이 도적단을 괴멸 시켜 줬다는 소문을 퍼트리는 임무였잖아? 그런데 근처에 이렇게 도적들이 활개 치고 다니면 안 되잖아."

뭐,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

"그래서 일부러 잡혔다고?"

"그래! 저 녀석들이 마을에 못 들어가게 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대신 날 잡아가세요! 뭐든 해드릴게요! 라고. 약한 척하느라 힘들었어."

과연. 그래서 그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푼 건가.

"세레나도 에이미도. 저 정도는 칸나 혼자서도 정리할 수 있지? 소문은 우리가 낼 테니까! 힘내! 같은 소리나 하고. 동료애가 게 없어. 치사한 녀석들."

심지어 그러고도 아직 화가 다 안 가라앉는지, 칸나는 투덜투덜 그런 불평까지 내뱉었다.

에이미는 내가 보기에도 원래 좀 약삭빠른 이미지였지만, 세레나도 그런 건가. 어떤 의미로는 참 견고한 동료애가 아닐 수 없었다.

"…뭐, 네 실력을 믿으니까 그런 거겠지, 그래서, 돌아가는 건 어떻게 돌아갈 셈이었는데?"

"응? 그거야 걸어서 가면 되잖아?"

"길은 알고?"

"무시하지 마! 이래 봬도 맵퍼라고!"

진짜냐. 이 녀석이? 이상하다. 맵퍼는 보통 머리 좋은 사람이 맡는다는 이미지가…아니. 우리 파티도 내가 맵퍼를 하기는 했지만.

"뭐야, 그 눈은?"

"아니. 마차 안에서 그렇게 열중했던 녀석이 잘도 길을 기억하는구나 싶어서. 그 정도면 맵퍼에서도 최상위권 아니야? 대단하네."

"…야, 야. 그런데 너희는 여기에 무슨 일이야? 혹시 너희도 나랑 비슷하게 도적들을 때려잡으려고 온 거야? 길은 제대로 기억해? 불안하면 같이 가줄까?"

"……."

"무, 뭐야, 그 눈은!?"

뭐긴 뭐야. 의심에 가득 찬 눈이지, 이것아.

"무릎 꿇고 빌면 마을까지 데려가 주지. 뭐, 임무에 실패한 다음 앨리시아가 뭐라고 할지 정 궁금하다면 안 해도 상관없지만."

"나, 나쁜 놈! 치사하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순순히 무릎을 털썩 꿇는 칸나였다.

내가 시켜놓고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자존심 너무 없는 거 아니냐?

"농담이야. 농담. 일어나. 알았어. 일단 오늘은 여기에서 자고 아침에 데려다줄 테니까."

"……."

그렇게 말하면서 칸나를 일으켜 세웠지만, 칸나는 안도하기는커녕 오히려 살짝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왜 또?"

"아무리 그래도 교관님의 남자를…그리고 너 엄청 크고 절륜하다면서? 같이 잔 여자는 다음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면서? 나 조금 전에 엄청 해서 조금 피곤한데. 과연 버틸 수 있을지…."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야! 말 그대로 잠만! 따로! 섹스 없이!"

내 여자도 그쪽 클랜 간부를 하고 있으니까 나도 진짜 웬만하면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은데, 아라크네 클랜 놈들은 왜 하나같이 다 이 모양이야!?

게다가 같이 잔 여자는 다음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니! 그런 소문은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뭐어…훗. 사실이기는 하지만. 후훗. 내가 또 한 절륜하…아, 아니. 이게 아니지.

"아아. 응. 그래. 알겠어."

심지어 이 녀석, 내가 섹스 없이 잠만 잔다는 사실을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잖아! 너 지금 중2병 보고 납득한 거지!?

"그리고 지금은 정령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있으니까 괜찮지만, 함부로 계획 얘기하지 마라. 저 녀석은 여기 현지인이야."

하고 싶은 말은 무척 많았지만, 더 말해 봤자 괜히 나만 더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그냥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라지.

"아무튼 그럼 슬슬 정리나 해볼까."

예상외의 인물과 조우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 일이 변하는 건 아니다.

우선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서 도적들을 쫓아내야지.

게다가 우리를 마차에 태운 수법만 봐도 이 녀석들이 인신매매에 익숙한 녀석들이라는 건 뻔하니까 말이야. 어쩌면 여기에도 아직 피해자들이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칸나와 중2병과 함께, 생각보다 넓은 도적 아지트를 꼼꼼하게 뒤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역시나라고 해야 할지. 아지트에서는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발견되었다. 그것도 꽤나 많은 수가.

"이제 괜찮습니다. 이것도 전부 용사 미리엘의 은혜지요."

이 사람들을 전부 원래 살던 곳으로 데려다주려면 고생 좀 해야겠지만, 그건 칸나한테 맡기면 되겠지. 어차피 이런 걸 위해서 여기에 데려온 녀석이니까.

기회가 날 때마다 미리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나는 사람들은 안심시켜줬다.

이 사람들이 각자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서 미리엘의 이름을 언급해주는 것만으로도, 미리엘이 만들어낸 용사의 여정에 신빙성이 더해진다는 거지.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도적들이 사용하던 마차를 이용해서 피해자들을 일단 칸나와 함께 칸나가 담당하는 마을에 보내주기로 했다.

거기까지만 보내주면 거기부터는 삼인방이 알아서 피해자들을 원래 마을로 돌려보내 주고 소문을 퍼뜨리겠지.

도적 아지트에서 얻은 금품도 있으니, 그걸 적절하게 이용만 해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다.

"이럇!"

뭐, 마차를 이용한다고 해도, 내가 이런 걸 몰 수 있을 리가 없는 만큼 칸나를 시켰지만.

설마 진짜로 마차까지 몰 수 있을 줄이야. 의외로 재주가 많은 녀석이다.

아무튼 그런 고로, 나와 중2병은 어제처럼 지붕 위에 올라타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왠지."

"응?"

"이렇게 있으면 세상이 평화롭게 느껴지는군."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시작하자마자 그런 식으로 도적들을 쳐부수게 된 것만 하더라도, 그다지 평화로운 여정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조용히 말발굽 소리나 바람 부는 소리만 듣고 있자니 또 중2병 감성이라도 자극받았나.

"전쟁신님의 뜻대로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 같지 않아서 마음에 안 드냐?"

그렇게 생각해서 일부러 중2병을 비꼬는 말투로 말해 줬지만,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건…여신은 이런 세계를 만들고 싶은 건가."

이런 세계라니. 여기가 너희 세계인데 말이야.

뭐,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다. 확실히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쟁신의 세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분위기지.

"그래. 어딜 가도 전쟁이 없는 세계. 건전하고 좋잖아?"

뭐, 우리 여신님의 슬로건은 ‘싸우지 말고 섹스해! 섹스!’인만큼, 건전하다는 표현은 그다지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금은 너도 그런 작업에 협조하고 있다는 거지. 전서구의 흔적이 보이면 바로 말하라고."

"아아. 약속은 지킨다. 이 몸에 잠든 피에 맹세코."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닌 거 아니었냐. 얘는 잘나가다가도 꼭 이렇게 중2병 티를 낸다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다음, 나는 그대로 마차 지붕 위에 등을 대고 팔베개를 했다. 어차피 칸나가 있는 마을까지 가려면….

"어? 야! 이쪽 길 아니야! 저쪽! 저쪽!"

"어? 우와악! 그런 건 빨리 좀 말해!"

"길 다 기억하고 있다면서!"

"창문도 없는 마차 안에 있었는데 기억할 리가 없잖아!"

이, 이 자식…어제는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한 주제에 이제 와서 정색하다니.

"자, 지도를 잘 봐. 지금 우리 위치가 여기. 그리고 목적지가 바로…."

"마차 모는 데 방해되니까 저리 치워. 어차피 지도 같은 거 잘 못 봐."

"맵퍼라면서!?"

"그게 뭐!? 맵퍼는 길만 잘 외우면 되는 거잖아! 지도 그리고 보는 건 세레나가 다 했어!"

"……."

왠지 얠 데리고 다닌 앨리시아의 기분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하니 이런 곳에서 내 여자와 통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젠장. 이래서는 어제처럼 편하게 낮잠이나 자면서 보내기는 틀렸군.

"옆으로 조금 비켜봐. 내가 옆에 앉아서…."

그렇게 말하면서 지붕에서 마부석 쪽으로 자리를 옮기자, 칸나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내게 속삭였다.

"야. 위험하니까 밑에는 만지지 마라. 만질 거면 가슴까지만 만져."

"길 안내 해주려고 하는 거거든!? 만지기는 어딜 만져!?"

갑자기 목소리는 왜 낮추나 했더니! 이 자식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또. 데리고 다니는 여자 가슴이 없으니까 내 거라도 만지려는 줄…."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보다 진짜 아라크네 클랜 애들은 하나같이 왜 다 이 모양인 거야!?

"성자잖아?"

"성자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확실히 성자가 된 이후로 엄청 절륜해지고, 머릿속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섹스 생각이 나서 곤란하지만…아무튼 그런 거 아니야!

여신님! 여기에 천벌 받을 애가 있어요! 천벌 내려주세요!

"그, 그만둬! 성자가 그러면 농담으로 안 들리잖아! 진짜 천벌 받으면 어쩌려고 그래!?"

뭐, 그런 식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서로 투닥투닥 떠들면서 가는 바람에, 끝없이 이어지는 마차 여행도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 부탁한다"

우리가 납치당하고 도적 아지트에 도착한 게 저녁 즈음이었던 것처럼, 돌아가는 것 역시도 비슷한 시간이 걸렸다.

하늘이 노을로 새빨갛게 물든 시간대. 우리가 납치당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칸나에게 인사를 하고 중2병과 함께 마차에서 내려왔다.

삼인방이 맡은 마을은 눈을 찌푸리고 보면 저 멀리에 희미하게나마 보일 정도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다.

더 이상의 길 안내는 필요 없겠지. 나머지 뒤처리는 삼인방에게 맡기기로 하자.

"그나저나 하루 꼬박 걸려서 결국 제자리라니."

"마차를 가져왔으면 좋았지 않아?"

"우리보다는 저쪽이 더 필요하잖아. 사람들을 자기 마을로 데려가 줘야 하니까. 거기에 어차피 가져와 봤자 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혹시 네가 몰 줄 알아?"

"아니. 난 귀하게 자랐으니까."

"……."

얘 뭐야 대체.

그런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자, 중2병도 살짝 무안해진 모양이었다.

"저, 정말이야!"

어련하시겠어.

"정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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