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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62화 (1,129/1,205)
  • 1162화

    금방 알아들어서 장하다는 듯, 디아나는 몸을 내밀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원래 칭찬받으러 온 거였으니 기분은 좋지만, 지금 디아나가 던진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니 확실히 조금 꺼림칙하기는 했다.

    "아니. 디아나도 알잖아. 그동안 제대로 연락 안 됐던 거."

    내가 그런 힘을 쓸 줄 알게 된 건 바로 며칠 전. 미리엘이 안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물론 내가 그 자리에서 그렇게 힘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도, 그에 따른 대비는 해놨을 거다. 걔가 그렇게까지 생각 없이 일을 진행하는 애도 아니고.

    내가 꺼림칙하다는 점은 그런 게 아니라.

    "그러고 보니 미리엘 그 녀석, 내가 용사의 힘을 쓰는 걸 보고도 별 반응 없었네?"

    그 자리에서 반응을 안 한 건 이해한다. 그렇다고 해서 걔가 거기서 같이 놀랄 수는 없으니까. 필사적으로 안면 근육을 컨트롤한 거겠지.

    하지만 그 이후, 단둘이 밤을 보내게 됐을 때도 그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건 이상하지 않아?

    물론 미리엘 스스로 이제 용사의 힘에는 관심이 사라졌다고 하기는 했지만, 내가 그 힘을 쓰는 건 굳이 용사의 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상하게 여길만한 일이잖아?

    그런데 그걸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자신은 용사의 힘에 관심이 없다. 자네에게 그렇게 보이기 위해 그 아이는 지나치게 필사적인 것일지도 모르겠구먼."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지나치게라는 표현을 썼다는 건, 그런 의미잖아? 미리엘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적어도 디아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나도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지나치게 용사의 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건, 좋게 보면 그냥 보이는 그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나쁘게 보면 내 신뢰를 얻으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보면 아직도 그 힘에 미련이 있기 때문에 애써 관심 없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선뜻 믿기 힘들었다.

    네 배에 바람구멍을 내려고 했던 여자를 그렇게까지 믿는 거냐고 하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조교 이후에 보여준 미리엘의 태도를 생각해 보라고.

    그 태도가 내 마음에 드는가와는 별개로, 도저히 그게 가식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 몸도 모르겠구먼. 자네의 눈썰미는 이 몸도 신뢰하네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는 얘기지. 알았어."

    디아나는 내 눈썰미를 믿는다고 얘기해 줬지만, 상대가 이미 전적이 있는 미리엘이어서는 그것도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게 못 되는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와서 다시 걔가 이상한 짓을 꾸밀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심지어 내가 가기 전부터 날, 성자를 용사의 윗급으로 포장까지 해줬잖아.

    게다가 아까 낮에도 그런 식으로….

    "아, 그러고 보니."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미리엘이 건네준 쪽지의 존재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앨리시아랑 데이트하는 동안 완전히 존재를 잊고 있었어.

    "음?"

    "아, 아니. 그게 말이지."

    위험해. 이거 뭐라고 변명하지? 그런 말을 하면서 건네줬으니, 십중팔구 이상한 말이 쓰여 있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가 건네준 쪽지를 내 여자한테 비밀로 하는 것도 뭔가 양심에 찔리고.

    "아니. 미리엘한테 이런 걸 받아서."

    잠깐 고민한 끝에, 나는 디아나의 눈앞에서 쪽지를 오픈하기로 했다.

    만약 이상한 말이라도 쓰여 있다면, 난 이런 쪽지인 줄 몰랐다고 딱 잡아떼야지.

    "음? 쪽지인가?"

    디아나 몰래 손바닥에 난 땀을 닦으며 인벤토리에서 쪽지를 꺼내자, 디아나가 건네받아서는 테이블 위에 활짝 펼쳤다.

    그리고 그 쪽지에 적혀 있었던 것은 바로….

    "클랜원에게 전해 줄 전언이었구먼."

    그, 그 망할 여자가아아! 뭐가 적나라한 내용이고, 뭘 혼자 보라는 거야!

    아니. 확실히 클랜의 운영 방침이라든가 인원수 배치라든가 심지어 이곳에 보낼 인원 배정까지, 이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보면 안 될 내용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지만! 이런 걸 남들 다 볼 수 있게 그 자리에서 바로 봤다면 큰 문제가 됐겠지만! 그래도 그 여자 일부러 헷갈리는 말투 쓴 거지!?

    "음? 마지막에 이것은 뭔가? 성자님, 실망했다면 미안해? 무엇을 말인가?"

    "몰라. 그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건지 난 전혀 모르겠어."

    "조, 조금 전의 말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이 몸은 그저 어느 정도 조심하자는 의미로…."

    아니. 디아나.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전혀 아니라고.

    내게 쪽지를 건네주고 나서 미리엘이 혼자 좋아했을 걸 상상하니, 괜히 더 속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젠장. 다시 가서 혼내줄 수도 없고. 어젯밤에 너무 봐줬나.

    "어찌 됐든 그쪽 일은 일단 잘 풀리고 있다고 봐야겠구먼. 잘했네."

    내가 부들부들하는 것이 너무 보기 안쓰러웠는지, 디아나는 다시 몸을 뻗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쩔 셈인가? 다시 바프라로 돌아갈 겐가?"

    그리고는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서, 내 눈을 빤히 쳐다봐줬다.

    디아나. 네가 그런 눈으로 보면 나도 계속 미리엘 생각만 하고 있을 수 없잖아. 하여간 내 감정을 너무 잘 컨트롤한다니까.

    "아니. 이 쪽지도 아라크네 클랜에 전해 줘야 하고, 어차피 며칠 걸릴 거라고 했으니까 바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실비아한테도 별일 없다는 연락 왔다고 했지?"

    "음."

    플리투스 진영에 가기 전에 내가 끼고 있던 통신용 반지를 실비아한테 건네줬는데, 오늘도 이미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그럼…같이 저택에 올라갈까? 디아나도 돌아가지 못한 지 벌써 며칠 지났지?"

    바프라 쪽에서는 이미 연락이 왔고, 플리투스 쪽에서는 여러모로 연락이 올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디아나도 굳이 여기에 혼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는 얘기가 되니, 나는 오랜만에 디아나와 함께 위쪽 공기나 맛보기로 했다.

    "으응. 역시 이 몸은 이쪽 공기가 더 잘 맞는구먼."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위쪽으로 돌아와 길드를 빠져나오자, 디아나가 두 팔을 양옆으로 활짝 펼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공기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마 대기 중에 포함된 마나라든가 디아나만이 느낄 수 있는 다른 점이 있는 거겠지.

    "고생했어."

    진짜 다들 고생이 많았지만, 그중에서 디아나가 제일 고생했지.

    두 팔을 너무 활짝 펼치는 바람에 살짝 벗겨질 뻔한 후드 달린 로브의 매무새를 고쳐주며 말하자, 디아나가 배시시 웃으며 날 올려다봤다.

    "오랜만에 둘뿐이구먼."

    무슨 소리야. 아까까지도 계속 둘뿐이었잖아. 라는 멋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게. 이렇게 둘만 있게 된 게 대체 얼마만…."

    아, 말하는 도중에 생각난 건데, 이 전에 둘만 있었던 건 그때잖아? 바프라를 감시하면서 환각 마법 쓴다고 둘이 같이 성의 천장에 붙어서 힐링 섹스할 때.

    "자, 자네에…."

    디아나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아까까지 좋았던 목소리에 살짝 원망이 섞였다.

    푹 눌러쓴 후드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얼굴도 귀 끝까지 새빨개져 있겠지.

    "미안. 이번에는 진짜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었어."

    분위기 안 망치고 좋게 이어갈 셈이었는데 말이야. 결과적으로 더 멋없는 말을 해버리다니. 이것도 성자의 저주인가?

    "뭐든 성자 탓으로 돌리지 말게. 여신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나."

    확실히. 그 여신이라면 진짜로 삐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아,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읽고서 더 삐질지도.

    "정말이지 자네는."

    아무튼 그렇게 분위기가 살짝 망가졌음에도, 디아나는 은근슬쩍 내 팔에 매달려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만에 올라올 수 있게 되어 기분은 엄청 좋은 모양이다.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군. 이미 밤이 늦은 시간이지만, 여기는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모험가들의 도시.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럼 조금 같이 돌아…."

    돌아다닐까? 라고 말하려고 한 바로 그 순간, 내 팔에 매달린 디아나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깜짝 놀라서 황급히 무릎을 꿇고 그 안색을 엿봤지만.

    "으음…미안하네."

    다행히도 별문제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디아나, 졸려?"

    "조금 피로가 쌓인 모양이네."

    "그럼 어쩔 수 없지. 곧장 돌아가자."

    디아나도 아쉬운 눈치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디아나의 몸을 그대로 안아 들고, 그대로 발걸음을 저택 쪽으로 돌렸다.

    "후흥. 편하고 좋구먼."

    "너무하네. 내가 이동 수단이야?"

    "착하지. 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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