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61화 (1,128/1,205)

1161화

그런가. 아까의 그 묘한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던 건가.

조금 전 말을 가지고 확신했다. 미리엘이 완벽하게 신뢰받는 것과 다르게, 나는 이 근육 덩어리에 그다지 신뢰받고 있지 못한 모양이다.

이건 조금 입을 털어둘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발가스 장군. 장군은 전쟁을 권하는 신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지?"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단순히 끊임없이 싸우고 전쟁하면, 그걸로 신의 뜻을 완벽하게 따르는 것이라 생각하나?"

"그건…."

아마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냐고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아까 네가 한 질문과 다 이어지게 되어 있어.

"그렇다면 대륙을 통일해서 잠시나마 세계에서 전쟁을 없앤 리리안 플리투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지? 신의 뜻을 거스른 대역 죄인인가?"

"말도 안 되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말도 안 되지. 신이 우리 인간에게 내려준 최고의 은총 용사. 그 용사 중에서도 최고라는 성자의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신의 뜻을 거스른다니 있을 수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리리안 플리투스님은 세상에서 전쟁을 없앴다. 그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도 같은 성자의 운명을 타고난 자로서 계속 고민했었지."

"결론은 나왔습니까?"

시작은 상당히 뜬금없었지만, 내용은 상당히 진지한 내용이었다.

발가스도 그걸 느꼈는지, 마찬가지로 진지한 얼굴이 되어서는 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나는 신의 목적이 단순히 우리가 끊임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건 아니라고 결론 내렸네. 신은 우리 인간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지. 신은 아마, 서로 투쟁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성장하길 기대하고 우리를 전쟁으로 이끌으셨던 것 같네. 전쟁으로 단련된 강한 육체에 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거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그 문장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건지, 발가스는 몇 번이나 그 부분을 반복해서 따라 중얼거렸다.

저렇게 과몰입해주니까 나도 속일 맛이 나는데? 아니. 지금은 장난스러운 생각할 때가 아니지. 집중하자. 집중.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런 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서로 투쟁하며 발전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서로 죽고 죽이는 것에만 몰두하게 됐지."

"그렇다면…."

"그래. 리리안 플리투스님은 신의 뜻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 대륙을 통일하신 거지. 뭐, 리리안 플리투스님이 모습을 감추자마자 다시 이 모양이 되어 버렸지만. 혹시 옛날을 기억하는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 못 들어봤나? 요즘은 옛날과 비교하면 상당히 수준이 떨어졌다고."

"드, 들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노인네들이 젊은이를 보면서 "쯧쯧. 요즘 젊은것들은…."하는 건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법이거든. 시대는 물론 아예 차원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건 있는 모양이다.

"그래. 통일 시대와 달리 지금은 사람들의 평균 레벨이 확연히 낮아졌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네. 그렇기 때문에 바프라를 되도록 평화롭게 손에 넣은 거야. 우선은 이 뒤틀린 전쟁을 끝내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낼 수 있으면 그게 최선이지."

"아…!"

이게 이렇게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거겠지. 감탄한 모습의 발가스를 바라보면서, 나는 내 말이 먹혀들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직접 반응을 보니 안심이 됐다.

실은 지금 건 즉석에서 생각해낸 말이 아니거든. 아무리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을 "구원아. 제발 말 좀 그만하면 안 되니?" 라며 울린 전적이 있는 나라도, 이런 말을 즉석에서 술술 만들어내기는 힘들단 말이지.

전쟁신의 세계에서 전쟁을 멈추려고 하고 있는 거다. 바프라를 제거한 후, 나는 줄곧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다.

바프라는 괜찮았다. 그쪽은 내가 플리투스 사람이라고 알고 있으니, 전쟁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바프라를 플리투스에 복속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그건 비스도 마찬가지다. 물론 나중 일이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지만, 만약 그쪽에 가서도 내가 플리투스 사람이라는 걸로 일을 진행하면 같은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멈출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플리투스는? 플리투스에서만큼은 그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바프라를 제거한 이후에 바쁘게 일하면서도, 내 머리 한구석에서는 줄곧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신의 세계에서 전쟁을 멈추는 그럴듯한 이유를 대려면, 대체 뭐라고 입을 털어야 할까?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이 세계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내가 혼자 스스로 떠올린 건 아니다. 계기는 바로 창관의 준비가 한창이었던 그때, 자신이 키워낸 성기사들이 이곳에 보내기에 충분한 실력일까 고민하던 마틸다에게 사라가 해준 말이었다.

"괜찮아요. 이 세계는 생각했던 것만큼 살벌한 곳이 아닌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확실히 그렇지." 라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의 말대로, 전쟁신의 교리에 따르는 세계라는 타이틀을 가진 것치고 이 세계는 너무 평화로웠다.

물론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은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동안 눈으로 직접 본, 전쟁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들은 솔직히 말해서 위쪽 세계의 도시와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사람들의 성격이 조금 더 호전적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지역색으로 받아들여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근소한 차이였다.

그래. 이 세계는 생각했던 것만큼 전쟁신을 열렬히 신봉하는 세계가 아니었던 거다.

아니. 일단 전 대륙이 전쟁신을 유일신으로 따르고 신봉하는 건 맞다. 다만 그 정도가 위쪽 세계 같지 않다고 할까?

위쪽에서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잡고 물어봐도 여신님의 말씀을 줄줄이 읊을 수 있을 정도로 모두가 열렬한 신봉자였다면, 이쪽은 그렇지 않았다.

일반인들 사이에서 전쟁신에 대한 믿음은 일단 모태 종교니까 믿는다는 느낌으로 미적지근한 수준이었다.

대체 위쪽 세계와 이쪽 세계의 차이가 뭐길래 그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단순히 여신의 사상인 섹스가 더 믿고 따르기 편하고 좋으니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답은 금방 나왔다.

위쪽 세계와 이쪽 세계의 결정적인 차이. 그것은 신과 얼마나 밀접하게 지내는지에 있었다.

위쪽 세계에서는 마틸다가 저주에 걸려 성녀의 대가 잠깐 끊기기 전까지, 매번 성녀가 여신을 그 몸에 강림 시켜 여신이 직접 신도들에게 목소리를 전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전쟁신이 여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적게 잡아도 이미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천 년 전이라는 게 말이야 쉽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게 옛날이다. 원래 세계의 감각으로 따지면 기원전. 선사시대 수준이잖아?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런 생각도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됐다.

그렇게 옛날에 자취를 감춘 신의 말이라면,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도 몇 되지 않는 것 아닐까? 기록으로 남은 게 있더라도, 보는 사람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건 제대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뭐, 이걸 전부 내가 생각해낸 건 아니고, 실은 난 중간중간 뜬구름 잡는 소리만 던졌을 뿐 대부분 디아나가 생각해 준 거지만.

그나마 전쟁신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시기를 추론해낸 건 전부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이 몸의 나이로 그런 것을 추론해내지 말게!" 라면서 디아나한테 토닥토닥 공격만 받았었지.

그 이후에 "우우…이 몸…그렇게 옛날 사람 같은가…?" 라며 살짝 진심으로 우울해진 디아나를 달래주느라 꽤 애를 먹었던 건, 지금 와서 생각 해 보면 좋은 추억이다.

아무튼 애매모호하게 남아 있는 전쟁신의 말을 이쪽이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낸 후, 나는 일하는 틈틈이 그쪽 방면도 열심히 조사했다.

일반 시민들의 생각은 그렉과 듀크 변태 듀오를 시켜서 조사하게 하고, 귀족들이 전쟁신의 교리를 어떻게 믿고 따르는지는 우리가 직접 조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우리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어떤 식으로 전쟁신의 말을 이용해서 플리투스를 구슬릴 거냐는 건데, 여기부터는 디아나보다 내가 더 활약했다.

아니. 언제나 하는 생각이지만, 이 세계가 무협지의 삼강 구도와 비슷하다는 게 또 떠올라서 말이지.

그리고 플리투스는 무협지 세계관으로 따지자면 정파 포지션이다. 그러니 어쩌면 이런 허울 좋은 구실이 먹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다.

물론 여기가 진짜 무협지 세계인 건 아니니, 플리투스가 정파 같은 사상에 무조건 동조해 줄 거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우리는 그동안 신의 말을 곡해해왔지. 전쟁은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돼. 우리의 진짜 목적은, 신이 우리에게 전쟁을 지시한 진짜 목적은, 우리 자신의 발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네. 그러니까 나는. 성자로서. 인류의 발전을 저해하는 이 잘못된 전쟁부터 바로잡는다."

이 모습을 보아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군.

그렇게 엄숙하게 선언하는 내 주위에는 어느샌가 일반 병사들까지 몰려와서 홀린 듯이 내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훗. 역시 나야.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보물찾기할 때 선생님한테 "얘들아! 이쪽으로 가야 한다니까! 왜 자꾸 선생님 말을 안 듣고 구원이 말을 듣니!? 너희 구원이가 죽으라면 죽을 거야!?" 라는 소리를 그냥 들은 게 아니지.

이것이 바로 내츄럴 본 사이비 교수라는 이명을 가진 이 구원 님의 진짜 실력…!

짝짝짝.

그렇게 혼자 자조하고 있자니, 어디에선가 갑자기 박수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그 박수소리에 동조한 건지 점점 박수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우와아아! 성자님 만세에!"

아, 아니. 형님들? 조금 진정하시죠? 이런 헛소리에 이렇게까지 열렬하게 호응해주면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부끄러워지잖아!

"내가 성자님을 왜 믿고 따르는지, 이제 알겠지? 발가스 장군."

내가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몰라서 가만히 있자,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부드럽게 내 팔짱을 껴왔다.

그게 누군지는 굳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리엘 이 녀석이었나. 아까 제일 먼저 박수 쳐서 이런 오글거리는 반응을 유도해낸 건.

이 녀석은 대체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야? 아니. 따로 설명할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용사로서, 리리안 플리투스의 손녀로서, 올바른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그 일은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발가스 장군. 내 힘이 되어주겠어?"

"물론입니다! 이 발가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지금 쿵 하면서 살짝 땅까지 울렸는데. 무릎 안 아픈가?

아니. 그보다 미리엘 이 녀석, 기껏 내가 양념을 다 쳐놨더니 지금 자기가 낼름 받아먹어 버린 거야?

뭐, 결국 플리투스에서 직접 활동할 건 미리엘이고, 어차피 미리엘을 뒤에서 조종하는 건 나니까 크게 상관은 없지만.

"뭐, 하루이틀사이에 끝날 일이 아니니까. 우선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나가자고."

아무튼 슬슬 얘기가 정리된 것 같아서, 나는 근엄한 표정을 풀고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핫! 네놈들! 왜들 멈춰있는 거냐! 휴전이 체결됐다고 군기가 빠진 건 아니겠지!? 성자님 말씀을 못 들은 거냐!?"

딱히 지금 하는 일부터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말이지. 뭐, 각자 자기 일 하러 흩어지는 건 환영이지만.

자기도 허리를 90도로 숙여서 인사하고 할 일하러 돌아가는 발가스를 적당히 인사하고 보내준 다음, 나는 다시 앨리시아를 오붓하게 쳐다봤다.

갑자기 중간에 발가스가 끼어드는 바람에 그런 분위기가 되어 버렸지만, 원래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은 산책 데이트였었으니까.

게다가 아까 내가 한 말을 영향인지, 다들 조금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기 시작해서 우리 쪽으로 쏠리는 이목도 훨씬 적어졌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데이트를 즐길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지만, 내 오붓한 시선을 받은 앨리시아의 얼굴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왜, 왜 그런 표정으로 보냐."

"…너, 직업 잘못 고른 거 아니야?"

아니. 천직이라고 생각하는데. 심지어 이건 비유도 아니야. 신이 직접 하사해 준 직업이니까 말 그대로 천직이지.

"그게 아니라 모험…하아. 아니다. 원래 이런 놈이었지."

"이제 와서 후회하고 정떨어졌다고 해도 안 놔준다. 한 번 내 여자는 영원한 내 여자야."

"그, 그런 거…이런 데서 그런 말 하지 마! 새끼야! 넌 부끄럽지도 않냐!?"

훗. 부끄러움 따위. 레이와의 감정 공유로 단련된 나에게 있어서는 사치스러운 감정에 불과하지.

"…뭘 멋있는 척하면서 말하는 거야."

"안 멋있어?"

"멋있어."

아니. 미리엘. 너한테 물어본 거 아니거든? 그보다 넌 아직 안 갔냐?

"성자님. 아무리 나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상처받아."

그렇게 말하면서 아까부터 껴안고 있는 내 팔에 더욱 가슴을 밀어붙이는 미리엘이었다.

이 녀석, 몸은 전체적으로 탄탄하게 단련된 주제에 가슴은 왜 이렇게 부드러운…아, 아니. 이게 아니지.

"그래서, 넌 여기에 왜 왔는데?"

"아아. 실은 이걸 건네주러 왔어."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엘은 곱게 접은 종이를 내게 건넸다. 이건…쪽지인가?

"또 성자님은 금방 떠나야 하니까. 내 마음을 담아서 몇 자 적어봤어. 제법 적나라한 얘기도 적혀 있으니까, 되도록 혼자 있을 때 봐줘."

대체 뭘 적은 거야…. 말하는 것만 보면 그렇고 그런 글이라도 적은 것 같아 보였지만, 설마 진짜로 그런 글을 적은 건 아닐 테고.

…아니지? 또 평소처럼 헷갈리는 말투를 쓰고 있는 것뿐이지?

"미, 미리엘 너…!"

미리엘의 그 모습을 오랫동안 같이 알고 지낸 앨리시아조차도 헷갈리게 할 정도여서, 앨리시아는 완전히 내가 건네받은 쪽지에 적힌 내용을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오해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는 거지만.

"그럼 두 사람, 계속해서 즐거운 시간 보내."

그런 앨리시아의 오해를 풀어주지도 않고, 미리엘은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미련 덕지덕지 남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슬며시 내 팔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대로 멀어져가는 미리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물컹. 하고 기분 좋은 감촉이 반대쪽 팔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서 그쪽을 보니, 내 팔을 끌어안은 채 고개만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는 앨리시아의 모습이 있었다.

새빨간 머리칼 사이로 엿보이는 귀 끝이 살짝 물든 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건 어색하니까 평소처럼 지내자고 한 거 아니었어?"

"…별로 이 정도는 친구 사이에도 하잖아."

아니. 뭐, 그런 친구 사이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넌 그런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불만 있어?"

"있어."

"핫. 당연…무, 뭐? 지금 있다고 했어 새끼야!?"

"난 이래 봬도 질투심이 강하거든. 나 말고 다른 남자한테는 친구라도 이런 짓 하지 마라."

"으윽…. 자, 자기는 내 친구랑도 자는 새끼가 질투는…."

아, 아니. 거길 찌르면 저도 할 말은 없는데 말이죠.

그래도 그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할까. 까놓고 말해서 네 친구가 너무 위험했다는 건 너도 인정하잖아?

"아, 안 해 새끼야…."

응? 갑자기…아, 아아. 다른 남자랑은 팔짱 안 낀다고. 갑자기 또 거기로 돌아오는구나.

그럼 아까 그건 날 구박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부끄러움을 숨기려고 한 말이었어?

…얘는 뇌에 필터를 안 거치고 툭 내뱉는 느낌이 있어서 사라랑은 또 다른 느낌으로 가끔 명치 딜을 꽂는단 말이지.

아무튼 그 이후로는 딱히 방해받는 일도 없이, 우리는 사귀기 전과 마찬가지로 험한 말투로 투닥투닥거리면서, 그러면서도 사귀기 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즐기며 느긋하게 산책 데이트를 마쳤다.

"그런 일이 있었어."

"…그렇구먼."

한껏 늘어놓은 내 무용담을, 디아나는 다소 덤덤하게 받아쳤다.

그래. 디아나와 있다는 걸 보면 알 수 있듯, 난 지금 구미호 마을에 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앨리시아와 적어도 하룻밤은 보내고 오고 싶었지만, 그렇게 전쟁을 멈추는 일에 열의를 보여 놓고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거기에 눌러앉아 있기에는 눈치가 보여서 말이지. 하는 수 없이 앨리시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분위기상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역시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미리엘이랑 하룻밤을 보내놓고 진짜 내 여자인 앨리시아하고는 아무 일도 없이 돌아오다니.

물론 나름 데이트를 하기도 했고, 앨리시아도 원래 성격이 호탕한 만큼 쿨하게 이해하고 보내줬지만, 으음…나중에 만나면 진짜 잘해 줘야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그쪽 요새에서 벗어난 나는, 곧장 우리의 브레인에게 상황 보고부터 하러 왔다는 얘기다.

뭐, 대놓고 말하자면 무용담을 늘어놓고 덤으로 칭찬도 좀 듣고 싶어서 왔다.

정작 디아나는 칭찬은커녕 무덤덤한, 어떻게 보면 심각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으로 내 얘기를 들었지만 말이다.

"왜 그래?"

설마 이 얘기 하니까 또 나이 생각나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괜찮다니까. 난 전혀 신경 안 써. 디아나 네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그런 생각 안 했네!"

그러니까 괜히 건드리지 말게! 라고 덧붙이면서, 디아나는 내게 가볍게 딱밤을 먹였다.

그럴까 봐 나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이야. 우리 애들의 독심술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아서 요즘 들어 살짝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네. 처음에 병사들이 험악한 분위기를 풍기고 장군이 위압감을 풍기며 나타나 자네를 시험했다고 했잖은가?"

"응? 아, 응. 그랬지."

"미리엘 양은 알고 있었는가?"

"그야 미리엘의 협력 없이는 못 했을 테니 당연히…아니. 그 얘기 하는 게 아니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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