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60화 (1,127/1,205)
  • 1160화

    그러니 당연한 얘기지만, 그 말을 뒷받침해 줄 흔적이 전혀 없다.

    미리엘이 얘기해 준 스토리대로라면, 미리엘의 여정은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런 세계이니만큼 3세력에 속하지 않은 작은 마을은 언제 어떻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리엘이 지나온 곳 전부가 그렇게 되는 건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래. 미리 준비를 해둬야지."

    즉, 미리엘은 이렇게 말하는 거다. 자신의 인생을 증명해 줄 증인을 자기 클랜원들로 메꾸겠다고.

    클랜원이 많으니까 이런 무식한 방법도 가능하구나.

    계획치고는 100명이라는 인원도 적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런 건 흩어져서 소문을 퍼뜨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다 흩어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미리엘이 지도로 표시한 장소만 하더라도 상당히 광범위하다. 이 범위를 100명으로 커버하려면, 두 명씩 짝을 이뤄 행동하는 것조차 힘들지도 모른다.

    "괜찮아.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미리 다른 곳을 조금 둘러봤는데, 그 정도 수준이면 4계층 수색대 수준으로 충분할 거야. 오히려 이쪽 세계의 사람은 우리 클랜원들에게 좋은 양식이 되어 줄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엘은 혀를 내밀어 살짝 입술을 핥았다.

    야. 갑자기 위험한 분위기 풍기지 마라. 그리고 양식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설마 소문을 퍼트리려는 놈들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소란을 피우겠다는 건 아니겠지?

    "응? 혹시 성자님은 우리 클랜의 소문을 못 들었어?"

    "너희 클랜이 강한 건 나도…."

    "그쪽 소문이 아니야 성자님. 내가 말하는 건, 우리 클랜이 강한 이유야."

    이유? 그야 던전 열심히 다니면서 열심히 직업 레벨 올리고, 레벨도…아.

    "야, 양식이라는 게 그거 말하는 거였어!?"

    "나로서는 성자님이 바로 눈치채지 못한 게 의외인걸."

    아니. 위험하다는 얘기를 하는 중이었으니 당연히 생각이 전투력 걱정 쪽으로 가게 되지. 갑자기 섹스 얘기가 될 거라고 내가 어떻게 아냐.

    "그리고 그렇게 우리 클랜원들이 남자들을 홀리고 다니면, 성자님의 진짜 목적도 더 수월하게 풀리지 않겠어?"

    미리엘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지는 내용이었다.

    "…너 혹시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냐?"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바프라에 창관을 만들어서 성기사들을 투입했다는 얘기를 미리엘이 알 리가 없다.

    나도 며칠 전에 즉석으로 생각해내서 실행한 거니까. 그런데도 그것과 비슷한 계획이 얘 입에서 그대로 나온다는 것은….

    "응? 무슨 말이야?"

    나랑 얘랑 생각하는 수준이 비슷하다는 뜻이 되잖아!?

    서, 설마 이것도 조교의 영향인가?미리엘과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 날.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했지만, 나는 당장 떠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물론, 눈앞에 있는 앨리시아 때문이다.

    아니. 얘한테 붙들렸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모처럼 만났으니까, 조금은 애인 역할을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다들 상황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7계층 공략에 박차가 가해지면서 같이 오붓한 시간을 즐길 기회가 거의 없었으니까. 특히 앨리시아의 경우 사도 인장을 받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런 곳에 오게 됐으니, 진짜로 사귀는 기분을 맛볼 틈도 없었다.

    사귀는 과정은 제일 힘들었던 녀석이 이런 상황이니,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지 않겠어?

    "너 대체 뭘 할 거야 이…!?"

    물론 앨리시아는 지금 오붓한 기분을 맛보기는커녕 격앙해서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고 있었지만.

    이유는 단순하다. 미리엘이 힘들다는 이유로 아침을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어."

    아니. 난 원래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거든? 그냥 잠만 자려고 했어. 그런데 미리엘이 옆에서 자꾸 잠을 못 자게 떠들어대잖아. "성자님. 만약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면 시중들이 의심할 거야. 게다가 하룻밤 내내 시중들을 물린 거니, 격렬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돼." 라면서 이유를 구구절절하게 조잘조잘.

    그래도 난 참았어. 그냥 베개로 귀 막고 자려고 했거든? 그랬더니 미리엘 그 녀석이 "성자님. 혹시…자신 없어진 거야?" 라고….

    그래. 나도 알아. 나도 대체 이거랑 같은 패턴에 몇 번을 당하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더라고. 성자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짜로 이 방면으로는 한 번도 굴욕을 당해 본 적 없어서 그런 건지, 꼭 저 도발만 당하면 나도 모르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아침도 같이할 수 없게 된 미리엘이 완성됐다는 얘기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녹아웃 시키고 난 옆에서 편안하게 숙면하다가 왔어.

    "그걸 말이라고…!"

    "어쩔 수 없었어."

    뭐, 그렇다고 해서 내 여자 앞에서 당당하냐고 하면 그건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난 당당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모처럼 미리엘이 날 최강의 용사로 한껏 떠받들어줬는데, 여기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

    평소에 그다지 눈치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앨리시아지만, 그래도 적진 한복판에서 모두를 속이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보니 조금은 눈치가 늘어난 걸까?

    드디어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해 줬는지, 앨리시아는 내 멱살을 잡고 있던 손에서 살짝 힘을 뺐다.

    "성자님 말이 맞아 앨리시아. 오랜만에 만났으니 어쩔 수 없잖아. 너무 질투하지 말아줘."

    뒤에서 나타난 미리엘이 전부 초를 쳐 버렸지만.

    야. 그렇게 말하면 마치 우리가 오랜만에 섹스해서 불타오른 것 같잖아. 그런 의미로 어쩔 수 없다고 한 게 아니거든?

    그냥 계속 침대에 누워나 있지 왜 나타난 거야.

    "지금부터는 앨리시아한테 양보해 줄 테니까."

    차라리 진짜 눈치가 없는 거면 면박이라도 줄 텐데, 눈치는 또 엄청 빨라서 내가 뭘 원하는지 기가 막히게 파악한단 말이지. 저쪽 핏줄은 다 그런 건가?

    "그렇다네. 그럼 사양 말고 같이 걸으면서 얘기라도 할까?"

    나는 앨리시아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감고는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엘. 고맙다고는 하지 않으마.

    "살풍경하네."

    둘이 오붓하게 즐기면서 산책 데이트라도 즐길 생각으로 밖에 나왔지만, 이곳은 요새 안. 도저히 데이트를 즐길 분위기는 아니었다.

    "당연하지. 그럼 뭘 기대한 거야."

    내 중얼거림에 퉁명스럽게 반응하면서, 앨리시아는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내 팔을 떼어냈다.

    역시 아직 화내고 있는 걸까. 하긴. 나와 미리엘의 관계를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고는 해도, 역시 직접 경험하는 건 틀리겠지.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젠장. 진짜 미리엘이 말한 사방에서 감시당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잘 알겠네. 보는 눈이 너무 많으니까 사과도 제대로 할 수가 없네.

    뭐, 앨리시아도 같은 이유로 평소의 그 불같은 성격이 안 나오고 있는 거겠지만.

    아까 멱살 잡은 건 뭐냐고? 평소 같았으면 멱살로 안 끝났을걸. 말투만 봐도 아까부터 그 특유의 거친 말투가 많이 자제되고 있잖아?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애인 같은 짓을 하는 게 좀…그런 거 있잖아…."

    아무튼 그런 이유로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니, 앨리시아가 고개를 돌리고 툭 내뱉듯 그런 말을 해왔다.

    그런 거 있잖아라고 말해도 말이지.

    "아니. 우리 애인 사이거든? 까먹은 거 아니지?"

    내가 그 새끼손가락을 슬쩍 어루만지며 말하자, 앨리시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누, 누굴 바보로 알아 새끼야!?"

    아, 드디어 나왔다. 아까부터 저 말투 자제하느라 말 줄이는 게 은근히 듣는 사람도 답답하게 만들었는데.

    "그러면 뭐가 문제야. 나랑 이러고 싶어서 고백한 거 아니었어?"

    "아니. 그게. 뭐라고 하지. 왠지 간질간질하다고 할까? 그런 거 있잖아 새끼야!"

    또 그런 거 있다고 하네.

    하지만 뭐, 앨리시아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다. 줄곧 친구처럼 지냈는데,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려면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 얘가 그렇게 요령 좋은 성격도 아니고.

    "그리고 애초에 난 이런 걸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아무튼 그런 거…!"

    이번에는 자기도 똑같은 말을 세 번째 반복하려고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앨리시아는 도중에 말을 끊고 얼굴을 붉혔다.

    나한테 고백한 것도, 애인 사이에 하는 짓을 즐기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서 고백했다는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하긴. 이제 와서 태도를 바꾸는 것도 어색하기는 하지. 우리는 우리답게 있으면 되나."

    앨리시아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전부 이해한 나는, 피식 웃으면서 그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나같이 눈치 빠른 애인을 둬서 다행인 줄 알아. 라는 의미를 담아서.

    아마 다른 녀석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찰떡같이 알아듣지는 못했을 거야.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앨리시아는 그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시원스럽게 웃어 보였다.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아니. 오랜만에 웃는 얼굴 보니까 보기 좋아서."

    "…너 사람이 하는 말 제대로 안 들어!?"

    아니. 알면서 말한 건데. 친구처럼 지내는 건 친구처럼 지내는 거고, 그래도 애인 사이인데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잖아. 친구 사이에도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겠다.

    "치사한 새끼.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말하고…!"

    "그래서 마음에 안 들어?"

    "얼굴 그렇게 가까이 들이밀지 마! 새끼야."

    "싫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제압해야 하니까."

    "제압!? 내가 무슨 야생마인 줄 알아 새끼야!? 그리고 얼굴 들이미는 게 제압이랑 무슨 상관이야!?"

    다 알면서 물어보네. 실제로 키스하면 제압될 거면서.

    그보다 이 녀석, 일단 자기가 야생 동물 같다는 자각은 있구나.

    그 말을 빌미로 다시 한번 앨리시아한테 장난을 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정말로 사이가 좋으시군요."

    "발가스 장군."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인상과 다르게 부드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근육 덩어리는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니. 편하게 부르라고 해도 말이지.

    미리엘의 스토리텔링에 푹 빠져서 시중을 대거 투입해 모시게 했다는 얘기만 들으면 이 근육덩어리 본인도 미리엘의 곁에 찰싹 붙어 있을 것만 같지만, 하루 동안 같이 지내본 결과 의외로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어제 최전선에 총사령관 본인이 직접 가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발가스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진두지휘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프라와 휴전 협정이 맺어지며 병사나 물자의 재조정으로 바빠진 지금, 발가스는 쉴 틈 없이 움직여대는 바람에 실은 나하고는 그다지 얘기할 기회도 없었다.

    "상당히 바빠 보이네. 혹시 우리 방해돼?"

    일단 일하는 사람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게 요새 안을 산책하고 있을 셈이었지만, 이 근육 덩어리와 얼굴을 마주친 걸 보니 어느새 일하는 구역으로 들어와 버린 모양이다.

    "아닙니다. 제가 바쁘다고 하더라도, 성자님만 하겠습니까."

    이런 근육 덩어리한테 성자님이라고 떠받들어지니까 또 기분이 묘하네.

    물론 발가스는 성자를 그 성자가 아닌 다른 의미의 성자로 알고 말하는 거겠지만.

    "성자님도 곧 다시 움직이시는 것이지요?"

    …이거, 혹시 축객령인가? 여기에서 볼 일 다 봤으면 빨리 다른 곳으로 꺼지라는.

    아니. 그냥 내가 너무 과하게 꼬아서 생각하는 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발가스를 보면서,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내가 좋은 말까지 비꼬아 들을 정도로 꼬인 성격은 아닌데, 방금 그 기분은 대체 뭐였지?

    "그래. 다음은 비스니까. 바프라처럼 평화롭게 손에 넣지는 못할 거야."

    어찌됐든 지금은 용사들의 대장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낼 필요가 있었다.

    모처럼 미리엘이 여기까지 완벽하게 진행해놨는데, 내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수는 없지.

    "그러고 보니 바프라는 상당히 평화롭게 손에 넣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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