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59화 (1,126/1,205)

1159화

이곳의 총사령관이라는 사람도 저 모양이고.

이렇게 지내고 있었으면 대체 왜 그동안 연락도 제대로 안 했던 거야? 괜히 걱정해서 손해 봤네.

"성자님. 그렇게 과일을 계속 물고 있다는 건, 루티아로는 부족하다는 얘기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옆에 있던 미리엘이 더욱 내게 몸을 밀착해왔다.

게다가 손까지 내 허벅지 안쪽에 넣어서…무, 뭐 하는 거야 이것아! 남들 보는 앞에서 어딜 만지려고! 아니! 남들 보는 앞이라는 게 문제가 아니지! 손 안 치워!?

그렇게 생각하며 그 손을 은근슬쩍 치워내려고 했지만, 미리엘은 힘을 꽉 주고 요지부동이었다.

힘으로 억지로 밀어내는 건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면 수상해 보일 테고.

이 녀석, 내가 멋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너무 사적으로 이용하는 거 아니야?

아까 리리안 플리투스가 성자라는 얘기를 퍼뜨렸다는 걸 들었을 때는 감동했었는데! 내 감동 돌려줘!

게다가 그냥 허벅지 안쪽에 손을 밀어 넣은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미리엘은 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기까지 했다.

"성자님. 제대로 느껴줘."

대체 뭘!? 잠깐 그렇게 생각했지만, 장난치고는 미리엘의 눈빛이 생각보다 진지했다. 게다가 옆에 있는 앨리시아도 아까 루티아가 장난쳤을 때처럼 화난 느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챔과 동시에, 나는 내 허벅지 안쪽에서 움직이는 미리엘의 손가락이 뭔가 글씨를 쓰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핫. 성자님. 그렇게 떫은 표정 짓지 말아줘. 낮에는 성자님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여기를…."

"오해받을 몸짓 하지 마 이것아!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슬쩍 손을 가져가며 요염한 몸짓을 보이는 미리엘에게 있는 힘껏 역정을 내봤지만, 미리엘은 전혀 동요한 눈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오해받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거잖아?"

그, 그거야 그렇지만.

휴전이 타결된 것으로 플리투스군과 바프라군은 각각 최전선에서 군을 물렸다. 물론 최전선에 같이 있던 우리도 곰덩이 장군을 따라 플리투스 진영의 요새 안까지 물러나게 됐다.

그리고 그 요새에서도 최고지휘관이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는 사람이나 머무를 것 같은 호화로운 방. 그곳에서 나는 지금 미리엘과 단둘이 있었다. 우리에게 배정된 수많은 시중도 전부 물리고 단둘이. 이유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말해두지만, 시중들을 물리기 위해 그런 명목을 내세웠다는 얘기다. 진짜로 얘랑 섹스한다는 얘기가….

지이익.

응?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아래에서 들려온 이질적인 소리에 시선을 내리자, 거기에는 내 바지 지퍼를 앞니로 물고 내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는 미리엘의 모습이 있었다.

"갑자기 무슨 짓이야 이것아!?"

"성자님과 만나면 우선 여기에 키스를. 그렇게 가르친 건 성자님이잖아?"

…뭐, 그야 그렇지만.

어, 어쩔 수 없잖아! 게임에서나 해본 조교를 실제로 하게 된 거니까! 나도 분위기에 휩쓸린 거라고!

"그게 아니면, 만나자마자 하지 않아서 불만이야? 미안해. 이런 나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하는 건 조금 부끄러워서. 아직 조교가 완벽하지 않은가 봐. 다시 조교를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받아들일게."

"그런 말을 할 거면 적어도 싫어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해라."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어.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있는데.

"하핫. 역시 성자님은 날카롭군."

네 욕망이 너무 노골적인 거야 이것아.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내심 조금 안심했다. 아까 미리엘이 내 허벅지 안에 쓴 글이 ‘감시당하고 있어. 내 말에 맞추면서 밤까지 기다려줘.’ 라는 문장이라는 걸 이해했을 때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이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리 심각한 분위기는 아닌 모양이다.

"그래서, 일단 자세한 설명부터 해주겠어?"

일단 나도 그 자리에서 사정을 들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건 한계가 있어서 말이지. 결국 자세한 사정은 전혀 듣지 못했다.

참고로 그런 식의 대화라는 건…뭐, 나도 미리엘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했다는 얘기다.

이 녀석, 자기가 먼저 시작한 주제에 내가 하려고 하니까 갑자기 그런 반응을 보여서는.

"그렇군. 쪽."

거기에 키스는 기어이 하는 거냐. 이제 걔는 좀 놔줘라.

괜히 신경 쓰면 내가 더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아서, 나는 애써 무심한 척 미리엘의 몸을 떼어냈다.

"알겠어. 진지하게 얘기할게. 그렇군. 무엇부터 얘기하면 좋을까. 그래. 우선 내가 성자님을 이곳에 부른 이유부터 밝히는 게 좋겠군. 눈치 빠른 성자님이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단순히 발가스 장군에게 성자님을 소개하기 위해서 부른 게 아니야."

그야 그렇겠지. 그게 진짜 목적이었으면 이미 목적은 달성한 거니까. 날 이 시간까지 잡아둘 이유가 없다. 이 녀석이 사적인 이유로 잡아둔 게 아닌 이상.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부탁이 있어서 불렀어."

"부탁이라니. 나한테?"

"맞아. 앞으로의 활동에 아무래도 필요할 것 같아서. 반지로 부탁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반지를 쓰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거든."

"아까 말한 감시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 감시당하고 있다는 말부터 조금 의외였다.

왜냐하면 아까 만난 그 장군은, 아무리 봐도 미리엘을 엄청나게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 분위기는 신뢰를 뛰어넘어서 신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으음…."

그런 내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미리엘이 조금 석연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이 타이밍에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말이 되는데.

"실은 그 감시라는 표현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몰라."

"그게 또 무슨 말이야?"

그것 때문에 내가 그런 이유까지 대면서 지금 이 녀석이랑 여기에 단둘이 있는 건데.

설마 속인 건 아니겠지?

"오해하지 말아줘. 결과적으로는 감시받고 있는 건 맞으니까. 그렇군. 우선 그 오해부터 풀지. 그걸 위해서는 우선 내 지금까지의 행적부터 알아야 해."

그렇게 운을 떼고 미리엘의 입에서 차례차례 흘러나온 스토리는, 간단히 말해서 전형적인 용사 전설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이름 없는 시골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소녀.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습격해온 도적 무리.

눈앞에서 평생을 같이 지내던 마을 사람들이 차례차례 살해당하는 위기의 순간, 갑자기 눈을 뜬 미지의 힘. 그 힘을 사용해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소녀였지만, 이미 소녀가 갈 곳은 없었다. 결국 소녀는 미지의 힘을 정체를 알기 위해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든든한 동료들과 차례차례 만나는 도중, 소녀는 드디어 자신의 힘을 알고 있는 자를 만나게 되고, 거기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출생의 비밀! 소녀는 바로 세계를 통일한 그 리리안 플리투스의 후손이었다!

심지어 리리안 플리투스는 그냥 용사가 아니라 용사 중의 용사. 성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자는 리리안 플리투스와 같은 힘을 가진 성자라고 하는데…!

라고 하는,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왕도 용사 스토리였다.

"하핫. 성자님은 엄격하군. 일단 내 나름대로 머리를 짜본 건데 말이야. 그렇게 진부했어?"

뭐, 이 세계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기준으로는 그랬다.

그나마 미리엘의 얘기와 다른 진부한 용사 전설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 디테일에 있었다. 그냥 생각해낸 것치고는 너무 얘기가 자세한데.

"거짓말을 할 거면 진실을 섞어서 교묘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들었거든."

과연. 그렇…아니. 잠깐만. 그럼 아까 들은 얘기의 일정 부분은 진실이라는 말이 되잖아!? 대체 어느 부분이!?

"하핫. 성자님께서 내 과거에 관심을 가져주는 거야? 그거 영광인걸."

대답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미리엘은 그렇게 적당히 얼버무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디테일한 점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에서는 그런 진부한 얘기가 잘 통하는 건지, 발가스 장군은 내 얘기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 같아."

뭐, 이해 못 할 얘기는 아니다. 나야 거짓말이라는 걸 아니까 이렇게 냉정하게 태클을 거는 거지. 만약 이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나도 똑같이 반응했을 거다.

그야 그렇잖아? 왕도 전개의 용사 전설이라고. 왕도 전개를 그저 진부한 스토리라고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주 쓰이며 왕도라고 불린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한테 통용되는 스토리라는 뜻도 된다.

그런 스토리의 한복판에 내가 직접 있다는 것이니, 어떻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어?

"하핫. 그 말대로. 발가스 장군은 자신이 전형적인 용사 전설의 등장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고양된 모습이었어."

그리하여 용사의 힘을 알아본 용맹한 장군이, 용사의 뜻에 따라서 자칫하면 나라의 뜻에 반대될지도 모르는 큰 결단을 내리게 됐다는 얘기인가.

가면 갈수록 더 전형적인 용사 스토리로군.

"하지만 발가스 장군은 우리 얘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우리를 한시도 혼자 내버려두지 않았어. 씻을 때는 물론 잠을 잘 때도, 심지어는 볼일을 볼 때도 꼭 시중을 붙여주었지."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감시받는 상황이 되었다는 얘기인가. 어쩐지 아까 우리 둘만 있고 싶다면서 시중들을 전부 물릴 때, 발가스의 반발이 유독 심한 것 같더라니.

내가 시중들 도움 없이는 잠자리도 제대로 가지지 못할 정도로 한심해 보이냐고 성내지 않았다면, 분명 이 방에는 아직도 시중들이 남아서 우리를 시중들고 있었을 거다.

아니. 잠깐만. 그럼 디아나랑 반지로 통화했을 때는?

"그때도 마찬가지로 전부 지켜보고 있었지."

그래서 휴전 협정을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만 간략하게 얘기하고는 바로 끊어 버린 건가.

대략적인 상황이 전부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저 장군을 통해서 플리투스 수도로 침투해 똑같이 용사 스토리의 왕도를 따라가면 된다는 얘기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해주고 있는 미리엘에게, 내가 해줄 말이라고는 이런 것밖에 없었다.

"그래. 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성자님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그런 얘기였지. 어쩌다 보니 얘기가 크게 탈선해서 잠깐 깜빡했어.

"말해 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들어줄게."

애초에 얘가 여기에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것도 나 때문…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신 때문이지만, 아무튼 나한테 책임이 있는 건 확실하니까.

"성자님."

대체 어떤 부탁을 하려는 건지, 미리엘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처럼 진지한 얘기를 하는 중이니까, 그런 식으로 유혹하는 건 멈춰줬으면 좋겠어."

"유혹한 적 없어! 네가 멋대로 유혹당하는 거잖아!"

진지한 표정이길래 살짝 긴장했는데! 겨우 그런 말 하려고 그런 표정 지은 거였어!? 너 원래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원래 시원스러운 무협지 주인공 같은 캐릭터였잖아! 대체 언제부터 그런 캐릭터가 된 거야! …나한테 조교 당한 이후부터인가.

"성자님은 자신의 매력을 조금 더 제대로 인지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부탁이라는 건?"

아무래도 계속 받아주면 끝없이 그 얘기만 할 것 같아서, 나는 억지로 얘기를 정상 궤도로 돌리기로 했다.

"아아.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우리 클랜원들에게 지금 내가 해준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고, 이곳 근방의…그렇군. 여기 지도를 봐주겠어? 이곳부터 이곳까지 골고루 데려다주면 좋겠어."

"너희 클랜원들을?"

"그래. 세나라는 사람이 지금 나 대신 클랜장 대리 업무를 하고 있는데, 4계층 수색대 위주로 100명 정도 꾸려달라고 하면 알아서 인원을 편성해 줄 거야."

"100명씩이나…일단 이유를 들어봐도 될까?"

"성자님이라면 이미 눈치챘잖아? 발가스 장군의 마음을 움직인 건 좋지만, 내 이야기에는 큰 결점이 있어."

"거짓말이라는 점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