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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58화 (1,125/1,205)
  • 1158화

    목소리에 확신이 없는 건, 결코 거기 가서 섹스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게 아니다.

    그저 앞일은 모르는 거잖아? 미리엘 걔가 거기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해놨을지 나도 정확히 아는 게 없으니까 말이야.

    이 구원. 내 여자한테 거짓말은 하지 않는 남자거든.

    "그런 건 확실하지 않아도 똑바로 대답해 바보야!"

    하지만 때로는 너무 솔직한 것도 문제인 모양이다.

    "아, 아무튼 다녀올게!"

    여기에 계속 이러고 있으면 나만 불리해질 뿐이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다시 한번 셋의 입술에 쪽쪽 가볍게 입술을 맞춰주고 곧장 망루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 진짜 이상한 짓 하면 가만 안 놔둘 거야!"

    위에서 울려 퍼지는 사라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목적지는 국경지대. 그것도 바프라의 진영이 아닌 플리투스 진영. 바로 아라크네 클랜의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곳이다.

    밤이 아니니 한 번에 이동할 수는 없지만, 그림자 이동을 연발하면서 이동하면 늦어도 점심 즈음에는 도착할 수 있겠지.

    이 지평선이 없는 세계는 매번 봐도 적응이 안 되지만, 목적지까지 가는 방향을 몰라서 헤맬 일은 없다는 장점은 있었다.

    그나저나 저쪽에서 대체 날 왜 보자고 하는 걸까.

    국경지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그림자 이동을 연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디아나의 말에 따르면, 반지로 연락해온 건 미리엘 본인이 아니라 앨리시아였다고 한다. 미리엘은 도저히 우리한테 연락할 틈이 없었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앨리시아마저도 길게 얘기할 틈은 만들 수 없었는지, 반지의 통화 시간을 전부 활용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내게 꼭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는 건, 그만큼 이게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가 되는 건데 말이야.

    디아나하고도 그에 관해 잠깐 얘기를 나눠봤지만, 아무리 디아나라도 뭔가를 추리해내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뭐, 일단 가보면 알겠지.

    아라크네 간부들이 전원 무사하다는 걸 보니 저쪽 상황이 위험한 것 같지도 않고. 특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앨리시아가 날 부른 거다. 절대 날 위험에 빠뜨릴 일은 없겠지.

    그게 아니었으면 사라가 절대 날 곱게 혼자 보내주지 않았을 거다. 그만큼 앨리시아가 보여준 의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두터웠다.

    당연한 얘기지만, 플리투스의 진영에 잠입하는 건 무척이나 간단했다.

    휴전 절차를 밟았다고 하지만, 아직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아직 전선에서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플리투스군은 발을 묶기 위한 함정이라든가 복잡한 전술을 수행하기 위한 진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덕분에 내가 숨어들어 갈 그림자도 곳곳에 깔려 있었다.

    그래서 안전하게 안으로 잠입할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거기서 하나 문제가 생겼다.

    이거 어쩌지? 아라크네의 간부들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일단 그럴듯한 곳을 대충 둘러봤지만, 대체 어디에 숨은 건지 다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모습을 드러낼까.

    뭔가 수상해. 설마 함정인가!? 같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연락해온 게 앨리시아라는 점도 있었지만, 앨리시아에게 연락을 하도록 지시한 사람은 결국 미리엘일 테니까 말이야.

    만약 이게 함정이라면 앨리시아와 미리엘을 포함한 아라크네 간부진 전원도 마찬가지로 함정에 빠졌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미리엘이 그렇게 쉽게 함정에 빠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저기 지나다니는 병사들의 분위기가 얼핏 봐도 아침에 있었던 휴전 선포에 영향을 받아서 풀어진 느낌이었거든.

    "누구냐!?"

    그래서 별생각 없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아무리 그래도 역시 군의 한복판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게다가 풀어진 분위기라고 해도, 어제까지 생사를 넘나들며 격렬하게 전쟁하던 군인들.

    순식간에 날 둘러싸고 창을 들이미는 군기가 바싹 들어간 모습은,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수준이었다.

    "진정해. 나 그렇게 위험한 사람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나는 바프라를 손에 넣은 용사로서 이곳에 온 거니까. 언제나 당당하게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뭐, 실제로 긴장 안 하기도 했고.

    애널라이즈를 쓰고 대충 둘러본 결과 전쟁지역답게 전체적인 레벨이 지금까지 봐왔던 곳보다 높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레벨이 몇이든 내 성자 스킬 한 방이면 다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질 텐데.

    "바프라의 기습인가!?"

    "뭐, 바프라에서 온 건 맞지만…."

    "제길! 그러니까 그 교활한 놈들은 믿을 수 없다고 말했잖아!"

    아니. 사람 얘기는 좀 끝까지 듣지? 자기들끼리 흥분하지 말아 줄래? 이러다가 또다시 전쟁이라도 일으키겠다?

    이런 놈들이 아침에 휴전 공표할 때는 잘도 문제 일으키지 않고 가만히 있었네.

    "무슨 일이냐."

    그렇게 생각하며 기막혀하고 있자니, 멀리에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등장과 동시에 분위기를 진정시킨 그 인물은, 이 소란의 중심이 나라는 걸 알았는지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이 녀석이 이곳의 보스라고. 이 혈기 넘치는 병사들이 휴전 공표 시에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도, 이 인물의 뛰어난 장악력 덕분이라고.

    그런 인물이 이런 최전선 한복판에 등장한 게 조금 의외이기는 했지만,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네놈은?"

    "아침에 메시지 보냈잖아? 못 봤어?"

    "…네놈이 그 빛의 화살을 쏜 용사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래도 병사들이랑 다르게 말은 통하네. 이해력도 어느 정도 빠르고.

    용사라는 걸 알고도 말이 짧은 게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미리엘이 이 녀석을 어떤 식으로 구슬렸는지 정확히 모르는 이상 나도 함부로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못 믿겠어?"

    "못 믿겠군. 이런 나약하게 생긴 놈이 그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아니.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나약하게 생겼다니. 내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야 댁이랑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댁이 무식하게 근육 덩어리라서 그런 거고.

    애초에 대체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뭐지? 진짜 시비 거는 건가?

    "아…그럼 보여줄까? 난 별로 상관없는데. 하지만 그거 쓰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 다 죽을 텐데."

    조금 망설였지만, 나는 일단 세게 나가보기로 했다.

    사라가 쏜 빛의 화살을 그대로 만들어내는 건 아무리 그래도 불가능하지만, 그냥 맛보기만 보여주는 정도라면.

    "으음…그래. 그럼 약하게 너한테만…."

    나는 그림자 이동으로 놈의 눈앞까지 순식간에 이동한 다음, 용사의 힘을 손에 두르고 그대로 그 목을….

    "멈춰!"

    꺾어 버리려고 했지만, 중간에 다른 인물이 끼어들어서 그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인물은,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오지 마. 쓰레온. 하마터면 너한테 쓸 뻔했잖아."

    "야! 손! 손손!"

    용사의 힘을 두른 내 손을 검집으로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쓰레온이 기겁했다.

    왜 그래? 내 손이 빛나는 거 보니까 옛날에 당했던 생각 나서 그래? 걱정하지 않아도, 이거 성자의 손길 아니니까 안심해. 너도 마나에 민감하니까 아닌 거 대충 느껴지잖아?

    "아, 미안미안. 그런데 넌 어디에 있다가 이제 나타났냐?"

    내가 손을 거두자, 쓰레온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검집을 다시 허리에 차며 옆으로 힐끔 눈길을 줬다.

    "후우…감사합니다. 레온님."

    그리고 거기에는, 아까의 그 위엄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곰덩이 같은 남자의 모습이 있었다.

    살짝 상황 파악이 안 되는데. 이게 뭐 하자는 거야? 그러니까 즉, 전부….

    "연기였어?"

    아무리 그래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은 연기가 아니었는지 다들 나처럼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연기라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이 설명되지 않았다.

    "미안해 성자님. 이 남자가 아무래도 성자님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

    쓰레온이 튀어나온 막사에서 뒤이어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해 준 건 바로 미리엘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아라크네 간부들이 줄줄이 따라 나오며 황당하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저건 그냥 황당해하는 표정이 아니라, 진심으로 기겁한 표정이었다.

    뭐, 그야 그렇겠지. 쟤들도 내가 설마 진짜로 용사의 힘을 쓸 줄은, 쓸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우리 성자님도 정말 대책 없네. 설마 대장부터 혼쭐내려고 하다니. 모처럼 휴전했는데, 그러다가 다시 전쟁이라도 나면 어쩔 생각이었어?"

    그래도 역시나라고 할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는데도, 아라크네 간부 중에서도 색기를 담당하고 있는 섹시 도적 루티아 누님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건네줬다.

    아니. 색기하고는 별로 관계없나.

    "아니. 어쩔 수 없잖아요. 못 믿겠다니까 믿게 해주려면. 그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 좀 해줄래요?"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성자님을 시험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놀리듯 말하는 루티아 누님의 말을 어깨 으쓱하며 받아치자, 식은땀을 다 닦은 곰덩이가 앞으로 한발 나서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 그래. 아까 믿을 수 없다느니 뭐니 했었지."

    미리엘이 했던 말을 기억하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성자…응? 잠깐만.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다들 날 성자라고 부르고 있지 않아? 뭐야 이거? 설마하니 우리가 여신님 쪽 사람이라는 걸 밝힌 건 아닐 테고.

    "네. 리리안 플리투스님의 후계자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 곁에는 새로운 용사님도 같이 계시고, 심지어는 모든 용사의 대장 격이라는 전설의 성자님까지 계신다고 하니, 아무래도 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말이었군요."

    조금 전에 보여주신 그 투기에는 정말로 놀랐습니다. 몸집에 안 맞게 귀여운 미소를 지으며, 대장은 그런 말을 덧붙였다.

    갑자기 인상이 확 변하니까 적응 안 된다. 피지컬과 험악한 인상으로 유명한 격투기 선수가 갑자기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더니 귀여운 척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아니.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즉, 조금 전 얘기를 정리해 보자면….

    "성자 얘기까지 벌써 해버린 거야?"

    "나중에 밝혀져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밝히고 행동하는 게 낫지 않겠어? 여기에 있는 발가스를 보면 알겠지만…."

    시치미 뚝 떼고 미리엘을 향해 넌지시 말하자, 미리엘도 내 의도를 알았는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장에게 시선을 줬다.

    "네. 제 배움이 얕은 탓인지 지금껏 성자 전설에 관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구원 님의 모습을 직접 뵈고 확신했습니다.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었군요. 성자라는 것은. 그렇다면 리리안 플리투스님께서 성자님이셨다는 얘기도…."

    "그래. 맞아. 할머니는 성자의 힘으로 나머지 용사들을 차례차례 굴복시킨 거지."

    "오오. 견문이 넓어진 기분입니다."

    그렇군. 그런 느낌으로 거짓말을 한 건가.

    아무래도 미리엘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성과를 낸 모양이었다. 그냥 리리안 플리투스의 후광을 등에 업고 미리엘 자신이 플리투스를 장악만 해도 훌륭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 리리안 플리투스의 후광을 이용해서 내 위치를 더욱 탄탄하게 해줄 줄이야.

    "아무튼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할까?"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와서는 팔짱을 끼고, 미리엘은 자신들이 있던 막사로 날 안내했다.

    "미안해. 전선을 뒤로 물리기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라서, 조금 너저분할 거야."

    "아니. 그건 딱히 상관없는데…."

    그것보다 이 상황에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해주지 않겠어?

    "어딘가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성자님."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어?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미는 근육 덩어리에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미리엘이 무슨 얘기를 떠벌린 건지 모르는 이상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입맛에 맞지 않아?"

    "그런…우읍!?"

    이, 이 자식. 지금 내 입에 억지로 쑤셔 넣었어! 뭐야 이거!?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야!? 그렇게 협박하는 거 맞지!?

    겉으로는 달달한 표정 지으면서 알콩달콩한 연인 행세 하고 있는 주제에!

    "앗! 미리엘! 치사해!"

    "우으읍!?"

    야! 앨리시아! 너까지 뭐 하는 거야!? 이런 걸로 경쟁하지 마! 어차피 경쟁 안 해도 넌 내 여자잖아!

    그래. 지금 나는, 양옆에 앨리시아와 미리엘을 끼고 그 둘이 주는 대로 요깃거리를 받아먹는 중이었다. 아니. 그 둘뿐만이 아니다.

    "앨리시아는 원래 그렇다지만, 미리엘까지 뭐 하는 거야? 그래서는 성자님의 마음을 빼앗는 건 무리야. 남자의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말하면서 루티아 누님은 내 등 뒤에서 가슴 쪽으로 손을 뻗어 쭈욱 훑어 내려가면서, 자연스럽게 얼굴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서는 그대로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져오더니…내 입에서 튀어나온 과일 끝부분만 살짝 깨물어 먹고는 요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입술이 닿지는 않았지만, 이거 완전히….

    "이렇게 훔치는 거야. 키스하고 싶다는 듯이 내 입술만 빤히 보게 되잖아?"

    "…그런 뜻으로 본 거 아니거든요."

    다른 여자랑 키스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얘들이 우리 관계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부 반응을 보이면 괜히 수상해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격하게 충돌해서, 잠깐 뇌 정지가 왔을 뿐이야.

    그러니까 앨리시아. 그렇게 이글이글 거리는 눈으로 보지 좀 마라.

    "어머. 무서워라."

    처음부터 앨리시아한테 장난치는 게 목적이었는지, 루티아 누님은 앨리시아의 눈길을 받자마자 부드럽게 내게서 떨어졌다.

    왠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게 지내고 있지 않아?

    "새로 즉위한 바프라의 여왕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대단하시군요.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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