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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57화 (1,124/1,205)
  • 1157화

    회심의 등짝 스매시였다.

    "지금 밤 아니야. 이 바보야."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좋아서 잠시 정신이 나갔습니다."

    "흥. 원래 같이 가서 씻겨줄 생각이었는데. 벌이야. 구원은 혼자 정령으로 씻어. 자, 우리는 가서 씻어요."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됐다는 얘기다.

    주변에 레이아나 마틸다 같은 힐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한 얘기지만 사라가 힐링 섹스를 허락해 줄 리도 없어서, 나는 아직도 아침에 입은 등짝 스매시의 데미지를 고스란히 등허리에 간직하고 있었다.

    "하핫. 용사님도 잠을 잘못 자면 불편하신 건 똑같군요."

    "뭐 그렇지."

    옆에서 새침한 표정으로 비서 노릇을 하고 있는 사라를 힐끔 보면서,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침부터 다사다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있을 사건이 이걸로 끝인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 사건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겠지.

    "슬슬 시간인가."

    아침에 있었던 일을 추억하는 건 이쯤 하기로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이미 모두 모여 있습니다."

    "딱히 다 같이 모여서 구경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하핫. 이런 일생일대의 이벤트를 놓치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요."

    내가 툴툴거리면서 걸음을 옮기자, 케이로스 아저씨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문을 열어줬다.

    딱히 아저씨가 직접 열어줄 필요는 없는데 말이야. 성이니만큼 근처에 시중드는 사람들도 잔뜩 있고, 옆에서 비서 노릇을 하던 사라도 있고 말이야.

    자기가 귀족 중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권력에는 크게 관심 없다며 적당한 자리에서 사양하는 것도 그렇고, 참 특이한 아저씨야.

    하긴. 요즘은 다른 은사모 회원들도 그런 사람이 많아지고 있지만.

    "아저씨는 이런 것보다 데이트나 즐기는 걸 더 좋아할 것 같은데. 요즘 즐겁다면서?"

    난 우리 애들이랑 데이트한 게 대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말이야.

    그런 비아냥을 잔뜩 담은 말이었지만, 행복에 절은 케이로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후후. 다 구원 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음흉한 웃음 짓지 마. 이 아저씨야.

    아무튼 요즘 이게 내 고민 중 하나였다.

    아무리 등을 찔리는 연기로 한번 솎아냈다고 해도, 역시 내가 제일 믿을만한 귀족들은 원래부터 은사모 회원이었던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전부 국정에 소홀해질 정도로 애인이랑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거다.

    전쟁신의 세계에 사랑을 전파한다는 성자로서는 좋아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레이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해줘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머리가 아픈 일이었다.

    그나마 어제 창관 개관 후 방문했던 애인 없는 귀족들이 전부 성기사들의 테크닉에 매료됐다는 보고가 있었으니, 크게 문제가 일어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데이트하는 것도 좋지만 일할 때는 너무 긴장 풀지 마. 특히 앞으로 며칠은 나도 자리를 비워야 하니까."

    "네. 조심하겠습니다."

    어차피 사라 님이나 실비아 님이 남아계시는 이상, 허튼 생각을 품는 이는 없을 겁니다.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케이로스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라나 실비아한테만 계속 의지하려고 해서는 곤란해. 걔들도 계속 여기에만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아저씨는 할 땐 하는 아저씨라는 걸 아니까, 믿음은 가지만 말이야.

    "도착했군요."

    아무튼 그런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우리는 이 성에서 제일 높은 망루에 도착했다.

    원래는 병사들이 망을 보는 장소지만, 지금은 얼핏 봐도 병사는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니 하나둘씩 일어나서 인사를 해오는 얼굴에는, 한껏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우리도 보여주기 위해 하는 거지만, 이렇게까지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조금 마음이 불편하군. 뭐, 우리 힘을 다시 한번 제대로 각인시켜줄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레이와 그 옆에 서 있는 실비아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나서, 나는 망루의 끝자락으로 가서 먼 곳을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프라와 플리투스의 국경지대를 향해 시선을 던진 것이었지만, 물론 내 시력으로는 확인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 저쪽 상황이 어떤지 하나도 안 보여.

    지금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그저 이 지평선 없이 쭉 이어지는 풍경은 몇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양군 모두 거리를 벌리고 가만히 대치하고 있네."

    아마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거겠지. 사라가 옆에 다가와서는 자연스럽게 저쪽 상황을 설명해 줬다.

    "그래.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군."

    겉으로는 나도 보이는 척 연기하면서도, 속으로는 꽤나 안도했다.

    이런 건 둘 중 하나만 잘못 마음을 먹어도 일이 완전히 틀어지니까 말이야. 게다가 전쟁신의 세계에서의 최전선인 만큼 혈기 왕성한 누군가가 일을 벌이는 게 아닐까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괜찮은 모양이다.

    "그럼 슬슬 시작할까. 사라 네가 할래?"

    물론 말로만 묻는 척을 했을 뿐, 처음부터 사라가 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애초에 나한테는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사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활을 꺼내더니, 활시위를 당겨서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국경지대를 겨눴다.

    일하는 모습이 멋있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정확하게 목표물을 노리기 위해서 차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사라의 얼굴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그 활에 마나의 화살이 생겨나며 점점 찬란한 빛을 내뿜기 시작하니.

    "오, 오오…."

    뒤에서 숨죽인 채 구경하고 있던 귀족들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게 들렸다.

    훗. 봤냐. 이게 바로 내 여자가. 게다가 이렇게 멋진 척하고 있는 사라지만, 실은 그 몸 안쪽에는 내가 아침부터….

    "구원."

    "으, 응?"

    "집중하고 있으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마."

    새, 생각도 안 돼!? 그냥 네가 내 마음을 안 읽으면 되는 문제잖아!? 라고 생각은 했지만, 중요한 대목이었으니 나도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잡념을 의식해서 없애는 것도 어려운 일이란 말이지. 그게 가능했으면 내가 성인이지. 아니. 뭐, 성자지만. 성자라서 더 잡념을 없애기 더 어려운 거라고.

    "후우."

    그렇게 잡념을 없애기 위해 다른 잡념으로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자니, 갑자기 옆에서 피융하고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빛의 화살은 사라의 손을 떠나 국경지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거대한 빛 덩어리처럼 보여도 실제로 빛은 아니니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건 아니었지만.

    "저걸 쓰레온이 막을 수 있을까?"

    "레벨 많이 올랐다고 했잖아?"

    "아니. 그야 그렇지만."

    그 쓰레온이 저걸 막는 그림이 상상이 안 된단 말이지.

    바프라의 수도에서 용사가 쏘아낸 힘을 플리투스에 있는 용사가 멋들어지게 맞받아치면서 두 세력이 다 용사의 힘 아래에 있음을 증명하고 그대로 전쟁을 멈춘다.

    계획대로라면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데, 쓰레온이 과연?

    "적당히 힘 빼고 쐈으니까 괜찮겠지."

    저게 힘 빼고 쏜 거구나. 아니. 확실히 전에 미리엘을 보낼 때 쐈던 유성우와 비교해 보면 위력이 많이 약하지만.

    "난 그것보다 제대로 맞을지가 걱정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사라는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고 손으로 해를 가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사라야. 그런 자세 하지 마라. 밸런스 감각이 좋으니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만, 너 지금 오피스룩이잖아.

    "구원이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집중을 못 한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남의 생각을 마음대로 안 읽으면 되는 거잖아. 너 지금도 난 한마디도 안 하고 있는데 네가 멋대로 내 생각 읽으면서 대화하고 있는 거 아냐?

    "흥."

    그런 내 생각마저 읽은 건지, 사라는 가볍게 콧방귀를 끼고는 다시 시선을 국경지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윽고.

    "아, 맞았다."

    맞췄다니 뭘? 설마 쓰레온 죽은 거 아니지?

    "바보. 이걸로 겨우 저쪽 전선은 정리되겠네."

    "그러게."

    아차, 난 지금 보이는 척하고 있어야 하지.

    사라의 말투에서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국경지대의 쓰레온을 향해 대충 손을 흔드는 척을 한 다음 몸을 돌렸다.

    "축하합니다."

    "축하받기에는 아직 할 일이 많이 쌓여 있지만 말이야."

    "흐흠. 잠깐 우리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다들 먼저 물러나 주겠어요?"

    케이로스를 필두로 한 귀족들의 축하를 적당히 받아넘기면서 레이에게 다가가자, 레이가 제법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귀족들을 물렸다.

    바프라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일단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얕잡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특히나 조금 전에 말도 안 되는 힘을 보여준 사라가 저기에 딱 버티고 서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어제도 말했지만, 앞으로 며칠 못 보게 될 거야. 나 없어서 쓸쓸하다고 울지 말고 잘 지내고 있을 수 있지? 여왕님."

    "내, 내가 울긴 왜 울어!"

    아니. 전에 울었잖아. 뭐, 그때는 내가 다른 여자랑 하는 걸 감정 공유로 전해 받으면서 여러모로 복잡해졌을 때니, 그때 일을 끄집어와서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지만.

    일단 레이도 그때 일이 떠오르기는 했는지, 괜히 실비아의 반대편으로 슬쩍 몸을 뺐다.

    "……."

    우와…실비아가 지금 잠깐이지만 ‘저도 당신 같은 사람이랑 붙어 있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어.

    아침에는 둘이 사이좋게 내 다리 사이에서 붙어 있었던 주제에.

    "사라도 실비아도. 부탁 좀 할게."

    "…내가 무슨 애야."

    "넵!"

    "여긴 걱정하지 마."

    작게 투덜거리는 레이와 달리, 실비아와 사라는 믿음직스러운 대답을 들려줬다. 셋이 단결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인지 괜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 어젯밤처럼 셋이…끄아악!?"

    "구원은 맨날 한마디가 많아."

    그냥 헤어지기 전에 농담 좀 한 거잖아! 너무 가차 없이 응징하는 거 아니야!?

    "아무튼 그럼 다녀올게."

    "응, 구원이야말로 조심해. 괜히 어디 다치지 말고."

    마지막으로 가기 전에 셋에게 각각 키스를 해주자, 사라가 살짝 새침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해 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얘도 이 오빠 걱정은 엄청 한다니까.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를 만든 것도 잠시.

    "아! 너도! 갑자기 섹스하지 마! 실수로 감정공유 켤지도 모르니까!"

    손을 들고 사라의 말을 이어받는 레이의 발언에, 훈훈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아예 처음부터 감정 공유가 오작동하는 걸 전제로 깔고 말하지 마! 네가 켜려고 일부러 힘쓰지만 않으면 그거 자기 혼자 안 켜지거든!?"

    나는 당연히 그 말에 반박했지만, 말하고 나서 깨달았다. 이건 함정이었다.

    저, 저 녀석…의도치 않게 고도의 함정을 파지 말라고! 누구 사람 잡을 일 있어!?

    사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진 걸 느끼고, 나는 황급히 말을 덧붙여야 했다.

    "물론 거기 가서 섹스를 할 일도 없겠지만!"

    "…정말이지?"

    "아,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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