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51화 (1,118/1,205)
  • 1151화

    레이의 약점 키워드를 말하자, 레이가 아까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그랬군. 이 녀석, 아직도 부끄러워하는 거였어. 요즘에는 조금 나아진 줄 알았는데.

    바프라를 죽인 그 사건 이후로, 당연한 얘기지만 나와 레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특히나 내가 감정 공유를 사용해서 레이를 받쳐준 행동에 크게 감동한 모양이라, 내 무리한 부탁도 튕기는 일도 없이 웬만하면 다 들어주려고 애쓰는 모습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난 레이의 약점인 알콩달콩한 분위기를 시도 때도 없이 만들려고 했고, 레이도 다 받아주면서 조금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정 네 입으로 말하기 싫다면 감정 공유를 쓰겠어."

    "그, 그만둬!"

    뭐, 이런 반응도 재미있고 좋지만 말이야.

    딱히 거길 막는다고 감정 공유가 막아지는 게 아닐 텐데도, 레이는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여왕이라는 지위에 걸맞은 화려한 드레스. 그 너머로 엿보이는 가슴의 모양이 레이의 손에 짓눌려 바뀌는 것이, 묘하게 남심을 자극하는 모습이었다.

    "크헤헤헤. 자, 쓴다."

    "아, 안 돼애!"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가는 나와, 비련의 주인공처럼 외치며 뒤로 물러나는 여왕님 차림의 레이.

    "이미 늦었어. 자, 자아…꾸에엑."

    "적당히 해. 이 바보야."

    하지만 그 사악한 그림은, 용사님의 손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고 말았다.

    쳇. 한창 재미있을 때에.

    "아니. 미안. 레이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 날 가지고 논 거야!?"

    당연히 가지고 논…아니. 장난 좀 친 거지. 이게 그렇게 배신당한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 일이야? 너도 슬슬 이쯤 되면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얘 표정을 보아하니 그렇게 말해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진짜 생긴 건 전혀 안 그렇게 생겼으면서 엄청 순진하다니까.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섹시한 차림의 무뚝뚝한 암살자 누님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아무튼 오늘도 늦었네? 그렇게 바빠?"

    배신당한 표정의 레이의 등을 밀어서 침대로 이동하며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바쁘다기보다는…난 거기에 있기만 하면 되니까."

    말을 이렇게 하고 있고, 아마 레이 자신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일단 내가 하는 일도 전부 왕의 동의를 받아야 진행되는 일이니만큼, 서로 일하면서 얼굴 볼 일이 많거든.

    그리고 내가 본 레이 여왕의 일하는 모습은, 의외로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허수아비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가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레이는 그냥 상징적인 인물로서 왕좌에 앉아 있고, 진짜 일은 대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그런 그림을 예상했는데, 의외로 레이는 왕이 하는 일을 능숙하게 처리해나가는 것 같았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는데, 레이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바프라의 옆에서 나고 자라며 왕이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봤기 때문인 걸까?

    문제가 될 것 같았던 상식 부족 문제도, 따지고 보면 성에 관한 상식만 부족한 거니 왕의 일을 하기에 크게 문제 될 게 없는 모양이고.

    아무튼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 레이였고, 내가 아까 여왕님 여왕님 하면서 장난친 것도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그런 자리에 계속 있는 것만으로도 피곤하잖아? 자, 빨리 와서 쉬어."

    "으, 응…."

    레이의 몸을 이끌고 가서 넓은 침대에 눕혀주자, 레이는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움츠리면서도 입가에는 기쁨의 미소를 띠었다.

    "지극정성이시네요."

    그러니까 질투하지 말래도. 아니. 진짜 당하고 싶어서 저러는 것일 수도 있어. 사라는 레이한테 동질감을 느끼는 건지, 묘하게 잘 대해주니까.

    그렇다면….

    "시끄러워. 비서. 주인님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지 마."

    "누, 누가 주인님이고 누가 비서야!"

    아, 이제 와서 그걸 부정하기야? 아까 낮에는 전혀 부정 안 한 주제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서. 지금 네 차림을 보고 다시 얘기해 볼래?"

    "…으, 으읏!"

    그래. 사라는 지금 오피스룩을 입고 있었다.

    아니. 아까 낮에 오피스룩 입히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잖아? 이 구원. 생각한 건 바로 실행에 옮기는 남자라서 말이지. 크크큭.

    "반항적인 비서로군. 아무래도 안 되겠어. 실비아."

    "느헤…핫! 네, 넵!"

    아직도 실비아테라피의 여운에 젖어서 침대에 축 늘어져 있던 실비아는, 내 부름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자기를 부른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실비아야. 상상력을 발휘해 보렴. 내가 이 상황에서 우리 기사님을 부를 이유라고는 하나밖에 없지 않니?

    "제압해."

    내가 손가락으로 사라를 가리키자, 사라와 실비아 둘 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다.

    "사, 사라 님을…말입니까아…?"

    "아니. 반항적인 비서를."

    "진짜 바보 아니야? 자, 잠깐만요! 실비아!?"

    사라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 치며 말했지만, 그 반응을 얼마 가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우리 기사님이 진짜로 사라의 뒤로 돌아 들어가서는 그 팔을 꺾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프지 않게 어느 정도 힘은 빼고 있겠지만, 이 상황 자체가 사라는 당황스러운 거겠지.

    "저, 정말로…꺄악!"

    진심으로 반항하면 둘 다 크게 다칠 거라는 생각 때문인 걸까? 사라는 반항다운 반항도 못 해보고 실비아에게 눌려서 두 팔을 뒤로 꺾인 채 엎드린 자세로 제압되고 말았다.

    만약 사라가 진심으로 반항했으면…아니. 그래도 실비아가 이기려나? 일단 궁사인 사라에 비해 실비아는 근접 전투에 특화되어 있고, 사람 상대하는 법도 더 잘 아니까.

    물론 사라한테는 용사라는 희대의 사기 직업이 있으니까 진짜로 붙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나. 어차피 내 여자들끼리 진짜로 싸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했어. 실비아. 이제 좀 얌전하군."

    "햐으…."

    "으흣…!"

    나는 실비아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주고, 그 손을 그대로 내려 엎드린 채 제압된 사라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줬다.

    "그럼 레이. 반항적인 비서는 내버려 두고 우리끼리 먼저 시작할까."

    "어!? 나, 나!?"

    얘가 정신 놓고 구경하고 있었나 보네. 당연히 너지. 아까 사라가 참견하기 전에 우리가 어떤 분위기였는지 잊었어?

    "그나저나…."

    레이의 몸을 침대 위에 눕히고, 나는 다시 분위기를 잡으려고 노력했다.

    "으응…?"

    하지만 레이는 여전히 저쪽이 신경 쓰이는지, 내 말에 어색하게 반응하면서 계속 눈동자를 힐끔힐끔 옆으로 움직였다.

    역시 눈동자에 사도 인장을 받은 사람답군. 즉흥적으로 정한 위치였지만, 볼 때마다 잘 정한 것 같아.

    "그렇게 신경 쓰여?"

    "그치만…."

    뭐, 사라가 저렇게 이글이글 거리는 눈으로 보고 있으면, 레이가 아니더라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지만.

    "비서. 눈 감아."

    "……."

    일단 명령조로 말해 봤지만, 사라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다.

    …사라야. 지금 그런 컨셉으로 연기하는 거지? 진심으로 욱한 거 아니지? 나랑 이런 플레이 자주 하잖아. 실비아도 딱히 아프게 제압하고 있는 게 아닐 테고.

    사라 얘는 이런 플레이를 할 때 너무 메소드 연기를 펼치니, 가끔 보면 진심인지 연기인지 나조차도 구분을 못 하겠어.

    "이런 꼴이 되어서도 여전히 반항적이군."

    살짝 불안했지만, 나는 사라가 반항적인 비서를 연기 중이라고 믿기로 했다.

    그 턱을 잡고 살짝 들어 올려서 잠시 눈싸움을 한 다음, 나는 실비아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네가 그 눈을 거두지 않겠다면…."

    "으햐앗!?"

    아니. 실비아야. 분위기 깨지게 왜 그러니.

    딱히 너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두 눈을 꼬옥 감고 바들바들 떨면서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 같은 표정을 지을 필요 없어. 난 그저 그 목에 걸려 있는 넥타이가 필요할 뿐이거든.

    말하는 걸 잊었지만, 실비아는 지금 평소에 입던 갑옷이 아니라 정장을 입고 있었다.

    실비아는 레이의 곁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레이가 가는 곳마다 그런 완전 무장 차림으로 따라다니면 새로 즉위한 여왕의 이미지가 너무 살풍경해진다는 의견이 있어서 말이야.

    "아으아아…헤?"

    아무튼 그런 이유로 그 목에는 넥타이도 매어져 있었다.

    내가 그 넥타이를 풀어서 손에 쥐자, 실비아가 입을 헤벌리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건 예상 못 했던 모양이다.

    아니. 저 표정은 예상 못 한 걸 넘어서서, 기대가 배신당한 표정 아니야?

    실비아야. 넌 대체 뭘 기대한 거니? 내가 진짜로 뭔가 하려고 하면 바로 모든 걸 내려놓고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하면서.

    그런 생각이 살짝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표정을 보고 아무것도 안 해주면 남자가 아니지.

    "잠깐 이것 좀 빌릴게."

    "그으읍?! 네헤에…."

    가볍게 입술만 맞춘 것뿐인데 이런 녹아내린 표정이라니. 우리 실비아는 여전히 너무 약하다니까.

    "고마워."

    다시 가볍게. 이번에는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몇 차례 쪽쪽 버드 키스를 반복해주자, 실비아의 몸에서 흐물흐물 힘이 풀렸다.

    그러면서 사라를 제압하고 있는 그 손도 느슨해졌지만, 사라는 딱히 벗어날 생각도 없다는 듯이 팔이 뒤로 꺾인 채 엎드린 자세를 유지해 줬다.

    다행이다. 역시 그런 플레이를 연기 중이었구나. 사라야. 요즘 연기력이 너무 많이 늘어서 오빠가 살짝 헷갈렸잖아.

    "칫."

    그래도 자기 위에서 나랑 실비아가 꽁냥거리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까보다 눈이 더 살벌해지기는 했지만.

    "이쪽의 호위병은 이렇게 순종적인데, 비서라는 여자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