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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48화 (1,115/1,205)
  • 1148화

    아무튼 무사히 물건을 뽑아내자, 디아나는 엉덩이를 바들바들 떨면서 뜨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음부에서는 울컥울컥 애액이 쏟아지는 모습이 마치.

    "느꼈어?"

    "…빨리 아래로 가기나 하게. 곧 마법이 풀릴 걸세."

    안 느꼈다고는 안 하는구나. 하여간 우리 대마법사님도 진짜 변태라니까. 지금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내는 건, 나중에 꼭 제대로 보상해 줄게.

    살짝 말려 올라간 디아나의 치마와 로브를 제대로 정돈하고 나서 그 귀여운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준 다음, 나는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알현실 내부로 들어갔다.

    "보았느냐! 용사가 뭐가 대수라는 거냐!"

    "아니. 대수 맞는데."

    "여기는 내 나라다! 내 왕국이다! 아무도 날 무시할 수 없어! 내게 거스른 자는 죽고, 내게 충성을 맹세한 자는 살아남는다! 이 바프라는 그런 곳이다! 내가 곧 법이고! 내가 곧…!"

    와. 얘 그동안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보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박박 긁기는 했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죽은 놈이 부활했는데 쳐다도 안 보는 건 너무하지 않냐?

    "야."

    "크헉!"

    빠각! 하는 호쾌한 소리가 들릴 정도로 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자, 놈은 몸을 한차례 휘청이더니 이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뒤를 돌아봤다.

    물론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아 버렸지만.

    "안녕."

    "마, 마, 말…네, 네놈, 네놈은…."

    살랑살랑 가볍게 손가락만 흔들며 인사하자, 놈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건지 고개를 세차게 저어댔다.

    그런다고 해서 멀쩡히 눈앞에 있는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닌데 말이지.

    "그러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었어야지. 내가 말했잖아. 이건 너무 허무하지 않냐고. 너 진짜로 용사님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알았어? 에이.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는 예상했지."

    "예…상?"

    "그래. 어차피 그거 찔린다고 안 죽으니까 찔려줬는데, 너 너무 좋아하더라."

    그렇게 말하면서 상처 하나 없는 배 부분을 힐끔 보여주자, 바프라의 동공이 세차게 떨렸다. 계속해서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동정심을 자극…은 안 하네. 내가 이상한 건가? 이놈은 조금 더 당해도 싸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물론 좋아하는 놈이 너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한번 웃어주자, 아까 바프라와 함께 좋아하던 놈들의 안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서, 설마. 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그런 내 행동으로 뭔가를 깨달았는지, 바프라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그래도 꼴에 대가리 돌아가는 속도가 제일 빠르기는 하네.

    "언제부터라고 해도 말이지."

    "서, 설마 그때 칼에 베인 것도…!"

    "아, 그건 내 애드립이었어. 좋았지? 갑자기 생각나서 즉석에서 실행해 봤는데, 설마 이렇게 덥석 물 줄 이야."

    뭐, 그게 아니더라도 결국 이 자식이 내 뒤통수를 치도록 철저하게 계획해뒀지만.

    시작은, 그래. 이 자식이 레이를 방패 삼아 목숨을 구하고, 은사모에게 역제안을 한 날이었다. 그날 나는 케이로스의 저택에서 라파엘과 다른 은사모 회원들을 설득하고 돌아와서, 그걸로 만족하고 있었다. ‘역시 나야. 말발 하나는 타고났어.’ 라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면서.

    하지만 그사이에 다녀갔다는 디아나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반지 너머로 들은 바프라의 얘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은사모에 바프라의 공작원이 있을 것 같다는 거다. 은사모는 최근 급속도로 세력을 불리고 있었으니, 다른 생각을 가진 놈이 몰래 가입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즉, 내가 그날 케이로스의 저택에서 한 행동은, 생각보다 효력이 없을 거라는 얘기가 된다.

    그 얘기를 들은 나는 직접 구미호 마을로 건너가서 디아나와 제대로 대화를 나눴고, 결국 디아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케이로스의 저택에서 은사모 회원들이 내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던 건, 그냥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라파엘이 내 말을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니 자기 의견을 낼 수 없었던 거다.

    실제로 그날 내 말에 설득당한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 증거로, 내가 저택을 나간 후 조용히 케이로스의 저택에 모여든 이들이 있었다고 하니까 말이야.

    그것도 처음부터 바프라의 명을 듣고 은사모에 잠입한 무리뿐만이 아니었다. 나보다는 바프라에 붙는 게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케이로스와 힘을 합쳐 꿍꿍이를 꾸미려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그래서, 플리투스에 합병하면서도 바프라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해 주겠다는 내 고마운 제안을 이 자식이 이런 식으로 거절해 버렸는데, 이게 여기 있는 모두의 의견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물론 아닙니다. 지금 일어난 일은 루이스 바프라를 비롯한 일부 반란 분자들의 소행입니다."

    "케, 케이로스 네 이놈!"

    케이로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편이었지만.

    일단 바프라도 케이로스가 핵심이라는 걸 알고 회유해 보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놈은 케이로스의 성격을 잘못 파악했다.

    자기 입으로 "네놈은 그저 가늘고 길게 살뿐이면 그만인 소인배다." 같은 말을 한 주제에, 케이로스를 최고 권력자로 앉히려고 하다니. 케이로스가 그런 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저 아저씨는 진짜로 자기 애인이랑 오붓하게 살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아저씨라고.

    게다가 은사모를 그냥 섹스에 미친 모임으로 잘못 생각하고, 여자를 물건처럼 다루며 "네놈에게도 포상을 주지."라니.

    바꿔말하면 케이로스가 사랑하는 여자도 자기 마음에 들면 넘기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잖아? 완전히 역린을 건드린 꼴이잖아.

    대체 은사모에 공작원까지 침투시킨 주제에 어떻게 은사모가 뭐 하는 곳인지도 제대로 모를 수가 있지?

    아니. 분명 공작원은 제대로 얘기했겠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분명 "사랑? 훗. 웃기는군. 놈들의 목적은 섹스다. 그것 이외에 여자와 함께 있을 이유가 없지." 같은 말을 했을 게 틀림없어.

    아무튼 그런 이유로 케이로스는 더더욱 바프라에 대한 정이 떨어져서, 내 충실한 심복이 되어 계획을 조율해 줬다는 얘기다. 겉으로는 바프라의 회유에 넘어간 척을 하면서 말이지.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이렇게 은사모의 뜻과 끝까지 함께할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됐고, 동시에.

    "흠. 뭐, 좋아. 이래 봬도 난 자비로운 사람이니까. 일부의 실수로 전체를 처벌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직접 암살을 시도한 놈들까지 용서해 줄 생각은 없지만."

    드디어 이 쓰레기를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처분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이제 놈이 이교도니 뭐니 하는 이상한 변명 생각할 필요 없이, 그냥 죽여 버려도 되겠어.

    아, 이교도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 사이에 안 밝혀줘서 고맙다.

    실은 이 며칠 동안 이 녀석의 속을 박박 긁으면서, 유일하게 걱정한 게 그거였거든. 혹시 지나친 스트레스에 이 녀석도 눈이 돌아가서, 여신을 따르는 몸이 됐다는 걸 밝히고 자폭하면 어쩌지 하고 말이야.

    하지만 놈은 끝끝내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틈을 봐서 내 뒤를 찌르면 된다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자기 피해가 더 크다는 생각을 한 거겠지.

    그렇게 자폭하면 바프라 자신은 확실히 죽게 되고, 내게 끼칠 수 있는 피해는 기껏해야 섹스할 때 좋은 여자 하나라는 생각에 말이야.

    하여간 이 녀석이 헛똑똑이야. 알고 보면 생각이 틀에 박힌 자기 기준, 그것도 섹스에서 못 벗어나는 불쌍한 중생이라니까.

    "오, 오지 마! 네놈들! 막아라! 뭐하는 거냐! 내가 죽으면…내가 죽고도 네놈들의 지위가 그대로 유지될 거라 생각하는 거냐!? 다 플리투스의 수작이다! 계략이다!"

    "미안하지만 우리 플리투스는 너처럼 그런 짓 안 해. 정정당당이 신조거든."

    "웃기지 마라! 네놈! 네놈도 그렇다! 이대로 날 죽인다고 해서, 바프라를 쉽게 장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네놈이 회유한 건 기껏해야 수도에 있는 귀족이 전부다! 다른 곳에 있는, 전쟁 지역에 가 있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곧 군대를 몰고 밀려올 거다! 바프라는 바프라 없이 유지될 수…!"

    "거 참 말 많네. 걱정하지 마. 제대로 후계자도 남겨놨으면서 뭐가 그렇게 걱정이 심해?"

    마지막임을 직감한 듯 악을 지르는 바프라를 딱한 눈으로 바라보며 뒤쪽으로 손짓하자, 케이로스의 뒤에 직립 부동자세로 서 있던 사병 하나가 투구를 벗으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면서.

    "다, 다크 엘프…! 그것도 순혈의…!"

    투구를 벗고 레이가 얼굴을 드러내자, 알현실 내부가 크게 술렁였다.

    같은 은사모 내에서도 레이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은 손에 꼽았던 만큼, 충격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거겠지.

    실은 이런 걸 염두에 두고 레이의 존재를 숨겼던 게 아니라, 그냥 레이의 존재가 공공연해지면 바프라가 사람을 보내서 귀찮게 할까 봐 숨겼던 건데.

    이유야 어찌 됐든 그 덕분에 이렇게 주목받게 된 거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레이의 허리를 옆구리에 꽉 끌어안아서 지지해주며,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 레이. 당당하게 있어. 이제 네게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으니까.

    "소개하지. 넌 이미 알지? 자기 딸이니까. 레이 바프라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뜬금없이 등장한 바프라의 후계자였겠지만, 그럼에도 레이가 바프라의 딸이라는 걸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까 누군가 외쳤듯, 다크 엘프라는 종족은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이 너무도 뚜렷하니까.

    쓰레기 놈. 다른 종족을 깔보는 그 순혈주의가 제 발목을 잡았군.

    "보다시피 바프라의 후계자는 제대로 있다. 앞으로는 레이 바프라가 바프라의 새로운 군주가 될 거다. 아, 수도 밖에 있어서 상황을 모르는 귀족들은 갑작스러운 왕위 계승에 반발할 거라든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넌 병사라든가 다른 이유를 들어서 죽은 걸로 해줄 테니까. 뭐, 실제로도 죽을 거지만."

    그렇게 살인 예고까지 곁들이면서 잔뜩 놈을 몰아세웠지만, 그 말을 들은 바프라의 반응은 내 예상과 조금 달랐다.

    "크큭…."

    놈은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띠고는, 내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레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포식자의 눈으로.

    "크하하하! 용사 놈! 마지막에 방심했군!"

    그런가. 그 카드를 꺼낸 생각인가.

    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차피 상황은 이 이상 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해졌으니, 놈은 자신의 최후를 화려한 자폭으로 마무리 지을 생각인 거다.

    하지만 말이야. 그 카드를 쓸 생각이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썼어야지. 시간도 듬뿍 줬잖아? 며칠 동안 신경을 박박 긁으면서.

    "나는…크아악!"

    바프라는 곧장 그 말을 외치려고 했지만, 그전에 놈의 얼굴은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진한 키스를 하게 됐다.

    레이와 마찬가지로 케이로스의 뒤에서 튀어나온, 사라와 실비아에 의해서.

    나조차 놈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눈치챘는데, 눈치 빠른 우리 애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잖아?

    "끈질겨. 변질자."

    바프라의 뒤통수를 자근자근 밟으면서, 사라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묘하게 자신의 멋진 각선미를 자랑하는 것 같은 자세로 뒤통수를 지르밟으며 그런 말투로 말하니, 왠지 여왕님 같은 분위기까지 풍기는 사라였다.

    물론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말이야. 진짜 남들 앞에서는 이렇게 쿨한 여자가 없다니까.

    그보다 사라야. 지금 변질자라고 했는데, 굳이 변태라는 단어를 피한 건 혹시 변태는 날 부르는 애칭으로만 남겨두고 싶어서 그런 거니?

    아니. 싫다는 건 아닌데 말이야.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실비아. 실비아는 괜찮아요."

    아무튼 그렇게 바프라를 발 하나로 제압하고 나서, 사라는 마찬가지로 바프라를 제압하고 있는 실비아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실비아는 제대로 바프라의 팔을 뒤로 꺾어서 그 몸을 억누르며 제압하고 있었다.

    "네? 하지만…."

    "괜찮아요. 이런 능력도 없는 변질자한테 둘이나 붙을 필요 없잖아요?"

    실비아는 떨어지길 주저하는 모습이었지만, 사라는 쿨하게 바프라를 비하하며 말했다.

    그런가. 튀어나온 모습만 봐도 엄청난 실력자인 사라와 실비아가 둘이나 붙어서 제압하고 있으면, 괜히 바프라만 더 대단해 보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사라는 그걸 경계하는 모양이다.

    "아, 알겠습니다."

    실비아도 사라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조심스럽게 바프라에게서 떨어지고는 제압하고 있던 팔을 풀었다.

    물론 그 즉시 바프라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크아아악! 커헉! 캑! 끄르르…."

    자신의 다리로 뻗어오는 손을 재빠르게 굽으로 찍어 누르고, 그 사이에 몸을 일으킨 바프라의 안면을 걷어찬 다음, 다시 다리를 아래로 휘둘러서 바프라를 자빠뜨리고, 이번에는 목을 지르밟는 것으로, 사라는 완벽하게 바프라를 제압했다.

    설명은 길었지만 이 모든 동작이 1초도 되지 않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심지어 손을 찍고 안면을 차고 다리를 걸고 목을 누른 것까지, 사라는 그 모든 동작을 오른발만 사용해서 완수했다.

    이상하다. 맨몸 격투는 내 전공일 텐데, 왜 사라가 더 강해 보이는 걸까?

    바프라의 목을 지르밟고 있는 오른발이 너무도 찬란하게 보였다. 아니. 착각이 아니라 실제로 빛나고 있었다.

    사라야. 혹시 발에 마나까지 담아서 걷어찬 거니? 그러니까 바프라의 한쪽 손이 박살 나고 두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뒤틀려 있구나. 덤으로 이빨도 산산조각이 나서, 그나마 종족빨을 받아서 봐줄 만했던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이 며칠 동안 시원하게 긁어대면서 그동안 이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기분이 다 풀렸었거든.

    그래서 이제 마무리를 지어도 딱히 시원하거나 그런 감정은 없을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보니 전혀 아니네. 쟤가 한 대 맞을 때마다 엄청 시원해. 내 평생 이 정도 타격감은 느껴본 적이 없어.

    "끄으으…끄으…!"

    아무튼 보는 내가 다 타격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직접 얻어맞은 바프라는 사라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지 않아도 뼈저리게 알게 됐겠지.

    놈은 말도 안 된다는 눈으로 나와 사라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 아직 멀쩡하게 남아 있는 한 손으로 반항할 생각조차 못 했다.

    직접 용사의 힘으로 맞아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기지?

    그러니까 전에 사라가 폭격을 퍼부었을 때 눈치채고 알아서 사렸어야지. 그때 위협만 받고 안 맞았다고 해서 반항할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해? 진짜 아무리 간이 커도 그렇지, 어떻게 용사를 죽일 생각을 하냐?

    물론 난 진짜 용사가 아니니, 그만큼의 힘이 안 느껴졌겠지만.

    아무튼 사라의 손…아니. 발에 의해서 바프라는 완벽히 제압됐다.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레이가 태어날 때부터 여신의 교리를 따르는 몸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릴 염려도 없다. 이 세계에는 그런 텔레파시 기술이 없다는 모양이니까.

    무협지에 나오는 전음 같은 기술은 있다는 모양이지만, 그것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야 가능한 기술이다. 저렇게 목을 밟힌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지.

    술법으로만 따지면 이 세계의 일인자라고 할 수 있는 요리스가 직접 한 말이고, 이 며칠 이쪽에 머무르며 요리스의 도움을 받아서 이쪽 세계의 마법 방식에 더욱 통달하게 된 디아나가 보증까지 해준 말이니 틀림없다.

    실제로 이 며칠 환각 마법으로 바프라를 감시하면서, 이 녀석이 전음을 쓰는 모습을 디아나가 몇 차례 감지하기도 했고.

    때문에 바프라가 허튼 말을 할 걱정은 이제 할 필요가 없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이 갖춰진 상황에서, 나는 느긋하게 아까 하던 말을 이어서 하기로 했다.

    "그러니 다른 귀족들의 반발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모든 것이 지금과 같을 텐데 뭐가 문제겠어? 플리투스에 합병되고 나서도…아니. 합병이라는 표현은 강압적으로 들려서 좋지 않군."

    일부러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곁에 있던 레이의 턱을 살짝 붙잡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여전히 떨리는 몸. 위축된 어깨. 글썽이는 눈동자. 바프라는 저 꼴이 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레이는 바프라의 앞에 서 있는 게 두려운 모습이었다.

    아까 놈이 레이를 향해 던진 그 야수 같은 시선 때문인가. 그 시선이 레이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건지도 모른다. 아마 레이가 바프라의 진실을 깨달은 그날도 같은 시선과 마주쳤을 테니까.

    하지만 레이. 이제 괜찮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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