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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46화 (1,113/1,205)
  • 1146화

    그렇게 말할 정도로, 놈이 책상 아래에서 꺼낸 여자는 꽤나 예쁘장했다.

    물론 우리 애들은 물론 구미호 마을에 있는 아무나 가져다 놔도 비교하는 게 실례일 수준이었지만, 여자가 레벨을 올릴 기회도 좀처럼 없는 이 세계에서는 저 정도 외모만 돼도 최상위권이라고 봐야겠지.

    "이, 있는 힘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케이로스도 같았는지, 지금까지 차분함을 유지하던 케이로스가 처음으로 고양된 표정을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 너 같은 놈도 움직이게 할 정도라니. 역시 섹스가 대단하긴 하군."

    그리고 그런 케이로스에게 코웃음 치면서, 바프라는 다시 손을 휘휘 내저어 케이로스를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는 여자를 책상 위에 엎드리게 하고는….

    "야. 섹스 중독."

    본격적으로 행위를 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모습을 드러냈다.

    "흥. 용사라는 놈이 여전히 쥐새끼처럼 살금살금 나타나는군. 흡!"

    "흐읏!?"

    물론 놈은 그런 내게 아랑곳하지 않고 행위를 계속했지만 말이다. 저 새끼는 진짜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조진다.

    "뭐지? 그 표정은? 또 비밀 엄수를 바라나?"

    그래도 눈치가 있는 놈이라 내 표정이 썩어가는 걸 느끼기는 했는지, 놈은 또다시 여자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케이로스한테 줄 포상 아니었나?"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멈추기는 싫군. 네년. 이 일을 떠벌릴 건가?"

    "아, 아니요! 모릅니다! 전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그렇다는군."

    쓰레기 새끼.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지만, 아무래도 놈의 섹스를 멈출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꽤나 성대하게 해주셨더군."

    "훗. 뒤늦게 듣고 숨어들어온 건가. 그래서, 감사 인사라도 하러 왔나?"

    "감사 인사라고?"

    "눈엣가시인 라파엘을 처리해주고 네놈이 제일 신임하는 케이로스를 제일 중요한 위치로 끌어올려 준 거다. 감사 인사 이외에 네놈이 할 말이 뭐가 있다는 거지?"

    놈의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놈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이런 교활한 놈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지.

    전부 놈의 계획하에 이뤄진 일이라는 얘기다.

    은사모의 최고 권력자 라파엘을 죽임으로써 "우리 은사모의 세력이 이렇게나 커진 만큼, 놈도 함부로 우리에게 손을 댈 수 없을 거다."라는 어제의 내 말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동시에 내가 이곳에서 제일 신용하는 케이로스에게 권력 양도를 꾀하는 것으로 회유까지 해버린 거다.

    놈이 오늘 일으킨 일 전부가, 은사모에서 내 영향력을 지우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런가. 은사모와 손잡고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게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 사이에 있는 내 존재는 방해라는 건가.

    아마 ‘이제 섹스 외에는 흥미가 없다.’ 라고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닐 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계속 권력을 쥐고 있을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같은 섹스 라이프를 즐기기는 힘들 테니까.

    "처음부터 우리 플리투스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었다는 건가."

    "훗. 내가 왜 네놈 따위의 밑에 들어가야 하지?"

    어제 손을 내밀었던 건, 어디까지나 내 손발을 자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바프라는 오만한 미소와 함께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 녀석, 어제랑 똑같은 실수를 하고 있지 않아?

    "그럼 나도 더는 네놈을 살려둘 필요가 없군."

    내가 이 녀석을 어제 죽이지 않고 살려둔 이유로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모든 이유를 요약하자면 간단히 말해 이거였다.

    놈을 죽인 후, 나와 협력 관계인 바프라 사람들에게 할 그럴듯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지금도 죽인 후 그럴듯한 변명이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미 은사모와의 관계에 균열이 갔다면, 왜 굳이 변명이 필요하지? 어차피 이 녀석을 살리든 죽이든 내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건 변함이 없잖아?

    "설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정도로 멍청한 놈이었다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녀석에게 뭔가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왠지 모를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훗. 이 내가 네놈이 그렇게 나올 것도 생각 못 했을 것 같나?"

    하지만 아무래도 놈은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놈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알현실 곳곳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거다. 모두 같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 그래. 바프라의 직속 부대원들이 알현실 곳곳에 총집결해 있었다.

    "…일단 묻겠는데. 이런 오합지졸들로 용사인 날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흥. 이 녀석들만으로는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바프라는 자신도 검을 들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이런 놈들이라도 이 정도의 수가 모이면 틈 하나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지."

    한 발 한 발, 마치 건들거리는 것처럼 왕좌에서 내려오는 바프라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대체 제까짓 게 뭐라고, 틈만 있으면 날 끝장낼 수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쟤 진짜로 사라네 할머니랑 같이 통일 전쟁을 겪어본 놈 맞아? 용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거 아니야? 아니면 내가 용사치고 너무 약해 보여서 만만하게 본 건가?

    아무래도 한 번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말이 안 통할 것 같군.

    나는 맵을 열어서 바프라와 나,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디에른 가문의 위치가 일직선 상에 놓이는 것을 확인한 후, 인벤토리에서 신호탄을 하나 꺼내 작동시켰다.

    알아듣기 쉽게 신호탄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물건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신호탄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세트가 되는 고글을 착용해야만 볼 수 있는 마나의 파장을 쏘아내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신호탄에서 쏘아낸 그 마나의 파장은 공기 이외의 물질과 부딪히면 반사되는 성질이 있어서, 이렇게 실내에서 쓰더라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내 위치는 물론 건물 내부 구조나 사람들의 위치까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게다가 고글을 통해 보이는 색을 설정할 수 있어서 사전에 말만 맞춰두면 대략적인 의사 전달도 할 수 있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 대마법사님 만만세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물건을 손에 쥐고, 나는 노란색 파장. 위협사격을 요청하는 파장의 색을 쏘아 보냈다. 디에른 가문에서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사라를 향해서.

    신호는 금방 왔다. 사라가 국경 지대를 향해 화살을 쏠 때 구구절절 감상을 늘어놨던 기억이 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거리가 워낙 멀었기 때문에 그런 감상을 늘어놓을 시간이 있었던 거다.

    고작 디에른 가문과 이곳 성 정도의 거리라면, 사라의 화살은.

    콰르릉! 콰콰과과광!

    마치 번개가 내려꽂힌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성이 무너지고 알현실 내부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그 와중에 사망자가 나오지 않게 한 건 대단하지만, 사라야. 오빠는 가끔 네가 무섭다.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이러는 거니?

    뭐, 지금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닌가.

    "저, 정말…정말로 용사였다고…?"

    이 자식, 어쩐지 뺀질뺀질하더라니. 안 믿었던 거냐.

    하긴 어쩐지 이상하더라고. 나이를 생각해 보면 분명 통일 전쟁을 겪으면서 용사의 강력함을 몸소 체험했을 나이인데, 내가 용사라는 걸 알고도 만만하게 보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아무래도 내가 뭘 잘 못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다시 한번 듣고 싶은데. 이 용사님한테 뭐? 틈이 어쨌다고?"

    진짜 용사의 힘이 담긴 폭격을 맞고 얼이 빠진 표정을 짓는 바프라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나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다, 당황할 것 없다! 아무리 용사라도 이런 큰 기술을 반복해서…!"

    그래도 꼴에 한 세력의 군주라고, 놈은 바로 정신을 다잡고 냉정하게 직속 부대를 지휘하려 했다.

    물론 시도만 했다는 거지, 진짜로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겨우 이정도 위협사격이 큰 기술?"

    전쟁터에 안 간 지 오래돼서 위협사격이 뭔지도 까먹었나? 고작 위협사격에 전력을 다하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어? 이 정도 기술, 우리 사라한테는.

    콰앙! 콰쾅!

    다시 한번 신호탄을 발동시키자, 이번에는 무너진 천장 사이로 직접 빛의 창이 바닥으로 꽂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바프라가 주저앉아 있는 계단 주위를 폭격했다.

    역시 우리 사라는 뭐든 금방금방 배우고 잘한다니까. 연출에도 소질이 있다니.

    "야."

    "크윽!"

    얼이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바프라의 뺨을, 나는 거칠게 몇 대 두드렸다. 그러자 바프라는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그런다고 봐줄 내가 아니었다.

    "얘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야. 야!"

    툭툭. 일부러 기분 나쁘라고 뺨과 머리를 툭툭 치고 건드리는 내게, 바프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 용사님이 부르시면 재깍재깍 대답 좀 해 새끼야. 쫄았냐? 쫄아서 말도 안 나와?"

    너무 양아치 같다고? 일부러 기분 나쁘라고 이러는 거야. 이 쓰레기는 이런 꼴을 당해도 싸.

    그리고 이 녀석의 직속 부대원들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주위에 보는 눈도 많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이 녀석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짓밟는 것도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죽여라."

    그래도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태연한 척하네. 하지만.

    "죽여? 내가 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일 거였으면 굳이 사라한테 위협사격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겠지.

    아니. 아예 신호 자체를 보낼 필요도 없었어. 그냥 성자 스킬만 써도 여기에 있는 놈들 싹 다 제압할 수 있으니까.

    "잘 들어 새끼야. 너도 눈치가 좀 있으면 알겠지만, 이 용사님이 말이야. 네까짓 거 제압을 못 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너무 착해서. 웬만하면 세력의 힘을 온존한 채로 꿀꺽. 아니지. 웬만하면 좋게좋게 해결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내가 설마 너희도 상대를 못 할까 봐? 이 수도에 있는 인간들이 전원 떼로 덤벼도 나 하나 못 이겨. 무슨 말인지 알겠지?"

    거짓말은 아니다. 진짜로 전쟁신의 부활만 없었으면 성역 선포만 쓰고 돌아다녀도 수도를 전멸시키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용사님이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게. 응?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말고 좋게좋게 해결하자. 나는 세력 하나 꿀꺽할 수 있어서 좋고, 너는 마음껏 섹스할 수 있어서 좋고. 나쁠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 내 말 틀려?"

    "…무슨 생각이지?"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그냥 고개를 끄덕일 놈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귀찮아 죽겠네.

    "야. 계략이라는 건 말이야. 권모술수라는 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바프라의 머리를 콕콕 찔렀다.

    "너같이 힘없는 놈한테나 필요한 거야. 넌 잘 모르겠지만, 나만큼 힘이 있으면 그런 게 필요가 없어요. 내가 왜? 그냥 다 힘으로 해결되는데?"

    놈의 얼굴이 다시 한번 굴욕으로 물들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더 정색하고 화를 냈다.

    "알았으면 네놈과 똑같이 생각하면서 날 모욕할 생각하지 마라. 쓰레기. 쓸데없이 대가리 굴릴 생각도 하지 말고. 넌 그냥. 아야! 아으 뭐가 이렇게 날카로워. 하긴 너 하는 거 보니까 칼이라도 이렇게 잘 안 갈면 뭐 하나 제대로 베지도 못하겠더라."

    놈의 칼을 주워들려다가 날에 살짝 베여서 피를 보고도, 나는 비꼬기를 멈추지 않았다.

    "너 따위는 진짜 우리 플리투스에 오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말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는 손에든 날카로운 검을 그대로 바프라의 손에 다시 쥐여줬다. 찌를 수 있으면 찔러보라고 말하는 듯이.

    "그러니까 적당히 높은 자리에 앉혀준다고 할 때 말 듣자. 알았지? 뒤처리는 알아서 하고."

    톡톡. 놈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려준 다음,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으드득하고 놈의 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뭐 상관없겠지. 날 잡으라는 명령은커녕 손에 쥔 검을 휘두를 생각조차 못 하는 걸 보면 말이야.

    고작 용사의 힘을 좀 보여줬다고 그 오만한 놈이 저렇게 되다니. 역시 우리 사라라니까. 빨리 가서 있는 힘껏 껴안아 줘야지. 아니. 그전에 저 더러운 놈을 만진 손부터 박박 씻어야 하나.

    성에서의 사건이 있은 후, 며칠. 그사이에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우선 바프라는 사라의 폭격을 "폐관 수련 후 강해진 힘을 시험해 보다가 힘 조절에 실패했다."면서 자신의 힘인 것처럼 둘러댔지만, 이미 은사모에 가입한 수도의 귀족이 7할이 넘는 상황에서 그 말을 진짜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성이 이렇게 폭격당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바프라를 향한 불신감만 커져갔다.

    물론 바프라의 계획도 점점 자신이 힘을 잃고 귀족들이 득세하게 되는 것이었으니, 바프라도 내심 흡족해…할 리가 없었다.

    "네놈…죽고 싶은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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