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45화 (1,112/1,205)
  • 1145화

    부드러운 키스 후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자, 레이의 표정이 꿈에서 깬 사람처럼 변했다.

    동시에 가슴에 뭔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은 것 같은 느낌이 감정 공유를 통해 느껴졌다.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바프라의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되는 건가.

    하긴. 오늘 만나서 직접 대화해 본 바프라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교활하고 쓰레기였으니까.

    다시 생각하니 또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 이 감정에 휩싸이면 레이도 같이 휘말리게 될 거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면서, 계속해서 레이에게 말을 건넸다.

    "어때? 조금은 결심이 선 것 같아?"

    오늘 낮에 그 사건이 있은 후, 우리는 무척이나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사라도. 심지어는 이곳에서 레이를 지키고 있으라고 했던 실비아까지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왔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레이만큼은 가만히 내버려 뒀다. 혼자 차분히 마음의 정리를 하라고 말이다.

    "잘…모르겠어."

    역시 그런가. 온종일 마음을 다잡는 데 힘썼다고는 하지만, 고작 하루다. 레이와 바프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쉽게 다잡힐 마음은 아니겠지.

    하지만 레이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은 여유롭지 않았다.

    "레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조금 가혹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레이가 정말로 자기 손으로 바프라와의 관계에 마무리를 짓고 싶은 것이라면 말이다.

    "응…."

    "괜찮아. 이렇게 나도 곁에 있으니까.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어."

    어쩌면 독촉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밖에 없었다. 지금 발동하고 있는 이 감정 공유가 최대한 레이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레이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기한은 앞으로 며칠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여유로운 생각이었다는 걸, 우리는 아침에 들려온 신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깨닫게 됐다.

    "혀, 형님! 라, 라파엘 님이! 라파엘 님이 사망하셨습니다!"

    "…라파엘? 그 분수에 안 맞게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능력 없는 걔?"

    아직 잠이 덜 깨 멍한 머리로, 나는 그만 너무 솔직한 발언을 내뱉고 말았다.

    다행히 신은 날 떠받들기라도 할 듯이 따르기 때문에 이런 것 가지고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 그렇습니까?"

    아니. 내가 너한테 묻고 있잖아. 왜 네가…아니. 지금 이런 말 할 때가 아니지. 잠깐만. 그러니까 뭐? 라파엘이 죽었다고?

    "네!"

    "대체 갑자기 왜?"

    아까 무심코 말해 버린 대로, 놈은 능력이 없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분명 바프라가 자기가 조종하기 쉽게 앉혀놓은 것에 불과할 거다.

    나도 어제 자기 자존심 때문에 반발하는 놈을 타이르면서 얼마나 귀찮았는지. 솔직히 말해서, 은사모가 앞으로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라파엘 같은 놈이 제일 윗자리에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가 왜 그렇게 놈을 타이르고 설득하려고 했겠어? 아무리 바프라가 자기 편하려고 준 자리라고 할지라도, 놈의 지위가 가진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절대 없기 때문이다. 한 세력의 이인자라는 건 그만큼이나 대단한 위치였다.

    그런데 그렇게 대단한 지위에 있는 놈이, 갑자기 죽었다고? 뭐지? 그릇도 작은놈이 갑자기 너무 큰 일을 앞두니까 심하게 설레서 지병인 심장병이 도졌나?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라파엘이 갑자기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 설마하니 어떤 미친놈이 뜬금없이 한 세력의 이인자를 죽여 버린 것도 아닐 테고 말이야.

    "바프라, 바프라가…."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듯, 신의 입에서는 한 명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 그래. 생각해 보니 내가 상대하는 놈이 바로 그 미친놈이었지.

    "대체 그놈은…아니. 그전에 이런 시간에 둘이 만날 일이 있었다고? 아직 해도 완전히 안 떴잖아?"

    본의 아니게 잠은 확 깨 버렸지만, 그렇게 잠기운이 달아난 머리로 생각해 봐도 이해 안 되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그것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대답하려고 한 바로 그 순간, 옆에서 상당히 피곤한 목소리가 끼어들어 왔다.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이제 막 돌아온 것 같은 모습의 요리스가 있었다.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피곤한 표정. 거기에 저 옷에 묻은 건…피가 튄 자국인가? 심지어 한 방향에서 튄 모양 같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봐."

    "네."

    2시간 전쯤. 그러니까 다들 한창 자고 있을 새벽에, 갑자기 바프라가 또 수도에 있는 모든 귀족을 소집했다고 한다.

    물론 그중에는 요리스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출발하기 전 내게 말을 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내 여자들과의 좋은 시간을 방해하기에는 미안했다고 한다.

    야 이 바보들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배려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잖아!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요리스가 내 뒤쪽을 향해 힐끔힐끔 눈치를 봤거든. 아마 내가 아니라 사라가 무서워서 도저히 방해할 수 없었던 거겠지.

    사라야. 아무래도 초반에 기선 제압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아무튼 그런 이유로 요리스는 내게 말도 없이 성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역시나 낮에 모였던 귀족들이 전원 소집되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낮에 모인 귀족 중 살아남은 자들이.

    그리고 전원이 모이자마자 바프라가 처음 내뱉은 말이 바로.

    "몇 시간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낮에 내린 결정에는 실수가 있었던 것 같군. 이 내가 네놈들의 수준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이거였다고 한다.

    아닌 밤중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라고, 거기에 있는 모두가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그중 용감한 몇몇은, 직접 바프라에게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봤다고 한다. 물론 속마음과는 다른 정중한 어조로.

    그러자 바프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위엄을 다시금 보여주고 본보기도 보여줬으니, 모반을 꾸미던 다른 놈들도 마음이 변할 거다. 말은 좋지. 이상적이야. 하지만 네놈들의 수준에 그런 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놈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면…."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머리가 날아간 몸이 제멋대로 소리를 내뱉을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머리가 날아간 건 그 한 명뿐만이 아니었다. 아까 용기를 내서 바프라의 진의를 물어본 이들도 차례차례 목이 날아갔다고 한다.

    나중에 확인한 바로는, 그때 죽은 사람은 전원 은사모의 회원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최근 여론에 휩쓸려 가입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전원이 연차가 오래된 멤버였다고 한다.

    "생각대로야. 역시 멍청한 놈들은 있는 법이군. 이 자리는 모반자를 색출하기 위한 자리다. 그런 자리에서 감히 멋대로 입을 열다니. 내가 언제 네놈들의 발언을 허락했었지?"

    낮과 달리 펜이 아닌 검기로, 그것도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프라의 그것보다 훨씬 정교해진 검기로 사람들을 살해 한 후, 바프라는 오만하게 그렇게 내뱉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된 고요한 알현실.

    그 정적을 즐기는 것처럼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신하들의 면면을 둘러본 후, 바프라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네놈들의 수준으로는 도저히 이성적인 정책을 펼칠 수 없다. 네놈들은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 개돼지들이지. 그래서 생각해 봤지. 어떻게 하면 네놈들의 부족한 머리에 내 위대함을 확실히 각인시켜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간단하더군."

    그렇게 말하면서, 놈은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끄어억…바, 바프…라…사, 살려…!"

    "머리를 자르면 잔챙이들은 흩어지게 마련이지."

    아마 일부러 그렇게 한 거겠지. 갈라진 배를 움켜잡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라파엘의 모습을 보며, 바프라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동시에, 앞으로는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듯이 검지를 세워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리는 제스쳐를 취했다고 한다.

    "그건 설마…."

    "네. 신호였습니다."

    바프라가 낮에 은사모를 향해 보낸 계획서에는, 꽤나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명되어 있었다.

    바프라가 머리를 두드리는 제스쳐도 그 계획서에 쓰여 있던 신호 중 하나였다.

    이제부터 바프라는 뭔가 엄청난 폭정을 저지를 거다. 그런 바프라의 폭정을 보다 못한 정의로운 신하 중 한 명이 나서서 바프라의 폭정을 지적하고, 다른 신하들마저 그 지적에 힘을 보태 바프라의 힘은 점점 약해지게 된다.

    그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바로, 바프라가 행했다는 머리를 두드리는 제스쳐였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명된 계획서에서 유일하게 두루뭉술하게 설명된 부분이 바로 뭔가 엄청난 폭정을 저지를 거라는 부분이었는데, 설마 이런 사건을 일으킬 생각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그 예상치 못한 바프라의 행동이 엄청난 변수를 낳아 버리고 말았다.

    정의로운 신하가 나서서 바프라의 폭정을 지적한다는 부분에서 그 정의로운 신하 역할을 맡을 사람이, 바프라가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 라파엘이었으니까.

    당연하잖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녀석이 은사모에서 제일 지위가 높은 녀석이었다고.

    그런데 그런 녀석을 죽여 버린 거다. 게다가 은사모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놈을 죽여놓고서 은사모와의 비밀 계획을 계속하려고 하다니.

    굳이 요리스한테 듣지 않아도 상상이 됐다.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생각했겠지. 이건 함정이라고.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긍정하듯, 요리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신호를 알아들은 사람은 많았지만, 그 자리에서 선뜻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단 한 사람만 제외하면 말이지요."

    "단 한 사람? 그게 대체 누군데?"

    "케이로스님입니다."

    요리스의 얘기를 전부 전해 들은 후, 나는 오늘도 아침부터 홀로 성에 잠입하게 됐다. 목적지는 물론 바프라가 있을 알현실.

    요리스의 얘기에 따르면, 케이로스의 용기있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를 호응해주는 용감한 귀족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 결과 케이로스는 바프라와 단신으로 대치하게 됐고, 얼마간의 대치 후 바프라는 짜증이 난다는 듯 케이로스를 제외한 모두를 물러나게 했다.

    즉, 지금도 알현실에는 바프라와 케이로스가 단둘이 남아 있을 거라는 얘기다.

    "이제 이곳을 나가면, 네놈은 나와 단신으로 대치하고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돌아온 남자가 된다."

    "네."

    알현실에 잠입해 들어가니, 대치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차분한 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획대로 이제부터는 점점 네놈에게 밀리는 것 같은 연기를 해주지."

    "황송합니다."

    "앞으로는 네놈이 바프라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조금은 기뻐하는 내색을 해도 좋을 텐데?"

    "제 주제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바프라’라는 세력은 근본은 결국 바프라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요."

    "흥. 여전히 재미없는 놈이로군."

    "황송합니다."

    "뭐, 좋아. 이제 그만 가봐라. 이쯤 됐으면 슬슬 밖의 놈들이 멋대로 추측하고 떠들기에 충분한 시간이겠지."

    무미건조한 케이로스의 반응에 흥이 식었는지, 바프라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케이로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실례했습니다."

    "케이로스."

    "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케이로스를 다시 불러세우더니, 바프라는 끈적한 살기를 담아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 네놈을 선택한 이유, 주제 파악을 잘하는 네놈이라면 알고 있겠지?"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 똑똑히 기억해두겠다. 네놈이 맡은 역할만 잘 수행한다면."

    "꺄악!"

    그렇게 말하면서, 바프라는 책상 아래에 있던 여자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보란 듯이 그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저러고 있었던 건가. 저 새끼는 진짜 성자인 내가 봐도 섹스에 제대로 미친 놈 같아.

    "네놈에게도 포상을 베풀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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