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38화 (1,105/1,205)
  • 1138화

    내가 살면서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나?

    너무나도 뻔뻔한 놈의 태도에, 나는 한순간이나마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거슬렸는지, 바프라는 작게 혀를 차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쯧. 케이로스 놈. 그간 조금은 배짱이 붙은 줄 알았건만. 겁쟁이는 결국 겁쟁이라는 건가."

    아까도 살짝 느꼈지만, 상당히 혼잣말을, 아니. 혼잣말하는 척하면서 빈정대기를 좋아하는 놈이로군. 어째서 갑자기 케이로스를 빈정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으흣! 흐으응!"

    아니. 그런 것보다 일단 허리부터 멈춰 이 미친놈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야!?

    "가서 케이로스에게 전해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응? 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쪽을 보지도 않고 툭 내뱉은 바프라의 말뜻이 바로 이해되지 않아서, 나는 잠깐 오작동이 걸린 기계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즉, 저 새끼는 날…그런 뜻이지?

    이상하다? 나 혹시 아까 케이로스랑 대화할 때 썼던 약자 태세를 아직도 안 풀었나?

    잠깐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해 봤지만, 내가 이 중요한 때에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저놈이 오해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걸 이해한 순간, 나는 이미 놈에게 단검을 날리고 있었다. 그것도 스킬까지 사용해가면서.

    그간 7계층에서 지내면서 내가 성장한 건 은신과 그림자 이동 스킬 레벨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월영무사의 레벨도 착실히 올라가고 있었고, 새로운 스킬도 제법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선보인 이 그림자 투척도 그중 하나로, 간단히 말해서 그림자 이동을 손에 쥔 사물에 한정하여 쓸 수 있는 능력이다.

    단독으로도 쓸만한 스킬이지만, 단검 투척과 같은 스킬과 혼용하면 효과가 배가 되는 스킬로, 특히나 이곳처럼 화려한 장식물로 인해 그림자가 많은 곳이라면 그 효용성은 무궁무진했다.

    "크윽!"

    비록 바프라의 배틀마스터 레벨이 내 월영무사 레벨보다 조금 더 높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암습을 쉽게 막아낼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냥 레벨은 내가 더 높으니까 더더욱.

    "네놈…."

    놈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것으로 목 옆에 긴 자상이 남는 정도의 수준에서 가까스로 내 단검을 피해냈다.

    사실 그냥 맞고 죽으면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던진 거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녀석은 아니라는 거군.

    "케이로스의 수하가 아니군."

    그렇게 말하면서, 놈은 드디어 아래에 깔린 여자에게서 자기 물건을 뽑았…으악. 젠장! 더러운 걸 뭘 뚝뚝 흘리면서 뭘 이쪽을 향하는 거야!? 안 치워!?

    그나마 놈도 자기 물건을 남에게 보이는 취미는 없는지, 여자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그 얼굴을 끌고 와 입에 자기 물건을 처넣었다.

    아니. 확실히 저러면 꼴 보기 싫은 건 가려지지만…뭐, 좋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어딜 어떻게 봐야 내가 누구 수하로 보이는 거야? 시력이 많이 안 좋니?"

    일단 케이로스와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모르는 척을 했지만, 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저 녀석은 왜 계속 케이로스를 언급하는 거지? 진짜 뭘 알고 있는 건가?

    "흥. 그 건방진 말투, 내 세력 아래에 있는 놈도 아니군. 그렇다면…그런가. 네가 레이를 데려간 그놈인가."

    그렇게 말하고, 바프라는 왕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여자는 진짜 그냥 쾌락을 위한 도구 취급이로군.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웠지만, 그 역겨운 태도와 별개로 머리는 꽤나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설마 말투만으로 내 정체까지 꿰뚫어볼 줄이야.

    그리고 동시에 놀라운 자신감이기도 했다. 바프라 내부 사람이라면 절대 자기한테 함부로 입을 못 놀릴 거라는 자신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판단이니까.

    "정체는?"

    "설마 얘기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건 아니지?"

    "나와 대화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 아니었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대화해 줄 마음도 없다는 얘기인가.

    하지만 날 너무 우습게 봤군. 미안하지만 아까 단검을 던졌을 때, 마음속으로 이미 결단을 내렸거든.

    만약 처음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되면 계획은 많이 어그러지겠지만, 수도에 있는 귀족의 7할을 이미 장악했다고 했다는 케이로스의 수완을 믿어보기로 하자.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보다, 이런 역겨운 놈을 이대로 살려주는 게 더 문제일 것 같아.

    "네놈의 정체 여하에 따라서는 내게도 대화 의사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놈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내 결단을 살짝 흔들었다.

    칫. 운이 좋은 녀석. 딱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다니.

    어차피 놈을 해치우는 건 간단하다. 해치우기 전에 정체를 밝히는 것쯤이야 별문제 없겠지.

    방심한 악당이나 할법한 판단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물론 방심한 건 절대 아니다. 이것저것 다 계산해 보고 내린 이성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해 봐. 놈은 조금 전까지 여자랑 섹스하고 있었잖아? 다시 말하면 이 근처에는 놈과 나, 그리고 여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는 얘기다.

    "그전에 여자는 치우지?"

    물론 바프라야 어찌 됐든 여자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우선 여자부터 밖으로 내쫓기로 했다.

    왕좌 앞의 책상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아마 지금도 바프라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겠지.

    "그렇군."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에, 나는 당연히 바프라가 여자를 밖으로 내쫓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곧장 깨닫게 됐다.

    "바, 바프라님! 살려 주십시오! 살려…! 끄윽…끄르륵…."

    책상 아래에서 들려온 끔찍한 소리로 인해서.

    "이제 여기에는 우리 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묻지. 네놈의 정체는?"

    저 새끼…지금….

    "상당히 분노하는군. 고작 여자 하나가 죽은 것치고."

    "고작…여자…?"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정의로운 성격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기에도, 놈의 행동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너무 역겨웠다.

    "네놈의 세계에서는 아닌가 보지?"

    내 세계라고? 저 새끼는 또 무슨…아니. 그런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진실을 깨닫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앞으로…."

    "그래. 우리 플리투스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

    "…플리투스?"

    이죽거리면서 말하는 놈에게, 이번에는 내가 한마디 해주자, 놈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엿보였다.

    지금까지 쭉 알고 있었다는 듯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놈이 이런 표정을 짓게 된 건 상당히 유쾌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그래. 정체를 밝히라고 했지? 소개하지. 플리투스의 용사님이시다."

    "…네놈이? 용사? …여신 세계의 용사 같은 것 아니라 말이냐?"

    역시나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군.

    설마 직접 만난 진지남도 알아채지 못한 내 정체를, 보고만 들었을 이 녀석이 먼저 알아채고 있었다니.

    아니. 이 녀석이기 때문에 알아챈 건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애널라이즈를 써봤다.

    이름 : 루이스 바프라

    종족 : 다크 엘프 238

    직업 : 배틀마스터 279

    레벨 : 280

    그러자 내 눈앞에 뜬 창에는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아까 이 녀석이 섹스하던 게 떠올라서 혹시나 싶어 해본 건데, 설마 이렇게 타이밍 좋게 레벨업을 했을 줄이야.

    이번에는 아까 애널라이즈를 섰을 때의 수치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이젠 기억하고 있지 않더라도 상관없나. 이렇게 레벨과 직업 레벨이 달라서는 말이야.

    "여신의 용사?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플리투스라고 말했을 텐데?"

    "…플리투스인가."

    "그래. 뭐, 나는 리리안 플리투스의 직계는 아니지만."

    "……!"

    나는 이라는 단어를 통해 리리안 플리투스의 직계도 있음을 암시하자, 바프라의 눈썹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꿀틀거렸다.

    그야 그렇겠지. 238살이면 순혈 다크 엘프치고는 젊은 나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리리안 플리투스의 통일 왕국 시대를 겪기에는 충분한 나이니까.

    이 녀석은 순혈 다크 엘프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인간을 무시하는 것 같은 언행을 보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리리안 플리투스한테 자격지심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자, 그래서? 네가 생각하기엔 어떻지? 이 용사님이 대화 상대로 충분한 것 같아?"

    이렇게까지 상황 파악이 끝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편하게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눈앞의 자식이 역겹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이용해 줘야겠어.

    "…어이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군. 리리안 플리투스가 사라진 지 몇 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지? 인간이라서 세월의 흐름이 가늠이 안 되나? 이제 와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진심으로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래. 처음에는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 그래도 한 세력의 수장인데, 당황했다고 곧장 흐트러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말이지. 이미 흐름은 나한테 왔거든.

    "그럼 증명해 줄까?"

    "증명이라고? 어떻게 말이지?"

    "간단해."

    그렇게 말하고 살기를 집중시키자, 놈의 얼굴에서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 나를…?"

    "왜? 못할 것 같아?"

    "못할 것 같군. 이 성안에서 그런 일을 벌이면 아무리 네놈이 강해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럴 것 같아? 그거 이상하네. 혹시 프리움 성문에서의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아직도 못 들었어?"

    "그건 네놈이 멀쩡했을 때의 이야기지."

    과연. 만약 내가 진짜 용사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곱게 죽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 건가. 그리고 아무리 용사라도 상처 입은 상태에서는 이 성을 곱게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자신감이 지나쳐 만용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말이 있으니까.

    "걸레년의 유혹에 넘어간 이단자를 용사가 직접 나서서 죽였다는데, 대체 어떤 놈이 덤벼든다는 거지?"

    "……!"

    "모를 줄 알았나 봐? 너 너무 용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나한테는 느껴지거든. 네 몸에서 풍기는 걸레년의 더러운 냄새가 풀풀."

    "그런 말을 누가…."

    "지하 수로에 보낸 부하들, 아직 소식이 없지? 왜 그럴까?"

    사실 이런 식으로 쓰려고 데려간 건 아니었지만, 역시 죽이지 않고 끌고 가길 잘했어. 이래서 사람은 선행을 쌓으면 복이 온다는 건가.

    "그놈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 그건 걱정 마. 다 듣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건틀렛을 벗고 빛나는 반지를 놈에게 보여줬다.

    "그렇지 디아나?"

    "음. 제대로 다 들었네."

    역시 대마법사님이야. 실은 지금 막 반지를 발동해서 말을 건 건데, 제대로 분위기를 읽고 말을 맞춰주잖아.

    "…그래도 넌 날 죽일 수 없다."

    퇴로가 완전히 막혀서 패닉에 빠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바프라는 아직 겉으로는 냉철함을 잃지는 않았다. 뭐, 하는 말을 보니 속으로는 엄청 당황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저렇게 말하면 내가 자길 죽일 실력이 된다고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즉, 놈은 이제 완전히 내가 용사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실력이라고 믿고 있는 거다.

    "그래? 내가 왜?"

    "네놈은 대화를 하러 왔을 텐데?"

    끝까지 네놈 네놈 거리는 건,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건가.

    "그건 네놈한테서 더러운 걸레년의 냄새를 맡기 전 얘기고. 아, 그래.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네. 넌 대체 무슨 말을 할 셈이었어? 내가 걸레년의 용사라면."

    "무슨 말인지 모르…."

    "이제 와서 모르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고. 다 들켰는데. 너도 내가 걸레년의 용사라는 생각에 대화해 보려고 한 거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할 생각이었어? 한번 말해 봐. 혹시 알아? 내가 들어줄지."

    내가 그렇게 선심 쓰듯 말하자, 놈은 조금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네놈의 목적은, 바프라를 흡수 합병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뭐,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게 왜?"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얘가 살고 싶어서 별말을 다 하는구나.

    놈의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그런 생각이었다.

    "야. 너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나한테 할 말이 아니라, 걸레년의 용사가 찾아왔으면…."

    "마찬가지다. 난 이제 세력 유지에 흥미가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새끼 진짜 뭐야? 설마 진짜 섹스에 빠져서 이제 다 필요 없어졌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