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37화 (1,104/1,205)

1137화

하지만 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레이는 괜히 더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음. 내가 생각해도 조금 전 태도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아.

아니. 레이 얘가 가끔 되지도 않는 백치미를 자랑하는 캐릭터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좀 막대하게 되는 게 있더라고.

얘도 이제 사도 임명까지 하고 정식으로 내 여자가 됐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별거 아니야. 그냥. 너 나 진짜 좋아하는구나?"

"가, 갑자기 왜 그런 얘기가 돼!?"

그런 의미에서 살짝 달달한 분위기를 유도해 봤지만, 이런 쪽으로 면역이 전혀 없는 레이답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전혀 받아주지 못했다.

사도 임명까지 주고받은 애가 이렇게까지 면역이 없는 것도 신기하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흐뭇하게 레이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구원 님?"

"아, 응?"

"지난밤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오늘도 할 일이 많습니까?"

질문 형식이었지만, 아마 실비아도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닐 거다. 오히려 내게 본래 목적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말을 건 거겠지.

보통 이런 대화를 할 때는 웬만해서는 끼어들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는 실비아인데, 그 실비아가 이렇게 끼어들 정도라니. 얘기가 삼천포로 많이 빠지기는 했나 보구나.

"그래. 케르베로스를 데려다 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깽!?"

기특한 기사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렇게 대답하자, 레이의 품에 있던 켈베로스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강아지 주제에 표정 참 풍부한 녀석이다.

"그럼 켈비는 내가 봐줄게!"

하지만 그런 케르베로스와 반대로, 레이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케르베로스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활발하게 외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활발한 척하면서인가. 감정 공유 꺼놨다고 해서 내 눈썰미를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그래. 어차피 오늘 당장 결단이 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레이 넌 여기에서 기다리면서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어."

처음 만났을 때의 독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요즘은 백치미만 선보이는 레이지만, 그래도 분명 마지막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다.

아니. 설령 역할이 없더라도 뭔가 하고 싶을 거다. 나와의 관계에 더 신경이 쏠리게 되면서 언급하지 않게 됐지만, 원래 바프라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이유로 날 따라온 녀석이니까.

"…응."

역시나 내 생각은 정답이었는지, 레이는 ‘무슨 마음의 준비?’ 같은 말을 하며 백치미를 뽐내는 일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용하기 힘든 표정과 함께.

그래. 네 마음 알아주는 건 나밖에 없지?

"미리 말하는데, 난 따라갈 거야."

그리고 물론 여기에 남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따라가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행여나 따라오지 말라고 할까, 사라는 얼른 자기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 혹시 용사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딱히 혼자 갈 생각은 없었다.

어젯밤처럼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서 여기저기 재빨리 이동해야 할 일도 없었고, 은신을 써서 어디에 잠입해 들어갈 생각도 없었으니까.

"대신 실비아가 레이랑 같이 기다려줘야 할 것 같은데. 실비아, 괜찮지?"

딱히 디에른 가문이 배신할 걱정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 바프라에서 레이는 누구한테 어떻게 노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둘 수는 없으니, 경호원 하나쯤은 남겨두지 않으면.

"네, 넵!"

목소리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실비아는 내가 곁에 있으면 항상 저러니까.

"고마워. 좋아. 그럼 용사님. 가실까요?"

나는 실비아에게 레이를 맡기기로 하고, 사라를 향해서 팔을 내밀었다.

"바보. 어디 데이트하러 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사라였다.

좋아. 우선은 요리스한테 말해서 길을 열어달라고 해야겠지?

앞으로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지만, 가벼운 발걸음은 문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무거워지고 말았다.

"아, 형님! 드디어! 일어나셨습니까!"

신과 유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기분이 다운된 건 아니다. 바보 같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일단 믿을만한 놈이라는 건 여기까지 같이 오면서 충분히 알았으니까.

문제는 신의 표정이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는 점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버지께서… 아버지께서 바프라에게 불려 갔습니다."

"그게 왜? 디에른 가문이 유일한 미약 공급원이니, 불려 갈 일은 많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말한 나도 그런 이유 때문에 부른 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희망을 걸고 해본 말이었지만, 역시나 신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 아버지뿐만이 아닙니다."

응? 뭔가 말투가 묘한데? 아, 설마….

시선을 유리 쪽으로 옮기자, 유리가 역시나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조금 전 연락이 왔습니다만, 케이로스님도 성으로 불려 가셨다고 합니다."

"언제?"

"조금 됐습니다. 약 1시간 전에…."

젠장. 방에서 느긋하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잖아. 설마 바프라가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칠 줄이야.

원래라면 사라가 방 밖에 있는 이 둘의 기척을 느끼고 말해 줬을 텐데, 내가 계속 장난을 거는 바람에 감각이 흐려진 건가.

"불려 간 건 그 셋뿐이야?"

"아닙니다. 정확한 인원은 모릅니다만, 고위관료 상당수가 불려 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일정 이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 전원이…."

망할. 그 셋만 불려 갔다고 하면 차라리 희망이 있었을 텐데.

"…일단 확인하겠는데, 유리네 아저씨는 은사모의 회원이 아니지?"

갑작스러운 바프라의 소환. 거기에서 제일 걱정되는 건, 역시나 은사모였다.

어제 도시에 소문을 내는 걸 기점으로, 케이로스도 더 적극적으로 은사모와 뜻을 같이할 사람을 모은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조금 더 적극적인 활동을 선언한 지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설마 진짜로 벌써 실수해서 꼬리가 잡힌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어제 진지남이 해준 말 중에 "바프라는 세력 내부에 무언가 목적을 가진 비밀 조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말이 있어서 살짝 불안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사라야. 미안한데…."

같이 못 갈 것 같아.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사라가 먼저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고글 같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신호탄은 제대로 가지고 있지?"

"고마워. 사랑해."

너무 듬직한 그 모습에 새삼 반하면서, 나는 황급히 건물 밖으로 나가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목표는 물론,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성 내부로의 잠입이다.

해가 쨍쨍한 낮인 만큼 밤과 같은 절대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림자만 골라서 숨어드는 것으로 내 은신술은 톡톡히 밥값을 해냈다.

아무에게도 들키는 일 없이 성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된 나는, 곧장 바프라가 있는 곳을 찾았다.

성의 내부 구조는 어제 잠입하면서 대강 꿰고 있었기 때문에,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프라는 물론 불려 갔다는 고위관료들까지 전원 알현실에 모여 있었으니까.

신이 말한 대로 진짜 고위관료란 고위관료는 싹 다 불러모았는지, 딱 봐도 높으신 분들이 알현실을 빽빽하게 채운 모습은 마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회의를 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이질적인 물건이 알현실의 한중간에 있었다.

"…쓰레기가."

지금도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나오고 있는 시체를, 왕좌 같은 곳에 앉아 있는 바프라가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그렇게 내뱉었다.

"정말로, 정말로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고작해야 몇 년이다. 고작해야 몇 년이, 그렇게 내가 우스워 보일 정도로 긴 시간이었나?"

그렇게 말한 후, 바프라는 나지막하게 "이래서 인간들이란."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과연. 다크 엘프의 순혈주의라는 말이 그냥 섹스 때문에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는 건가.

진지남의 정보를 들으면서도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바프라의 본모습은 내 상상과 많이 다른 것 같다고.

"그래서, 다음은 누구지?"

놈이 내뿜는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신하들은 얼음이 되어있었지만, 바프라 자신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여유를 뛰어넘어서, 권태로움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권태로운 목소리로, 바프라는 좌중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갑자기 다음은 누구냐니. 대화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다른 반역자를 찾는 것 같지만, 설마 반역자가 제 발로 나오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그런 생각을 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하 중 한 명이 더욱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소인들의 미천한 머리로는 폐하께서……커허억."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바프라가 던진 무언가에 목이 뚫리고 말았지만.

저건……펜? 어쩐지 왕좌 앞에 책상이 있는 게 조금 안 어울리기는 했어. 보통 왕좌는 의자만 있잖아? 아마 이러려고 일부러 준비해둔 모양이다. 저기 바닥에 있는 시체도 바프라한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어있는 걸 보니, 같은 방식으로 당한 것 같고.

그리고 슬쩍 들여다본 책상 위의 펜꽂이에는 아직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펜이 꽂아져 있었다.

"네놈이었나. 네놈은 이전부터 남을 구슬리고 아첨하길 좋아하는 놈이었지."

바프라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 펜꽂이에 손을 뻗어 또 펜 하나를 들고는 빙글빙글 돌려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신하 중 몇 명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것을, 바프라의 눈은 매섭게 포착한 것처럼 보였다.

저 책상, 지금 보니 그냥 단순히 펜을 손닿는 위치에 두기 위한 목적만으로 가져다 둔 게 아닌 모양이군.

이런 식으로 펜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걸 어필하며 위압감을 주면, 찔리는 놈들은 알아서 티를 낼 거라고. 만약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책상을 가져다 둔 것이라면, 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머리가 돌아가는 타입인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바프라가 다른 세력과 가장 차별화된 특징이, 꼼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는 점이었지. 그런 곳의 수장이라는 놈이 머리 안 돌아가는 바보일 리가 없나.

게다가 놈이 더 골치 아픈 점은, 머리는 물론 전투력 역시도 이곳에서 최고라는 점이었다.

이런 식으로 위압감을 준다는 계획도, 펜만으로 신하를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야만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이니까.

물론 여기 놈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지 않고, 그에 반해 바프라의 레벨은 우리 파티하고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높았으니……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별생각 없이 애널라이즈를 썼다. 그리고 눈앞에 뜬 화면을 본 순간,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루이스 바프라. 레벨 279.

이 녀석, 원래 레벨이 이랬나? 분명 며칠 전 몬스터의 대공습 때는, 279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렇다고 해서 레벨이 정확히 몇이었는지 확실히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때도 279였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냥 레벨뿐만 아니라 직업인 배틀 마스터의 레벨까지 279인걸 보면, 단순히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딱히 레벨을 올릴 일이……아, 그런가. 방금 둘 죽였지. 그래서 레벨이 올랐을 수도 있는 건가. 뭐야. 괜히 설렜네.

아무튼 바프라는 진짜로 다른 반역자가 제 발로 나서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죽은 저 사람이 반역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바프라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그럼, 다음."

그렇게 사람 둘은 순식간에 죽이고 나서, 바프라는 또다시 권태로운 목소리로 신하들을 종용했다. 물론, 바프라의 부름에 그 누구도 입하나 뻥긋하지 않았지만.

그야 그렇겠지. 입 열면 죽을 게 뻔한데 누가 나서려고 하겠어?

"또 내가 나서서 쓸데없는 시간을 들이게 하지 말고 빨리 나와라. 굳이 저놈들과 한패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바프라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놈이 사정을 다 알고 있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그 묘한 말투 때문에 살짝 불안해지기는 했다.

저놈들과 한패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니. 설마 은사모를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지금 죽은 저 둘이 은사모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아니라도 믿고 싶다. 케이로스도 제법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고.

"정말 아무도 없나? 저런 겁쟁이들조차 모반을 꾀했는데. 윽. 후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바프라였지만, 놈은 말을 끝맺는 대신 그 권태로운 표정을 갑자기 찌푸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응? 잠깐만. 뭐야 저 반응은? 뭔가 살짝 익숙한 반응인데? 저 새끼 설마…….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확인해봐야겠어. 내 은신술은 사라한테도 들키지 않을 수준이니, 분명 괜찮을 거야.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바프라가 앉아있는 왕좌의 뒤쪽 그림자를 향해 그림자 이동을 시도했다.

역시나 그간 연마해온 내 은신술은 완벽해서, 내가 바로 뒤까지 이동해도 바프라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안심하면서 몸을 숙여 책상 아래를 엿봤고, 거기에서 내가 본 건…….

"……응. ……읍."

이, 이런 미친놈아! 책상은 이래서 가져다 놓은 거였냐!? 이 와중에도 그렇게 섹스가 하고 싶어!? 이런 대낮에!?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남들 다 보는데!?

젠장! 내가 아까부터 얼마나 이 책상을 가져다 놓은 계략을 감탄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내 감탄 돌려줘! 이 부러워 죽을……아, 아니. 이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래. 아니나 다를까. 책상 아래에서는 놈의 물건을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은 바프라를 제외한 전원이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 숨 쉬는 소리도 조심할 정도로 정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적 속에서 조금의 소리도 흘리지 않으면서 봉사한다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잖아.

"네놈들도 잘 알겠지만, 나는 시간 낭비가 싫다."

또다시 무게를 잡고 말하는 바프라였지만, 책상 아래의 진실을 알고 난 나에게는 이제 그 말투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다.

‘빨리 아무도 없는 데서 마음껏 섹스하고 싶으니까 대충 알아서 자진신고하고 꺼져라.’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런 분위기 속에 나설 사람이…….

"바프라님."

있네. 심지어 이번에는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케이로스 아저씨! 미쳤어!? 죽고 싶어!? 설마 내가 여기 온 거 알고 여차하면 구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야 물론 성자 스킬 다 쓰면서 진심으로 싸우면 바프라를 포함한 여기에 있는 전원이랑 싸워도 딱히 못 이길 것도 없지만, 그러면 내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되잖아!

"호오. 케이로스 네놈인가."

케이로스의 돌발 행동에 지켜보던 나까지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바프라의 손에 있는 펜이 케이로스를 향해 날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케이로스를 믿어서 그런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네놈은 권력보다는 그저 자신의 가늘고 긴 명줄만 붙잡고 있으면 그만인 겁쟁이였을 텐데?"

"네. 그렇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긍정하는 케이로스의 모습에, 바프라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여전하군. 그래. 그런 네놈이 무슨 일이지?"

"이쯤 하면 바프라님을 의심하던 이들도 생각을 바로잡았을 것 같습니다."

"큭. 의심이라. 반역자의 대표로서 하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지?"

"겁쟁이의 대표로서 하는 말입니다."

케이로스가 그렇게 대답한 순간, 바프라의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펜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얼마간의 정적.

케이로스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바프라는, 흥이 식었다는 듯 펜을 다시 펜꽂이에 던져 넣었다.

반역을 꾀한 놈이 더 없는 게 아니라, 있지만 이쯤 하면 놈들도 생각을 접었을 거라고 말한 게 주효한 건가.

생각보다도 훨씬 자신감이 넘치는 놈이군. 보통 이런 타입은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 할 거라고 봤는데 말이야.

"치워라."

바프라가 턱짓으로 시체 둘을 가리키자, 밖에서 병사들이 쏜살같이 달려나와 시체를 수거해갔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자, 쥐죽은 듯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올리고서는 알현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잠깐."

대부분의 사람들이 뒤를 돈 바로 그 순간, 바프라가 펜꽂이에서 펜을 한 움큼 집어 들더니 앞으로 뿌렸다.

그러자 그 펜들은 마치 유도 기능이 달린 것처럼, 정확히 펜 하나당 한 명씩 목을 뚫고 지나갔다.

저건……나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까 펜을 만지작거리면서 겁줄 때 떨었던 놈들이잖아?

"그놈들도 같이 데려가라."

바프라의 기습에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란 듯 굳어져 버렸지만, 바프라는 여전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턱만 까딱 까닥 움직이면서 명령했다.

그제야 드디어, 알현실에서는 길었던 심문 시간이 끝이 났다.

"케이로스."

성 밖으로 나와서 삼삼오오 흩어지는 권력자들의 행렬. 그중 아는 얼굴이 있는 곳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슬쩍 말을 거니, 케이로스가 흠칫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구원님이셨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 아까는 그렇게 배짱 좋더니. 아저씨, 다시 봤어?"

일단 아는 얼굴은 모두 무사했으니 살짝 장난기를 섞어서 말해봤지만, 케이로스의 표정은 풀릴 기색이 안 보였다.

오히려 더욱 표정을 어둡게 하면서, 케이로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아까 죽은 사람 중에, 은사모에 중요한 인물이라도 있었어?"

어제 케이로스에게 들은 건데, 아무래도 성에서 소문에 관한 정보를 통제하고 있던 이 역시도 은사모였던 모양이다.

언젠가 신이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은사모 회원 중에는 대단한 권력자도 있다고 합니다."라고 한 적이 있잖아? 그게 바로 그 사람을 말하는 거였다고.

만약 그 인물이 조금 전에 죽은 거라면, 확실히 케이로스가 이런 표정이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그렇게 혼자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케이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무거운 마음을 나타내듯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대라니?"

"어제부터 시내에 나도는 그 소문이 생각보다 상당한 여파를 낳았는지, 어제부로 저희 은사모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수도에 있는 귀족의 7할은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게 왜? 잘 됐잖아?"

"하지만 아까 바프라의 손에 죽은 사람 중, 저희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뭐? 그게 말이 돼?

아까 있던 이들 중 7할이 은사모라면, 대충 펜을 던져도 최소 한 명은 은사모에서도 사상자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피해자가 아예 없다는 말은…….

"네. 어쩌면 바프라는, 저희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뇌리에 다시 한번 어제 진지남한테 들었던 정보가 떠올랐다.

바프라는 세력 내부에 묘한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 정보.

그 망할 진지남 녀석. 이래서는 그냥 어렴풋이 생각만 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을 서두르면 더 꼬일 수도 있어."

수도에 있는 귀족의 7할이면 확실히 그냥 부딪혀도 승산은 있다.

하지만 이건 도전 기회가 단 한 번밖에 없는 승부. 지면 그걸로 끝이다.

우리 목적은 그냥 그냥 바프라를 장악하는 게 아니잖아? 바프라 장악은 물론,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다시 한번 섹스를 부담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게 우리 진짜 목적이니까.

그러려면 적어도 여신의 마나가 담긴 물이 시내로 유통되어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때까지는 기다리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식을 한 번에 바꾸려면,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지지를 얻고 들고 일어나는 정도의 소동은 필요해.

"며칠이면 일반인들도 슬슬 들고일어날 조짐이 보일 거야.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하지만 구원님."

나도 알아. 그 사이에 바프라가 먼저 치고 들어오면 전부 물거품이 돼버리겠지.

뭔가, 뭔가 바프라의 발을 묶어둘 방법이 없을까?

애초에 그놈은 왜 은사모를 전원 살려둔 걸까? 정말로 은사모의 존재를 깨닫고 있는 거라면, 굳이 살려둘 필요 없이 전원 처리해버리면 그만이잖아?

제법 머리도 돌아가는 놈이고, 후환을 남길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 잠깐만. 어쩌면, 혹시 바프라 그놈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닫게 됐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일단 케이로스를 그런 식으로 안심시키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성안으로 잠입을 시도했다.

물론 목적은 바프라를 만나기 위해서.

"야."

아까는 바글바글 들어서 있던 사람들이 물러나고 홀로, 아니. 책상 아래에 있던 여자와 둘이서 남은 바프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응……하응! 흐응! 바, 바프라니임!"

그것도 당당하게 책상 위에 여자를 올려놓고 섹스를 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건데, 쟤도 진짜 어지간히 또라이 같아.

아니. 그보다 쟤 지금 내 말 안 들렸나? 나 지금 은신도 풀었는데?

"야!"

왕좌를 향해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바프라가 허리를 멈추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훗."

"아응! 흐앙!"

저, 저 씹어 먹을 놈이 진짜! 야! 허리 안 멈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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