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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34화 (1,101/1,205)
  • 1134화

    가볍게 뺨을 후려주기 위해 다가가자, 나는 놈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쁜 여자라면 모를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내놈의 얼굴은 그 수가 무척이나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그 사내새끼가 7계층의 주민이라고 하면 더더욱.

    잠깐 머리를 굴려서 놈의 얼굴을 기억과 대조해본 결과, 나는 놈의 정체를 손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네가 여기에 왜 있냐?"

    놈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은 지금.

    "무슨…크윽…헛소리를 하는 거지…!?"

    이 진지남은 저번에 지하로 갔을 때 실비아한테 실컷 두들겨 맞은 다음, 우리가 디에른 가문까지 몸소 질질 끌고 가줬는데?

    어떻게 이놈이 또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디에른 가문에서 풀어주지 않은 이상…잠깐만. 설마. 아니. 하지만.

    "뭐, 됐어. 넌 일단 좀 맞자."

    정확한 사정은 아직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놈이 우리 레이를 괴롭혔던 그 진지남과 똑같은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성자의 손길을 두른 주먹으로 놈을 흠씬 두들겨 패준 다음, 놈들의 몸을 밧줄로 묶어서…아차. 그러고 보니 혹시 이것 때문에 흔적이 진하게 남은 거 아니야? 전에도 이런 식으로 질질 끌고 갔었잖아.

    물론 바프라가 곧장 또 새로운 흔적 추적 부대를 투입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또 흔적을 남겨줄 필요는 없었다.

    쳇. 귀찮아. 그렇다고 해서 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지.

    "뭐, 뭐 하는 거냐!? 그만! 그만 두어푸푸!"

    나는 밧줄을 이용해 놈들의 몸을 일렬로 줄줄이 묶은 후, 한꺼번에 수로 안으로 집어 던졌다.

    이렇게 해서 끌고 가면, 흔적 같은 건 안 남지 않겠어?

    "죽지 말고 잘 버텨라."

    그렇게 해서, 나는 놈들을 데리고 수로를 통해 디에른 가문으로 돌아갔다.

    "구원 님 돌아오셨…그, 그자는…!?"

    그리고 여지없이 날 마중 나와준 요리스는, 내가 끌고 온 진지남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 내가 진지남의 얼굴을 알아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또, 똑같이 생겼군요."

    디에른 가문의 감옥에 갇혀 있는 놈과 내가 지금 막 데려온 놈.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요리스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딱히 아저씨가 배신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성자 스킬로 제압하고 감옥에 처박아 뒀으니까. 만에 하나 디에른 가문이 배신하고 풀어줬다고 하더라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다.

    역시 그냥 닮은…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닮았고, 소속 부대마저 같다. 아마 쌍둥이 같은 거겠지.

    "그나저나 상당히 심각하군."

    "여자…여자아아…."

    감옥에 갇혀서 벌써 며칠째 내 성자의 기운에 중독당해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성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2병은 대체 이걸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버틴 거지? 아니. 물론 중2병도 마차를 습격했을 즈음에는 상당히 맛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하는 수 없지. 모처럼 생포했는데 이대로 버리기엔 아까우니까. 꺼내…."

    "구원. 여기서 뭐해?"

    꺼내서 데려가야겠어.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뒤에서 들려온 예쁜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바로 사라 말이다.

    얘는 또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분명 호수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여기로 왔는데.

    아니. 감각이 좋은 사라니까 내가 돌아온 걸 알 수 있었다 쳐. 하지만 밖에 있는 경비병은 어떻게 뚫고…쫄아서 비켜줬겠구나.

    "넌 진짜…."

    "여자아아아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보다 더 격하게 사라를 반기는 무리에 의해 내 목소리는 또다시 끊기고 말았다.

    "기분 나빠."

    하지만 사라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감옥에서 발광하던 무리가 차례차례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뭐야 이거.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탄지신공? 점혈?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용사라는 직업은 보면 볼수록 무협지에 있어야 어울리는 직업 아니야? 여긴 판타지 세계잖아. 왜 이런 세계관에 저런 사기 직업이 있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아까보다 더 늘어나 버렸지만, 여기서는 나도 용사들의 대장이다. 용사의 힘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뭐, 요리스도 눈이 빠져라 놀라는 중이라 일일이 날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이지만.

    "뭐야 저거?"

    "보다시피 인질이야. 이대로 놔두면 인질로서 가치가 없어질 것 같으니 데려가려고."

    "저쪽으로?"

    "그래. 미약 중독 상태를 풀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흐으응.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라는 별로 흥미 없다는 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전 대화만으로는 상황 파악이 안 될 테니 더 깊게 캐묻고 싶겠지만, 다른 사람의 눈도 있으니까 말이야. 적당히 자제하고 맞춰주는 거겠지.

    "그러니까 사라 넌 다른 애들이랑 같이 조금만 기다려줘. 최대한 빨리 다녀올 테니까."

    "…알겠어."

    사라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는 끄덕여줬다.

    내가 성에서 무사히 돌아온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여기에 찾아온 목적은 달성했을 테니까.

    고마워 사라야. 부족한 설명은 돌아와서 다 제대로 해줄게.

    "그럼 아저씨. 감옥 좀 열어줘. 이제 내가 데려갈 테니까."

    "네? 아, 네."

    뭐, 설명이 부족한 건 이 아저씨도 마찬가지인지 상당히 곤혹스러운 눈치였지만.

    그래도 이제 완전히 나랑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는 건지, 요리스는 군말 없이 감옥 문을 열어줬다.

    이 아저씨도 나중에 또 따로 설명을 해줘야겠군.

    아무튼 그렇게 전에 생포한 놈들과 오늘 생포한 놈들. 두 무리를 전부 밧줄로 엮어서 묶은 후, 나는 다시 한번 호수에 다이빙했다.

    목적지는 물론, 호수 밑바닥에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이다.

    "구원 씨! 이렇게나 빨리…어머? 그분들은?"

    "적이야. 위험하니까 조금 떨어져."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구미호 마을로 돌아가니, 바로 눈앞에 레이아가 서서는 날 마중해 줬다. 아니. 레이아뿐만이 아니다. 디아나도 마틸다도, 그리고 레이첼 누님까지?

    "레이첼도 여기에 왔어?"

    "응. 생각해 보니까 저택보다 여기에서 지내는 게 출퇴근하기에 더 좋은 것 같아서."

    아니. 그야 그렇겠지. 텔레포트 마법진만 타면 순식간이니까.

    하지만 은근히 부끄러워하면서 말하는 걸 보니, 그냥 단순히 출퇴근하기 편하다고 눌러앉은 게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켈베로스까지 데려온 걸 보니, 완전히 여기에 눌러 살 생각이잖아.

    "그다지 문제 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길드에서 필요한 절차는 다 밟게 했네. 거기에 레이첼양도 오랜만에 자네를 만나니 더욱…."

    "디, 디아나님!"

    저게 정답이었군. 디아나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는 레이첼 누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냥 하루 한 번이라도 나랑 대화하고 싶어서 온 거였어.

    그런 이유라면 굳이 감출 필요 없는 것 같은데. 하여간 레이첼 누님도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으시다니까.

    "그런데 당신? 그 사람들은 대체 누군가요? 조금 전에 적이라고 하셨죠?"

    "아, 응. 그게 말인데."

    그래. 당황하는 레이첼 누님의 모습은 무척이나 흐뭇했지만, 지금은 흐뭇해할 때가 아니다.

    오늘 밤도 할 일이 엄청 많으니까, 빨리 끝내야지.

    나는 우선 이놈들의 정체부터 데려온 경위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흠. 사정은 이해했네. 하지만 이곳으로 데려와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감옥에 처박아서 굶어 죽을 때까지 방치해 두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전쟁 포로처럼 죽으면 전쟁신 부활이 앞당겨지는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럴 바에야 그냥 필요한 곳에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거 말인데, 혹시 이 마을에 남자 필요 없어?"

    전에 얼핏 들은 얘기로는, 여자밖에 존재하지 않는 구미호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산 아랫마을에서 남자를 데려온다는 모양이니까.

    게다가 마을 전체를 여신의 마나로 덮은 바람에 구미호들의 성욕은 커져만 가는데, 위로 데려가서 신전 체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서 곤란하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런 구미호 마을에 딱 어울리는 인재들이 이놈들이라는 얘기다.

    적당히 레벨 높고 섹스 좋아하는 놈들이니, 평생 갇혀서 정액 탱크 역할을 하기에 이놈들보다 더 좋은 놈들도 없잖아?

    "그, 그런 의미로…말인가요?"

    "그런 의미로."

    우리 애들이 나보다도 더 구미호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부끄러워하며 되묻는 레이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레이아는 귀를 앞으로 접으며 더욱 부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최근에는 저기…많이 곤란해지기는 했지만요. 로엘 씨에게 상담해 볼까요?"

    "지금 바로 할 수 있을까? 부탁할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엘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니. 그냥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솔직히 말해서 바프라의 정예 부대원들이라는 말을 듣고 겁먹을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구미호들이 핍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건 어디까지나 구미호 쪽이 소수였기 때문이지, 구미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니까.

    오히려 일 대 일이라면 구미호만큼 남자 상대로 강한 종족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단순히 정기를 흡수하는 능력만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강력한 속박 스킬도 가지고 있으니까.

    거기에 저택에서 중2병을 구속해놓은 디아나 특제 구속구까지 투입되니, 내가 데려온 바프라의 직속 부대원들은 아무런 반항도 못 하게 됐다.

    "안녕? 오랜만이지?"

    그렇게 떨거지들은 전부 구미호 마을에 있는 용도 불명의 커다란 집에 가둬둔 다음, 나는 오늘 데려온 진지남 하나만 따로 빼내서 대화를 시도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진지남을 포함한 전원 다 성자 스킬의 영향은 풀어줬다. 이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넌…일전에 배에서 만났던 그놈이로군."

    역시 이 녀석이 배에서 강간마랑 있었던 그 진지남이었군. 어쩐지 아까 성역 선포를 맞고서 아는 척을 하더라니.

    실은 나도 그것 때문에 디에른 가문에서 대충 감옥 확인만 하고서는 재빨리 여기로 데려온 거였다. 이 녀석이 깨어나서 괜한 말을 시작하면 곤란해지니까.

    "그래. 그래도 기억은 하고 있나 보네."

    "그런 능력을 쓰는 놈을 쉽게 잊을 리가 없지. 묘한 능력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구미호였을 줄이야."

    응? 구미호? 얘 지금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야.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구미호는 태생적으로 여자밖에 태어나지 않아요.

    "네 눈에는 내가 여자로 보이냐?"

    "남자로 보이는군. 하지만 구미호는 둔갑술의 대가지."

    …그러고 보니 레이아의 종족 스킬창에도 습득하지 않은 스킬 중에 그런 스킬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곳까지 데려와서 시치미 뗄 생각인가?"

    "하긴. 그럴 필요 없기는 하지.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헛다리를 제대로 짚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착각을 수정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냥 계속 착각하고 있으라지.

    "나 혼자만 따로 빼 왔다는 건,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로군."

    "그래. 그래도 넌 말이 좀 통해서 다행이네. 내 요구는 간단해. 바프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넘겨."

    "나도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그런 어설픈 협박에 내가 주군을 배신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한 건가?"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말하는 진지남이었지만, 얘 아까부터 계속 헛다리만 짚고 있네. 이렇게 계속 헛다리만 짚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협박이라니. 전혀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거래지. 그야 레이한테 한 짓을 생각해 보면 때려죽여도 시원찮기는 하지만, 난 그렇게 폭력적인 놈이 아니거든."

    "거래? 웃기는군. 네년 따위가 내게…."

    "섹스."

    "무, 뭣…?"

    "아닌 척하지 마. 그 바프라 밑에서 일한 놈이 섹스를 싫어할 리 없잖아? 아까 봐서 알겠지만, 구미호라는 종족은 기본적으로 다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미인이거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네가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미인들 사이에서 평생 섹스만 즐기면서 맘 편하게 살다 갈 수 있다는 거지."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언제 어딜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아니. 구미호들은 정기, 그러니까 생명력을 빨아먹잖아? 나 정도 되지 않으면 할 때마다…뭐, 구미호들도 오래 빨아먹으려면 적당히 조절하면서 하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럼 다시 한번 말해 볼래? 주군을 배신 못 한다고 했던가? 참고로 말하자면, 네 동료들은 먼저 즐기는 중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디아나한테 신호를 보내자, 디아나가 마법을 사용해 건물 안의 모습을 잠깐 우리 눈앞에 띄워 줬다.

    그리고 자기 동료들이 각양각색의 구미호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황홀한 경험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본 순간, 지금까지 굳건하던 진지남의 눈동자가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닌 척해 봤자 결국 이 자식도 같은 족속이었군.

    "…바프라에 대해 뭘 말하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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