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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32화 (1,099/1,205)

1132화

응. 실은 당장 오늘 밤만 하더라도, 바프라의 반응을 엿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조금 전에 막 지령을 내려놓고 무슨 오늘 밤부터 반응을 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자 모험가의 친화력과 행동력을 무시하면 안 되지. 아까도 사람들이랑 거의 10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떠들어대는 거 봤잖아?

분명 밤이 되기 전에 어느 정도 소문이 확산되어서, 바프라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거다. 안 그래도 지금 바프라는 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양이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성에 잠입해서 바프라의 반응을 엿볼 생각이었는데, 사라가 따라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면 시작부터 일이 꼬이게 된다.

"사라야. 넌 은신술을 못 쓰잖아."

"구원도 별로 잘하는 거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사라는 아직 내가 그림자 은신 쓰는 걸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지.

그러니까 이렇게 걱정하는 거였군. 내가 여기에선 성자 스킬도 함부로 못 쓴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만약 들켰을 때 힘으로 돌파해 줄 사람이 한 명은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부터 내가 은신을 쓸 테니까, 사라 네가 한 번 날 찾아내 봐. 찾아내면 같이 가는 거고, 못 찾아내면 나 혼자 가는 거야. 어때?"

어차피 가기 전에 한 번 사라로 시험해 볼 생각이었으니, 오히려 잘 됐다.

아무리 여기 사람들 평균 수준이 낮다고 해도, 바프라만큼은 예외다. 레벨도 상당히 높은 데다가, 무엇보다도 배틀마스터라는 특수 직업의 잠재력이 엄청났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레이한테 사도 임명을 했으니까 말이야. 살짝 스탯 창을 열어서 이것저것 확인해 봤거든.

250레벨도 되지 않은 레이만 봐도 잠재력이 엄청난 직업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250레벨은 한참 뛰어넘은 바프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용사에게 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즉, 사라한테 은신이 들키지 않으면 바프라한테도 들키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내가 염탐 가기 전에 사라한테 은신을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흐으응? 그래. 좋아."

아무튼 그런 내 속내를 알 리 없는 사라는, 내가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게 조금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마 의심스러운 마음 이상으로 자신의 감각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진짜지? 말 바꾸기 없기다?"

사라의 마음이 변할세라, 나는 황급히 창문으로 다가가서 커튼을 쳤다.

"잠깐! 이 변태! 이상한 생각하는…어?"

지금 누가 누구한테 변태라는 거야? 이 변태 용사. 너야말로 커튼 좀 친 것 가지고 대낮부터 너무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냐?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위치를 들킬 테니 참자.

그래. 커튼을 닫음과 동시에, 나는 은신을 쓰면서 반대편 벽 쪽으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그리고 사라도 내 모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훗. 아무리 찾아봐라. 내 그림자 은신을 간파할 수 있나. 이대로 움직여도 안 보일걸? 내가 여기에 와서 은신을 얼마나 자주 썼는데. 덕분에 스킬 레벨도 엄청 올라가서 안 그래도 좋았던 스킬이 더 사기가 됐다고.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진짜로 당황한 것 같은 사라의 모습에, 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서 춤까지 춰봤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는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결국.

"이걸로 내가 이긴…끄아아아악!?"

너무 신난 나머지 사라의 뒤로 몰래 다가가 가슴을 덥석 잡으며 귓가에 속삭여준 순간, 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격통이 손등에 엄습해왔다.

"이 변태! 너 여기에 와서 은신술만 연습했지!?"

모, 모함이 너무 심하잖아!

"지금까지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내가 지금까지 7계층에서 얼마나 잠입 활동을 많이 했는지, 은신 실력이 왜 이렇게 향상될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해주자, 사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그렇게 툭 내뱉었다.

그렇군. 아까의 그 말도 그냥 모함이 아니라, 나한테 들었던 얘기를 바탕으로 나온 결론이었다는 얘기인가.

어쩔 수 없군. 엄한 사람을 변태로 몰고 간 벌로 오늘 하루 오빠라고만 부르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런 이유였다면 봐주도록 하지.

"그야 전부 말해주면 걱정할 테니까 적당히 생략하면서 말했지."

"나중에 알게 되면 더 기분 나쁘거든 이 바보야."

"미안해. 앞으로는 조심할게."

그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아 주며 사과해도, 사라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야 그도 그럴만한 것이.

"사라야.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 거 알지?"

이것 때문에 사라는 지금 사기당한 기분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진짜로 사라가 같이 따라가면 일이 제대로 꼬일 테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안 가고 말지.

뭐, 이렇게 내가 양보해주지 않기만 하면, 사라도 사기 당했다면서 생떼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흥."

이렇게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싫다는 말은 안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얘가 은근히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사기든 뭐든 자기 입으로 한 번 뱉은 말은 착실히 지키거든.

"남들 앞에서 키스 어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아야!"

오리처럼 삐죽 내밀고 있는 사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주자, 사라가 내 손가락을 콱하고 깨물어 버렸다.

젠장. 지금까지 단독 행동이 많았다는 걸 알고 나니까 괜히 더 기분이 안 좋아졌잖아. 그냥 변태라는 누명을 쓰더라도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 자, 이거 봐. 사라 너도 진짜 모르겠잖아?"

이렇게 된 이상, 사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내 은신이 얼마나 완벽한지 제대로 인식시켜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사라의 눈앞에서 다시 한번 그림자 은신을 사용했다.

이렇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완벽한 은신술이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까지도 전혀 위험하지 않았고, 오늘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알거든."

"크헉…치, 치사하게."

하지만 우리의 용사님은 내가 사라진 그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내 옆구리를 정확히 노리고 쿡 찔렀다.

"진짜 어디 다치고 오면 가만 안 둘 거야."

"밤에? 잠깐! 타임! 타임!"

다시 은신하면서 옆으로 피했는데 얘는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거야!? 안 보인다면서!? 설마 이제 내 회피 동작도 예상하고 예측샷 날리는 거야!?

"이 바보는 진짜…하아. 나도 은신술이나 배울까."

그만둬. 이것 때문에 그나마 내가 요즘 활약하고 있는데, 내 아이덴티티를 뺏으려고 하지 마. 넌 진짜로 배우면 금방 나보다 더 숙달할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미안해……. 원래라면 내가 따라가야 할 텐데. 저번에 그 일 때문에 아직 자신이 없어서."

한숨 쉬는 사라의 옆에서, 레이가 살짝 풀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 레이 쟤 사라한테 반말하는구나. 아니. 생각해 보면 레이가 더 연상이고, 위에 있을 때 둘이 계속 붙어 있었으니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레이가 사라보다 연상이라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질까.

아무튼 그런 것보다, 레이 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저번에 그 일이라는 건 아마 지하 감옥에 갔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감정 공유로 나까지 말려들게 하면서 기절하는 바람에 민폐를 끼친 일 말이다.

마음의 상처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낫는 일도 아니고, 한 번 저지른 적이 있으니 더 조심스러워지겠지. 이해한다.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아니. 딱히 그 문제 아니더라도 넌 안 데려갈 거거든?"

쟤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원래라면 자기가 무조건 따라갈 것처럼 말하는 거야?

"뭐어!?"

"왜 그렇게 놀라? 뭐 문제 있어?"

"나도 은신할 줄 아는데!?"

아니. 그야 그렇겠지. 너랑 나랑 처음 만난 곳이 그런 곳이었으니까. 물론 방안에 은신해 있는 경비병들의 기척을 못 느끼고 당당히 행동하는 바람에 들키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잠입한 것만으로도 이미 최소한의 은신술은 할 줄 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래 봤자 코스프레 수준이잖아."

"또, 또 코스프레라고…! 코스프레 아니었거든!?"

이 암살자 코스프레녀가 또 했던 말을 또 하게 하네.

너 전에 그거 코스프레 맞아 이것아. 대체 어떤 암살자가 그렇게 노출 심한 옷을 입고 돌아다녀? 특히 너 같은 애가 그런 옷 입고 있으면 눈에 엄청 띄거든?

하지만 이렇게 말해 줘 봤자 저 녀석은 인정을 안 하겠지. 그렇다면.

"그럼 한번 여기에서 은신해 봐."

"지, 지금?"

그럼 지금 아니면 언제 하려고?

그런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레이가 두고 보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그리고는 벽에 있는 가구 그늘로 쪼르르 달려가더니…오오. 솔직히 말해서 웅크릴 때까지는 그냥 웃기기만 했는데, 저러니까 진짜 안 보이기는 하네.

뭐, 그래 봤자 나한테만 안 보이는 거겠지만.

"사라야."

"레이. 다 보여요. 그만 나와요."

내가 눈짓을 하자, 사라가 한숨 듬뿍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 줬다.

역시 용사님의 눈은 피할 수 없었던 건가.

"치사해! 그쪽은 용사니까…!"

하지만 이렇게 자기 은신술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도 레이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야 용사가 치사한 직업이라는 건 나도 백번 공감하지만, 포기하라고. 너 진짜 어설프다니까. 그냥 은신술만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방심하다가 들켰던 그 마음가짐 자체가.

진짜 이런 애가 어떻게 바프라의 눈을 피해서 몇 년이나 숨어지냈는지 몰라. 이건 그냥 내 짐작인데, 분명 헬레나가 엄청 고생했을 거야.

아무튼 오기를 부리는 레이였지만, 그런 레이의 오기를 단번에 꺾어 버리는 이가 있었다.

"저한테도 보였습니다."

우리 기사님 말이다.

누구한테나 귀여움 받을 정도로 성격 좋은 실비아지만, 레이한테만큼은 은근히 쌀쌀맞다니까. 뭐, 레이랑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쌀쌀맞은 정도로 끝나서 다행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거, 거짓말!?"

"정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구원 님에게도 보였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실비아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 아니. 실비아야. 실은 그게 말이지. 아무래도 난 마나가 없는 세계에서 온 만큼, 너희처럼 마나 감지라든가 그런 게 말이지.

"그, 그래! 당연히 나한테도 보였지! 레이. 너 진짜 어설프다."

"구원. 레이 지금 그쪽에 없어."

어, 어라!? 방금 목소리는 저쪽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이쪽이거든 바보."

드, 득의양양한 표정 짓기는. 내 눈을 속인 것 정도는 전혀 자랑할 게 못 된다는 건 아냐?

…내 입으로 말하고도 조금 슬퍼지는 사실이지만.

"하아. 정말 미안해. 내 힘이 꼭 필요했을 텐데. 하필…미안해?"

아무튼 내 눈을 속인 것으로, 레이는 ‘내 은신술은 완벽하지만 바프라와 접촉하면 트라우마가 어떻게 발동할지 알 수 없으니 따라가지 못하게 됐다.’라고 혼자 멋대로 결론 내린 모양이었다.

반박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이쯤 되니 슬슬 의미 없는 소모전처럼 느껴졌다.

그래. 여기에서 레벨도 제일 낮은 애가 그래도 자기 실력에 자신 있는 모습이 귀엽잖아. 내가 좀 져주면 어때.

"괜찮아.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나아지겠지. 전에는 바프라 이름만 나와도 벌벌 떨었는데, 이제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앞으로도 같이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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