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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28화 (1,095/1,205)
  • 1128화

    감탄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아직 감탄하기에는 일렀다.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만큼 미흡한 점도 많았으니까.

    혼자 고개를 끄덕이던 요리스도 이내 그 점을 깨달은 건지, 내 얼굴을 엿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구원님. 그 사람들을 어떻게 이끄실 생각이십니까? 그냥 들고 일어난다면 분명…."

    내가 바프라의 성격을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대학살이 일어나겠지. 들고일어난 모든 사람을 여신의 힘에 매혹된 이교도로 몰고 가며 쓸어 버릴 거다.

    게다가 진짜로 여신의 마나에 중독된 사람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이니만큼, 바프라의 대학살에는 대의명분이 확실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여기 디에른 가문까지 그 불똥이 튈지도 모를 일이지. 여신의 마나는 대대적으로 디에른 가문이 관리했으니, 관리 소홀을 핑계로 대면서 본보기로 처리할지도.

    하지만 나도 그런 걸 생각 못 하고 꺼낸 말이 아니다. 내가 괜히 그런 귀찮은 밑 작업을 해놨겠어?

    "그러니까 이 일은 타이밍이 중요해. 바프라가 사람들을 이교도로 몰기 전에, 바프라 자신이 그년의 힘에 취한 이단자라는 걸 밝힐 필요가 있어. 아저씨는 성에도 자주 불려 다니잖아? 성에서 뭐 이상한 소문 들은 거 없어?"

    "…그러고 보니, 지금은 쓰지 않아 폐쇄된 지하 감옥에서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이 며칠 사이에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묘한 일이라니?"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하로 간 사람이 몇 명 보이지 않게 됐다든가, 간수들이 최근 들어 살기 등등해졌다든가 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뿐인지라…. 그마저도 바프라 본인이 직접 나서서 소문이 퍼지는 걸 통제하고 있어 정확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혹시 중요한 이야기였습니까?"

    "그래. 엄청 중요한 얘기지."

    생각했던 것보다 통제를 더 잘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독이 됐다.

    "분명 바프라는 최근까지 얼굴 본 사람도 없을 정도로 자기 방에만 처박혀 있었지?"

    "네. 그렇기 때문에 지하 감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나 그렇게 된 거군.

    여기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다. 지금까지 코빼기도 안 비치던 놈이 갑자기 직접 나서서 언론 통제를 시도하면, 그 소문이 마냥 뜬소문이 아니라고 대놓고 광고해주는 격이잖아?

    여신의 마나에 뇌가 절어서 그 정도 판단도 못 하게 된 건가? 아니면….

    "바프라가 갑자기 다시 활동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별말 없었고?"

    "있었습니다. 폐관 수련에서 성과를 얻었으니 더는 웅크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했습니다."

    역시 일단 변명 정도는 생각해놓고 있었군.

    하지만 폐관 수련이라니. 섹스나 해대고 있었던 주제에 거창하기는. 우리처럼 섹스로 레벨이라도 올릴 수 있다면 또 모를까.

    "내가 하나 맞춰볼까? 걔 그렇게 말해놓고 요즘도 거의 방에 틀어박혀서 지내지?"

    "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요리스도 딱히 놀란 기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아저씨도 바프라가 섹스에 미쳐 있다는 얘기는 나한테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그래놓고 폐관 수련이라니. 푸흡. 아저씨도 걔 말을 믿은 거 아니지?"

    "물론입니다. 하지만, 바프라가 내뿜는 기세가 이전보다 강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믿는 사람도 있는 눈치였습니다."

    …응? 이전보다 강해졌다고? 그건 조금 예상외인데.

    내 예상이 정확하다면, 바프라는 틀어박힌 동안 줄곧 섹스만 해댔을 거다. 그런 놈이 어떻게 강해졌다는 거야? 진짜로 우리처럼…아니. 잠깐만. 혹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짜로?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섣불리 단정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어찌 됐든 상관없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지금 떠오른 생각을 머릿속 한구석에 기억만 해두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전에도 말했지만 바프라가 틀어박혀 있던 건 섹스에 빠져서야. 그리고 바프라가 요즘 다시 얼굴을 보이게 된 건, 섹스를 전처럼 못하게 됐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혹시 성의 지하에서…!?"

    "그런 거지. 아무래도 딱 타이밍 맞게 돌아온 것 같군. 슬슬 움직여야겠어. 가자."

    저쪽으로 가기 전에 예상했던 것처럼 지하에서 몬스터를 봤다는 소문이 확실히 퍼진 건 아니지만, 지하에 뭔가가 있다는 소문이 퍼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애매모호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더 이용하기 쉬워진 느낌마저 있었다.

    요리스와 대화를 마치고 방에서 빠져나온 나는 곧장 마을로…가기 전에, 우선 실비아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일단 내가 돌아왔다는 건 알려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방에 도착해도, 실비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시중에게 물어보니 아무래도 훈련장에 가 있는 모양.

    안내를 받아서 훈련장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그런 것도 못 하는 겁니까?"

    "하, 할 수 이씁돠아아아!"

    엄청 무덤덤한 목소리로 디에른 가문의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실비아가 있었다.

    아마 실비아는 평소처럼 멍한 무표정과 덤덤 말투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겠지만, ‘그런 것도 못하면서 왜 사는 겁니까? 세상 살기 부끄럽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말투였다.

    게다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훈련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각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는 게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였다.

    어쩐지 요리스를 포함해서 여기 사람들이 묘하게 고분고분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비아가 본의 아니게 엄청 굴리고 있었구나.

    하는 수 없지. 이 성자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기로 할까.

    "실비아."

    움찔. 내 목소리가 들린 순간 몸을 크게 한번 떨고 나서, 실비아는 천천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만화 연출을 보는 것처럼 표정이 매 순간 변하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완전히 돌린 순간, 그 멍한 무표정은 예쁜 미소가 만개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구, 구원님! 오셨습니까!? 에? 사라님도?"

    "오랜만이에요. 실비아. 잘 지냈죠? 오늘부터는 나도 함께하게 됐어요."

    "오랜만입니다! 그렇습니까! 든든합니다!"

    사랑의 라이벌이 자기만 독점하던 시간에 끼어들겠다고 선언한 거다.

    조금쯤은 아쉽다는 내색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실비아는 한순간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그렇게 대답했다.

    저러니까 우리 애들이 다들 실비아는 경계도 하지 않고 귀여워하는 거겠지.

    "구원님! 하러 가신 일은 다 잘 되신 겁니까?"

    사라와 인사를 마친 실비아는,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는 쭉 같이 붙어 다녔으니, 며칠 동안 내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평소처럼 바들바들 떨지도 않고, 실비아는 마냥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래서겠지. 자기가 말실수한 것도 눈치 못 챈 건.

    그렇잖아? 내가 저쪽에 뭘 하러 갔었는지 생각해 보면, 이런 데서 꺼낼 말은 아니니까.

    내가 옆에 있던 레이에게 힐끔 다시 시선을 주자, 레이는 홱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고개를 돌려서 시선을 피했다.

    그래. 잘 되기는 잘 됐지. 엄청 기분 좋게 잘 말이야.

    하지만 그걸 다 얘기하려면 하렘 플레이부터, 아니. 그전에 같이 목욕탕을 가게 된 계기. 사도 인장에 대한 내 마음을 털어놓은 것부터 얘기해야 하니까, 엄청나게 얘기가 길어질 거다.

    "나도 엄청 얘기해주고 싶은데, 실비아 지금 바쁘지 않아?"

    "네? 아, 저거 말입니까? 괜찮습니다!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린 후, 실비아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엄청나게 귀여운 모습이기는 했지만, 실비아야. 정말로 그걸로 괜찮은 거니? 훈련받던 사람들 엄청 상처받은 표정 짓고 있는데.

    "오늘 훈련은 끝입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각자 훈련하십시오!"

    게다가 실비아가 웃는 얼굴로 추가타까지 가하자, 훈련생 중에는 쓰러지는 사람마저 나왔다.

    …훈련이 힘들어서 겨우 버티고 있다가 끝났다는 소리 듣고 쓰러진 거겠지? 다른 뜻은 없는 거겠지? 아무리 실비아가 예뻐도 그렇지, 실비아는 지금 남장 중이라고 새끼들아. 알고 있는 거지?

    "우리 실비아가 그렇게까지 얘기를 듣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자 갈까. 저기 가서 차분히 얘기를…."

    "그, 그만둬!"

    내가 실비아의 등을 떠밀며 방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자, 레이가 내 팔에 달라붙어서는 새빨개진 얼굴을 도리도리 저어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드디어 실비아도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왜 그러…으아앗!? 아, 아으…제, 제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

    실비아 테라피. 돌아왔구나. 반갑다.

    고개를 바들바들 떠는 것처럼 저으며 부정하는 실비아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야. 여기서 혼자 쓸쓸하게 기다려주고 있던 실비아도 자세히 들을 자격이 있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 알려줄게. 그젯밤에 하렘 플레이를 했거든? 처음 맛보는 쾌감에 마틸다와 레이아에 이어서 디아나와 사라, 바넷사랑 레이첼까지 무너뜨리고도 진정이 안 되더라고. 그때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레이가…사, 사라 씨? 옆구리에 닿은 이 손은 대체 뭔가요?"

    "응? 왜 그래? 모르는 사람처럼. 구원이 좋아하는 그거 있잖아. 손으로 잡고 비틀면서 위아래로 흔들면 자기도 모르게 몸이 바들바들 떨리면서 감정이 격해지는 그거."

    사라야. 너 지금 자기 딴에는 야한 말투라고 하고 있을 셈인지 모르겠는데, 하나도 안 야하고 그냥 무섭거든? 알았으니까 옆구리에서 손 좀 떼고 얘기하자.

    우리끼리 있을 때면 모르겠는데, 여기에서는 내 위엄이 무너지지 않는 게 엄청 중요하단 말이야.

    "나도 알거든 바보야. 그것만 아니었으면 벌써 꼬집었어. 그러니까 구원도 자중해."

    이, 이 녀석. 그렇게 스크류 핸드잡을 연상시키는 말투를 해댄 주제에, 지금 대놓고 꼬집는다고 한 거야?

    아무튼 사라의 말도 지당했다. 아직은 남들 앞에서 섹스 관련 얘기를 대놓고 할 때가 아니지.

    물론 방에 들어와 우리끼리만 됐다고 해도, 곧장 또 그런 장난을 치며 허비할 시간은 없었지만.

    "미안 실비아. 며칠 동안 쌓인 얘기가 많지만, 그전에 우선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아까 말한 그거?"

    무슨 말인지 곧장 눈치채고 물어보는 사라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 사람들이 여신님의 마나에 영향받기 전에 소문이 퍼져야 하니, 마을에 가 있는 둘에게도 신호를 보내야지."

    둘에게는 성에서 몬스터를 봤다는 소문이 밖으로 흘러나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라고 일러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성 밖으로 소문이 새어나가기는커녕 성안에서조차 몬스터를 봤다는 말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게 지금 상황이다. 둘 다 제대로 된 활동은 하지 않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 계속해서 사람들과 친해지며 때만 노리고 있겠지.

    그러니 내가 직접 가서 슬슬 활동을 시작하라고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잠깐 얘기만 하고 올 거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너희끼리 얘기하면서 조금만 기다려줘."

    "나한테 맡겨둬."

    든든하게 말하는 사라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후, 나는 혼자 방을 빠져나와 그대로 근처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갔다.

    아직 해가 쨍쨍한 아침이지만, 내 능력은 딱히 밤에만 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장거리 이동이라면 모를까, 산 아래에 있는 도시 정도는 직접 그림자를 눈으로 보고 이동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전에 두 변태와 헤어진 곳의 기억을 되새기며, 나는 신중하게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내 기억은 정확했는지, 그림자 이동으로 이동한 곳은 정확히 두 변태와 헤어진 술집 앞이었다.

    그림자 이동을 쓰면서 은신까지 쓴 덕분에 아무도 갑자기 나타낸 내 존재는 눈치 못 챈 모양.

    일단 골목으로 들어가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신을 풀고, 약자 태세로 외모에 디버프까지 준 다음 나는 당당하게 거리로 나왔다.

    그렇게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흡족해하면서 곧장 앞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지만, 아쉽게도 거기에 두 변태의 모습은 없었다.

    역시 한 자리에서 계속 머물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는 건가. 하는 수 없지. 조금 돌아다니면서 찾아볼까.

    한 세력의 수도인 만큼 엄청 넓은 도시였지만, 어차피 둘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을 테니 찾기 어렵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을 증명하듯,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둘 중 한 명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거기서 내가 말했지! 그렇게 작은 아이에게 손을 대려 하다니! 파렴치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아직 무르익지 않은 어린아이는 그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것이 어른 된 자의 도리라는 거다!"

    …저놈 말이 더 파렴치하게 들리는 건, 내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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