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23화 (1,090/1,205)
  • 1123화

    훗. 해냈다. 난 해내고야 말았어.

    아니.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지. 여기까지 오는 데 큰 도움을 준 앨리시아에게 이 공을 돌립니다. 아까 눈치 없다고 욕해서 미안하다. 이게 이렇게 되네. 고맙다!

    아무튼 그렇게 무사히 자기 맡은 역할에 몰두할 수 있게 된 우리는, 산 정상에 있는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국경지대의 위치를 확인했다.

    물론 내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이곳이 모든 곳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지형이라고 해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는 한계가 있으니까.

    때문에 눈이 비상식적으로 좋은 사라 혼자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확인해야만 했고, 이곳 구미호 산의 바깥으로 나간 적 없는 사라로서는 바프라와 플리투스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 또한 일이었다.

    우선 전쟁을 활발히 일어나는 곳 위주로 선을 그으며 세 세력의 영토를 구분하고, 그중에서 플리투스와 바프라의 국경지대를 정확히 짚어낸다.

    사라 혼자서 하기에는 고된 작업이었지만, 다행히도 날이 저물기 전에 사라는 모든 작업을 해냈다.

    물론 국경지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냈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었지만.

    "저기 일렬로 밝게 빛나는 곳 보이지?"

    드디어 어둠이 드리워진 시간이 찾아왔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사라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확실히 그곳에서는 사라의 말처럼 불빛이 일렬로 길게 일렁이는 곳이 보였다.

    불빛이 저런 식으로 늘어져 있다는 건, 저기가 성벽 같은 건가? 저렇게 눈에 띌 줄 알았으면, 그냥 낮부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밤에 찾았어도 됐겠네.

    "지금 싸우고 있어. 저기로는 절대 가지 마."

    성벽이 아니라 전선이었어!? 맨날 전쟁한다고 말로는 들었지만, 설마 이 시간까지 저러고 있을 줄이야.

    "저 선에서 조금 왼쪽으로 가면 저기에 성벽…안 보이지?"

    "응."

    그냥 불빛 말고는 다 검은 도화지로밖에 안 보여.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소매를 꽉 잡았다.

    "오늘은 조금 위험해 보이는데…그냥 내일 가면 안 돼?"

    낮에 그렇게 한기를 풀풀 내뿜던 애랑 동일인물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애틋한 표정. 이래서 내가 사라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어차피 내일이 돼도 전쟁은 똑같이 하고 있을 거야. 차라리 하루라도 더 빨리 가는 게 낮지. 그리고 내 은신이 얼마나 완벽한지 알잖아? 내가 걸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러니까 사라야. 응?"

    하지만 아무리 사라가 귀여워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자, 사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눈에 힘을 주고 다시 저편을 자세히 관찰했다. 조금이라도 날 안전한 곳으로 보내주기 위해서.

    "그러면 저기에…안 보인다고 했지. 차라리 내가 화살로 쏴줄까? 마나 잔뜩 넣어서 쏘면 구원 눈에도 빛나는 게 보이겠지?"

    "…저기까지요? 그게 가능해요?"

    "힘주면 될 것 같은데."

    아니. 나도 정확히 거리 가늠이 되는 건 아니지만, 힘준다고 될 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을 하시네요.

    "아니. 그만둬. 괜히 쟤들이 적은 새로운 방식의 공습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해지니까."

    나 하나라면 그림자 은신으로 숨을 자신이 있었지만, 텔레포트 마법진도 설치해야 하고 아라크네 클랜과 쓰레온도 건너가야 한다.

    너무 요란스럽게 하는 건 좋지 않을…아니. 사라가 쏘는 화살은 용사의 힘이 담겨 있다. 그것도 리리안 플리투스의 직계로서의 힘이.

    물론 저기에 있는 놈들이 그런 세세한 차이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등장 방법으로는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사라야. 혹시 일직선으로 쏘지 말고, 곡사로 여러 발 쏠 수도 있어?"

    "곡사?"

    "응. 가능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느낌으로."

    "으응…아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 수 있구나. 솔직히 별 기대 안 하고 물어본 거였는데.

    "그래? 그럼 말이야. 전선에서 조금 떨어진 안전한 곳 중에서도 제일 찾아오기 힘든 곳에 9발 쏴줄 수 있을까? 산꼭대기같이 당장 찾아오기 힘든 곳에."

    그 주변에 산이 있는지 없는지는 안 보여서 모르겠지만.

    "좋아. 그럼 떨어지는 거 잘 봐."

    다행히도 내 말과 부합하는 장소가 있었는지, 사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활을 꺼내서 있는 힘껏 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그 활에서 화살 형태의 기파가 생겨나며 천천히 빛을 모으기 시작했다.

    "흐윽…으응…."

    사라도 이 정도 힘을 방출해 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겠지.

    섹시한 신음과 함께 계속해서 힘을 모으니, 어느샌가 화살이 제대로 눈뜨고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드디어 활시위를 놓자, 머리 위를 향해 일자로 쏘아져 나간 화살이 환하게 빛나며 온 세상을 밝게 비추었다.

    아니.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세상이 낮으로 변한 것처럼 밝아졌다. 마치 태양이 생겨난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 용사라는 직업은 진짜 사기야.

    게다가 사라는 쓰레온보다도 레벨이 훨씬 높고, 심지어 그 리리안 플리투스의 손녀이기까지 하다.

    아니. 나도 리리안 플리투스를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이 했다는 위업만 들어봐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짐작이 되잖아?

    이렇게 무식하게 강한 용사 중에서도 차원이 다른 강함. 그러니까 다른 용사들을 중심으로 뭉친 세력을 전부 규합하고 전쟁신의 세계에서 세계 통일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업적을 이뤄낸 거겠지.

    그런 사람의 손녀딸인 만큼, 사라도 용사 중에서도 특히 더 강한 걸까?

    "하아…하아…."

    물론 사라도 저거 한 방에 온 힘을 다 쓴 건지, 탈진한 것처럼 내게 기대서는 거친 숨만 몰아쉬었지만.

    "사라야. 이렇게까지 무리할 필요는…."

    "떨어지는 거 잘 봐. 놓치지 말고."

    사라의 말에 따라 다시 화살로 시선을 돌리니, 끝없이 올라가며 태양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이던 화살도 한계는 있다는 듯 마침 천천히 속도가 줄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서 잠시 멈춘 것처럼 보인 화살은, 방향을 바꿔 이번에는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끝이 향하는 곳은 물론 아까 봤던 전선의 근처.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속도가 붙으며 기세를 더해간 화살은,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한 순간 갑자기 아홉 갈래로 갈라지더니 땅에 엄청난 기세로 내리꽂혔다.

    물론 내 눈에는 이제 그냥 작은 빛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엄청난 기세로 내리꽂혔다는 건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럼 이제 그 추측을 눈으로 확인하러 가보실까.

    "그럼 사라야. 잠깐만 다녀올게."

    내게 기대고 있는 사라의 몸을 나무에 기대게 해주고, 나는 사라의 화살이 꽂힌 그 자리에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우읍…."

    몸에 쭉 힘이 빠지면서 몰려오는 가벼운 구토감은, 역시 바프라의 수도에서 오갈 때보다 이동 거리가 길기 때문일까? 어젯밤에 광란의 밤을 보내면서 레벨이 꽤나 올랐는데도 이렇게나 마나가 아슬아슬하다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기운이 쭉 빠졌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황급히 개량된 텔레포트 마법진을 꺼내서 자리에 설치했다.

    땅이 울퉁불퉁해서 상당히 설치하기 불편했지만…잠깐만. 나무가 쓰러진 거잖아? 이거 혹시 사라가 쏜 화살 때문에 지형이 바뀐 거야?

    일단 대충 치워서 공간을 확보한 후 텔레포트 마법진부터 설치한 다음 주변을 둘러보니, 역시나 내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대략 100평 정도의 땅만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 주위는 빽빽하게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서, 여기가 내가 말한 대로 전선 근처의 산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잠깐 든 생각인데 말이야. 그냥 구미호산 꼭대기에서 사라가 각 세력의 수도를 향해 화살만 날려대면 플리투스도 바프라도 비스도 와해시킬 수 있는 거 아니야?

    전에 봤던 바프라의 레벨로 짐작해 봤을 때, 이런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잖아?

    아니. 물론 머리를 쳐봤자 삼삼오오 갈라져서 또 리리안 플리투스가 통일하기 이전의 춘추전국시대 같은 상황이 펼쳐질 테니, 그냥 거대 세력 3개가 힘 싸움하고 있는 이 상황이 우리한테도 더 이상적이지만.

    아무튼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텔레포트 마법진 발동에 필요한 마나가 전부 변환될 때까지도 누가 다가오는 기척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에 억지로 힘을 줘서 기어가듯이 텔레포트 마법진 위로 올라탄 다음, 마법진을 작동해 구미호 마을로 건너갔다.

    "잘 된 모양이군. 고생했어. 성자님."

    구미호 마을에서는 역시나 전원이 텔레포트 마법진 주변에 서서 내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리엘이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내 몸을 안아 들어 디아나에게 건네주자, 디아나가 곧장 마나 공유를 시작해 줬다.

    "그럼. 다음 일은 내게 맡기고 성자님은 푹 쉬어."

    미리엘은 그런 날 내려다보며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주저 없이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가려고 했다.

    "잠깐 기다려 봐. 마지막 확인을…."

    "알고 있어. 건너간 후에 마나 변환기의 작동을 멈추고 주변 마나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텔레포트 마법진은 분해해서 들고 다닌다. 맞지?"

    내 말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미리엘이었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얘기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너희가 가면 이미…."

    "아아. 응. 꽤나 성대하게 환영해주겠지.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해 버리면 말이야. 하핫. 성자님이 생각한 거지? 괜찮은 애드리브였어."

    젠장. 역시 여기에서도 느껴진 건가. 하긴 세상을 비춘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힘이었다. 미리엘 정도 되는 녀석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겠지.

    나와 사라가 있던 산꼭대기와 이곳은 제법 거리가 있으니까 방심하고 말았어. 설마 사라가 내뿜는 힘이 그렇게나 강렬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곳으로 화살까지 쏘라는 얘기는 안 했을 텐데. 아니. 한 번 내려와서 디아나랑 상담이라도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이제 미리엘도 사라가 용사라는 사실을 알아 버린 거다.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하필 이런 최악의 타이밍에 미리엘한테 이런 중요한 사실을 들켜 버리다니.

    그렇게 어지러운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고 있었지만, 미리엘은 의외로 그에 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럼 성자님. 다녀올게. 기대하고 있어. 성자님이 바프라를 장악하기 전까지, 나도 반드시 플리투스를 수중에 넣을게."

    그저 그렇게 맹세하듯 말한 후, 미리엘은 사람들을 이끌고 텔레포트 마법진의 저편으로 사라지려고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아무리 쟤가 이제 용사의 힘을 포기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반응이 없다고?

    "잠깐만! 야!"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 이 자리에 없는 언니한테도 대신 인사 부탁해."

    "뭐? 야!"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쟤 지금 언니라고 한 거 맞지!?

    아니. 사실 잘 생각해 보면, 사라가 용사라는 사실이 밝혀진 시점에서 이미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위쪽 세계에서 용사란 쓰레온의 플리투스 가문과,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사우론 아우덴 뿐이니까. 그리고 사라의 외모는 누가 봐도 마신의 저주를 받은 플리투스 가문의 그 핏줄이 아니다. 그러면 갑자기 등장한 용사 사라의 정체는 무엇일까?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쉽게 나오는 대답이었다. 사라 역시도 사우론 아우덴의 숨겨진 자식이라고 말이다.

    미리엘이 그 정도 생각도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사라를 자신의 언니라고 생각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사실을 조금 전에 깨달은 사람치고는 반응이 너무 덤덤하잖아?

    "디아나? 혹시…."

    내가 저쪽으로 건너가서 기다리는 동안, 디아나가 대신 뭔가 변명을 해준 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디아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 몸이 아닐세. 다만 밖에서 사라 양의 힘이 느껴졌을 때, 미리엘 양이 이렇게 말하더구먼. ‘하핫. 역시 성자님은 인복이 있군.’이라고 말일세."

    "네. 그렇게 말하는 미리엘 씨의 모습은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디아나에 뒤이어서, 내가 아까 했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레이아와 마틸다가 해줬다.

    그래. 미리엘의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설마 예전에 같이 던전에 갔을 때? 아니. 하지만 그때 사라가 보여준 힘만으로 용사라고 짐작하기에는 너무….

    "다시 가서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어."

    "늦었네. 이미 저쪽에서 텔레포트 마법진의 작동을 멈췄네."

    뒤늦게 미리엘을 뒤따라가 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디아나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어쩌면 이 일은 이 몸들이 참견할 일이 아닐지도 모르네. 가족에는 다들 저마다의 형태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사라양이 미리엘 양에게 사실을 밝히려 하지 않은 것처럼, 미리엘 양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네."

    "하지만 방금 언니라고…."

    "대놓고 용사의 힘을 보여줬으니까요.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요?"

    그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당신. 이런 경우는 당사자들의 마음이 가장 중요해요. 우선은 사라 씨와 미리엘 씨에게 맡기기로 하죠."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게 제일 좋다고 생각은 해. 사라가 내 여자라고 해서 사라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간섭하거나 억압하려고 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다만 저 아우덴 가문은 용사라는 머리 아픈 문제가 얽혀 있어서 그렇지.

    진짜 미리엘이 자기 말대로 용사라는 힘을 완전히 포기한 거라면 별문제 없는 일이겠지만….

    그럼 미리엘이 가져간 통신 반지를 통해서라도…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만약 미리엘이 이미 플리투스에서 보낸 사람들과 조우했다면, 반지를 발동시키는 건 작전을 망치는 최악의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반지를 통한 연락은 어디까지나 저쪽에서 이쪽으로 하는 것이 기본. 내가 바프라에 있을 때도 지켜왔던 룰을 함부로 깰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날 당장 미리엘의 속내를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대신이라는 건 아니지만, 다른 인물의 속내는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사라 말이다.

    "…무슨 일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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