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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122화 (1,089/1,205)

1122화

"너 진짜 나한테 관심있냐?"

"아, 아니야! 그냥 남자가 신기한 거야!"

계속해서 쫄래쫄래 따라오는 리사를 떼어내기 위해 밑밥을 던져봤지만, 리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따라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아니라고 부정만 했으면 떼어내기 쉬웠을 텐데, 남자 핑계 대면서 관심 있다는 건 부정 안 하네. 귀찮은 녀석.

"그런 것치고는 시선이 계속 내 얼굴에 고정되어 있잖아. 솔직히 말해라."

"리, 리사야…?"

나는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한 번 더 물고 늘어졌다. 거기에 레이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까지 가세하니, 리사도 슬슬 조급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자, 자의식과잉 아니야!? 여기에 남자가 너밖에 없으니까 너만 보지!"

자기는 정당하다는 듯이 그렇게 외쳤지만, 그 외침은 부산스럽던 우리 일행을 순식간에 침묵하게 만들었다. 뒤따라오면서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받던 아라크네 간부들까지도.

"왜,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리사도 자기가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그리고 그런 리사의 의문에 대답해 준 건.

"크헉."

저쪽에서 들려오는 쓰레온의 각혈 소리였다.

불쌍한 녀석. 아무리 헬레나가 있다지만, 저놈도 남자는 남자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미인밖에 없는 동네에 왔다고 내심 들떠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불의의 일격을 맞다니.

게다가 잔인하게도, 리사는 그런 쓰레온을 발견하고는 확인사살까지 시도했다.

"다, 다른 남자!? 왜 있어!?"

"쿨럭…."

쟤 실은 전쟁신이 보낸 자객 같은 거 아니야? 작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 용사부터 한 명 죽이려고 드네.

이 이상 놔두면 위험하다. 빨리 쫓아내지 않으면.

"아까부터 쭉 있었어. 내 얼굴에 정신 팔려서 못 본 거겠지."

"아, 아니라고 했잖아! 바보 남자! 자의식과잉! 지골로!"

"지골…!"

다행히 내 의도대로 리사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가 버렸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 망할 꼬맹이가 남긴 피해는 막대했다.

아니. 나는 괜찮아. 응. 전혀 신경 안 써. 왜냐하면 지골로라는 건 그거잖아? 내가 여자 등쳐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언변이 좋고 잘생겼다는 뜻이잖아? 다만 내가 아니라 쓰레온이 문제라는 거지.

그 망할 꼬맹이는 나중에 보면 꼭 한번 괴롭혀주자.

"푸흡. 들었는가. 지골로라고 하네."

그리고 우리 쪽 꼬맹이도 나중에 꼭 괴롭혀주자.

디아나 쟤는 지난밤에 그런 일까지 당했으면서 겁도 없네. 뭐, 그런 플레이로 기죽지 않고 저렇게 웃는 게 귀여워서 보기 좋기는 하지만.

"야. 괜찮냐? 나도 설마 저 발랑 까진 게 널 의식조차 안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아무리 쓰레온이지만 이번만큼은 너무 불쌍했다.

최근에는 계속 붙어 다니면서 마음을 달래주던 헬레나까지 없으니 더 데미지를 입기도 했을 거고, 리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계기가 내 도발이다 보니, 나는 쓰레온의 등을 토닥이면서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이번엔 딱히 네 문제가 아니잖아? 그냥…뭐라고 하면 좋을까."

"…이제 그만 됐어."

내가 너무 잘생겨서 가려졌을 뿐이야. 라고 사실을 말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서 말을 고르고 있자니, 쓰레온이 고개를 흔들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것도 엄청나게 의욕이 활활 불타는 눈으로.

"이런 굴욕도 전부, 마신만 없애면, 이 핏줄에 흐르는 저주의 주박만 끊어내면 모든 것이 해결돼. 해주겠어. 이 손으로 반드시 해내고야 말겠어!"

오오! 얘 지금 뭔가 엄청 용사 같은 말을 했어! 지나가던 마을 꼬맹이 A한테 무시당하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게다가 저주가 풀린다고 해서 지금까지 안 올라간 매력 수치가 보답 받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냥 앞으로는 매력 스탯도 올릴 수 있게 될 뿐이겠지만!

뭐, 헬레나와의 행복한 미래에 더해 또 하나 동기부여가 생긴 건 좋은 일이다. 나는 괜히 걸고넘어지지 말고 조용히 박수나 쳐주기로 했다.

아무튼 그렇게 망할 꼬맹이를 떨쳐낸 우리는, 드디어 목적지인 외딴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이 어디로 연결되는지와 같은 간단한 정보를 설명 후, 우리는 마지막으로 출발 전 점검을 시작했다.

"그런데 성자님. 성자님이 먼저 국경 지대까지 가서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고, 그걸 통해 우리가 건너간다는 계획은 알겠어. 하지만 성자님은 어떻게 국경 지대로 가는 거지? 지금 이렇게 우리를 전부 데리고 왔다는 건, 당장 가능한 거야?"

미리엘의 의문은 지당했다.

뭐, 당장 이동이 가능해서 전부 데려온 게 아니라, 그냥 사라가 무서워서 빨리 뭐라도 하려고 데려온 거였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동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 가기 전에 위치 확인이 필요해서 빨리 온 거야. 너희는 그때까지 건너간 후의 계획이라도 검토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어."

국경지대에는 나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당연히 건너편에서 길잡이 역할을 해줄 조력자 또한 없었다. 그러니 그림자 이동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확실한 위치 파악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위치 파악 방법이라고 하면 역시….

"그럼 갈까. 둘이서."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사라의 모습에, 나는 때아닌 오한이 느껴졌다.

이, 이상하다? 저렇게 예쁜 미소를 보고 왜 갑자기 춥지?

"디, 디아나! 레이아! 마틸다! 헬프! 도와줘! 날 혼자 내버려 두지 마!"

"어머, 구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누가 우리 오빠를 혼자 내버려둬? 걱정하지 마. 내가 쭈욱 곁에 있어줄게."

그러니까 무서워! 무섭다고! 넌 왜 꼭 이런 타이밍에만 말을 그렇게 하냐!?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말했으면 좀 좋아!?

게다가 사라의 의욕 넘치는 모습에 다들 말릴 생각을 포기했는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버렸다.

얘, 얘들아!? 아무리 그래도 서방님을 그렇게 쉽게 버리려고!? 설마 너희도 화난 거야!? 그러니까 말했잖아! 내가 미리엘을 그렇게 조교 한 건 앞으로 싸우지 못하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젠장. 대마법사 누님! 천사님! 마틸다! 평소처럼 핑크빛 모드라도…누구, 누구 없어!?

"들리십니까?"

간절하면 이루어진다. 그 순간, 나는 그 말을 뼛속 깊이 실감할 수 있었다.

디아나의 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빛이 나며, 날 구원해 줄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실비아!"

"햐읏!? 구, 구원님!?"

반지 너머로 내 목소리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는 이 목소리! 틀림없는 우리 기사님이야! 역시 실비아야! 이렇게 완벽한 타이밍에 등장하다니!

물론 이 시간에 갑자기 저쪽에서 연락했다는 건, 그리 좋은 신호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분노한 용사한테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그래! 구원이야! 이 시간에 갑자기 연락해왔다는 건 뭔가 있었다는 뜻이 거지!? 무슨 일이야!?"

"헤? 아, 아닙니다. 그냥…."

"이 몸이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 시간에 연락을 넣으라고 했네."

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어제 낮에 이 몸을 찾았다고 했잖은가. 그때 이 몸이 어디에 있었을 것 같은가?"

아, 설마 그때 여기에 내려와서 실비아한테 보고를 듣고 있었어?

역시 대마법사님. 내가 신경 쓰지 못한 부분까지 착실하게 커버를…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시 말해서 이 시간에 연락했다는 건…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야?"

"넵!"

안심하라는 듯 힘차게 대답한 실비아였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날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실비아. 잘 생각해 봐. 호수에서 여신님의 기운이 급격하게 늘어났을 텐데, 거기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아, 그, 그건…지난번에 구원님이 얘기해주신 말을 토대로…제가 잘 둘러댔습니다아…."

실비아아아! 너무 유능하잖아아!

슬슬 실비아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힘없이 대답하는 말에, 나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혼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렇다네. 그러니까 오빠. 너무 걱정하지 마.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위로해 줄게. 원한다면 몸으로라도…."

"음. 나머지 얘기는 이 몸이 확인하겠네. 자네는 안심하고 다녀오게."

얼굴을 살포시 붉히면서 내 뒷덜미를 덥석 잡아채는 용사와, 그런 용사의 등을 상냥하게 떠밀어주는 대마법사.

잔인하게 전신을 옥죄어오는 둘의 연계 공격에, 나는 허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누군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은…애, 앨리시아!

그리고 그 순간, 우리 겁 없는 전사님과 내 눈이 똑바로 마주쳤다.

"저기! 언니!"

저 겁 없고 눈치도 없는 성격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구나!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느낌으로 앨리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뭐에요!?"

사라의 차가운 시선에도, 앨리시아는 물러서지 않고 씩씩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모, 몸으로 한다든가! 그런 건 둘만 있을 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직 저 같은 신참은 감당을 못하겠습니다!"

야이 눈치 없는 것아아아아아! 아까 그 말을 어떻게 들으면 진짜 몸으로 위로해주겠다는 뜻으로 들어어! 누가 어떻게 들어도 다른 뜻으로 몸의 대화를 나눠보자는 뜻이잖아!

반지 너머에 있는 실비아도 파악한 분위기를 어떻게 현장에 있는 네가 모르냐!?

표정이야!? 표정 보고 착각한 거야!? 얘가 얼굴을 붉히면서 부끄러운 표정을 지은 건 그냥 평소에 나랑 이미지 플레이를 자주 하는 바람에 연기력이 단련된 것뿐이라고!

"그, 그런 뜻이…하, 할 수 없네요. 알겠어요. 둘이서 조금 나갔다 올게요."

그 사라마저도 설마 이런 착각을 할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역시 순발력 좋은 용사님답게 바로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네!? 진심이십니까!?"

"그, 그래요! 왜요!?"

"아뇨. 말로만 듣던 야외 플…여, 역시 언니이십니다! 레벨이 높으십니다!"

야! 앨리시아! 네가 위기질서 확실히 지키는 애라는 건 충분히 알겠는데, 그건 좀 도가 지나치지 않냐!? 뭘 칭찬하고 있는 거야!?

"아, 아, 알면 됐어요!"

게다가 그런 앨리시아의 태도 때문에 사라는 또 사라대로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된 모양이었다.

노골적으로 야외 플레이를 암시하는 앨리시아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고, 사라는 괜히 내 목덜미를 잡은 손에 힘만 잔뜩 주면서 날 질질 끌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야. 사라야.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

"시, 시끄러워!"

"이제 우리 들어가면 쟤 엄청 힐끔거리면서 ‘우와…저게 바로 대낮에 당당하게 야외 노출 플레이를 하고 온 사람의 모습….’ 같은 표정 지을 텐데."

"시, 시끄럽다고 했잖아!"

그렇게까지 부끄러워할 거면, 괜히 오기 부리지 말고 나중에 얘기했어도 됐잖아. 뭐, 덕분에 나한테는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온 격이 됐지만.

"대화하자고 나왔으면서 오빠한테 시끄럽다는 건 또 뭐냐. 애초에 대화라고 해도, 그거잖아? 미리엘 얘기잖아? 아까도 말했잖아. 그건…."

"내 동생이니까 이상한 생각 같은 건 안 든다고 했으면서!"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거잖아. 미리엘이 싸움을 포기하게 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 어떻게 그런…!"

"응? 방법이 궁금해? 그럼 그 몸으로 직접 알려줄까? 하긴 어차피 그냥 들어가도 오해 살 텐데, 그럴 거면 아예 오해가 아니게 한 번 찐하게…."

"이 변태! 변태 대마왕! 진짜 미쳤어!"

내가 은근슬쩍 사라의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말하자, 사라가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찰싹찰싹 때리며 앙탈을 부렸다. 앙탈치고는 살짝 아팠지만.

"맞아. 난 항상 너한테 미쳐 있어."

"허, 헛소리하지 말고 가기나 해! 위치 파악이 중요하다면서!"

결국 내가 느끼한 말까지 섞으면서 계속 들이밀자, 사라는 진짜 야외 플레이를 하게 될 위험에 처했다고 느낀 건지 먼저 꼬리를 말고 산 정상 쪽으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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