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21화 (1,088/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21화

    미리엘이 말한 대로, 아라크네 클랜은 이미 만반의 준비가 끝나 있었다.

    아라크네 클랜 수준이면 간부 한 사람당 아공간 주머니를 몇 개씩 차는 건 일도 아니어서, 겉보기에는 짐을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평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간 무장을 보아서는 아마 엄청나게 준비한 거겠지.

    게다가 7명이 전부 그러고 있는 거다. 그래. 원래라면 5계층의 전진기지를 지키고 있어야 할 지니까지 포함한 7명의 간부 전원이.

    그리고 그 7명 중에는….

    "오셨습니까! 언니들!"

    "언니라고 하지 마세요!"

    당연히 앨리시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앨리시아 얘는 대체 간이 얼마나 큰 거야? 같은 용사인 쓰레온도 사라가 화내면 겁먹는데, 눈썹 하나 깜짝 안 하는 것 좀 봐. 그러고 보니 미리엘도 그랬지. 아라크네 클랜은 다 이런가?

    뭐, 저기 쌍둥이 마법사 둘은 디아나의 존안을 뵈어서 황송하다는 듯 머리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고 있었지만.

    "어, 여. 너도 왔냐."

    아무튼 우리 애들한테 먼저 90도 인사를 한 다음, 앨리시아는 뒤늦게 내게 다가와서 어색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이제 얘도 내 여자가 된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깨소금 쏟아지는 행동을 하기에는 많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뭐, 앨리시아가 그런 성격도 아니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지기도 할 테고. 아직 며칠 안 됐으니까.

    "난 덤이냐."

    사실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니까 별로 상관은 없지만, 어색한 앨리시아와의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가벼운 불평을 던졌다.

    앨리시아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어깨에 힘이 빠지며 특유의 그 야성미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이래 봬도 위계질서가 확실한 사람이라서."

    아니. 어깨에 힘이 빠진 건 좋은데, 이번엔 또 너무 빠졌잖아. 위계질서는 무슨 위계질서야!?

    "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얘들 엉덩이에 깔려 사는 것 같잖아!?"

    "아니라고?"

    당연히 아니지! 라고 대답하려 했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사라의 시선에 재빨리 말을 바꾸기로 했다.

    이건…이용할 수 있겠어.

    "아니요. 물론 맞습니다. 다만 앨리시아씨가 어떻게 눈치챘는지 궁금해서 말이지요. 하하하하핫. 그렇게 티가 나나? 사라야. 들었어? 내가 평소에 너희한테 얼마나 잘해 줬으면 다른 사람들도 단번에 눈치채네. 키야. 너 진짜 남자 잘 만났다."

    봤냐? 이 순발력. 내가 이래 봬도 어렸을 때부터 ‘넌 나중에 크면 입만으로 먹고 살 수 있겠다.’라는 명예로운 칭찬을 들은 몸이라 이 말이야!

    "…나도 알아. 바보야."

    사라도 이런 말을 듣자 느끼는 바가 조금 있는 거겠지. 아까 대련 중에 미리엘의 신음을 들은 이후로 계속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오던 눈에서 드디어 힘이 빠져나갔다.

    성공했다! 역시 나야! 기회가 왔을 때 한 번에 잡는 이 실력! 이게 바로 성자의….

    "그래도 나중에 얘기는 할 거야."

    제, 젠자아아아앙! 실패인가!

    아니. 그래도 목소리에 패기가 없어졌으니 아까보다는 상황이 나아졌다고 위안 삼아도 괜찮지 않을까?

    "…너 또 뭐 잘못했냐?"

    그렇게 속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자니, 앨리시아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을 했다.

    또라니!? 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우리 애들한테 잘못만 하는 줄 알겠다.

    "…일단 그제도 했잖아."

    그제? 그건 너 때문이잖아 이것아!

    "미안. 기다리게 했군."

    아무튼 그런 식으로 앨리시아와의 정답게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드디어 미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에 자기가 원래 쓰던 검과 리리안 플리투스의 세검을 동시에 차고, 아공간 주머니도 몇 개씩 찬 모습으로.

    "그럼 갈까?"

    주위를 둘러봐서 자신 이외의 멤버들도 준비가 끝났다는 걸 다시금 확인한 후, 미리엘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간부진 전원이 총출동해도 돼?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를 일인데, 남아서 지휘할 간부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아?"

    그 옆에 바싹 붙어서 그런 말을 건네자, 미리엘이 입가에 띈 미소를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이런, 너무 속내 보이는 말이었나.

    "걱정해주지 않아도 우리 클랜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아. 원래부터 6계층 탐사를 위해 간부진 전원이 나서는 일은 자주 있었으니까. 날 포함한 8명 전원이 없더라도 제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

    "…그러냐."

    "아니면 성자님은 다른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엘은 앨리시아 쪽으로 힐끔 시선을 던졌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시선을 따라가 앨리시아를 바라보자, 저쪽도 우리 시선을 눈치챘는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둘이서 갑자기."

    "아니…."

    걱정돼서. 그렇게 솔직하게 속마음을 진짜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위험하니까 넌 가지 마."라는 말이라도 했으면,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앨리시아가 가만히 있겠어?

    아무리 상대가 그렇게 혼자 좋아하고 속앓이를 하다가 겨우 맺어진 나라고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고 화를 버럭 낼 게 틀림없었다. 얘는 그런 성격이니까.

    "자식. 이 누님이 걱정되냐?"

    하지만 그런 내 태도를 보고 오히려 속마음을 알아챈 건지, 앨리시아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씨익하고 미소 지었다.

    얘는 눈치는 없는 주제에 묘하게 야생의 감 같은 게 살아 있단 말이야.

    "그럼 안 되겠냐? 어디 다쳐서 오면 혼내줄 거니까 몸조심해라."

    "윽!? 누, 누가 누굴 혼낸다는 거야! 햇병아…."

    "야. 너 그새 까먹었냐?"

    습관적으로 날 햇병아리라고 부르려고 했던 앨리시아였지만, 이제 애인 사이가 됐는데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불릴 수는 없지.

    게다가 그렇게 부르지 못하도록 조치도 이미 취했고 말이다.

    "다, 닥쳐!"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건지, 앨리시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황급히 뒤로 도망가 버렸다.

    "하핫. 이렇게 보니 성자님과 앨리시아가 맺어졌다는 게 실감이 되는군."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미리엘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리엘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조금 의외였다. 물론 시원시원한 성격이니 질투심을 추하게 내비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좋아할 줄은 몰랐는데.

    전에 중2병을 하룻밤 잡아뒀던 것만 하더라도, 앨리시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그런 거였다고 순순히 인정했었잖아?

    그런데 그 사이에 태도가 이렇게 바뀐다고? 뭔가 그럴만한 계기라도 있었나?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랬지. 쓰레온과의 대결 말이다.

    미리엘이 신음을 내는 바람에 어중간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대결은 미리엘의 판정패였다.

    그리고 내가 알던 미리엘은 용사에게 승부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데 판정패를 당하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는 얘기는…얘가 진짜로 강해지고 싶다는 마음을 접은 건가? 진짜로 전직을 포기하니까 된 거라고?

    "성자님. 너무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거야."

    "네가 그런 말만 안 하면 오해할 확률이 확 떨어질 거라는 건 아냐?"

    "하핫. 물론이지. 하지만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오해라서 말이야."

    …이 녀석, 지금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 자기 입으로 실토한 거지?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버리고 말았다.

    "가자."

    길드에 도착하니. 주변에서 우릴 향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야 그렇겠지. 아라크네의 간부진. 세이비어스 클랜 전원. 둘 중 하나만 모여도 이목을 끌 집단인데, 그 둘이 동시에 같이 나타난 거니까.

    게다가 그 사이에는 지금 모험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커플까지 있는 거니까.

    "야. 앨리시아."

    "무, 뭐야. 새끼야. 왜 불…으흑!?"

    나는 뒤로 도망가 있던 앨리시아를 불러서 그 허리를 확 껴안았다.

    주변에서 "오오!" 하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행동했다.

    물론 앨리시아는 아랑곳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힘 조절도 못하고 날 퍽퍽 때려댔지만.

    "이, 이런 미친 새…무, 뭐하는 거야!? 미쳤어!?"

    그나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줄여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야! 아파! 아파! 우리 계획 때문에 일부러 이러는 거니까 조금만 참아 봐!"

    "이게 계획이랑 무슨 상관이야!?"

    "요즘 소원하던 너희랑 우리 클랜이 갑자기 이렇게 다 같이 던전으로 향하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을 거란 소문이 퍼질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너랑 나랑 커플이 된 기념으로 다 같이 행동하는 것뿐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는 거야."

    뭐,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지금 한 말은 그냥 갖다 붙인 말이고, 진짜 목적은 모험가들에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니. 과시욕이라든가 그런 게 아니다. 난 단지 전에 앨리시아가 길드에서 날 감싸주기 위해 한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여자를 얼굴로만 판단한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나한테 차인 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날 감싸준 것 말이다.

    그 이후로 나에 대한 소문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대신 아주 가끔 이런 소문이 돌기도 했거든. ‘그냥 앨리시아가 성자 취향이 아닌 것뿐 아니야?’ 라는 소문이.

    그러니까 전혀 아니라고 이런 식으로 확실히 선전해주지 않으면.

    "…이상한 데서 대가리 굴리는 새끼."

    치, 칭찬이지?

    아무튼 내 갖다 붙인 말에 넘어가 준 건지, 앨리시아도 겨우 때리는 걸 멈추고 내 곁에 얌전히 안겨 있게 됐다.

    고개를 푹 숙이고 꼼지락 꼼지락거리는 것이 앨리시아답지 않아서 엄청 어색하기는 했지만.

    "어, 어서와."

    아무튼 그렇게 앨리시아를 옆구리에 끼고 안내 데스크로 가니, 레이첼 누님이 오늘도 완벽한 안내원 스마일로 날 맞이해주셨다.

    목소리가 살짝 떨린 건, 어젯밤의 일이 새삼 생각났기 때문이겠지. 그러고 보니 누님은 혼자 일찍 출근하는 바람에 아직도 멘탈 케어가 안 됐구나.

    "응. 레이첼. 아침에 말한 준비는 어떻게 됐어?"

    미리엘에게 얘기한 건 조금 전이지만, 미리엘에게 맡길 거라는 결단 자체는 어제 이미 내렸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레이첼 누님이 출근하기 전에 부탁을 하나 했거든. 아라크네 클랜 멤버의 길드 카드로도 7계층으로 이어지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아, 응. 언제든 가능해. 그럼 아라크네 클랜의 간부 전원이 동행하는 걸로 해줄까?"

    7계층으로 가는 수속 절차는 조금 특별하다.

    던전 입장 파티 등록의 본래 목적인 ‘모험가들의 상태를 관리하고 위급 시에는 길드원을 파견하거나 긴급 구조 퀘스트를 내서 구조해온다.’를 실행할 수 없는 곳이니까.

    길드 내에서도 몇 명만 알고 있는 정보고, 때문에 수속 절차 레이첼 누님밖에 진행할 수 없다.

    이것도 다 길드에 연줄이 있는 덕이라고 할까. 아니. 그런 걸 노리고 레이첼 누님을 꼬신 건 아니지만.

    아무튼 누님에게 그렇게 등록 절차를 밟고, 우리는 드디어 7계층으로 내려오게 됐다.

    물론 내려오자마자 뭔가 극적인 변화가 있는 건 아니다. 심지어 여기 구미호 마을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한 덕분에 대기 중의 마나까지 여신의 마나로 가득 차있으니까.

    그래서 처음 7계층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후로 오랜만에 다시 7계층에 오게 된 아라크네 클랜원들은 덤덤한 반응이었지만.

    "레이아 언니! 오늘은 사람이…나, 남자!?"

    오히려 거기에 있던 구미호들이 깜짝 놀라서 우르르 몰려온 우리를 바라봤다. 특히 나를.

    그나저나 저 꼬맹이는 왜 항상 올 때마다 마주치는 것 같냐. 쟤 혹시 맨날 텔레포트 마법진 근처에서 죽치고 있는 거 아니야?

    "크앙! 남자다!"

    "꺄아아악!"

    장난삼아 두 팔을 들어 올리며 덮치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해 보자, 리사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웅크리고 말았다.

    "구원 씨. 장난이 지나치세요. 리사. 괜찮니?"

    아니. 진짜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기껏해야 "뭐해? 바보 아냐?" 같은 말이나 할 줄 알았는데.

    "괜찮아. 꼬맹아. 안 잡아 먹어."

    "누, 누가 꼬맹이야."

    무릎 꿇고 앉아 위로하는 레이아의 옆에 나도 똑같이 앉아서 위로하자, 리사는 내 손을 탁 쳐내며 허세를 부렸다. 싸가지 하고는.

    "괜찮으면 됐다. 그럼 우린 바빠서 이만."

    이렇게 리사와의 소동에 방심한 틈을 타서 재빨리 빠져나가지 않으면, 주위로 몰려드는 구미호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눈치챈 나는 매정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음? 가? 성자님이 국경 지대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해주는 것 아니었어?"

    "아니. 일단 따라와.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과 연결된 곳은 여기가 아니야."

    그렇게 의아해하는 미리엘의 질문에도 대답해주면서 황급히 외진 곳에 있는 우리 애들의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꼬맹이는 쉽사리 나와 떨어질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바빠? 왜?"

    아까는 가볍게 위협만 해도 겁먹은 주제에 쫄래쫄래 따라오지 마라.

    이거 진짜 텔레포트 마법진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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