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20화 (1,087/1,205)
  • 1120화

    쓰레온보다 거리도 가까운 주제에.

    뭐, 집에서 헬레나한테 기나 빨리면서 지냈다는 쓰레온과 달리, 저 녀석은 클랜장으로서 할 일이 많을 테니까 이것도 최대한 빨리 온 거겠지만. 그리고 저 녀석이 늦게 온 덕분에 쓰레온에게 따로 주의 사항을 전달할 시간도 있었고.

    사정은 알겠지만, 그래도 일단 주의는 줘야겠지. 앞으로 시킬 일이 일인 만큼, 내 명령을 더 빠릿빠릿하게 듣지 않으면 곤란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가볍게 핀잔을 던져봤지만, 미리엘은 상상도 못 한 대답으로 내 핀잔을 받아쳤다.

    "미안해. 성자님을 만날 생각에 들떠 몸치장에 힘을 주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있었어. 하핫. 성자님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여자…이런, 선객이 있었군. 얘기할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 같아. 지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해줘."

    이제 와서 다른 애들의 존재를 눈치챈 척하지 마라! 내 바로 옆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데 그걸 눈치 못 채는 게 말이 돼!? 다 얘기해놓고 못 들은 걸로 해달라면 끝나는 줄 알아!? 시작부터 우리 애들 주변의 온도가 엄청나게 내려갔잖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 쓰레온! 치사하게 너만 살겠다고 구석으로 도망가냐!? 용사면 좀 당당하게 버텨!

    "…너 지금 그게 몸치장에 힘을 줬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얘들아. 진정해. 미리엘 쟤 그냥 헛소리하는 거야!

    그런 의미를 담아서 우리 애들 들으라고 한 말이었지만, 미리엘은 내 말에 정색하면서 대꾸했다.

    "성자님.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

    "헛소리하지 마! 너 그냥 던전 갈 때 입는 갑옷 입고 왔잖아!? 허리에 검까지 차고! 대체 어딜 꾸몄다는 거야!?"

    "하핫. 실은 도중에 깨달았거든. 성자님이 이런 때에 날 부를 이유가 한 가지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애써 공들인 치장을 다 벗어내고 이런 차림으로 오게 됐지. 성자님의 초대에 들떠서 그런 당연한 사실을 바로 깨닫지도 못하다니. 성자님 앞에서는 나도 역시 영락없는 여자…또 지금 할 얘기는 아니었군. 못 들은 걸로 해줘."

    "…음. 앞으로 주의하게."

    연이어 터진 미리엘의 도발에 안 그래도 냉랭하던 우리 애들이 드디어 폭발…할 줄 알았지만, 그전에 디아나가 무게 잡고 말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역시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대마법사님밖에 없어.

    "네. 주의하겠습니다."

    제아무리 미리엘이라도 지고의 대마법사님 상대로 너무 막 나갈 수는 없었는지, 디아나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몸들이 자네를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닐세."

    원래 설명은 내가 할 셈이었지만, 나랑 계속 대화하게 두면 미리엘이 또 시답잖은 말로 시간을 질질 끌 거라 생각한 거겠지.

    디아나는 날 뒤로 물리고, 자기가 한 발 앞으로 나가서 어제오늘 사이에 결정된 사항들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미리엘은 나와 대화를 더 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는 듯 내 쪽을 힐끔 한번 엿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먼저 꺼낸 말인 만큼 다시 디아나 쪽으로 시선을 돌려 그 말을 경청했다.

    "우선은 플리투스와 바프라의 국경지대를 장악…입니까."

    "음. 극심한 전투가 매일같이 이어지는 곳인 만큼, 거친 자들 또한 많을 것으로 예상하네. 그만큼 위험한 임무가 될 걸세. 어쩌면 플리투스의 수도 한복판에서 그 검을 꺼내 드는 것보다 더 말일세. 그러니 자네가 굳이…."

    미리엘이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자, 디아나는 이때다 싶었는지 미리엘을 설득하려고 했다.

    그런가. 아까 미리엘이 그렇게 도발했는데도 디아나가 먼저 나서며 분위기를 진정시킨 이유. 아니. 애초에 우리 애들이 그런 도발을 맞고도 폭발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디아나도 다른 애들도, 미리엘이 나한테 눈이 멀어 사지를 향해 제 발로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거다.

    날 향한 마음을 대놓고 드러내는 건 마음에 안 들어도, 그 마음이 일으킨 행동에 대해서는 연민이 생긴다는 건가.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 애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엘은 아무런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진심인가?"

    "네. 국경지대를 우선 장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의 도움이 되기 위해 나선 것이니,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이 몸의 낭군님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아니었는가?"

    얼핏 들으면 비아냥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것도 디아나 나름대로 경고한 거겠지.

    쟤가 평소에는 잘 쓰지 않는 낭군님이라는 표현까지 쓴 이유가 뭐겠어? "자네가 아무리 노력해 봤자, 저자는 이 몸의 것일세. 의미 없는 노력으로 목숨을 버리지 말게."라는 뜻 아니겠어?

    뭐, 그마저도 미리엘한테는 소용이 없었지만.

    "하지만 국경지대로 향한다면, 준비가 더 필요하겠군요. 사실 성자님에게 얘기를 꺼낸 후 당장에라도 출발할 수 있게 준비를 갖춰두고 있었습니다만."

    디아나의 경고를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로 받아치면서, 미리엘은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이걸 기회 삼아서 다시 대화 상대를 디아나에서 나로 바꾸려고까지 했다.

    "성자님. 미안하지만 조금 더 시간을 줘. 원래는 간부들로만 이뤄진 소수 정예 파티로 잠입할 생각이었지만, 국경 지대로 향한다면 조금 더 인원을 늘려야겠어."

    "수도에서 국경지대로 목적지가 바뀌는 게, 인원수까지 대폭 바꿀 일이야? 아니. 보채는 게 아니라 진짜로 궁금해서."

    어차피 윗 놈한테 가서 검을 보여주고 플리투스의 정통 후계자라는 걸 인정받는다는 큰 틀의 계획은 변함이 없잖아?

    그렇게 생각했지만, 미리엘로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전쟁신의 세계라고 하더라도, 각 진영의 수도까지 전쟁의 불씨가 튀지는 않지. 그만큼 수도의 사람들은 경계심이 풀려 있을 거야. 하지만 매일같이 전투가 벌어지는 국경지대라면 얘기가 달라져. 수상한 자는 전부 적국의 스파이 취급을 당할 가능성도 있고, 다수에게 둘러싸여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도 있어. 그에 따른 대응이야."

    얼핏 들으면 타당한 의견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하고 질문을 던졌겠어?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

    "아니. 수도로 직행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어차피 국경 지대는 뚫고 지나가야 했잖아. 소수 정예로 거길 뚫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준비를 그렇게 한 거 아니었어?"

    "응? 성자님은 각 지역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잖아? 그 정도 도움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어? 성자님은 보기보다 매정하군."

    "그야 물론 도움은 줄 생각이었지만, 그게 아니라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처음부터 그림자 이동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

    내가 지금까지 얘한테 그림자 이동을 관련 얘기를 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애초에 그림자 이동으로 7계층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7계층 특유의 구조부터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얘기까지 했으면 내가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는데? 그런데 얘는 그 얘기를 어디서 듣고…아. 설마.

    "그것도 중2병한테 들었냐?"

    어제의 심문을 통해 전쟁신의 사람들은 성자 스킬에 걸리면 내 위치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2병이 강을 건너서까지 날 추격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것이었을 거다. 그러니 당연히 내가 그림자 이동으로 구미호 마을에 갔을 때마다 중2병은 느낄 수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미리엘이 중2병을 통해 내 정체불명의 이동법을 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미리엘이 그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는….

    "하핫. 드디어 걸렸군."

    "너, 너…! 너 알면서 입 다물고 있었던 거야!?"

    전쟁신의 사람들은 성자 스킬에 걸리면 내 위치를 어렴풋이 알 수 있다. 내가 어제 그 고생을 하면서 중2병에게 간신히 알아낸 그 정보를, 미리엘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잖아! 이 녀석, 어제 그 자리에 자기도 같이 있었으면서! 아니. 그것 때문에 나한테 재조교까지 받았으면서!

    어쩐지 중2병이 끝까지 미리엘을 믿는 것 같은 표정을 짓더라니! 어쩐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같더라니! 내가 추궁할 때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겠어!? ‘역시 용사의 후손답게 모든 걸 실토하지 않았군. 난 널 믿어.’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 거 아니야!?

    중2병을 완벽히 겁줬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잖아!?

    "구원 씨? 갑자기 무슨 말이신가요?"

    하지만 나와 미리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

    물론 성자 스킬이 전쟁신의 사람에게 주는 부작용에 대해서는 설명했지만, 중2병 앞에서 펼친 조교 플레이나 중2병의 입에 내 물건을 물린 것 등은 전부 생략했으니까.

    "이 계획은 전부 취소야! 역시 이 녀석은 믿을 수 없어!"

    미리엘은 걸렸다면서 시원한 미소를 짓고 끝냈지만, 이건 그냥 장난으로 웃어넘길 수준이 아니다. 신용이 제일 중요한 이 계획에서 신용을 잃어버린 거다.

    내가 그렇게 외치자, 미리엘도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했는지 입가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성자님. 그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건 어디까지나…미안한데, 잠시만 둘이 나가서 얘기해도 될까? 여기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

    또 그 말이냐.

    이번에는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아까 우리 애들을 도발할 때도 써먹었던 말인만큼, 우리 애들도 얘가 나랑 둘이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를 리가 없었다.

    "왜요. 그냥 여기서 얘기하지. 괜찮아요. 얘기해 봐요."

    사라야. 너 지금 엄청 무서운 거 아니?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면 평범한 얘기도 함부로 못 하겠다.

    "빨리 얘기하고 올게."

    그래도 사라가 저렇게 나오니 반대로 난 조금 침착해질 수 있어서, 나는 미리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야 구원!"

    "진지한 얘기잖아. 진짜 금방 얘기하고 올게. 오빠 믿지?"

    물론 뒤에서 사라가 역정을 내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미리엘을 데리고 방을 빠져나와서는 비어 있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별다른 의미는 아니고, 복도에는 메이드들이 대기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무슨 얘기야. 또 나한테 관심받고 싶어서 그랬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내가 그때 바로 얘기하지 않은 건, 물론 오랜만에 성자님의 조교를 받고 싶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야. 그러는 편이 더 성자님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다 큰 처자가 자연스럽게 조교 받고 싶었다는 얘기 하지 마라. 게다가 이번엔 진지한 표정으로 저러니까 더 적응 안 되네.

    덕분에 괜히 나만 진지함을 잃을 뻔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미리엘을 추궁했다.

    "정보를 알아내는데 괜히 시간만 더 들고, 중2병을 위협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애매해져 버렸는데?"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난 줄리안의 신뢰를 완벽하게 얻을 수 있었어. 이제 뭐든 궁금한 정보가 있다면, 나한테 부탁하면 돼. 줄리안은 내게 뭐든 말해 줄 거야."

    "그런 식으로 나와의 접점도 자연스럽게 더 늘릴 심산이었다는 거군."

    "역시 성자님은 이해력이 빠르군."

    미리엘은 바로 맞췄다는 듯 다시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럼 왜 어제 방에서 나오자마자 얘기 안 했어?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나하고도 공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만약 오늘 내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면, 이 얘기는 계속 어둠에 묻혀 있었을 거다.

    "성자님이 내 얘기를 받아들이면 플리투스의 수도로 갈 방법도 얘기할 테니까. 그때 자연스럽게 얘기가 나올 거라는 생각이었어. 뒤늦게 깨닫게 되면, 그만큼 성자님이 분노해서…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군."

    다 말해놓고 또 뭐가 부끄럽다는 거야!? 한마디로 내가 화나서 또 분노의 조교라도 할 줄 알았다는 거 아니야!?

    "하핫. 하필이면 다른 사람들도 있을 때 깨닫는 바람에, 계획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설마 국경지대 얘기가 나올 줄이야. 실수했어."

    살포시 얼굴 붉히면서 아쉽다는 표정 짓지 마!

    "아무튼 성자님. 전부 성자님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은 마음으로 벌인 가벼운 일탈이었어. 성자님의 신뢰를 깰 생각은 전혀 없었어. 날 믿어줘."

    황당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엘은 다시 표정을 다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진짜 얘는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의심부터 생겨. 진짜 믿어도 되는 거 맞아? 맞겠지? 바로 어제 사도 임명도 확인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하루 지난 지금도 사도 임명이 되나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바로 옆방에 우리 애들이 있는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 네 말이 다 진심이라도 믿고 한 번만 더 얘기한다. 너 진짜 배신하면 가만 안 둬."

    "으응…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노력하지."

    대신 조교가 아직도 유효한지 확인하기 위해 그 뺨을 강하게 꼬집고 비틀자, 미리엘이 요염한 신음과 함께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러면서 말하니까 역효과만 나는 것 같은데, 진짜 괜찮겠지?

    조금 불안한 감은 없잖아 있었지만, 전부 미리엘의 관심병이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한번 믿어보자고.

    미리엘과의 대화를 통해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미리엘을 데리고 우리 애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가 남은 얘기를 마저 하기로 했다.

    플리투스에서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알고 있는 7계층의 기본적인 정보와 함께 디아나가 만든 도구를 전해 줬다.

    건네준 도구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을 꼽자면, 바로 통신 마법이 걸린 반지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이겠지.

    특히 텔레포트 마법진은 내가 바프라의 칼데라호 밑바닥에 설치하고 온 것보다 개량된 물건이라, 여신의 마나로 변환시킨 주변의 마나를 일정 공간에 가두는 것으로 밖에서 존재를 눈치채기 어렵게 개량했다고 한다.

    4계층에서는 마을 주변을 거대한 공기 방울이 감싸고 있었잖아? 그걸 응용해서 마나의 막을 만들고 소형화까지 성공한 획기적인 물건이라나 뭐라나.

    디아나가 이 물건이 얼마나 대단한지 열변을 토해냈지만, 마법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뭐, 확실히 편하기는 할 것 같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런 대단한 물건이지만, 이번에는 아쉽게도 써보지도 못한 채 미리엘에게 건네주기로 했다.

    어차피 바프라 곳곳에 협력자가 있는 나보다는 미리엘이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칼데라호 지하에 설치하고 온 건 여신의 마나를 가둬두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된다. 각자 용도가 따로 있다는 거지. 괜히 욕심부려서 바꿀 필요 없어.

    "정말……우리한테 이런 걸 맡긴다는 거야?"

    하지만 미리엘로서는 그런 사정까지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디아나의 열변을 통해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만 들었으니, 내가 선뜻 신형을 건네주는 것에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마라. 차라리 평소처럼 시원한 미소라도 짓고 있어.

    젠장. 이복자매라고 알기 전까지는 사라랑 닮았다는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는데, 알고 나니까 쟤가 저런 표정 지을 때마다 사라가 겹쳐 보인단 말이지.

    정작 그 사라 씨는 차가운 눈으로 나랑 미리엘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래. 그러니까 만약 수세에 몰려서 죽을 것 같다 싶으면 이거라도 설치하고 도망쳐. 괜히 오기 부리다가 위험해지지 말고."

    "하지만 이걸 타고 오면 적들도 건너오게 될 텐데?"

    "상관없어. 어차피 소형이라 한 번에 건너올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으니까. 너희가 다 건너온 다음에 구미호 마을에 있는 걸 부숴 버리면 돼. 그사이에 몇 명 건너오는 건 이쪽에서 제압할 수 있기도 하고."

    구미호 마을에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길 지키고 있는 건 기본적으로 대마법사님이다. 건너온 놈 한둘 정도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적이 여신님의 마나를 통해 우리 정체를 알게 되는 건 막을 수 없지 않아?"

    "너희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아."

    "……."

    "그러니까 타이밍 잘 봐가면서 꼭 필요할 때만 써라."

    처음에는 어차피 미리엘이 실패해도 우리는 리스크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렇잖아? 미리엘이 가면 당연히 앨리시아도 따라갈 확률이 높은데, 내가 내 여자를 그냥 버리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물론 앨리시아가 따라가지 않는 게 제일이겠지만, 의리로 똘똘 뭉친 애가 가지 말란다고 안 갈리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 지금까지 그렇게 말한 건 그냥 바프라를 장악하자마자 플리투스와의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보니, 나 자신을 납득시키기 위해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거짓말도 우리 애들은 한눈에 꿰뚫어 봐서, 특히 우리 마음씩 착한 천사님이 적극적으로 말리는 바람에, 결국 이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 반지는 하루 한번 짧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통신용 반지야. 아마 디아나가 받을 테니까, 별일 없는 한 하루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보고해."

    이쪽은 텔레포트 마법진과 달리 극적인 업그레이드는 안 된 모양이지만, 정기 보고용으로 사용하기에는 큰 문제 없으니 상관없겠지.

    "그리고 남은 건……아."

    슬슬 얘기도 다 마무리된 것 같아서 뭐 빠진 것 없나 주변을 둘러보고 있자니, 아까부터 구석에 처박혀 있던 놈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얘기를 안 했네. 구석에 처박혀 있어서 잊고 있었어.

    "너 전력 보강을 위해 인원을 늘린다고 했지? 쟤도 데려가라. 어차피 용사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으려는 거니까, 용사의 힘을 쓸 줄 아는 놈 한 명 정도는 필요하잖아?"

    "……용사는 성자님과 같이 행동하는 것 아니었어?"

    "우리 쪽은 어차피 대강 정리가 됐으니까 상관없어. 용사의 힘도, 강한 아군도 너희가 더 필요할 테니까. 같이 데려가."

    사실은 우리는 사라를 데려가니 더 상관없는 거지만, 미리엘한테 그 얘기를 할 필요는 없지.

    괜히 얘한테 사라가 또 다른 용사라는 걸 밝히면 여러모로 복잡해지니까. 사라도 이복자매라는 걸 밝힐 생각은 없는 모양이고.

    "그, 그런가."

    하지만 이번에도 내 속내를 모르는 미리엘은, 눈동자가 살짝 요동치기까지 했다.

    야. 야. 너 왜 그래? 안 어울리게 왜 그런 표정 짓는 거야?

    "무슨 문제 있냐?"

    "……아, 아니. 하핫. 성자님께 이 정도 신뢰와 호의를 받으니……몸 둘 바를 모르겠군."

    아마 평소였으면 또 여심이 어쩌고 하면서 우리 애들을 도발했겠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감동했는지 미리엘은 천천히 말을 고르며 그런 식으로 돌려 표현했다.

    이게 그렇게까지 감동할 일이냐? 애초에 네가 평소에 수상한 짓만 하고 다니지 않았으면, 난 언제나 이 정도 신뢰를 보여줬을 텐데 말이야.

    아무튼 지금 미리엘이 저렇게 감동하는 건,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런가……용사로 전력 보강인가."

    "실력 걱정은 하지 마라. 나랑 다니면서 레벨 업 엄청 했으니까."

    "그래?"

    "다, 당연하지! 지금이라면 너한테도 안 져!"

    미리엘이 시선을 쓰레온에게 돌리자, 멍하니 이쪽을 보고 있던 쓰레온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허세를 부렸댔다.

    지금이라면 안 진다니. 그렇게 말하면 전에는 졌다는 거잖아? 너 언제는 비겼다고 하지 않았냐?

    "그건 흘려들을 수 없는 얘기군. 좋아. 어차피 동행하려면 실력 파악은 필수. 한번 여기에서 대련을……그만두지."

    그리고 미리엘도 쓰레온의 허세를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갑작스럽게 둘이 맞붙을 분위기가 형성됐지만……미리엘이 갑자기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바꿨다.

    얘 또 수상하게 왜 이러는 거야? 왜 꼭 믿을만하면 이렇게 수상한 짓을 하는 거야? 진짜 관심병에라도 걸린 거 아니야?

    "왜? 해보지. 마침 지하에 마음껏 싸울 수 있는 대련장도 있어."

    중요 임무를 앞두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반응이었다. 옆에서 "대련장이 아니라 이 몸의 연구실이네만……."이라고 정정하는 디아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나는 그런 식으로 둘의 대련을 부추겼다.

    생각해 보니 전직한 미리엘이 얼마나 더 강해졌는지 볼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말이야.

    "하, 하지만 성자님. 나에게도 마음의 준비라는 것이……."

    하지만 그런 내 부추김에, 미리엘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러니까 더 수상한데. 진심으로 당황한다는 건, 아까 보여준 수상한 행동이 관심 받으려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거잖아?

    "그냥 서로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한 대련이잖아. 마음의 준비씩이나 필요한 일이야?"

    "아니. 하지만……알겠어."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속내가 역력히 드러난 표정으로, 미리엘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할까. 서로의 실력 확인이 목적이니, 처음에는 가볍게 하지."

    지하에 오는 동안에도 쉴 새 없이 내 눈치를 살핀 미리엘이었지만, 도착해 버린 이상 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잡은 모양이었다.

    허리에 차고 온 검 대신 실비아가 연습용으로 쓰는 목검을 손에 쥐고, 미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푸른 화염이 검신을 타고 넘실넘실 흘러나오는 모습은, 나도 몇 번인가 본 적 있는 마법 검사 미리엘 특유의 검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던 화염은 점점 압축되듯이 밀도를 높이고 크기를 죽이더니, 이내 목검의 날에 눈부시게 푸른 빛의 코팅이 씌워진 것 같은 형상이 됐다.

    발동 과정이 상당히 다르지만, 저 빛나는 푸른 검날의 모습은 마치…….

    "네, 네가 어떻게 그걸!?"

    그래.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르는 쓰레온의 손에 들린 검기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하핫. 용사의 피를 이은 건 그쪽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간다!"

    이렇게 둘이 나란히 늘어놓고 보니 자신이 이룬 성과가 더욱 실감 나는지, 미리엘은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쓰레온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미리엘과 쓰레온의 검이 격돌하자,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주변으로 퍼져가는 게 느껴졌다.

    어느 쪽의 검기도 밀리는 모습은 없다. 그야 물론 쓰레온이 온 힘을 다해서 마나를 퍼부으면 저거보다 더 강력한 검기도 내뿜을 수 있지만, 적어도 미리엘의 검기가 용사가 평범하게 사용하는 검기에 비해 뒤처지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대련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마치 용사 둘이 싸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겠지.

    "이전부터 독특한 방식으로 마법을 운용한다는 생각은 했었네만, 이렇게 보니 미리엘양의 마나 운용 방식은 용사의 그것과 무척이나 흡사하구먼."

    마나에 관해서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전문가의 보증 수표가 달렸으니 확실했다.

    "디아나도 구별이 안 될 정도야?"

    "아니. 설명하기 복잡하네만, 미리엘양의 마법 검사였던 만큼 검기 또한 용사는 물론 일반적인 검사와도 궤를 달리한다네. 아무리 운용 방식이 같더라도 근원이 다른 만큼 마법 검사 특유의 그 느낌까지 지울 수는 없지. 하지만 마법 검사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구별하기 쉽지 않을 것 같구먼."

    즉, 전쟁신의 사람들은 충분히 속여 넘길 수 있다는 얘기다.

    미리엘이 처음부터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그리고 아까 쓰레온과의 대련을 주저한 것도, 우리한테 자신의 패를 전부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것치고는 희희낙락하면서 싸우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팽팽하던 구도에 드디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나서 몰아붙이는 미리엘에게 점점 밀리던 쓰레온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진심으로 용사의 힘을 개방한 거다.

    자연스럽게 쓰레온이 공세를 잡으며 미리엘은 수세에 몰리게 됐고, 그 몸에 쓰레온의 검이 스쳐 지나가면서…….

    "아응! 흐읏!?"

    미리엘의 입에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요염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쓰레온은 화들짝 놀라서 검을 뺐고, 미리엘은 미리엘대로 검을 멈춘 채 힐끔힐끔 내 눈치만 살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다른 남자에 의해 느끼는 모습, 성자님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서, 설마 갑자기 대련하기 싫다고 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어!?

    그런 거였으면 진작 얘기 좀 하지! 왜 넌 꼭 이럴 때 중요한 얘기를 안 하고 얼버무려서 사람을 의심하게 하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아, 아니! 너 던전에 다니면서 익숙해졌다면서! 그냥 참고 싸운다면서!"

    당황한 나는 미리엘에게 따지듯이 그렇게 말했다.

    옆에서 "난 우선 상처 나면서 저렇게 느끼는 이유부터 지적하고 싶은데."라고 중얼거리는 사라를 필사적으로 무시하면서.

    "성자님이 눈앞에 있으니……아무것도 아니야."

    다 말해놓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무슨 소용이야 이것아아아아아!

    "야. 구원."

    게다가 저 말로 인해, 눈치 빠른 사라가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마 아까 지적하고 싶어 했던 것이 누구 때문에 생긴 일인지 깨달은 거겠지.

    "자, 잠깐만! 난 잘못한 거 없어! 난 어디까지나 저 위험한 녀석을 전투 불능으로 만들려고……아,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대련은 어떻게 된 거야!? 앞으로 위험 지역에서 서로 등을 맡길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자리잖아!"

    옆에서 찌를 듯이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면서, 나는 다급하게 쓰레온과 미리엘을 부추겼다.

    뭐든 해봐! 치고받고 싸우든 뭘 하든 더 해봐! 빨리!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성자님 말대로 전보다 더 강해졌군. 용사가 가세한다면, 더 이상의 증원도 필요 없이 바로 출발해도 되겠어."

    다행히도 이대로 놔두면 내가 사라 손에 죽는다는 걸 깨달은 건지, 미리엘이 곧장 내게 구원의 손길을 뻗어왔다.

    "그, 그래!? 사실 국경지대 장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긴 한데. 그럼 당장 준비하고 출발할래!?"

    "난 상관없어."

    잘했어! 미리엘!

    매번 수상해 보이기만 했던 저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가, 지금만큼 예뻐 보인 적이 또 있을까?

    "나, 나도! 헬레나한테 인사도 마치고 왔어!"

    아니. 쓰레온. 넌 대체 얼마나 급했으면 용건도 모르고 왔으면서 작별 인사까지 하고 왔냐.

    쓰레온한테만 너무 냉정한 거 아니냐고? 그럼 고추 달린 놈한테 얼마나 상냥하게 해주라는 거야?

    "좋아! 그럼 당장 출발이다!"

    아무튼 미리엘도 쓰레온도 준비가 됐다면, 여기에서 지체하고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너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해."라고 무섭게 중얼거리는 사라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 나는 모두와 함께 아라크네 클랜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