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12화 (1,079/1,205)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12화

결국 사도 임명 없이 미리엘을 보내기로 결정한 우리는, 그에 관한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밤늦게까지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미리엘을 플리투스로 보내는 것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준비는 해야 한다.

성공하면 그 후에 이어진 우리의 행보도 크게 변할 테니 그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실패하면 또 실패하는 대로 준비가 필요하다.

어차피 실패해도 우리가 손해 볼 건 없다는 계산 하에 보내는 거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아무것도 안 챙겨주고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물론 먼저 말을 꺼낸 미리엘도 철저히 준비할 테고, 거대 클랜을 이끌고 있는 만큼 부족한 것도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기술력 하나만큼은 우리를 따라올 수 없는 만큼 우리도 가능한 한 도움을 줘야겠지.

아무튼 준비할 게 많다 보니 그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시간이 흘러 버려서, 남은 얘기는 내일 마저 하기로 하고 우리는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미리엘 얘기 말고도 아직 할 얘기가 남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지. 이 이상 시간이 늦어지면, 그만큼 모처럼 찾아온 천사님과의 시간이 줄어들게 되는 거니까.

"그럼 레이아. 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근처에 있던 레이아의 허리를 잡고 귓가에 속삭이며 살짝 윙크하자, 레이아가 날 올려다보며 살포시 웃어 보였다.

치유된다. 아까 내가 조금 멋진 말을 해서 그런지, 지금 이 미소는 평소보다도 훨씬 더 밝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레이아는 얼굴을 숙인 채 뭔가 주저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저…구원 씨?"

그리고 레이아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 눈동자에서는 희미하게 보랏빛 안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응?"

"같이…가실래요?"

그냥 같이 방에서 씻자고?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그런 의미라면 말하기 전에 그렇게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 다시 말해서….

"레, 레이아!?"

레이아의 제안에 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주변에 있던 다른 애들이 먼저 화들짝 놀라 반응을 보였다.

"가끔은 괜찮지 않나요? 오늘은 구원 씨의 마음에 보답해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그래도 레이아는 자기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굽히기는커녕 오히려 여러분도 같은 마음 아니냐고 묻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니, 다들 아무 말도 못 하게 되어 버렸다.

보답이라니. 아까 내가 한 말의 보답을 말하는 건가? 설마 그 말이 이런 나비 효과를 불러올 줄이야.

딱히 보답을 원하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모처럼 눈요기를 시켜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기대를 담아 다른 애들을 바라보자, 다들 하는 수 없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레이아의 제안을 받아들이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여론이 그렇게 바뀌자 급해진 인물들이 있었으니.

"하, 하지만 자네들! 잘 생각해 보게!"

"그래요! 조금 잘한다고 너무 풀어주면 구원은…."

바로 성벽상 남들과 이런 식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용사님과 대마법사님 말이다.

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그 짧은 순간에 서로 마음이 통했다는 듯 합심하여 여론을 다시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용사와 대마법사의 목소리는 더 큰 목소리에 간단히 묻히고 말았다.

"괘, 괘, 괜찮네요! 후, 후훗! 그렇게 누나들이랑 씻고 싶어?"

레이첼 누님, 엄청나게 당황했군. 자기 스스로 준비한 이벤트는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누님이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이벤트에는 약하니까 말이야. 오늘 같이 씻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고.

하지만 그럼에도 모두의 앞에서는 경험 풍부하고 여유 있는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은 건지, 누님은 애써 웃어 보이며 내게 도발적인 멘트를 던졌다.

"네!"

"어, 어쩔 수 없네. 누나가 구석구석 전부 깨끗하게 씻겨 줄게."

"전부는 안 돼요. 제가 씻겨 줄 곳도 남겨주세요."

그리고 그런 누님의 연기를 레이아가 이런 식으로 받아주기까지 하자, 나까지 다 같이 욕실에 가는 게 확정인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 그럴…후후훗. 먼저 씻겨 주는 사람이 임자예요."

레이첼 누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너무 그렇게 도발하면 진짜 도발에 걸리는 사람이 나와요.

"그럼…이렇게 딱 붙어가야겠네요."

"추기경님!?"

"이런 승부는 시작하기 전부터 결정지어지는 법이에요. 그렇죠? 당시인?"

이런 식으로요.

그나저나 마틸다야. 아까 신전에서 돌아올 때도 살짝 생각했던 거지만, 너 왜 아직도 핑크빛 모드가 발동되는 것 같니? 저주 풀렸잖아?

아무튼 그런 식으로 레이아와 마틸다, 레이첼 누님에게 등을 떠밀리면서 욕실로 향하자, 나머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줄줄이 우리 뒤를 따라왔다.

"구원 씨. 물 온도는 어떤가요? 이 정도면 적당한가요?"

"당시인. 가려운 곳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그리고 욕실에 도착한 지금, 나는 왼쪽에 레이아 오른쪽에 마틸다에게 팔을 맡기고 앉아 있었다.

넘버 원투가 양옆에서 거품을 내고 씻겨 주다니. 비록 상상했던 것처럼 가슴에 거품을 묻히고 씻겨 준다든가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게 바로 하렘을 차린 기분이라는 거겠지.

아, 참고로 말하자면 레이첼 누님은 저기 욕조 쪽에서 다른 애들과 같이 관망 중이다.

욕실에 올 때까지는 어떻게든 허세를 부리면서 레이아나 마틸다에게 지지 않으려 했던 누님이었지만, 막상 실전에 들어와 버리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고 굳어져 버린 거다.

괜찮아요. 누님. 어차피 여기에 못 끼고 있는 건 누님 혼자만이 아니니까요.

디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입까지 욕조에 담근 채 뽀글뽀글 거품만 내면서 우리를 보고 있었고, 사라에 이르러서는 이쪽을 보는 것도 힘들다는 듯 아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있었으니까.

하여간 저 변태들은. 이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이 씻는 것뿐이잖아. 이런 것도 못 견디면 어쩌려고 그래? 차라리 레이가 더 잘 버티잖아.

그래. 실은 레이도 계속 우리랑 같이 있었거든. 욕실에만 따라온 게 아니라, 저택에 돌아오고 다 같이 모였을 때부터 쭉.

다만 미리엘과의 관계라든가 사도 임명이라든가 레이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투성이었을 테니, 얘기에 끼지도 못하고 쭉 잠자코 있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 레이는 지금 사라나 디아나, 레이첼 누님, 바넷사와 같이 욕조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이쪽을….

첨벙.

바라보고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레이가 몸을 일으켜 욕조에서 빠져나왔다.

물에 젖어서 더욱 윤기 있어 보이는 검은 피부를 자랑하며 시선을 내 쪽에 고정시키고 성큼성큼 다가온 레이는, 바로 내 앞까지 와서 무릎을 꿇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 없었다. 레이아나 마틸다를 본받아서 레이도 내 몸을 씻겨 주고 싶어진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됐으니까. 거기에 양옆을 레이아와 마틸다가 차지하고 있는 만큼, 남은 곳은 내 등 뒤나 바로 앞밖에 없다.

그러니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은 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레이는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숙이더니, 욕실 의자에 앉아 있는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가져가고는.

쪽.

"오, 오늘도…자, 잔뜩. 기분 좋게…해 줘?"

그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 이상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후끈후끈한 욕실이었는데. 왜 이렇게 갑자기 추워졌지?

옆에서 내 팔을 씻겨 주던 레이아와 마틸다마저도 굳어져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흐르는 물소리밖에 남지 않은 공간.

보통이라면 질식사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레이는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야. 이상해. 얘 또 대답을 안 해."

이상한 건 너다 이것아! 걔는 고유 의지를 가진 생물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아, 아니. 이게 아니지.

"기분 좋게 해주기는 뭘 기분 좋게 해줘!? 오늘은 안 할 거거든!?"

"으, 으응!? 지, 진짜? 저…레이아 씨? 아, 안 해요?"

당황해서 반사적으로 다리까지 오므리며 외치자, 레이는 마치 "뭐? 너희 섹스를 신봉하는 신을 섬기잖아!? 왜 안 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옆에 있던 레이아를 향해 확인 질문까지 던졌다.

"네, 네? 아, 저기, 저는…하, 할 건데요…."

처, 천사니이임! 이런 애한테 말려들면 어떻게 해요!? 우왓!? 심지어 상상했는지 구미호로 변신까지 했어!

"방에 가서 한다는 뜻이니까! 여기선 그냥 씻기만 할 거야!"

"아, 그, 그렇구나…그렇게까지 문란하지는 않구나…난 또 다 같이 남자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오니까 또…."

또 뭐!? 또 무슨 상상을 한 건데!? 이 발랑 까진 계집애 같으니라고! 뭐가 마신의 종족이야! 네가 우리보다 훨씬 더 섹스 생각만 하고 지냐는 거 아니야!?

"그, 그럼…기분…아니. 깨끗하게 씻겨 줄게?"

쪽.

게다가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도, 레이는 물러나기는커녕 다시 한번 내 물건 끝에 입술을 맞추며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니까 걔는…!

"얘 이래도 대답을 안 해."

아오 진짜! 자! 까딱인다! 이제 됐냐!?

"아, 진짜다. 씻겨 준다고 하니까 대답하네. 착하지 착해."

그런 식으로 쓰다듬지 마! 여기선 안 할 거라고 했잖아! 왜 기분 좋게 하는 건데!? 너 실은 모르는 척하면서 들이대는 거지!?

"야. 씻겨 줄 거면 그냥 빨리 씻겨나 줘."

"아, 응. 그럼…아아…."

"입으로 말고 평범하게 거품으로!"

장난으로 이상한 상식을 주입했던 게 이런 식으로 역효과가 나다니!

"하지만 너 전에 여기는 여자가 입으로 씻겨…."

너 진짜 알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쌌을 때! 그건 쌌을 때 얘기니까!"

제, 젠장. 욕조에서 날아오는, 양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 따가워!

그렇게 생각하면서 힐끔 욕조 쪽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연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디아나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입까지 욕조에 담그고 있어서 그런지 커다란 눈동자가 괜히 더 커다랗게 느껴져서, 내 양심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디아나 역시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옆으로 길게 늘어진 귀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참방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도저히 이대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표정. 그 표정만 보면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이쪽으로 달려올 것 같았지만, 디아나의 두 다리는 꼿꼿하게 서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디아나는 팔을 휙 휘둘러서 척하고 날 향해 손가락질하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가게! 바넷사! 저 어설픈 시중인들에게 진짜 목욕 시중이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주게!"

아니! 야! 기껏 그렇게 폼 잡아놓고 한다는 게 대리전이냐!? 할거면 네가 와서 하던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나였지만, 우리 집사님은 저런 황당한 요구마저도 완벽하게 수행해내는 완벽 초인이었다.

"알겠습니다."

알긴 뭘 알겠다는 거야!? 진짜로 진짜 시중이 뭔지 보여주게!?

"가만히 있으십시오."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와서 내 등 뒤로 돌아간 바넷사는, 아니나 다를까 뺨이 살짝 붉었다.

야. 너도 부끄럽잖아. 가만히 있기는 뭘 가만히…으헛!?

"하아아아…."

뭐, 뭐야 이거…평범하게 손에 거품 묻히고 문질러주는 것뿐인데, 뭐야 이 느낌은. 황제가 받는 목욕 시중이라는 게 이런 느낌인가?

"구, 구원 씨!?"

"당신!?"

"으으응?"

순식간에 녹아내린 날 보고 당황하는 레이아와 마틸다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런 둘에게 괜찮다는 말을 해줄 여력조차 없었다.

"후핫핫핫! 보았는가! 이것이 바로 진짜 프로의 기술이라는 것일세!"

디아나 넌 자기가 해주는 것도 아니면서 큰소리는….

"…저도 추기경으로서의 긍지가 있어요!"

하지만 그 황당한 도발에, 우리 추기경님은 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아니. 추기경님. 이건 딱히 추기경의 긍지랑은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이게 섹스 얘기였다면 그런 쪽의 강의도 해주는 교단의 추기경으로서 긍지를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이거 섹스랑 관련 없는 거에요. 그냥 평범하게 씻겨 주는 게 기분 좋은 거예요. 알고 계시는 거죠?

"자아, 당시인…이쪽도 기분 좋게 해드릴게요."

전혀 모르시잖아….

마틸다는 사람을 홀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인 다음,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오른쪽 유두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거품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유두를 간질간질 간질여주시니.

"으윽…!"

안그래도 녹아 있던 내 머리에 번개가 치는 것 같은 쾌감이 달리면서 순식간에 허리를 들썩이며 사정하고 말았다.

뭐, 뭐야 이 쾌감. 아무리 분위기에 취하고 기분이 좋아도 이건…아. 얘 지금 레벨 엄청 높지….

"엣? 꺄악! 갑자기 싸면 어떻게 해?! 정말…기분 좋았니? 쪽. 할짝."

게다가 정면에 있다가 갑자기 정액 세례를 받은 레이는 불평하면서도 예의는 지키겠다는 듯 물건에 말을 건네며 입으로 물건을 깨끗하게 해주기까지.

야. 그런 식으로…아니. 잠깐만. 내가 지금 왜 이걸 일일이 태클 걸면서 거부하고 있어야 하지? 그냥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어도 되잖아?

그래. 가만히 있자. 이젠 뭐가 뭔지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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