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화
너무나 당연하게도, 사방에서 이런 질문이 터져 나오게 됐다.
전부 지당한 말씀들이셔서,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이래서 얘들한테 얘기하기 전에 생각을 한번 정리하고 싶었던 건데. 신전에 붙들려 있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없었어.
"으, 으음. 그게 말이지. 그 왜 있잖아. 이제 아라크네 클랜에는 믿을만한 인물도 심어둔 셈이 됐으니까…."
"…그 여자?"
"그래. 앨리시아."
"야. 구원. 너 말이야. 네 그 여자의 마음을 받아준 얘기, 최근 모험가들의 주요 안줏거리 취급을 받을 정도로 화제인 건 알아?"
"그런 식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해서야, 사람을 심어둔 의미가 전혀 없다고 보네마는."
…그, 그것도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제, 젠장! 이 치사한 용사 대마법사 콤비! 맨날 투닥투닥 싸우는 주제에 날 몰아붙일 때만 죽이 척척 맞아서는!
"아니. 그래도…."
"아니면 구원 씨는…뭔가 다른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아는 한 손을 살포시 자기 가슴 위에 얹었다.
그것은 아마도, 별 의미 없는 습관적인 행동이었겠지. 뭘 얹기에 차고 넘치는 크기 때문인지, 우리 천사님은 종종 저런 행동을 하시니까.
문제는 저택에 돌아온 후 다른 사람들이 모일 동안 레이아도 전신을 가리는 사제복을 갈아입고 와서, 지금은 가슴팍을 훤히 드러낸 무척이나 눈에 보양이 되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차림으로 저런 행동을 하니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 가슴 위로 눈이 갔고, 자연스럽게 그 가슴 위에 새겨진 인장에 주목하게 됐다.
살을 살짝 태운 것처럼 옅은 색이었지만,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천사님의 몸에서는 무척이나 눈에 띄었으니까.
그래. 바로 사도 인장 말이다.
"……!"
그리고 그 인장을 눈으로 인식하자마자, 모두가 동시에 눈을 희번덕이면서 휙 소리가 날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유일하게 날 희번득 쳐다보지 않은 건 자기 가슴에 눈길을 주지 않은 천사님뿐이었다.
천사님은 혼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다른 사람들을 모습을 두리번두리번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래로 눈을 떨어뜨렸고, 그제야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는 듯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남들보다 두 박자 늦게 날 쳐다봤다.
그런 천사님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귀여워서 평소 같았으면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겠지만, 이번만큼은 천사님의 힐링도 별로 소용이 없었다.
무서워! 무섭다니까요!? 눈에 힘 좀 풀어줘요!
"야. 구원."
"으, 응?"
마치 자기 힘의 근원이 마신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위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사라의 눈빛에, 나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떨 수밖에 없었다.
"너 솔직히 말해. 그 여자한테…사도 임명했어?"
"…아니."
하지만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겨우 공포심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 그래! 내가 걔한테 진짜 사도 임명을 한 것도 아닌데, 겁먹을 필요 없잖아?
"사라. 넌 날 그렇게 못 믿어? 내가 그런 중요한 걸, 너희한테 말도 안 하고 함부로 사용했을 것 같아? 실망이야!"
"어, 어? 아, 아니. 난 그냥…구원이 너무 그 여자를 믿는 것처럼 말하니까…미, 미안…."
역시나 제아무리 용사라도 내가 이런 식으로 반격할 줄 상상도 못했는지, 사라의 기세가 확연히 꺾였다.
좋아.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면서 그사이에 뭔가 변명을….
"그러면 구원 씨. 사도 임명은 전혀 관계없는 건가요?"
"아니. 그것 때문에 믿는 건 맞는데…아."
아, 아차! 한 번 밀어붙였다고 방심한 나머지 무심코 솔직하게 대답을…!
"뭐어!? 야! 구원!"
"자, 잠깐만! 설명할 수 있어! 설명할 기회를 줘!"
사라의 기세가 아까보다도 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걸 감지하고, 나는 바로 백기를 들어 올렸다.
제, 젠장. 이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말이지. 실은 전에 내가 미리엘을 잡아두고 며칠 만에 풀어줬잖아? 그때 사도 임명이 되는 걸 확인해서 풀어…자, 잠깐만 얘들아! 얘기는 끝까지 들으라니까!? 내가 아무리 그래도 사라 네 동생한테까지 손을 대겠어!?"
"별로 동생이라고 생각 안 하는데…그래서?"
하긴. 동생이라고 생각했으면 그 여자 그 여자라면서 견제할 리도 없겠지만.
"아무튼 나도 이상하긴 하더라고. 대체 왜 사도 임명이 되는지. 그래서 오늘 여신님한테 그것도 물어봤지. 그랬더니 글쎄 사도 임명을 발동할 수 있는 조건에 서로 사랑하는 것 말고도 다른 조건이 있다는 거야."
"다른 조건 말인가?"
"그래. 바로 조…."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나는 아까 낮에 여신이 왜 내가 조교라고 할 때 불편한 표정을 지었는지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 애들 앞에서 조교로 굴복시켰다고 말하려니까 엄청 입을 떼기 힘드네.
"…내가 걜 붙잡아두고 설득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잖아? 그러는 과정에서 말이지.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지…그, 그래! 날 많이 의지하게 되어서 말이야!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런 감정이 극에 달하면 사도 임명이 된다고 하더라고, 글쎄! 와 나도 깜짝 놀라서 진짜…."
"…자네."
엄청나게 잘 둘러댔다고 속으로 자화자찬까지 하면서 말했는데, 의외로 주위의 반응은 냉담했다.
"으, 응?"
"그러면 결국 아침의 마석 정산 소동은 무엇이었는가?"
"아, 그거? 그냥 걔가 나한테 관심 받고 싶어서…."
자, 잠깐만. 망했다. 이렇게 말하면 그냥 의지하는 게 아닌 것 같잖아. 이거 내가 들어봐도 좋아하는 사람의 반응 같은데?
아니. 사실 나도 미리엘의 반응이 그냥 조교당해서 복종하는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는 건 깨닫고 있었지만! 요즘 엄청 노골적으로 들이대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도 진짜로 그런 거 아니라고!
"흐으으응. 구원. 아까 뭐라고 했더라? 뭐? 내 동생이니까 손을 안 대?"
아니나 다를까, 사라가 바로 눈동자를 활활 불태우면서 내 눈앞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에, 에이. 사라야. 너 또 왜 그러니. 모처럼 예쁜 얼굴이 무섭게 변하잖아.
자, 잘 생각해 봐. 충분히 오해할 만한 발언이라는 건 나도 잘 알겠는데.
"아, 아니. 사라 씨. 생각해 보세요. 이건 제가 손을 댄 게 아니라 걔가 나한테…."
이건 틀렸다. 죽는다.
나는 잠시 후 내 몸을 덮칠 용사의 분노를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기다려도, 예상했던 용사의 분노는 떨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뜨자, 콱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표정으로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사라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만히 있는다는 건, 진짜로 때릴 생각은 없다는 뜻이겠지.
웬일이지? 사라가 이 타이밍에 분노를 참다니.
"사라 씨…. 저…구원 씨?"
의아해하는 나와 달리, 레이아는 사라가 왜 그러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슬그머니 사라를 안아서 토닥이며 옆으로 살짝 비키게 해주고, 레이아는 본인이 내 정면으로 와서는 내 두 손을 꼬옥 감싸 쥐고 허리를 살짝 굽힌 채 내 눈을 빤히 올려다봤다.
"그래서 구원 씨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미리엘을 플리투스에 보내볼 생각이야."
이렇게 말하면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낮에 미리엘이 한 말대로다. 만약 미리엘이 실패하더라도, 나한테 손해될 건 없으니까.
"사도 임명은?"
"안 할 거야."
"왜? 해. 하고 보내는 게 더 안전하잖아?"
"사라야. 너…."
확실히 내가 아까 말을 조금 이상하게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몰아붙이는 거 아니냐?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고개를 돌려 확인한 사라의 얼굴을 더없이 진지했다. 조금 전까지 내뿜던 분노도 전부 삭였는지, 화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꼬는 거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해. 그 여자한테도."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실패하면 전부 끝이잖아?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봐야지."
그제야 나는 드디어 사라가 왜 그렇게 참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가. 아까는 그렇게 가장 먼저 강한 척하면서 사기를 북돋았지만, 결국 사라도 걱정이 없을 수는 없는 거다.
그리고 아까 레이아가 사라를 끌어안아 준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다들 그런 사라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을 쭉 둘러보니, 다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리엘에게 사도 임명을 하라는 사라의 말 자체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니. 안 할 거야."
하지만 나는 모두가 보여준 의지가 어떤 의미인지 전부 이해하고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여신님이 사도 임명을 적극 사용하라고 했지만, 거절했잖아? 그때나 지금이나 내 대답은 똑같아. 난 단순히 목적만을 위해서 사도 임명을 사용하지는 않을 거야. 인장에 담긴 마음은 나도 너희와 같아. 나한테 있어서도 사도 임명은 어디까지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증표 같은 거야. 그러니까 다른 목적으로 쓸 생각은 없어. 혹시 내가 미리엘도 사랑하게 되어서 사도 임명을 할 수 있게 되면 모르겠지만, 아까 말했잖아? 미리엘의 경우는 다른 조건이 충족되어서 사도 임명이 사용 가능한 것 같다고."
그래. 중요한 건 이거였다. 솔직히 말해서 고민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아까 먼저 돌아와서 생각해 보려고 했던 가장 큰 주제도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 애들을 눈앞에 두고 반응을 보니,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내 생각은 확고해졌다.
얘들이 지금까지 사도 인장을 사랑의 증표로 생각하면서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다름 아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오죽하면 인장 위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내가 바꿔준다고 하면 기겁하고 싫어하겠어.
지금까지 그만큼 소중한 마음을 담아서 하나하나 시도한 사도 임명을, 필요하다고 남발할 수는 없지.
물론 이렇게 말하면 레이를 걸고넘어질 수도 있겠지만, 난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다고 본다.
레이와 그렇게 된 건 어디까지나 내 실수다. 게다가 가만히 놔두면 나뿐만 아니라 레이 역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다.
레이의 경우는 단순히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잘못을 나 스스로 바로잡는 의미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목적만을 위해서였으면, 레이도 그냥 미리엘처럼 며칠 조교해서 간단하게 사도 임명 가능 상태로 만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내가 뭣 하러 여기까지 데리고 오면서 서로 신뢰 관계를 쌓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어? 그러니 레이의 경우는 이 경우랑 확실히 달라.
억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안에서는 확실히 그렇게 구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중요해. 왜 안 중요하겠어? 너도 날 잃기 싫어서 실패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 그거랑 같은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너희가 좋아서, 너희랑 헤어지기 싫어서 이렇게 필사적인 거야. 그런데 그를 위해서 너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너희와의 추억을 짓밟아서는 의미가 없어."
"왜, 왜 그렇게…."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사라는 감격하면서도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알아줘. 사라야."
"…만약 실패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이렇게 감정이 흔들려도 역시 사라는 사라였다. 마지막 순간에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서 감정을 꾹 누르고는, 사라는 아닌 척 고개를 휙 돌리며 퉁명스럽게 그렇게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네 동생은 훨씬 괜찮은 녀석이니까. 아마 괜찮은 거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만약 걔가 나쁜 마음을 먹더라도 바로 교정해 줄 자신 있어."
"……."
어, 어라? 나 지금 엄청 멋있게 마무리 짓지 않았어? 왜 이렇게 반응이…아, 아앗!
"아, 아니! 이상한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됐어. 그건 이제."
당황한 날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사라는 이제 넌 그만 말하라는 듯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리고 그런 우리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들도 슬그머니 미소를 지어줬다. 아까 나랑 사라가 억지로 기운을 북돋은 후 보여줬던 억지 미소가 아니라, 진짜 미소를.
다행이다. 아까는 사라가 제일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 사라한테 말하는 것처럼 되었지만, 내가 한 말은 사라한테만 한 말이 아닌 여기에 있는 모두를 향해 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내 의지는 모두에게도 제대로 전해진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