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10화 (1,077/1,205)
  • 1110화

    내 머릿속에서, 엄청난 아이디어가 문득 떠올랐다.

    물론 그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사전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실행 가능하다면, 이보다 더 일이 쉬워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당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괜찮아요? 역시 아까 일로 무리가…."

    "아, 아니. 별거 아니야. 아무튼 슬슬 나갈까? 휴식 시간도 지난 것 같은데, 너무 오래 있으면 사람들이 걱정하겠다."

    겉으로는 그렇게 대답한 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번 제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어.

    어차피 마틸다도 다시 훈련장으로 돌아갈 테니, 난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모두에게 얘기하기 전에, 일단 혼자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마틸다와 함께 방을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일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니. 뭔가 큰 문제가 생겼다든가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아까 여신이 소환될 때 이상한 소리를 냈었잖아? 그 이후부터는 쭉 텔레파시로 대화했으니 괜찮지만, 처음에 질러 버린 그 소리는 역시나 신전 전체에 퍼져 나가 버린 모양이라 말이야.

    "추기경님, 조금 전 여신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만 무슨 계시라도…성자님도 오셨습니까?"

    소피아 대사제를 앞장세워 사제들이 우르르 문 앞에 진을 치고 있었던 거다.

    엄청나게 불편하군. 장모님 몰래 처가에 숨어들어와서 다른 여자랑 놀다가 딱 걸린 기분이야.

    아니. 소피아 대사제는 내가 마틸다랑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테니, 그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야.

    "대사제님! 교황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추기경님의 저주에 걸렸던 남자들의 저주가 일시에 모두 풀렸…."

    뭐, 뭐라고!? 아, 아니. 생각해 보니 당연한가. 레벨이 그렇게 오를 정도였으니, 얼마 남지도 않았던 저주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나로서는 섹스한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아서 왠지 실감이 안 나는…잠깐만. 그런데 이봐요 아가씨. 할 말이 있으면 끝까지 하지 왜 도중에 끊고 우릴 그렇게 빤히 쳐다봐요? 왜 갑자기 얼굴을 붉혀요!?

    "크, 크흠…."

    소, 소피아 대사제님!? 대사제님은 또 왜 그런 표정을…아, 아니야!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확실히 삽입은 했지만,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파워 섹스를 해서 저주를 푼 게 아니야! 댁들 아까 여신 목소리도 들었잖아!? 그래서 이렇게 우르르 몰려와 있는 거 아니었어!?

    "…마, 마틸다 추기경님께서는, 그…기분 좋으실 때 목소리마저 신성하셔서 마치 여신님…."

    무, 무슨 착각을 하는 거야아아아! 설마 아까 그 소리가, 마틸다가 그냥 기분 좋아서 낸 소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신전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못 낸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상식적으로!

    "자, 자 여러분!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들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소피아 대사제에에에에! 신경 써주는 건 알겠는데, 지금 이렇게 해산해 버리면 우리가 해명할 기회도 없어지잖아!

    마틸다! 마틸다도 뭐라고 말 좀…!

    "아으으으…."

    안 되겠다. 이건. 부끄러움에 완전히 맛이 가버렸어. 귀 끝까지 새빨갛게 붉히고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마치 수치 플…에에잇! 젠장! 주변 사람들이 다 이상한 생각을 하니까 나까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저주는 마틸다가 성녀가 되어 여신님을 몸에 강림시키면서 풀린 거예요."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건 역시 내 재치밖에 없다. 그렇게 판단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 끝에, 나는 간신히 완벽한 변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서, 성녀? 마틸다 추기경님도 말이에요?"

    "그래요. 그러니까…."

    "하, 한 시대에 두 명의 성녀가 동시에 나타나다니!"

    별일 아니라는 듯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소피아 대사제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에, 엥? 뭐야 이거? 반응이 왜 이래? 성녀가 둘이나 있으면 안 되는 거였어?

    "역시 성자님이셔…."

    "오오…!"

    게다가 주위에 모인 다른 사제들도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이쪽을 쳐다보는 게, 마치 대장간의 변태 커플을 도와준 게 소문난 이후로 날 쳐다보던 마을 사람들과 비슷한 느낌이….

    그,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왜 이쪽을 향해 기도를 올리기 시작하는데!? 아무리 그래 봤자 댁들은 성녀로 만들어줄 수….

    "성자님."

    "네, 네…?"

    "같이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소피아 대사제의 기세에 눌려서,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저택에 먼저 돌아가서 생각을 정리하려던 내 계획이….

    그 이후로도 또 한바탕 큰일이었다.

    여신과 나눈 대화의 내용은 사명과 관련된 내용이라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넘어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여신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성녀의 탄생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이런 식으로 동시대에 두 명의 성녀가 공존하는 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전대 성녀가 늙어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새로운 젊은 성녀가 탄생하여 짧게나마 두 명의 성녀가 같이 존재하는 건 종종 있었지만, 레이아와 마틸다의 경우는 그런 게 아니니까 말이야.

    안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성녀의 대가 끊긴 상황이었는데, 이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두 명의 성녀가 공존한다니.

    당연히 소식을 접한 사제들은 여신님의 축복이니 성자의 은총이니 떠들며 기도하기 바빠서, 신전 기능은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심지어 교황청에도 다시금 연락이 와서 두 성녀의 탄생을 축하는 의미로 대대적인 축제를 열자는 의견까지 나왔지만, 성자의 사명이 끝나지 않은 지금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는 말로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니. 그냥 축제만 하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그런 걸 했다가는 퍼레이드니 의식이니 뭐니 하면서 성녀 둘은 물론 성자인 나까지 교황청으로 끌려갈 게 불 보듯 뻔했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예정에도 없는 다사다난한 오후를 보낸 끝에, 늦은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겨우 신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심지어 마을 사람의 눈에 들면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까 봐 다 같이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도둑놈처럼 살금살금 숨어서 집까지 왔다니까.

    "피곤해 죽을 것 같아…."

    "미안해요. 할머니가 극성이셔서."

    저택 근처까지 오고 나서야, 우리는 드디어 답답한 후드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후드를 벗어던지고 피로감을 잔뜩 드러내자, 마틸다가 옆에서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아니. 오히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야. 전에는 어디 편찮으신 것 같다고 했었잖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이 갖춰진 교황청에 계시는 분이 그런 모습을 보이셔서, 마틸다가 엄청나게 걱정했던 걸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통신 마법 장치 너머로 본 교황님은, 기운이 넘치다 못해 처음 뵈었을 때보다 더 정정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기억하고 계셨나요?"

    "당연하지 기억 못 할 리가 없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틸다의 할머니인데."

    "당시인…."

    내 말에 적잖이 감동한 건지, 마틸다는 내 팔을 꼬옥 껴안으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올려다봤다.

    감동한 건 좋지만, 지금 이거 혹시 핑크빛 모드가 된 건가? 마틸다 너 이제 저주도 풀렸잖아? 왜 또 이렇게….

    "후훗. 그래도 조금 즐거웠어요. 모두가 기뻐해 주고, 거기에…."

    그런 생각을 하며 마틸다와 마주 보고 있자니, 마틸다의 반대쪽에서 이번에는 레이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내 팔을 슬그머니 껴안았다.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귀여운 눈웃음이 너무나 눈부셨다.

    "거기에?"

    "모르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 팔을 조금 더 힘있게 꼬옥 껴안는 레이아. 그 커다란 가슴이 꼬옥 눌리며 모양을 바꾸는 것이 사제복 너머로도 보일 정도로…아니. 이게 아니지.

    아무튼 레이아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모양이다. 오랜만에 나랑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뻤다고.

    하긴 최근 들어서는 이렇게 같이 있을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말이야. 가끔 같이 있더라도 섹스로 시간을 보낸 게 대부분이었고.

    "하긴. 나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즐겁기는 했어."

    "후훗. 그렇죠?"

    레이아의 머리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해주자, 레이아는 귀를 쫑긋쫑긋 움직이며 더 해맑은 미소를 보여줬다.

    치유된다.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피로가 한 번에 싹 날아간 기분이야.

    무척이나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레이아와 마틸다를 양옆에 끼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우리는 금세 저택에 도착해 버렸고, 바넷사의 마중을 받아서 정문을 지나간 순간, 마틸다의 입에서 지금 처한 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발언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당신, 여신님과 나눈 대화는 모두 모였을 때 얘기해 준다고 하셨죠?"

    그래. 이제부터는 또 진지하게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할 때였다.

    이미 저녁 시간은 지났을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바넷사에게 부탁해 모두를 한자리에 모았다.

    "…그, 그런 대화였다니…."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는 우선 여신과의 대화 중 우리가 실패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부터 말해 줬다.

    나조차도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얘기다. 아마 다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

    그렇잖아? 아무리 그렇게 믿는 여신님이 내려주신 사명이라고 해도, 지금까지 내가 던전에 갈 때마다 아무도 단 한 번의 불평도 하지 않은 건 이상하니까.

    원래라면 위험하니까 이런 일은 그만두라고 해야 정상이다. 우리가 던전을 안 다닌다고 해서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형편도 아니고 말이다.

    심지어 내가 4계층에서 조난당했다가 돌아왔을 때조차, 컨디션을 완전히 되찾을 때까지 쉬게 하려고만 했지 던전행을 완전히 그만두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거다. 만약 여신님의 말을 따르지 않거나 사명을 실패하면, 나와 영영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역시 그랬구먼. 이방인이 모두 사라진 후에야 자네가 나타났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네만…."

    하지만 아무리 예상하고 있었어도 직접 말로 듣는 건 충격이 큰지, 다들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젠장. 이래서 얘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옛날의 나였다면 절대 얘기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 애들이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느니 차라리 혼자 고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미 약속해 버렸으니까 말이야. 더는 혼자 끙끙대고 고민하지 않기로. 그 때문에 우리 애들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해버렸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우리 중에는 이런 때에조차 강한 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다들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그게 뭐 어때서? 실패 안 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래. 바로 용사님 말이다.

    나이는 제일 어린 주제에 강한 척하기는.

    원래 세계에서 게임이나 만화로 그려지는 용사는 보통 누구보다 강한 의지를 가지고 모두를 이끄는 존재처럼 묘사되는데, 사라를 보면 가끔 그런 용사가 떠오를 때가 있단 말이지.

    뭐, 이 세계에서 용사는 상당히 의미가 다르지만.

    "사라 말이 맞아. 너무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애초에 실패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야. 그냥 앞으로 더 열심히 하자 정도로 받아들이면 그만인 얘기야. 그렇지?"

    아무튼 지금은 사라의 말에 편승해서 분위기를 돋울 때다.

    "그래. 거기에 당장 마신을 없애라는 게 아니니까. 일단 전쟁을 멈춰서 봉인이 풀리는 시기만 늦추면 되는 거잖아? 실패할 리가 없어. 저쪽에서 짠 계획도 잘 풀려가고 있다면서? 레이한테 들었어."

    사라도 내 마음을 아는지 맞장구치며 그렇게 말해 줬고, 우리 둘이서 그러고 있자 다른 사람들도 계속 우울한 표정만 짓고 있을 수는 없어졌다는 듯 억지로나마 조금씩 표정을 폈다.

    "당연하지! 누구 계획인데. 일단 바프라만 손안에 넣으면, 다음은…."

    그 순간, 낮에 미리엘이 한 말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프라만 먹어서는 어느 쪽의 전쟁도 멈출 수 없다는 얘기 말이다.

    "자네. 이 몸의 생각에는, 바프라와 동시에 플리투스도 장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디아나도 그 점을 지적해왔다.

    역시 신과 유리를 만나서 처음 변명할 때 플리투스의 이름을 댔던 게 문제였나. 곁에 디아나만 있었어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그냥 오래전에 잊혀진 용사의 후손이라고만 했어도….

    "그런 표정 짓지 말게. 확실히 어려운 문제네만, 다 같이 생각하다 보면 뭔가 계책이 떠오를 것일세. 우선은 플리투스 전체가 아닌, 플리투스와 바프라가 맞닿은 국경 지역을 장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생각해 보세. 그곳만 장악하더라도 일단은 자네들이 의심받을 일은 없을 터이니 말일세."

    저렇게 말한다는 건, 그 머리 좋은 디아나조차도 당장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가. 하긴 뭔가 방법이 있었으면 얘들이 그냥 구미호 마을에 머물러 있기만 했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역시 남은 건, 그 방법밖에 없나.

    "…실은 하나. 방법이 있어. 아침에 내가 미리엘을 찾아갔었잖아? 그때 저쪽에서 제안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미리엘이 내게 던진 제안을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사도 임명이 된다는 사실이나, 미리엘이 내 관심을 받고 싶어서 이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숨기면서.

    하지만 그렇게 몇 가지 사실을 빼놓은 채로 설명하다 보니, 당연히 설명에 부자연스러운 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미리엘 씨만 너무 위험해지는 것 아닌가요?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한 이유가 뭘까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런 제안을

    "음. 미리엘 양이 길드에 6계층의 주인이 지닌할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설명은 되겠지만…."

    마석을 건넨 방식까지 생각해 보면, 불순한 의도밖에 느껴지지 않는구먼."

    "당신, 그런데도 당신은 미리엘 씨를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야 이 바보야. 너 얼마 전에 그 여자한테 찔려서 배에 구멍 날 뻔한 거 잊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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