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09화 (1,076/1,205)
  • 1109화

    그거야 물론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죽은 타이밍과 내가 이 세계에 온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일치한다는 것까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역시 그런 건가. 즉, 여신님도 내게 전부를 걸었다는 얘기다.

    "그래요. 제가 왜 조금의 힘을 보험으로 남겨두려고 하는지, 잘 아시겠죠?"

    내가 실패할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고작 그 정도 힘을 남겨봤자, 어차피 내가 실패하면 할 수 있는 건……아니. 하나 있기는 있지.

    여신님에게는 고작 그 정도 힘일지라도, 나 하나 처리하는 건 간단할 테니까.

    모든 이방인이 사라지고 나서 날 보낸 것처럼, 이번에는 날…….

    "성자 구원. 당신은 가끔 생각의 비약이 너무 심해요."

    크헉. 아, 아뇨. 여신님. 여신님을 의심한 게 아니라 말이죠.

    "아무리 상호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절 돕기 위해 찾아온 당신을 죽이고 힘을 회수한다니. 그런 짓은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다른 이들도 모두 자연히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기다린걸요? 무엇보다, 힘의 회수라면 굳이 죽이지 않아도 언제든지 회수할 수 있어요."

    ……아마 여신님은 날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겠지만, 나는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전부터 느껴왔던 불안감이 증폭된 기분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저 말은 즉, 내가 실패할 것 같으면 힘을 회수하고 다른 이를 데려와 그 힘을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니까.

    여신님이 남겨둔 보험용 힘이 또 다른 이방인을 데려오기 위한 힘이라고 한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

    그리고 지금까지 내 생각을 읽으며 꼬박꼬박 반박하던 여신님도, 이번만큼은 아무런 반박 없이 조용히 침묵만을 유지했다.

    분명 이번에도 생각을 읽었을 텐데도.

    "성자 구원.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내 생각을 전부 읽으면서도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여신님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텔레파시를 통해 내 머릿속으로 목소리를 전달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마신의 부활을 막는 것. 만약 당신이 실패한다면, 그 힘을 회수하여 또 다른 성자를 데려와야 할지도 모르죠.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하지만 성자 구원.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당신을 해친다는 뜻이 아니에요. 당신은 그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뿐이에요. 원래 세계로 가서, 이 세계에 오기 전처럼 평범한 삶을 사는 거죠. 이 세계와 당신이 살던 세계는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만약 돌아간다고 해도 시간은 몇 시간 정도밖에 흘러있지 않겠지요. 당신은 그저 몇 시간 게임을 하고 나온 것이 되는 거예요."

    마치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는 듯이 차분한 목소리로 날 타이르는 여신님의 말은, 얼핏 들으면 정말로 문제 될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문제는커녕 이 일로 여신님을 경계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지도 모르지.

    난 어디까지나 계약에 따라 이 세계에 불려 왔고, 그 때문에 힘을 부여받은 거니까. 계약 조건 달성에 실패하면 부여했던 힘을 돌려받고 원래 세계로 다시 보내는 건, 여신님으로서는 당연한 일이 되는 거다.

    게다가 전부 원래대로 돌려주기까지 한다잖아? 따지고 보면 실패에 따른 패널티가 전혀 없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신님과의 계약은 상당히 내게 유리한 계약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전부 냉정하게 생각해봤을 때 그럴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게다가 나는 이성적인 것하고는 거리가 먼, 오히려 매우 감정적인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여신님의 말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려고 해도, 그런 건 내게 불가능했다.

    지금 가진 힘을 모두 잃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라고? 원래 세계에서는 몇 시간 지나있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가진 기억은 온전히 남아있을 거다. 과연 그 세계에서 내가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하다. 힘을 잃는 게 문제가 아니다. 아니. 물론 힘을 잃는 것도 아깝겠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애들이랑 헤어지게 된다는 거다.

    예전부터 느껴왔던 막연한 불안감. 뚜렷한 동기부여가 있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내가 꾸준히 던전으로 발걸음을 옮긴 원동력이 바로 이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불안감이 여신님의 입을 통해 현실이 된 거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내가 여신을 경계하지 않고, 어떻게 냉정하게…!

    "물론, 지금의 당신에게는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가혹한 일이겠지요. 저도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어요."

    "그걸 알면서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는 개소리를…!"

    "하지만 성자 구원. 이 얘기는 전부 당신이 실패했을 때의 이야기에요.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면, 당신이 실패하지 않으면 그뿐인 이야기죠."

    나도 모르게 욱하고 소리 질렀지만, 여신님은 그런 내 태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을 들이밀었다.

    "그러니 당신이 절 경계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저야말로, 당신이 성공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바라고 있으니까요. 이 말조차 의심하는 건 아니죠?"

    "……."

    확실히 그건 그랬다. 자기 목적을 위해 가차 없이 내게서 힘을 뺏을 수 있다고 말하는 모습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인상과 너무 달라서 절로 경계심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신이 내 실패를 바랄 리가 없었다.

    "그래요. 특히나 당신은 그 어떤 이방인이 오더라도 얻지 못할 조건을 갖추는 것에 성공했으니까요. 절대로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조건?"

    "대마법사 아이의 마음을 얻은 것 말이에요. 그 아이를 통해 당신은 영생을 얻었으니, 우선 밑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멈춰 마신의 부활 시기만 연장시킬 수 있다면, 남은 교화 작업의 기한은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어요?"

    …과연. 그러고 보니 처음 레이아를 통해 강림했을 때, 내가 사도 임명한 여자들의 면면을 보고 무척이나 칭찬했었지.

    여신으로서도 이렇게 좋은 조건을 갖춘 사도가 또 나오리라는 법은 없으니, 내가 성공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는 건가.

    만약 여신이 감정에 호소하여 당신은 내가 가장 아끼는 이방인이니 뭐니 헛소리를 했다면 믿음이 안 갔겠지만, 이렇게 자기 목적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니 오히려 더 믿음이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안에서 확 바뀌어버린 여신의 이미지가 다시 나아진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젠장. 예전에는 신하면 떠오르는 절대적이고 권위적인 이미지와 달리, 어딘가 나사 빠진 구석도 있고 맹하기도 해서 귀여운 여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나사 빠진…."

    저것 봐. 방금까지는 그렇게 냉정했던 주제에, 이번에는 또 저렇게 귀여운 척을…저것도 전부 날 안심시키기 위한 연기였다는 건가.

    "서, 성자 구원! 당신은 가끔 너무 의심이 지나쳐요!"

    안 속아. 더는 안 속을 거야. 누가 믿을까 보냐.

    "정말…안 믿어 봤자 어차피 저와 같이 손잡고 마신을 막아야 하는 건 변함이 없잖아요…. 너무 의심하지 말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물어나 보세요. 슬슬 갈 시간이에요."

    확실히. 여신이 귀엽든 냉정하든, 지금 할 일은 의심하고 경계하는 게 아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청개구리 본능이 발동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우리 애들이랑 진짜로 헤어질지 모르는 거라고. 나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전에 하나만. 만약 내가 성공하면, 그때는?"

    "네?"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날 어떻게 할 거지?"

    "당신이 읽어보지도 않고 넘겨버린 처음 계약서대로, 소원을 하나 들어 드릴 거예요."

    …계약서 앞에 붙이는 수식어가 너무 길잖아. 그거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 여신 주제에 쪼잔하기는.

    "쪼, 쪼잔하지 않아요! 당신을 설득하려고 제가 얼마나 열심히 썼는데요! 그걸 그렇게 눈길 한번 안 주고…!"

    칫. 또 귀여운 척인가.

    "그러니까 귀여운 척이…됐어요. 정말! 그럼 저랑 더 할 말 없으세요!? 저 갈 거예요!?"

    "잠깐! 그전에 물어볼 게 있어. 위에서 보고 있었을 테니 미리엘이 내게 한 제안도 알고 있지? 그건 어떻게 생각해?"

    미리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고 못 박은 여신이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명색이 여신이다. 나보다 더 객관적으로 미리엘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 의견이라도 들어보자.

    "성자 구원. 당신도 사도 임명이 발동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잖아요? 어느 쪽 조건이 충족되었든 상관없어요. 그 아이가 당신에게 나쁜 생각을 하고 있을 리는 절대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요."

    "적어도 지금은?"

    "사람의 마음이란 변하기 쉬운 것이니까요.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아래로 내려가서 새로운 환경과 접하다 보면 생각이 변할지도 모를 일이죠. 물론 사도 임명을 쓴다면 당신에게 해가 되는 쪽으로 변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미리엘에게 사도 임명을 쓰길 원하는 건가?"

    "그 아이뿐만이 아니에요. 전 처음부터 당신이 사도 임명을 적극 활용하기를 바랐어요."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런 말을 했었지. 하지만….

    "이제 정말로 시간이 다 됐네요. 성자 구원. 마지막으로 한마디 할게요. 절 매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제와 당신은 운명 공동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너무 의심만 하지 마시고, 필요할 때는 절 믿고…으읏! 저, 저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짓는 여신. 동시에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신성한 기운이 차차 사그라지더니, 사랑스러운 추기경님이 내 안색을 빤히 엿보았다.

    "당신 괜찮으신가요?"

    아마 지금 내 표정은 상당히 복잡하겠지.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내 표정을 계속 보고 있었을 테니 걱정이 들지 않을 리가 없을 거다. 레이아의 말에 따르면 여신이 자기 몸에 강림해도 의식은 또렷하게 남아있다는 모양이니까.

    "응? 뭐가?"

    하지만 여신과 나눈 대화를 지금 당장 공유하는 건 망설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중요한 얘기를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수도 없기는 했다.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이유로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두기엔 너무 중요한 얘기니까.

    그러니 언젠가 말하기는 말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았다.

    "표정이 좋지 않아요. 여신님과 무슨 말을 나누신 건가요?"

    "돌아가서 얘기해줄게. 던전 공략에 관한 얘기니까, 다 같이 있을 때 한 번에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안 좋은 얘기인가요?"

    "아니. 안 좋다기보다는…조금 복잡한 얘기야."

    거짓말은 아니다. 여신이 한 말을 따라 하자는 건 아니지만, 실패만 하지 않으면 정말로 나한테 문제 될 거 하나도 없는 얘기니까.

    게다가 성공한 후의 미래도 확실히 대답을 들었으니, 좋은 얘기도 섞여 있기는 하잖아?

    "그런가요…. 그, 그런데 혹시…여신님이 저에 관해서는 별다른 얘기 안 하셨나요?"

    "응? 아, 성녀가 됐으니까? 별말 없었어. 하지만 여신님도 마틸다가 얼마나 여신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지 잘 알고 계실 거야. 이번에는 나랑 마신에 관한 얘기를 하기에도 바빠서…."

    아무리 내 안에서 여신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신을 이렇게나 믿는 마틸다에게 안 좋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열심히 마틸다를 다독여주고 있자니, 마틸다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여신님을 강림 몸에 시켰을 때, 저 당신과…아아! 어쩌자고 그런 일을…!"

    아아.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괜찮아. 그것도 걱정할 거 없어. 아마 여신님도 기분…."

    좋았을 거라고 하면, 성녀 앞에서 여신을 모욕하는 게 되겠지?

    반사적으로 내뱉으려고 했던 말을 가까스로 멈추고, 나는 다른 말로 마틸다를 다독여줬다.

    "마틸다의 기분을 이해해주셨을 거야. 마틸다가 그동안 얼마나 여신님을 그 몸에 강림시키고 싶어 했는지, 알고 계시는 눈치였거든."

    "그, 그런가요?"

    "응. 그럼. 마틸다도 정신은 있었을 테니까 봤잖아? 정령으로 씻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 나누던 거."

    "다, 다행이네요. 그러면…당신은 괜찮은가요?"

    "응? 나? 나야 물론 괜찮지. 내가 섹스로 나가떨어지는 거 봤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마틸다는 그저 솔직하게 기뻐하면 돼. 드디어 염원하던 성녀가 되고, 여신님까지 강림시켰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마틸다는 드디어 그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아…그, 그렇네요! 저 드디어…!"

    "그래. 마틸다도 오늘부터 드디어 성녀야. 많이 노력했나 보네. 나도 설마 설마 했는데, 이렇게 빨리 성기사의 마음가짐을 마스터하다니. 진짜 나도 아까 확인하고 깜짝…."

    그렇게 말하면서 무심코 다시 마틸다의 스테이터스창을 열어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당신? 왜 그러세요?"

    "아니. 마틸다 너 레벨이…."

    3, 318!? 뭐야 이거!?

    당연한 얘기지만, 조금 전 성녀로 전직할 때까지 마틸다의 레벨은 250이었다. 용사나 성자 같은 특수직 레벨을 올리지 않는 이상, 전직으로 레벨 한계를 돌파하지 않으면 그 이상 레벨이 오르지 않는 세계니까.

    즉, 마틸다는 그 잠깐 사이에 레벨이 68이나 올랐다는 얘기가 된다.

    심지어 나보다도 높잖아!? 250부터 레벨 올리기가 얼마나 힘든데 한순간에 68이나 올라!?

    서, 설마 아까 여신을 강림시켰을 때, 쥐어짜진 것 때문인가?

    몸을 조종하는 건 여신이었다지만, 그 몸 자체는 마틸다의 것이었으니까.

    정액을 오줌처럼 싸고 있었으니, 그 사이에 수십 수백 번의 절정을 느낀 것처럼 처리된 건지도 몰라.

    게다가 상대방이 느끼는 쾌감이 크면 클수록 얻는 경험치도 많으니, 아까 내가 느꼈던 쾌감의 폭력을 생각해보면…가능성이 있어. 아니. 사실 이거 말고 다른 가능성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렇다는 얘기는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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