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07화 (1,074/1,205)

1107화

레벨이…251이라고?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직업이….

아까는 그냥 대충 숫자만 확인하고 넘어가서 몰랐지만, 그러고 보니 바뀐 건 레벨만이 아니었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이 녀석 분명 전에는 직업이 마법검사였을 텐데?

"마강검사라니. 너 이게 대체…."

"그런가. 성자님은 레벨뿐만이 아니라 직업도 알 수 있는 건가. 섹스까지 할 필요도 없었군. 물론 나로서는 오랜만에 성자님의 정기를 안쪽으로 느낄 수 있어서 무척이나…."

"헛소리 그만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나 해."

"하핫. 이상한 일이지. 그토록 원할 때는 손에 닿지 않던 것이, 성자님의 가르침을 얻고 모든 것을 내려놓자 손에 닿더군."

…뭐야 그게. 여기가 무슨 무협 세계관인 줄 알아? 깨달음을 얻었다고 강해지게.

"아무튼 그런 거야. 이제 나는 7계층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 용사보다도 더 강해질 기반은 이미 마련되었으니까. 남은 건 내 노력에 달렸지. 그러니까 성자님. 날 믿어줘."

7계층에 가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플리투스를 장악하려는 이유가, 정말로 순수하게 나 하나만을 위해서라고?

그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미리엘과 똑바로 눈을 마주 보니, 미리엘도 올곧은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봐줬다.

이렇게 보고 있자니 점점 미리엘을 믿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가는 기분이야.

그래. 아까 사도 임명도 발동했었잖아? 사도 임명까지 되는 애가 날 속일 이유는…아니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미리엘을 7계층으로 보내주는 건 성급하게 결정 내릴 문제가 아니지.

게다가 미리엘이 가면 당연히 아라크네 간부들도 줄줄이 따라갈 거 아니야? 아무리 그 간부 중에 내 여자가 끼어 있다고 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쉽게 허락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나 7계층에 가고 싶다는 거지."

"내가 성자님의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그 정도밖에 없으니까."

아까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에서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 녀석 이제 자기감정을 숨길 생각도 별로 안 하네.

내가 앨리시아를 받아준 게 기폭제가 되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고도로 짜인 연기?

"…지금 당장은 대답 못 해. 조금 생각해 보지."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나한테는 이런 문제에서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상대가 있잖아?

"허락해 준다면, 반드시 성자님의 도움이 될게."

다시 한번 다짐하는 미리엘을 바라보며,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분명 이 모습만 보면 믿을만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찝찝한 걸까? 한 번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적이 있기 때문인가? 진짜 얘 말은 도저히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당장 확답을 줄 수 없는 만큼 미리엘과 이 이상 붙어 다닐 이유도 없었다. 일단 미리엘을 돌려보낸 다음, 나는 당장 바넷사를 불렀다. 바넷사 본인에게 용무가 있는 건 아니고, 단순히 디아나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머리가 복잡할 땐 뭐니 뭐니 해도 디아나랑 상담하는 게 제일이니까 말이야.

디아나한테 너무 의지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팀의 브레인을 놔두고 괜히 혼자 끙끙댈 필요 없잖아?

"디아나 님께서는 외출하셨습니다."

하지만 디아나에게 상담해 생각을 정리하려던 내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사이에? 어디로?"

"디아나 님께서 외출하시는데 일일이 제게 보고를 하고 가실 이유는 없습니다. 구원님만 하더라도 제게…."

"걔 또 말도 없이 나갔어?"

"…네."

내가 정곡을 찌르자, 드물게도 바넷사의 표정이 변했다. 살짝 시무룩하게.

어쩐지 쓸데없이 말이 길어지더라. 디아나가 가출했을 때의 기억이라도 떠올랐니? 은근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네. 앞으로는 나도 외출할 때 말 한마디라도 하고 나가야지.

아무튼 디아나의 소재 파악이 안 된다면, 일단 상담은 뒤로 미뤄야겠군.

그러면 그동안 뭘 할까? 디아나가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면서 시간만 축내고 있을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서는 이 틈에 레이에게 사도 임명을 하고 싶었지만, 사라와 함께 나간 레이 역시도 소재 파악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선택지는…역시 그거밖에 없군. 그럴 시간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고 생각하자.

"그럼 바넷사. 나도 잠깐 외출하고 올게."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신전으로 향하는 이 거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아니. 그만큼 독실한 신자가 많다는 얘기니, 성자로서는 좋아해야 할 일이겠지만 말이야.

신전으로 향하는 신도 중에는, 그중에서도 특히 남자들은 날 신봉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만큼, 걸리고 싶지 않았다.

여자들이 그래도 피곤할 텐데, 수십 수백 명의 사내새끼들한테 둘러싸인다니. 그런 지옥 같은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은신을 쓰고 건물의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건너며 철저하게 몸을 숨겼다.

어차피 내 목적지는 신전 내에서도 일반 신도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니, 거기까지만 들키지 않고 가면 돼.

그렇게 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이라고.

성직자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예배당 근처를 지나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예배당 근처에서 나는 레이아와 헬레나, 그리고 쓰레온과 마주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그리 예상 못 한 일이 아니었다. 레이아를 만나러 온 건 아니었지만, 레이아가 헬레나를 데리고 신전에 왔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같이 있던 쓰레온이 은신한 내게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응? 이상한 반응이…거기 누구냐!? 몰래 숨어서 뭘 하는 거냐!?"

제, 젠장! 거의 다 왔다고 그림자에 안 붙고 방심했더니! 저 녀석은 쓸데없이 기감만 예민해서! 더러운 사기 직업 같으니라고! 아무것도 아니야 새끼야! 무시해!

모른 척 지나가려고 했지만, 쓰레온은 내 기척을 정확하게 읽고 있는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모른 척 지나갈 생각은 관두는 게 좋을 거다! 신성한 신전에서 도둑놈처럼 은신하다니! 수상한 녀석! 그래 너! 널 말하는 거다!"

아마 자기 여자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거겠지. 쓰레온은 검까지 뽑아서 정확하게 내가 있는 장소를 향해 뻗었다.

심지어 내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자, 그마저도 읽었는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손가락 모양까지 읽을 수 있으면 좀 닥치라고! 쉿! 쉿!

"뭘 조용히 하라는 거냐! 이 용사 레온 플리투스가 네놈같이 수상한 놈을 곱게 보내줄 것 같으냐!?"

저새끼 실은 내 얼굴도 보이면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야? 나야 새끼야! 너 요즘에 나랑 같이 다니면서 내 마나도 많이 느껴봤을 거 아니야!

아니!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에잇 젠장! 하필이면 난 마나를 그런 식으로 운용하는 바람에 이상한 의미로 들리잖아!

아, 아무튼 좋아. 쓰레온한테 눈치를 바란 내가 잘못이지. 너 같은 놈 눈치에 기대지 않더라도, 난 이 위기를 내 능력만으로 극복해낼 수 있어.

아무리 네 기감이 좋아도, 거리 제한이 없어진 그림자 이동까지 간파할 수 있나 한 번 보자고.

내가 그냥 대놓고 통로 중앙으로 가서 그렇지, 신전 안은 각양각색의 화려한 색유리로 장식되어 있어서 그림자도 충분히….

"어머? 목걸이가…구원 씨?"

처, 천사니이이임! 그걸 말하시면 어떡해요!?

"으엑. 너냐? 너 거기서 왜 그러고 있냐?"

레이아의 말을 듣고 드디어 쓰레온도 내 정체를 눈치챘는지, 은근슬쩍 검을 내려놓으면서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 질문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옆에 있던 헬레나였다.

"이상할 것 있나요? 구원씨는 성자님이시니…."

"성자님?!"

"성자님이라고!?"

그리고 헬레나의 입에서 성자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예배당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신도들 중 시커먼 남정네들이 눈에 불을 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개중에는 여자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내 눈에는 남자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안 돼! 젠장! 이대로 당할 수 없어! 이, 이렇게 된 이상! 쓰레온! 희생양은 너로 정했다! 애초에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네가 책임져!

나는 그림자 이동으로 행렬 사이에 파고든 다음, 로브를 뒤집어쓰고 목소리를 낮게 깔며 외쳤다.

"요, 용사님이다아아아!"

성자와 용사. 그리 어감이 비슷하지는 않지만, 어그로를 끌기에는 이걸로 충분….

"에이. 뭐야. 용사였나. 아니, 이런. 성녀님. 안녕하십니까."

"쳇.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어떤 새…저, 저런. 서, 성녀님.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

"용사 따위와 성자님을 잘못 듣다니. 내 귀도 어떻게…서, 성녀님. 신성한 신전에서 거친 말은 좋지 않죠. 암요."

"크흑. 커헉, 쿨럭!"

각지에서 쏟아지는 아무 이유 없는 언어의 폭력에, 조금 전까지 위풍당당하던 쓰레온이 가슴을 부여잡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게다가 자길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며 욕하던 사람들이 레이아한테는 헤실헤실 웃으며 아닌 척을 하니, 데미지도 배가 된 모양이었다.

쓰레온 쟤도 참 평판이 안 좋아. 뭐,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면, 안 좋을 만하지. 괜히 쓰레온이겠어?

그에 반해 우리 천사님은 평판이 하늘을 찌르는군.

아무튼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에서 탈출한 나는, 다시 은신을 쓰고 성직자들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내 기척을 읽을 수 있는 쓰레온도 내 뒤를 따라왔고, 신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야 나는 겨우 은신을 풀 수 있었다.

"구원 씨!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은신을 풀자마자, 천사님이 환한 미소와 함께 쪼르르 내 쪽으로 달려왔다.

뒤로 보이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천사님이 이 예상치 못한 만남을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그냥 갑자기 레이아 얼굴이 보고 싶어서. 아, 헬레나 씨도 안녕하세요."

"어머, 후훗. 그런데 어쩌죠? 아직 헬레나 씨의 교육이 덜 끝나서요."

내 대답에 환한 이를 드러내며 더욱 밝게 웃으신 천사님은, 이내 귀까지 아래로 늘어뜨리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셨다.

이런 표정마저도 가련하고 아름다우시다.

"아,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 마저 해. 방해할 생각 없으니까."

"방해라는 생각은 안 하지만요. 그래도…괜찮을까요?"

"응."

"네. 그러면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아, 그리고 마틸다 추기경님이라면 훈련장에 계세요. 어디인지 아시죠?"

이런. 들켜 버린 건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천사님은 내 목적이 자신을 만나는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신전에 온 이유가 레이아가 아니면, 자연스럽게 대상은 나머지 하나로 좁혀진다는 거지.

"레이아 얼굴 보고 싶었다는 말도 거짓말은 아니었어."

"후훗. 네. 아, 저희는 예배가 시작하기 전에 예배당으로 가야 해서요. 그러면 구원 씨. 나중에 봐요."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내 말에도 천사님은 마냥 행복한 미소로 대답해주신 후, 귀엽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고 다시 예배당 쪽으로 돌아가셨다.

진짜 우리 천사님은 남자의 애간장을 녹이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계신 것 같아. 아니. 알고 한다기보다는, 그냥 하는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사랑스러우신 거지만.

아무튼 레이아 덕분에 마틸다의 성기사 훈련 강습 장소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으니, 나는 곧장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 당신!"

때마침 휴식 시간이었던 건지, 훈련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성실한 마틸다는 훈련장을 떠나지 않고 자기 주변에 모여든 몇몇 사람들에게 조언 섞인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그 눈이 내 모습을 포착한 순간 그것도 끝이었다.

"음 쪽. 쪽. 쪽."

성실한 마틸다 교관님은 사라지고, 내 눈앞에 있는 건 그저 머릿속에 키스 생각밖에 없는 핑크빛 마틸다뿐이었다.

"마틸다. 사람들이, 으읍. 보고."

"부끄러우신가요?"

아니. 내가 부끄러워서 그런다기보다는, 이따가 다시 저 사람들 가르칠 때 마틸다가 부끄러워할까 봐 그러지.

"아으으. 당신은 정마알…!"

너무 사랑스러워서 꽉 껴안아 주고 싶다는 표정을 짓는 마틸다였지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이미 이 이상 없을 정도로 꽉 껴안고 있었으니까.

"그러면…제 방으로 가실까요?"

대신 내 목덜미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면서, 마틸다는 내 허리를 안은 팔을 당겨 복도 쪽으로 유도했다.

아무래도 그만둔다는 선택지는 없는 모양이다. 뭐, 단둘이 얘기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가는 건 나도 찬성이지만.

"으응…하아아…당시이인…."

마틸다의 방…이라기 보다는 집무실 같은 곳에 들어오고 나서도 한동안 키스 세례가 이어진 후, 마틸다는 드디어 조금 만족했는지 내 어깨에 뺨을 기대고 달달한 시선을 내게 보내왔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당 수치가 올라갈 것 같은 시선이었다.

물론 나로서는 전혀 싫지 않았고, 오히려 계속 이러고 있고 싶은 마음마저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찾아왔으니 할 일은 해야지.

"마틸다. 지금 쉬는 시간이야?"

"네헤…."

대답인지 한숨인지 구분하기 힘든 소리였지만, 아마 대답한 거겠지?

"그래? 쉬는 시간이 얼마나 돼?"

"그건…아흣. 당신도 차아암…."

내 무척이나 평범한 질문에, 마틸다는 어째선지 앙큼한 눈짓을 보내며 귀엽게 주먹 쥔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두드렸다.

아니. 마틸다씨? 지금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한 번 정도 할 시간은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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