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2화
하지만, 그 말을 전부 믿어도 되는 걸까?
아니. 미리엘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다. 아까 마석 얘기를 할 때 "원래는 성자님이 날 더 이상 찾지 않게 됐을 때를 대비한 비밀 병기였는데, 나답지 않게 조바심을 냈어." 라는 말까지 했었으니, 내게 관심받고 싶다는 게 거짓말일 확률은 적다고 봐야겠지.
문제는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날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플리투스를 장악해 볼 테니, 널 보내달라고? 용사의 힘을 탐냈던 너를? 용사를 만들 수 있는 신이 봉인된 곳에? 그것도 딱 마지막 용사를 신봉하는 세력으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얘가 예전에 내 배를 찌르려고 한 걸 가지고 앙심을 품고 있다든가, 워낙 분위기가 수상한 녀석이라서 믿을 수가 없다든가, 그런 수준의 얘기가 아니잖아.
나한테 위험부담이 없기는.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네 말을 믿느니 차라리 넌 지금까지 자기 목적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고, 그 목적 하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아간 거라는 말을 믿겠다.
나한테 조교 당한 것도, 반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앨리시아한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전부 내 신뢰를 얻기 위한…하지만, 사도 임명이 가능했단 말이지.
비록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고 추측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 추측이 정확하다면, 어느 쪽이든 얘가 날 위험에 빠뜨릴 짓을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니. 잠깐만. 혹시 그때는 사도 임명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사도 임명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다시 되돌아갔을 가능성도….
"성자님. 나는 딱히 용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는데, 거기에 더해 옆에서는 미리엘이 엉뚱한 소리까지 해댔다.
"야. 이제 와서 그 얘기를 또 하자는 거냐? 너 그것 때문에 내 배를…아니다. 됐다."
젠장.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 사건에서 엄연히 피해자는 나고, 쟤는 가해자인데. 왜 내가 내 마음대로 얘기도 못 꺼내고, 오히려 더 미안해해야 하는 거야.
"미안해."
이것조차도 내가 위협으로 느낄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미리엘은 내 쪽으로 내밀었던 검을 황급히 다시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됐다고 했잖아. 너 사람 계속 그렇게 불편하게 할래? 차라리 그냥 아까처럼 수상하게 웃기라도 해라."
뭘 그렇게 미안해하는 거야. 네가 그걸로 다시 내 배를 찌르려고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봤거든?
"응…하핫…. 내가 그렇게 수상해…으윽."
으아아아! 진짜! 그게 뭐가 수상하게 웃는 거야?! 미안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올리니까 괜히 더 불쌍해 보이잖아! 너 진짜 그만 안 할래!?
"성자님. 아파."
내가 그 뺨을 꼬집고 양쪽으로 마구잡이로 잡아당기자, 그제야 미리엘의 눈빛이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픈 게 기분 좋잖아! 이 변태가!"
"그렇지만 방치 플레이를 당하는 중이라 괴로워."
"방치 플레이 같은 거 한 적 없어!"
겉으로는 이렇게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안심했다.
아까 같은 분위기는 진짜 견디기 싫거든. 특히 이 녀석은 사라랑 이복 자매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 아까 같은 표정을 지을 때마다 괜히 사라가 겹쳐 보여서 더 불편하단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면…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나는 딱히 용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얘기."
"그래. 그거. 너 그거 네가 말하고도…."
"성자님. 우선 내 얘기를 들어줘."
"…말해 봐."
아무래도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아서, 나는 우선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십중팔구 헛소리겠지만, 일단 들은 다음에 반박해도 늦지는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강해지는 거였어. 물론 용사가 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딱히 용사에 집착한 건 아니야. 용사보다 강해져서, 아버지의 검기를 완전히 깨우치고, 그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어."
"…그게 그거잖아?"
용사보다 강해진다니. 용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랑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거야?
네가 같이 안 다녀봐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용사라는 직업은 사기 직업이에요. 전투에 관해서 그보다 더 강해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니까?
네가 보기엔 쓰레온이 강함을 추구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격 같아? 아니잖아? 오히려 그 쓰레기는 그런 노력 쥐뿔도 안 해요. 그런데도 말도 안 되게 강하다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 성자님도 알고 있잖아? 용사보다 더 강한 사람을."
"…설마."
"그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대마법사님이 용사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야. 그건 디아나가 사기인 거고."
"나도 그렇게 되면 된다고 생각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예외 중의 예외를 들먹이면 어쩌자는 거야?
이건 단순히 레벨 문제가 아니다. 물론 디아나가 그만큼 압도적으로 강한 건 레벨 500을 찍었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레벨을 올리려면 그 이전에 우선 250레벨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우리 파티가 내 힘 덕분에 다들 쉽게 쉽게 전직해서 한계 돌파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디아나를 제외한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누님들 전원이 아직 그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고 250레벨에 머물러 있으니까.
그만큼이나 이 세계에서 250레벨 돌파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맨날 전쟁만 한다는 밑의 세계에서도 250레벨을 넘는 건 루이스 바프라 한 놈밖에 못 봤고,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이, 최강의 모험가라는 너 자신도 250레벨 돌파를 못 했잖아?
"7계층으로 가면 그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럼…."
"성자님. 전에도 말했잖아. 다 옛날 일이야. 성자님에게 굴복한 이후로, 나는 내 꿈을 포기했어."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거잖아.
돌고 돌아서 다시 이 얘기에 도착하다니. 서로의 얘기가 완전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군. 이래서는 끝이 없겠어.
"아무래도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그리고 사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어."
"…뭐?"
그 순간, 오싹하는 한기가 내 온몸을 덮쳤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더 강해지는 걸 꿈꿀 필요가 없다고? 설마.
황급히 애널라이즈를 사용해서 미리엘의 정보를 살펴봤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정보는….
"너 진짜 사람 깜짝깜짝 놀라게 할래!?"
여전히 250레벨이잖아! 어디서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하고 있어!
"성자님. 난 성자님한테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성자님이 믿을 수 없다면, 그렇군. 지금부터 섹스하자."
"…뭐?"
지,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섹스 말이야. 좋아하지?"
"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거짓말이…이게 아니야아아!"
젠장. 이놈의 주둥이. 반사적으로 나불나불 대기는.
"하핫."
"웃지 마!"
"미안해. 하지만 농담이 아니야. 정말로 섹스를 하면, 전부 알 수 있어."
얼굴에 띤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미리엘은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너랑?"
"응."
"내가?"
"다른 남자를 불러서 하라고 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
내 여자가 된 것 같은 말투 쓰지 마라.
"지금 여기서?"
"장소는 성자님이 원하는 곳에서 해도 상관없어. 어디든. 성자님의 말에 따를게."
어디든에 힘줘서 말하지 마라.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난 디아나 같은 노출광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섹스하면 알 수 있다고?"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얘랑 섹스하고 있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사실 여기에 오게 된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얘한테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이 녀석이 꺼낸 말들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말들이었다.
젠장. 그 망할 중2병. 그 녀석이 괜한 소리만 안 했어도…아니. 잠깐만. 중2병? 그래. 중2병이라….
"성자님?"
좋아. 어차피 이 녀석한테 여전히 사도 임명이 발동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게다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거잖아? 시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따라와."
"알았어. 처음에는 노출 산책 플레이로군. 역시 성자님이야. 나한테는 난이도가 조금 높지만, 성자님이 원하신다면…."
"옷 입고!"
대체 언제까지 벗고 있을 셈이야!
"으핫?!"
미리엘이 옷 입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자, 갑자기 앨리시아가 굴러들어왔다.
얘는 또 여기에서 뭐하는 거야. 아니. 반대 상황이면 나 같아도 이럴 것 같기는 하지만.
"아, 안녕. 야. 이건."
"앨리시아. 미안. 지금 조금 바빠서."
"뭐? 왜?"
"얘기는 나중에 미리엘이 해줄 거야. 그럼 난 이만 갈게."
벌떡 일어난 앨리시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주자, 멀리서 새된 비명 같은 게 들려왔다.
앨리시아 이 녀석, 내가 간 다음에 엄청 고생하겠군.
"미리엘. 가자. 따라와."
"…그래. 그럼 앨리시아."
눈앞에서 나와 앨리시아의 키스를 봤는데도, 미리엘은 표정 변화 없이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표정을 숨기는 건지, 아니면 진짜 별로 상관없는 건지. 뭐, 조금 있으면 확실해지겠지만.
"바넷사. 지금부터 난 지하에 있을 거야. 중요한 일을 할 테니까 그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해. 그 누구도야."
"…네."
미리엘과 함께 저택에 돌아온 나는, 우선 제일 먼저 바넷사부터 찾았다.
그 누구도라는 표현에는 당연히 디아나도 포함되어 있는 만큼 반발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바넷사는 내 진지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넌 내가 신호할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
미리엘을 대동하고 지하실 입구까지 내려간 나는, 우선 미리엘을 그 앞에서 대기하게 했다.
"여. 중2병. 잘 있었지?"
안에서 지키고 있던 메이드도 밖으로 내보내고 혼자 남은 나는, 우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볍게 인사부터 건넸다.
"……."
지하실에서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누워 있던 중2병은, 고개를 들어 날 확인하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나 같은 놈이랑 더 할 말 없다는 건가.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을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인가 본데, 이젠 그렇게 안 돼. 미안하지만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야. 억지로라도 입을 열게 해주지."
"더러운 걸레신의 더러운 종자다운 더러운 말투로군."
야. 모처럼 무게 잡으면서 말했는데 벌써 입을 열면 내가 뭐가 되냐? 조금만 더 버텨보지.
뭐, 좋아. 그래 봤자 앞으로 할 일에는 변함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