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100화 (1,067/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00화

    여러 소동이 있었지만, 그런 것치고 제대로 된 수확은 하나도 없었던 허무한 아침.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쓰레온의 방문을 무시하고 디아나랑 오붓한 시간이나 보낼 걸 하는 생각이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그나마 식사 때 우리 애들이 레이를 챙겨주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던 걸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아무튼 그런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 지나가고, 우리는 또다시 삼삼오오 자기 할 일을 찾아 흩어졌다.

    사라는 오늘도 레이를 데리고 외출. 레이아는 쓰레온네 집에 들러서 헬레나 씨와 함께 신전으로. 마틸다 역시도 성기사 육성을 위해 신전으로. 일 중독인 바넷사와 레이첼 누님은 오늘도 각자 일하러.

    그중에서도 난 사라와 레이 그룹에 끼어들 생각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레이만 빼 올 생각이었다.

    가만히 놔두면 또 사라 그것이 레이한테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할지 모를 일이니까 말이야. 안 그래도 상식이 없는 만큼 남한테 영향받기 쉬운 레이다. 이 이상 이상한 영향을 받게 할 수는 없지.

    게다가 나한테는 레이를 빼내 올 명분이 있었다. 사도 임명을 통한 감정 공유 제어권 획득이라는 명분이.

    아침에 있었던 그 지옥의 부끄러움 스파이럴을 바넷사한테 들키기까지 한 덕분에 또다시 일시적으로 감정 공유가 꺼지기는 했지만, 레이 그 녀석 진짜로 자기 스스로 컨트롤할 줄 모르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불완전한 제어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그런 고로 당장 사라와 레이를 막아서려고 했던 나였지만, 예상외의 인물이 날 방해하고 나섰다.

    "자네는 이 몸과 조금 할 얘기가 있네."

    바로 우리 대마법사님 말이다.

    지난밤을 같이 보낸 사람이 낮까지 나와 둘이 있으려고 하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아니. 딱히 그러자고 정해둔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지키고 있는 우리끼리의 불문율 같은 거라고 할까.

    아무튼 그만큼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라에게서 레이를 떼어놓는다는 당초 계획도 포기하고 순순히 디아나의 방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왜 그래? 혹시 그렇게 하고도 부족한 것 같아? 그런 거라면 나도…."

    "진지한 얘기일세. 그곳에 앉게."

    "넵."

    날 소파에 앉게 한 디아나는 자신도 맞은편 소파에 자리 잡고 앉은 후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아래쪽 얘기로 시작했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사이에 더 만들었다는 도구도 전해 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얘기는….

    "그런 것일세. 만약 자네만 괜찮다면, 이 몸이…."

    "아니.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확실히 요즘 신경을 못 써주고 있었지. 물론 아래에서 바빴기 때문이지만, 그걸 변명으로 삼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나도 이번에 끝장을 볼 생각이었어."

    변명이 아니다. 이왕 위로 올라왔으니 나도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갈 생각이었거든.

    어제는 그런 식으로 예정에 없던 시간을 쓰고 말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지. 내가 그런 상황까지 다 예상할 수 있으면 성자겠어? 신이지.

    지금부터라도 계획대로 시간을 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

    "말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나도 당장…아참. 그전에."

    "음? 뭔가?"

    고개를 귀엽게 갸웃거리는 디아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나는 디아나의 스테이터스 창을 열었다.

    어디 보자…오, 진짜로 있잖아.

    "아니. 잠깐 여신님이 말했던 종족창이라는 걸 확인해 봤어. 진짜로 있네. 종족 스킬 란에."

    그래. 앨리시아에게 사도 임명을 한 것으로, 정확히 스킬 레벨이 10이 됐으니까 이런 것도 보이게 된 거다.

    뭐, 그래 봤자 레이의 세부 스테이터스 창을 보고 조작하려면 레이한테도 사도 임명을 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크게 의미는…아니. 그렇지만도 않잖아.

    "어젯밤에 미리 확인해놨으면 아침에 레이아를 도와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레이아의 구미호 능력 컨트롤 같은 것도 결국에는 종족창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우리 천사님을 오랫동안 괴롭히던 주박에서 드디어 풀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레이아뿐만이 아니다. 잘하면 펠리시아를 괴롭히는 서큐버스의 힘이 폭주하는 것도….

    "자네…."

    디아나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깜박할 게 따로 있지 그런 것을 깜빡하는가?"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어, 어쩔 수 없잖아! 그런 생각이 안 날 정도로 기분 좋았으니까!"

    "무, 자네는 무슨 말을 하는 겐가!"

    "그리고 깜빡한 건 디아나도 마찬가지잖아! 디아나도 어제 앨리시아의 사도 인장을 확인했으면서!"

    "이, 이 몸은…!"

    "디아나도 그런 생각이 안 날 만큼 기분 좋았어?"

    "이, 이, 이 몸은…."

    계속해서 추궁하자 어제의 플레이라도 떠올린 건지, 디아나가 얼굴을 붉히면서 허벅지 사이를 은근슬쩍 비볐다.

    야. 대마법사님. 그런 식으로 유혹하지 마라. 안 그래도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를 한 직후잖아. 아쉽지만 지금 너랑 기분 좋은 일을 할 시간은…조, 조금이라면 있을까?

    "구원아!"

    마치 매혹이라도 걸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어 디아나의 입술에 키스하려고 했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문이 활짝 열리며 지금 여기에서 들리면 안 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 레이첼? 출근한 거 아니었어!?"

    화들짝 놀라서 디아나에게 떨어지며 문쪽을 돌아보니, 얼마나 급하게 온 건지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무릎을 손으로 짚고 숨을 고르는 레이첼 누님의 모습이 보였다.

    "크, 큰일! 구원이 너! 미리엘 씨랑! 그게! 믿을 수 있다고!"

    미리엘? 걔 이름이 또 여기서 왜 나와?

    안 좋은 예감이 등 뒤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내 이런 예감은 쓸데없이 잘 맞는단 말이지.

    "우선 진정해. 괜찮아. 천천히 말해도 돼. 무슨 일인데?"

    "으, 응…하아아. 그게…."

    레이첼 누님이 이렇게 당황하고 있다는 건, 상당히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겠지.

    그 몸을 끌어안고 등을 다독여주자, 레이첼 누님도 조금은 진정됐는지 심호흡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역시나 상당히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내용이었다.

    누님이 해준 말의 내용은 이랬다.

    레이첼 누님이 길드로 출근하자마자, 미리엘이 누님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던전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안내 데스크로 찾아온 모험가의 용건은 그리 많지 않다. 레이첼 누님은 여느 때처럼 던전 입장 수속 절차를 시작하려고 했지만, 미리엘은 그럴 생각으로 온 게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은 그런 일로 온 게 아니야. 그냥 모아뒀던 마석을 조금 정산하러 왔어."

    아라크네 클랜의 장이 고작 그런 일로 굳이 길드까지 찾아왔다니?

    의아하게 생각했던 레이첼 누님이었지만, 그 의문은 곧바로 해소됐다. 미리엘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6계층에서나 캘 수 있는 마석을 꺼내기 시작한 거다.

    나한테 철저하게 당한 이후로, 미리엘은 단 한 번도 6계층의 마석을 정신한 적이 없었다.

    아니. 미리엘뿐만이 아니다. 아라크네 클랜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6계층산 마석을 정산하지 않았다.

    가장 가치 있는 마석이라고 해봐야 5계층의 주인, 와이번의 마석을 정산했던 것이 전부.

    물론 아예 6계층 탐험을 중지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예전만큼 적극적인 공략은 이제 하지 않는 거겠지. 레이첼 누님도, 레이첼 누님에게 얘기를 전해 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미리엘은 그저 알고 있었던 거다. 길드에서 마석 정산을 하면 그 정보가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질 것이란 사실을.

    그 증거로, 미리엘의 아공간 주머니에서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6계층산 마석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왔다.

    "하핫. 그렇게 지레 겁먹을 필요 없어. 이 많은 양을 한 번에 다 정산할 생각은 없으니까. 내가 누굴 괴롭히는 취미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잖아? 으음…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진 레이첼 누님에게 여유로운 농담까지 던지면서 계속 주머니를 뒤적이던 미리엘은, 안내데스크를 가득 채울 만큼의 마석을 꺼내고 나서야 겨우 원하는 물건을 찾았다는 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찾았다. 이거야. 마석 정산, 부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미리엘이 내민 물건은 바로, 6계층의 마지막 관문을 지키는 주인의 마석이었다고 한다.

    "구원아! 이거 아무리 봐도…!"

    "괜찮아. 진정해. 별일 아니야."

    말하면서 또다시 걱정스러워졌는지 패닉 상태에 빠진 레이첼 누님의 등을 다독이면서, 나는 최대한 냉정한 척을 유지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머리가 많이 복잡했지만, 그런다고 나까지 당황해 버리면 레이첼 누님은 더욱 당황할 테니까.

    "말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레이첼. 일은 괜찮아? 맘대로 내팽개치고 온 건 아니지?"

    "괘, 괜찮아. 제대로 얘기하고 왔어. 집에서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잠깐 가지러 갔다 온다고."

    "그래? 그러면 너무 오래 있을 수도 없겠네. 빨리 돌아가 봐."

    "하지만…."

    "괜찮아. 아마 레이첼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아닐 테니까."

    "그, 그러니?"

    "응."

    내 너무도 태연한 태도가 위안이 됐는지, 레이첼 누님은 겨우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왔다.

    "아앗…그, 그러면 나 혹시…."

    "아니야. 말했잖아? 말해 줘서 고맙다고. 이제부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레이첼은 얼른 가봐. 그러다가 혼나겠다."

    대신 다른 일로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히기는 했지만, 나는 그마저도 완벽하게 커버해 줬다.

    나 지금 좀 멋있지 않냐?

    "으, 응. 그럼 구원아. 저녁에 봐."

    안심하고 다시 길드로 돌아가는 레이첼의 누님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고 있자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디아나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상당히 침착하구먼."

    "내가 당황하면 레이첼은 더 당황할 테니까. 디아나도 레이첼 성격 알잖아?"

    "이유는 그것뿐인가? 뭔가 다른 짐작 가는 이유가 있는 눈치였네만."

    "그거 뭐…."

    "미리엘양은 용사보다 이세계인의 피를, 여신님이 내려주신 힘을 더 강하게 물려받은 것으로 알고 있네. 이 몸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 정확해. 미리엘도 아마 그걸 노리고 마석을 꺼낸 거겠지. 그것도 레이첼한테 직접 가져다줄 정도니까."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미리엘은 계속해서 그런 낌새를 풍겨왔다. 자기도 미약하게나마 여신님에게 전해 받은 이세계인 특유의 힘을 쓸 수 있다고. 마음만 먹으면 몬스터의 성기를 얻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물론 6계층의 주인한테 성자 스킬로 얻을 수 있는 건 성기가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하지만 다른 의도가 섞여 있다는 겐가?"

    "아마도."

    그도 그럴 것이, 타이밍이 너무 딱 맞아떨어지잖아. 하필이면 다른 날도 아니고 앨리시아에게 사도 임명을 하고 보낸 바로 다음날 아침에 이런 소동을 일으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의도가 섞여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어. 자의식과잉이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하아.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은데 그 녀석은 진짜…좀 다녀올게."

    "혼자서 괜찮겠는가? 이 몸도 같이…."

    "괜찮아. 디아나랑 같이 가면 힘으로 핍박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디아나는 그런 거 싫어하잖아?"

    실은 같이 가면 안 될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지만. 그리고 아마 디아나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을 거다.

    "그런가. 무슨 일이 생기면 이 몸을 부르게."

    "응."

    진짜 그 트러블 메이커. 언제 날 잡아서 재조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젠장. 이제 웬만하면 여긴 오고 싶지 않은데.

    "꺄아아악! 성자님이다!"

    "뭐!? 정말?! 꺄악! 진짜다!"

    저것 봐. 아직 입구 근처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난리가 났잖아.

    여자들이 이런 얘기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앨리시아야. 너 클랜 내에서 인기가 너무 많은 거 아니냐?

    "들어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이런 거에 일일이 반응해주면 괜히 더 휩쓸려서 고생만 한다.

    나는 얼굴에 최대한 철판을 깔고 가서는 문지기를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말했다.

    "네! 앨리시아 교관님도 불러올까요?"

    "아니요. 미리엘 보러 왔어요."

    "……."

    뭐, 뭐야 이 분위기. 그러지 마. 무서워 이 아가씨들아.

    "…어제도, 클랜장님 보러 오셨죠?"

    "네."

    "……."

    그러니까 무섭다고! 한두 명도 아니고 정원에서 훈련하던 인원들까지 전원이 똑같은 눈으로 뭐하자는 거야!? 까딱하면 사람도 죽이겠다 너희!? 우리 동맹인 거 알지!? 나 동맹 클랜의 클랜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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