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99화 (1,066/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99화

    "여기에서 자고 있다고?"

    "네."

    바넷사의 안내를 받아서 레이가 쉬고 있다는 방문 앞까지 도착했지만, 선뜻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잖아. 안쪽에 지금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도저히 짐작이 안 되니까 말이야.

    "진짜 밖으로 안 나왔어?"

    "네."

    "딱 한 번도?"

    "안 들어가실 겁니까?"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넷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그런 얼굴로 닦달하기까지.

    아무리 공과 사의 구별을 확실히 하는 게 장점이라지만, 집사 모드일 때도 조금은 상냥하게 해줘도 되잖아.

    "…그……."

    그런 표정으로 바넷사를 바라보니, 바넷사가 자기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 마디도 제대로 내뱉지 않고 다시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돌려 버렸지만.

    "왜 멈춰? 할 말 있으면 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 뭔가 반응이 좀 이상한데? 이 반응…얘 설마 부끄러워하는 거야? 진짜로? 왜?

    혹시 "그렇게 집사일 때도 상냥하게 대하기 시작하면, 자제가 안 될 것 같아서 바넷사 불안하단 말이야!" 같은 말이 하고 싶었던 건가?

    응? 바넷사가 그런 말투를 쓸 리가 없지 않냐고? 어차피 내 상상 속에서 하는 말인데 아무렴 어때. 그리고 억지로 귀여운 말투 시키면 얘 진짜 저런 식으로 말해.

    아무튼 진짜로 그런 말을 하려던 거였다면, 이보다 더 귀여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응? 응?"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에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딱 보니까 부끄러워하는 게 뭔가 중요한…뜨하악!"

    원하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에 질척거린다 싶을 정도로 달라붙어 추궁하자, 계속 얼버무리기만 하던 바넷사가 갑자기 바로 앞에 있던 문을 활짝 열어 버렸다.

    "가, 갑자기 열면 어떡…레, 레이야? 일어났니?"

    안그래도 레이한테는 밤사이에 미안한 짓을 했는데, 활짝 열린 문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방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바넷사가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 녀석…나중에 두고 보자.

    "레이? 아직 안 일어났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가서 혼내주고 싶었지만, 나란 남자는 일의 우선순위라는 게 뭔지 아는 남자다.

    사람 실루엣이 보이는 침대로 살금살금 다가가자, 거기에는 아직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레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상당히 편안한 표정으로.

    솔직히 말해서 침대는 질척질척하게 젖어 있고 레이는 눈을 까뒤집은 채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내 예상보다 훨씬 괜찮아 보였다.

    아니. 괜찮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잖아. 아예 문제 자체가 없어 보이는데? 심지어 침대 시트까지 뽀송뽀송해.

    밤사이에 나와 디아나의 플레이를 감정 공유로 느꼈다면, 도저히 이럴 리가…잠깐만. 설마.

    "야. 야. 일어나 봐. 야."

    "으응…응…."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간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사실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까지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완전히 버리고 대충 몸을 흔들어서 레이를 깨워봤지만, 대체 얼마나 푹 잔 건지 레이는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바프라의 직속 부대에 쫓겨 살았던 녀석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걸 적응력이 좋다고 칭찬해 줘야 돼, 아니면 지나치게 태평하다고 해야 돼?

    "야. 안 일어나냐? 안 일어나면 그냥 내가 직접…."

    확인한다. 그렇게 말하고 이불을 걷어낸 다음 레이의 바지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갑자기 레이가 눈을 번쩍 뜨더니 허벅지에 차고 있던 단검을 쥐고 내게 달려들었다.

    "내 몸에 손대지…!"

    "워워. 진정해. 나야."

    그래. 인정해 줄게. 우리 레이 아직 안 죽었네.

    "까, 깜짝이야. 놀랐잖아. 노크라도 하고 들어오지!"

    자기도 나한테 단검을 들고 덤벼든 건 놀랐는지, 레이는 황급히 단검을 멀리 던져 버렸다.

    아니. 아예 흔들어서 깨우기까지 했거든? 뭐, 노크는 안 하고 들어왔지만.

    "아무튼 그래서 어때? 잘 잤냐?"

    "응.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푹 잔 것 같아. 여기, 생각보다 좋은 곳이네."

    조금 쑥스럽다는 듯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 짓는 레이의 그 모습은, 확실히 밑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편안해 보였다.

    그런가. 우리랑 합류하고 나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래쪽에 있을 때는 여전히 바프라의 영역 안에 있었던 거니까. 레이로서는 이렇게까지 긴장을 풀고 지낸 건 처음일지도 모른다.

    아까 그렇게 푹 잠들어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건가.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네.

    그렇게 말해 줬으면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아쉽게도 내 입에서 튀어나온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괜찮았냐?"

    "응? 지금 말했잖아. 여기…."

    "아니. 그게 아니라. 있잖냐. 괜찮았냐고."

    아무리 얼굴이 두꺼운 나라도 "나랑 디아나랑 섹스할 때 혼자서 엄청 기분 좋았을 텐데 괜찮았냐?" 라는 말을 직접 하기는 무안해서, 나는 손가락으로 레이의 하반신을 슬쩍 가리켰다.

    "으응? 아…이 벼, 변태."

    하지만 레이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도 바로 눈치를 못 채고, 굳이 내 손끝부터 쭉 따라가서 자신의 다리 사이까지 시선을 준 다음에야 얼굴을 붉혔다.

    변태라니. 어제 사라랑 하루 종일 같이 다녔다더니, 그새 배웠냐?

    "일단 나도 신경 써줘서 묻는 거야. 어젯밤은…."

    노출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더욱 불타올랐으니까.

    그 말을 어떻게 돌려 말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 레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젯밤? 너 어젯밤에도 뭐 했어?"

    "……."

    역시나 그런 건가.

    "어제저녁에 내가 술 마시고 했을 때는 느꼈지?"

    "아! 그, 그래! 너 그때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알아!?"

    이젠 더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확인차 질문을 던지자, 레이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왜? 뭘 했는데?"

    레이의 상태가 좀 이상해지자마자 여기로 데려왔다고 했으니, 적어도 밖에서 분수를 뿜거나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그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뭔가 이상한 말 같은 것도 한 것 같고…으으! 아무튼 사과해!"

    그게 뭐야. 얘도 술 취하면 필름 끊기고 이상한 짓을 하는 타입인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괜히 좀 궁금해지잖아.

    "미안."

    "아, 알면 됐지만…."

    하지만 지금은 궁금증을 해결할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순순히 사과하자, 레이도 순순히 사과를 받아줬다. 내가 이렇게 순순히 사과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진짜로 기억 안 나?"

    "하, 하나도 안 나!"

    반응을 보아하니 조금 나는 것 같은데. 뭐, 좋아. 아무튼 그런 것보다.

    "그래? 그러면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겠네. 잠깐만 기다려 봐."

    "응? 뭘?"

    "그게 말이지…우왁!"

    "…너 뭐해?"

    뭐, 뭐하긴 뭐하겠어. 널 깜짝 놀래주려고 했지.

    얘는 어떻게 된 여자가 이런 기습에 눈도 하나 깜빡 안 하냐. 진짜 보고 있자면 멘탈이 약한 건지 강한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깜짝 놀라게 해서 감정 공유가 되고 있나 확인하기 작전’은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갔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훗. 내가 살던 세계에는 흔들다리 효과라는 이론이 있었지."

    "응? 내가 살던 세계라니? 여기잖아?"

    아니거든. 그러고 보니 그 얘기도 아직 안 했구나. 귀찮아 죽겠네.

    뭐, 그런 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대충 설명하자면 사람은 착각하기 쉬운 생물이라는 이론이야. 설령 다른 일로 심장이 두근거리게 되더라도, 이성과 같이 있으면 그 이성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착각하고 사랑에 빠진다는 이론이지. 이미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이런 것에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너와의 관계를 더욱더 돈독히 하고 싶었거든. 그래서 이런 이론에까지 의지해 봤다는 얘기야."

    봤냐? 깜짝 놀라게 하기의 실패에서 이어지는 이 물 흐르는 듯한 변명. 자화자찬이 아니라 진심으로 난 천재인 게 아닐까?

    "레이. 난 그만큼이나 널 사랑…."

    "으으."

    흠. 역시 감정 공유가 꺼져 있군. 보통 얘랑 둘이 있을 때 이런 말을 하면 부끄러움의 연쇄 스파이럴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게 되는데.

    "야. 너 솔직히 말해."

    "허, 허을…?"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나는, 곧장 레이의 뺨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성격 때문에 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얘도 생긴 것만 놓고 보면 이지적인 미인인데, 이렇게 뺨이 늘어난 모습을 보니 또 이렇게 맹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말랑말랑한 것이 쭉쭉 잘도 늘어나는군.

    "너 실은 감정 공유 그냥 마음대로 껐다 켰다 할 수 있지?"

    "아, 아이어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것아! 그럼 왜 네가 필요할 때만 이렇게 딱딱 감정 공유가 꺼지는데!?"

    "아오 올아아!"

    걱정한 내가 바보 같잖아!

    두 뺨을 마구잡이로 쭉쭉 늘리면서 말하자, 레이가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면서 팔을 붕붕 휘둘렀다.

    물론 그런다고 벗어날 수 있을 리도 없었지만.

    젠장. 이 녀석이 진작에 이렇게 감정 공유 컨트롤만 가능했어도, 내가 얘한테 사도 임명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는데! 여기에 데려와서 우리 애들한테 소개까지 해줄 필요는 더더욱 없었고!

    아니. 뭐, 그렇다고 해서 후회하는 건 아니다.

    의외로 우리 애들이 잘 받아주기도 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앨리시아와의 일이 잘 풀리게 된 것도 그 영향이 없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우리 애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레이를 잘 받아주는 걸 보고, 앨리시아를 향한 감정에도 솔직해질 수 있었다고 할까? 뭐, 정말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다. 정도의 수준이지만.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억울해서라도 사도 임명을 해야겠어. 이젠 이 녀석이 감정 공유를 컨트롤 할 수 있든 없든 상관없어.

    결심을 굳힌 나는 잡고 있던 두 뺨을 놔주고, 대신 내 바지에 손을 가져갔다.

    "너…서, 설마…."

    어딘가 나사 빠진 구석이 있는 레이라지만, 이 모습을 보고도 내가 뭘 할 생각인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레이는 얼굴을 붉히면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내게 보냈지만, 나는 당당하게 그 시선을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그냥 내 느낌인데, 아마 지금이라면 분명 사도 임명이 될 거야. 우리 애들이 잘 받아주는 모습까지 눈으로 확인한 이상 마음에 더 걸릴 것도 없고 말이야.

    그러니까 괜히 더 미룰 필요 없잖아?

    "바, 밤에 괜찮았냐고 했지? 설마 밤사이에 다른 여자랑 해서 날 기, 기분 좋게 숙성시켜놓…이렇게 아침에 찾아와서…."

    "아니거든?! 넌 대체 날 얼마나 귀축으로 아는 거야!?"

    기분 좋게 숙성시키는 건 또 뭐고!? 그런 표현은 어디서 배운 거야!?

    "하, 하지만! 뇌에 섹스 생각밖에 없는 남자라서 뇌섹남이라고…."

    "사라아아아아아!"

    대체 나 없는 데서 다른 여자들한테 무슨 바람을 불어넣고 다니는 거야!? 디아나도 디아나야! 같이 있었을 거 아니야! 사라가 이상한 소리 하면 좀 말리라고!

    "아, 아니야?"

    "아니야!"

    "그럼 지금 바지는 왜 벗으려고 했어?"

    "…이, 이건 그게…그…."

    얘는 평소에는 안 그러다가 꼭 이상한 데서 정곡을 찌르더라!?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뭐 잘못했냐!? 그럼 미안하다! 사과할게! 봐줘라!

    "그, 그래! 네 자는 모습이, 자다 깼는데도 예쁜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바지를…."

    이렇게 된 이상, 이 녀석의 약점을 철저하게 공략해서 상황을 무마한다! 말하는 나조차도 부끄러워지는 대사였지만, 어차피 감정 공유가 꺼진 이상 두려워할 건 없어!

    "여, 역시…."

    "응? 뭐가 역시야?"

    "변태는 변태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한테만 들이대는 변태라고…."

    사라아아아아아아아! 너 진짜 어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내가 진짜 부끄러워서 접싯물에 코 박고 그대로 죽어 버리고 싶…어?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기다려 보시라니까요 레이 씨.

    "너…컨트롤…못 한다면서…."

    왜 또 감정 공유가 켜진 거야….

    "나, 나도 몰라…."

    아니. 네가 켰잖아. 네가 모르면 누가 아는 건데?

    뭐, 이제 와서 그런 걸 따져봤자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렇게, 그렇게 내 진심이 궁금했냐!? 자! 느껴라! 맘껏 느껴! 내가 이렇게 널 사랑한다!"

    "꺄악! 그만! 그만해! 너, 너도 부끄럽잖아!? 얼굴 빨개서 다 알아!"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우린 이제 이 지옥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같이 죽자!"

    나는 부끄러움의 연쇄 스파이럴에 빠져서 레이와 같이 죽음을 각오하기로 했다.

    "난 아직 죽기 싫어!"

    야! 이게 치사하게! 너도 같이 각오 좀 해!

    "이미 늦었어! 크하하하!"

    "…대체 뭘 하는 겁니까."

    그리고 그런 우리를 향해, 문틈에서 살짝 엿보던 바넷사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한마디 했다.

    아, 너 문 꽉 안 닫고 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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