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95화 (1,062/1,205)

1095화

얘가 진짜 가만히 듣고 있자니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앨리시아양. 그만하게. 자네 것까지 옮길 필요는 없네."

하지만 앨리시아의 그런 행동은 결과적으로 우리 애들의 이성을 되찾게 했다.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성감대로 옮기라고 해버리니, 괜히 그런 걸로 화내고 있던 자신들이 괜히 부끄러워진 거겠지.

우선은 제인 연장자인 디아나가 나서서 앨리시아를 말렸고.

"그래요. 당신이 그러면 우리가 뭐가 돼요."

사라도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후훗. 저희도 살짝 투정 부려본 것뿐이에요. 저희에게 해준 곳도 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곳인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사님이 멋지게 의미 부여를 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다른 애들은 천사님의 말에 딱히 동의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드디어 이 소동이 깔끔하게 끝났다는 거 아니겠어?

"그, 그럼 언니들! 절 받아주신다는……!"

"그거랑 이거랑은 또 다른 얘기에요. 그리고 징그러우니까 언니라고 하지 마요."

앨리시아도 그렇게 느꼈는지 눈동자를 희망으로 반짝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그 희망은 사라가 또 차갑게 잘라 내버렸다.

사도 인장 위치로 말미암은 흥분을 가라앉혔을 뿐, 아직 앨리시아를 받아주겠다는 얘기를 한 건 아니니까.

사실 아까 앨리시아가 보여준 대인배스러운 행동을 보고 조금은 우리 애들도 마음을 열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나.

특히나 사라는 원래부터 앨리시아를 엄청 경계했으니까 말이야.

"그런……! 받아들여 주실 때까지 전 이 자리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러든가요. 어차피 여긴 구원 방이니까 불편해지는 건 구원밖에 없어요."

야! 사라! 너 냉정한 말투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게 할 말이냐!?

"아니. 너희도 불편해질 거거든. 특히 사라 넌 각오해. 네 차례 되면 무조건 내 방으로 끌고 와서 할 거야."

"지, 지금 이 몸을 협박하는 겐가아!?"

사라를 향해 굳은 다짐을 한 나였지만, 어째선지 거기에 사라보다 더 극심한 반응을 보이는 이가 있었다.

……아니. 디아나야. 그야 물론 오늘이 네 차례인 건 맞지만, 아니. 그것 때문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니겠지. 하여간 쟤도 참 중증이라니까.

"내가? 여기에서 안 움직이겠다고 한 건 앨리시아잖아."

"우읏!?"

내 말에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한 디아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굳어졌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반박할 구석은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지만, 우리 노출증 대마법사님은 지금 그런 걸 냉정하게 생각할 정신이 없으시겠지.

지금 디아나의 머리에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아 있지 않을 거다.

나와 앨리시아의 관계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앨리시아 앞에서 노출 플레이를 하거나.

"하, 하는 수 없구먼."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면서 고심한 끝에, 디아나는 마지막으로 앨리시아의 새끼손가락을 힐끔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디아나! 인정하려는 거에요!?"

"사도 임명까지 된 마당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뭐, 확실히 새끼손가락을 보고 말했으니 저런 이유 때문에 인정해주는 게 맞겠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디아나가 다른 이유 때문에 인정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자네도 그만 인정하게.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지 않았는가."

"으, 응? 그랬어?"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 이건 또 처음 들어보는 얘기여서, 나는 무심코 끼어들고 말았다.

"그럼 내가 저 사람을 괜히 경계하는 줄 알았어!?"

아니. 괜히는 아니지만, 그냥 앨리시아가 내 동정을 빼앗아 가서 그러는 줄 알았지.

그런가. 그냥 동정을 빼앗긴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일어날 일까지 경계하고 있었던 건가.

나와 앨리시아를 한참 번갈아 노려보던 사라는,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중얼거렸다.

"……다신 언니라고 부르지 마요.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 서로 부를 일이 많을 테니까 확실히 해두겠다는 듯이. 즉, 허락해 준 거다.

"후훗. 사실은 구원 씨가 오기 전에 다 같이 미리 얘기했었어요."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천사님이 은근슬쩍 내게 다가와 그렇게 속삭여주셨다.

그러고 보니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뭔가 분위기가 묘했지.

혹시 앨리시아의 손가락에 있는 사도 인장을 보여주지 않았으면, 훨씬 더 빨리 허락받을 수 있었던 건……아니. 그건 아닌가. 아무리 다 같이 얘기가 끝났어도 곧바로 허락해 줄 분위기는 아니었으니, 사도 인장 소동이 없었으면 다른 걸로 그만큼 소동이 일어났겠지.

"언……네! 알겠습니다!"

아무튼 드디어 허락을 받아낸 앨리시아는, 감격에 겨워서 사라에게 달라붙으려고 했다.

"존댓말도 하지 마요!"

"진짜!?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잘 됐다!"

앨리시아 쟤도 진짜 단순하다니까. 아무리 사라가 저렇게 말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태세 전환이 저렇게 빠르지?

"……꼭 누굴 보는 것 같구먼."

야. 디아나. 너 왜 날 보면서 말하냐? 내가 그래도 저 정도 단세포는 아니잖아?

"야. 너 지금 나 욕했냐?"

"아, 안 했는데!?"

눈치도 없는 애가 이건 또 어떻게 눈치챈 거야!? 이것도 야생의 감이나 뭐 그런 거야!?

아니면 진짜 사도 인장에 그런 기능이라도 달려 있는 거 아니야!?

"여기면 됐어."

날 바라보며 조금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지막이 속삭이는 앨리시아의 모습에, 나는 자연히 그 허리에 팔을 둘렀다.

여기는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의 한복판. 이미 한밤중이라고 해도 좋은 시간.

그 이후로 앨리시아도 껴서 다 같이 저녁을 먹고 얘기도 나누고 하다 보니, 어느샌가 이런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 시간에 앨리시아와 단둘이 이런 곳에 있는 이유는 바로.

"정말로 가려고?"

"그래. 너도 내 성격 알잖아? 남자가 생겼으니 클랜을 옮긴다니. 난 그런 의리 없는 짓 못 해."

그래. 앨리시아가 이런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그 고생을 하면서 드디어 앨리시아와의 사이를 인정받았으니, 당연히 앨리시아도 앞으로는 우리 저택에 살면서 파티원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제 아라크네 클랜은 목적이 사라졌잖아? 꼭 네가 없어도……."

모험가는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던전에 발을 디딘다. 돈을 위해서.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연구를 위해서. 희귀 소재를 얻기 위해서.

그중 아라크네 클랜 소속 모험가들의 목적은 바로 던전 공략이다.

특히나 소속 간부들의 목적은 더욱 명확해서, 던전 최심부에 있는 전쟁신의 세계를 찾아내 더욱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한다는 미리엘의 목적을 돕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느 쪽도 이루어질 수 없는 목적이다. 목적을 잃은 아라크네에 굳이 앨리시아가 남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지 않아."

하지만 앨리시아는 단호하게 내 의견을 묵살했다.

그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에, 나는 무심코

"그렇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아직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미리엘한테 뭔가 다른 목적이 생긴 것 같아. 전에 너한테 붙잡혔다가 돌아왔을 때는 한동안 던전 공략도 소홀히 했었는데, 요즘에는 다시 불이 붙어서 던전도 열심히 다니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옆에서 도와주고 싶어."

또 미리엘인가. 게다가 던전에 열심히 다니고 있다니. 그 녀석 또 뭔가 이상한 짓을 꾸미는 건 아니겠지? 절대 나한테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맹세를 받기는 했지만, 걘 일거수일투족이 다 수상해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

"걱정하지 마 새끼야! 민폐 못 끼치게 내가 옆에서 잘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눈치 없는 앨리시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내 표정이 이상해졌는지, 앨리시아는 호쾌하게 웃으며 내 등을 팡팡 때렸다.

"……."

"뭐야 그 표정은? 너 설마 날 못 믿겠다는 거야!?"

"아니. 못 믿겠다는 건 아닌데……."

미리엘이 작정하고 숨기면 네가 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말이야.

게다가 너 루티아 누님한테 나랑 잘 됐다는 얘기도 했다면서? 당연히 미리엘의 귀에도 그 얘기가 들어갈 거고, 아니. 앨리시아 성격이면 아마 자기가 직접 미리엘한테 말하겠지.

그러면 미리엘이 또 널 얼마나 경계하겠어? 물론 전부 미리엘이 뒤가 구린 짓을 한다는 가정하에 하는 얘기지만 말이야.

"뭐, 아무튼 알겠어. 네가 그러고 싶다면 존중해 줘야지. 가자."

어차피 이러고 있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앨리시아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앨리시아와 함께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를 향해…….

"여기면 됐다니까!"

걸어가려고 했지만, 그전에 앨리시아가 몸에 힘을 줘서 버티고 섰다.

아차. 그러고 보니 그래서 이런 어중간한 곳에서 멈춰 선 거였지.

사실 나도 딱히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까지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거기에 앨리시아랑 같이 이러고 가면, 수많은 사람한테 둘러싸여서 질문 공세를 받을 것이 불 보듯 뻔했으니까.

앨리시아는 아라크네에서도 인기가 많고, 특히 나와의 연애사는 전 클랜원의 관심을 집중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는 모양이니까.

그러니 나로서도 여기에서 헤어지는 게 좋았지만, 얘가 이러니까 괜히 장난치고 싶어지네.

"왜!? 너 내가 부끄럽냐!?"

"그럼 남들 앞에서 껴안는 게 안 부끄럽냐!?"

어, 어라? 이게 아닌데? 이 녀석, 성격이 너무 직설적이라서 조금 비틀어서 말하는 건 안 통하잖아!?

"안 부끄러우면 같이 가던가 새끼야! 아예 그냥 키스하면서 갈까!?"

야! 이럴 때까지 그렇게 화끈할 필요는 없잖아!? 그만둬!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도 아니고 그게 뭐하는 짓이야!?

"잠깐! 타임! 항복! 내가 잘못했어!"

말만 그러는 게 아니라 진짜로 날 끌고 가려고 하기까지 해서, 나는 항복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설마하니 내 장난이 이런 식으로 파훼당할 줄이야.

"훗. 자식이 어딜 누님한테 까불고 있어."

괜히 장난쳤다가 본전도 못 찾은 나와 달리, 앨리시아는 양손을 허리에 얹고 우쭐거렸다.

한번 이겼다고 좋아하기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 밑에 깔려서 히익히익 울어댔던 주제에."

"무, 뭐야 새끼야!?"

"야! 쉿! 너무 큰 소리 내면 들켜!"

이 녀석, 지금 내 멱살 잡아서 벽에 밀어붙인 거 봤어? 너무 쉽게 흥분하잖아.

그나마 앨리시아도 남들한테 이런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는지, 곧장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폈지만.

"하아……. 진짜 이게 뭐야. 이래선 왠지 사귀기 전이랑 다를 게 없잖아."

다행히도 주변에 사람의 그림자는 없어서, 앨리시아는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뭐, 확실히 그냥 친구일 때랑 별 차이 없는 대화 흐름이기는 했지.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아."

난 지금 앨리시아한테 멱살이 잡힌 채 벽에 밀어붙여 지고 있었다.

자세상 앨리시아의 얼굴은 내 얼굴 바로 앞까지 와 있었고, 나는 그 뒷머리를 가볍게 당겨 그대로 입을 맞췄다.

"으응?!"

내가 머리를 당겨서 키스한 거긴 하지만, 자세가 자세다 보니 뭔가 덮쳐지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네.

"그리고 사람 관계라는 건 말 몇 마디로 갑자기 뭐가 확 바뀌고 그런 게 아니라고. 다를 게 게 없는 게 뭐 어때서? 원래부터 친한 친구였으니까 상관없잖아?"

"……응큿. ……그럴지도."

조금 여운이 남을 만한 긴 키스를 끝내고 그렇게 말하자, 앨리시아는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며 부끄러워했다.

평소엔 선머슴 같은 녀석이지만, 이럴 땐 확실히 여자답다니까.

"……그러면 이만 간다."

내 멱살을 놔주고 뒤로 물러난 앨리시아는 자기도 뺨이 달아오른 걸 느끼고 있는지 뺨에 살짝 손을 대서 그 온도를 확인했다.

"부끄러워하는 거야?"

"시, 시끄러워! 갈 거야!"

그리고 이번에는 내 장난에 막 나갈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전력 질주하는 앨리시아.

성격만큼이나 도망가는 모습도 무척이나 호쾌했다.

"훗. 이겼다."

그러면서도 용케 내 승리 선언을 듣고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이쪽을 노려보기는 했지만, 내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자 자기도 살짝 손을 흔들고는 다시 전력 질주로 도망가 버렸다.

아까는 앨리시아한테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말했지만, 저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진짜 기분이 묘하기는 하네. 어제까지는, 아니. 오늘 같이 식사하러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었지만, 기분 나쁜 감정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 가슴 따듯해지는 감정을 곱씹으면서, 나도 발끝을 돌려 저택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녀오셨습니까."

저택으로 돌아오니, 정원에서 바넷사가 메이드 몇 명과 함께 커다란 짐을 옮기고 있었다.

사람은 자기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 가장 멋지고 아름답다는 얘기도 있지만, 바넷사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게 아닐까?

"응. 바넷사는 이런 시간인데 아직도 일하는 거야?"

"……네. 덕분에."

덕분에라니. 바넷사야. 그 말은 이런 때에 쓰는 말이…… 아, 설마 지금 나 때문이라고 비꼬아 말한 거야? 내가 왜? 오늘은 하루 종일 나가 있었다고!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도 다녀오고! 그 이후에는 앨리시아랑 있었고!

넌 하루 종일 내 모습은커녕, 소문 정도 밖에…… 혹시 말이야. 소문 때문에 다 같이 대책 회의를 하느라 일할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가 하고 싶은 거니?

"그, 그래? 그래서 뭐하는 중이야?"

이 이상 얘기해 봤자 내가 유리할 게 하나도 없다.

냉철한 머리로 그렇게 판단해낸 나는 곧바로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디아나님의 연구 자재를 옮기는 중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바넷사가 눈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거기에는 디아나가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귀엽게 손을 흔드는 디아나에게 손을 마주 흔들어주고, 나는 계속해서 바넷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얼마나 걸릴 것 같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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