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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94화 (1,061/1,205)
  • 1094화

    구원은 매사에 진지하지 못하고 장난만 칠 줄 안다. 그런 오해를 줄곧 받아왔다. 그 때문인지 내 머리도 덩달아 과소평가 받는 경우가 많았다.

    나로서는 정말 억울해서 땅을 치고 싶어지는 오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정말 그랬으면 7계층에서 그런 임기응변을 보여주지도 못했을 거고, 우리는 진작에 정체를 들켜서 일을 그르쳤을 거다.

    갑자기 이런 말을 왜 하는 거냐고?

    뻔하지. 지금이야말로 저평가되어 왔던 내 능력을 총동원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나는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우선 진지하게 주위를 살폈다.

    전황은 지극히 불리하다. 하나만 있어도 당해내기 힘든 상대 다수에게 둘러싸인 상황.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냉철한 판단력이 필요한 법이다. 이 세상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란 없어.

    나는 냉정하게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 뭔지를 생각했다.

    우선은 장기인 입담을 이용해 상대의 수를 줄일 수 있는 만큼 줄인다.

    "잠깐 기다려. 먼저 말해둘 게 있다."

    나는 활짝 편 손을 내밀어 밀려들어 오는 상대의 공세를 일시적으로 막았다.

    무시하고 그대로 들이닥쳐 손을 물어뜯는 건 아닐까 잠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얘기를 들어줄 정도의 이성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이성을 잃고 폭주할지 알 수 없는 일. 그렇게 되기 전에 빨리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은 아까 생각했던 대로 수부터 줄이자. 나는 눈앞에 있는 상대 중 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극히 객관적인 사실을 말해 줬다.

    이것으로 제발 이성을 되찾아줘! 그런 염원을 담아서.

    "바넷사랑 레이첼 누님. 둘이 화내는 건 이상하지 않아? 둘은 딱히 이상한 곳에 한 것도 아니잖아?"

    "야! 구원! 너 죽을래!? 디아나! 레이아! 지금 들었어요!? 이 자식 우리한테는 이상한 곳에 했다고 인정했어요!"

    "자네에!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겐가아아!"

    "구원 씨……!"

    크윽! 젠장 맞을 용사! 사람의 말을 그런 식으로 곡해하다니! 그렇게나 싸움이 하고 싶은 거냐!?

    용사의 외침을 들은 대마법사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테이블을 탕탕 내리쳤고, 성녀는 자신의 가슴골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새침하게 눈을 흘기셨다.

    "아, 아니! 인정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내게 직접 지명받은 둘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굳어져 있었으니까.

    좋아! 우선은 이 기세를 몰아 둘부터 완벽하게 처리한다! 나머지 셋의 상대는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렇잖아!? 내 말이 틀려!? 뿔이랑 귀가 뭐가 이상하다고!? 오히려 치장한 것처럼 보이고 좋잖아!? 당당하게 있으면 아무도 거길 보고 그런 생각 안 한다고! 아니면 뭐야!? 너희는 거기가 이상한 곳이라고 스스로 인정……!"

    "저희가 인정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그래! 구원이 네가 언제가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잖니!?"

    "아니. 딱히 평소에는 이런 말……."

    "야. 구원."

    어떻게든 바넷사와 레이첼 누님을 설득해야 한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며 계속해서 반론을 이어나가려고 했지만, 그 시도는 용사에 의해 허무하게 좌절됐다.

    내 머리를 손으로 턱 잡더니, 그대로 고개를 자기 쪽으로 돌려 버린 거다.

    야. 잠깐 타임. 지금 목에서 뚜둑 소리 났어. 뚜둑.

    최대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봤지만, 용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우리한테는 더 할 말 있어?"

    용……아, 아니. 사라 씨? 왜 그런 말투를 쓰시는 건가요? 그래선 마치 사형 집행 전 사형수에게 "뭐 더 넘기고 싶은 말은 없나?"라고 묻는 교도관 같잖아요.

    "있어."

    하지만 이런 압박 속에서도, 내 냉철한 머리는 아직 내게 남은 패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내가 항상 말했잖아. 원하면 언제든 바꿔주겠……."

    "처음 정한 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이 몸이! 항상! 말하지! 않았는가아!"

    돌아온 건 대마법사님의 양손 연속 진심 펀치였지만.

    역시 대마법사님이야. 마법력에 능력치를 몰빵한 나머지 이렇게 진심이 되어도 물리력이 0이군.

    아, 아니.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아, 아야! 아야! 아파 디아나!"

    나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최대한 아픈 척을 해봤지만.

    "거짓말하지 말게!"

    괜히 딱밤만 한 대 더 맞았다.

    "진심이었는데……."

    "맞고 나서 3초 후에 아파하는 게 뭐가 진심인가아!"

    아, 아차! 이 내가 그런 실수를!

    "몸이 커서 그런가? 몸집이 작은 디아나는 모르겠지만, 원래 몸이 크면 그만큼 반응이 느려지는 법이거든. 뉴런의 전달 속도에도 한계는 있는 법이거든. 그 왜 그런 학설도 있잖아. 옛날에 살던 공룡은 다리 쪽에 한 대 맞으면 몇 분 후에나 그 통증을 느꼈을 거라는 학설. 그런 것처럼 나도 몸집이 큰 만큼……끄아아악! 깨져! 사라야! 용사님! 머리통 깨져!"

    "이건 바로 반응하네."

    크흑. 젠장. 어째서냐!? 완벽한 변명이었을 텐데!

    "디아나. 레이아. 이 자식 하나도 반성 안 하는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할까요?"

    "사라야. 오빠한테 이 자식이라니……네. 조용히 있겠습니다."

    진짜 사기 직업 같으니라고. 손가락에 힘만 줬는데 무슨 악력이…….

    "흠. 그렇구먼."

    완벽히 날 제압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용사와 대마법사는 머리를 맞대고 날 어떻게 혼쭐내줘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얘들은 맨날 둘이서 투닥투닥 싸우는 주제에, 꼭 이럴 때만 의기투합한다니까.

    젠장. 누군가, 누군가 날 구원해 줄 사람은 없는 건가!?

    바넷사! 레이첼 누님! 그래도 뿔이랑 귀 정도면 아직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거 아닌가요? 둘만이라도 절 위한 변호를…….

    "저……언니들……? 절 받아주시는 얘기는……."

    앨리시아아! 네가 있었구나! 솔직히 말해서 내가 봐도 지금은 저런 식으로 끼어들 타이밍이 전혀 아닌 것 같지만, 그 눈치 없는 점이 오늘은 날 살리는구나! 역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여걸! 멋지다 멋져 앨리시…….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조용히 있게."

    "아, 알겠습니다……."

    눈치 없게 끼어들었던 앨리시아는, 용사와 대마법사님의 눈치를 주자 잽싸게 분위기 파악을 하고는 다시 뒤로 빠졌다.

    눈치는 없어도 야생의 감은 살아 있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좀 도와달라고!

    "어떻게 할까요?"

    "으응……. 전 딱히……."

    앨리시아까지 물리친 용사는 최종 판결을 내리기 위해 다시 한번 대마법사와 성녀에게 의견을 구했지만, 거기에도 아직 한 줄기 희망은 남아 있었다.

    처, 천사니이임! 역시! 역시나 천사님! 전 언제나 믿고 있었습니다!

    "레이아!? 치사하게 또 이러기에요!?"

    "그치만……이런 곳이 제일 구원 씨답고 좋지 않나요……?"

    그래! 옳소 옳소! 사도 인장은 야한 곳에 박는 게 제일 나답고……처, 천사님. 혹시나,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요. 혹시 어차피 나는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으니 그냥 성감대에 박아 버리는 게 제일 나답다고, 마틸다나 앨리시아처럼 로맨틱한 의미를 담아 사도 인장 위치를 정하는 건 나답지 않다고 은근슬쩍 디스하시는 건……아, 아니죠? 에이. 떽! 이 머저리 같은 구원아! 우리 천사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난 성자야! 여신님이 야한 짓 하라고 세상에 보낸 사람이라고! 성자가 성감대에 사도 인장을 박겠다는 게 뭐가 나빠!"

    "야한 짓 하라고 보낸 거 아니에요!"

    지금까지 유일하게 소동에 가세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던 마틸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질렀다.

    띠링! 추기경 마틸다가 전투에 참전했다!

    만약 이게 게임이었다면 그런 화면이 뜨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추기경님의 참전도, 내 측후방에서 들려온 중얼거림이 불러온 후폭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 지금까지 성감대 얘기하고 있었던 거야!? 어쩐지! 난 또 언니들이 왜 그렇게 화를 내나 했네! 그런 거였구나! 야! 네가 잘못했네!"

    ……야. 앨리시아. 너 지금 내 등 탁탁 때리면서 호쾌하게 웃는데 말이야. 지금 그 말로 너도 나랑 같이 큰일 났어.

    "서, 서, 서, 성감대 아니거든요!?"

    "아니. 사라야. 그건 아니지. 그걸 부정하면 어떻게 해?"

    "넌 좀 닥쳐!"

    오, 오빠한테 너라니…….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이 이상 말하면 진짜로 용사님이 이성을 잃을 것 같아서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야생의 감조차 작동하지 않은 건지, 앨리시아는 호쾌하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야! 얘기 들어보니까 위치는 언제든 옮길 수 있는 거 아니야? 좋아! 그럼 내 것도 화끈하게 성감대로 옮겨! 그러면 되잖아?"

    ……무식한 해법이다. 무식한 해법이지만, 앨리시아가 제시한 그 해법에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린 것 또한 사실이었다.

    앨리시아는 그런 반응을 보고 한 건 해결했다고 생각한 건지,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자기 몸을 내게 들이밀었다.

    "자!"

    이걸 대체 어떻게 반응해주면 좋을까? 그래. 우선은…….

    "……성감대라니. 어디에다가?"

    "으엑!? 그, 그건……."

    제아무리 앨리시아라도 이번만큼은 부끄러웠는지, 앨리시아는 살짝 말을 더듬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가지고 있구나.

    "내, 내 입으로 말하라고!? 성자라는 새끼가 그것도 몰라? 많이 있잖아!? 예를 들면……보, 보, 보ㅈ……."

    "스타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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