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93화 (1,060/1,205)
  • 1093화

    마지막 발버둥을 해봤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자기 방문 앞에서 이런 소리나 하고 있는 거니까. 내가 죄지은 상황이 아니어도 차가운 시선을 받을만한 말이었다.

    "으윽.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그래. 여기서 아무리 이러고 있어봤자 어차피 결국에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해야 할 일은 뒤로 미루지 않고 곧장 한다. 그게 내 장점이잖아?

    나는 다시금 각오를 다지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 구원 씨. 오셨어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날 노려보고 있는 지옥도…지옥이라고 하기에는 다들 너무 예쁘지만. 아무튼 그런 광경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건 화기애애한 다과회였다. 게다가 제일 먼저 날 발견하신 천사님이 특유의 부드러운 눈웃음과 함께 날 반겨주시기까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광경에 나도 모르게 몸에서 힘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로 긴장을 풀었다는 건 아니다.

    쿵!

    "꺄악!"

    오히려 긴장을 풀지 않도록 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면서, 나는 바닥에 쿵 하고 무릎을 찧었다.

    천사님. 깜짝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그래도 이건 제 각오의 표시라고 생각해주세요.

    나는 일단 방에 있는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사라, 디아나, 레이아, 마틸다, 레이첼 누님에 뒤이어 들어온 바넷사까지. 레이를 제외하고는 이 저택에 있을 수 있는 전원이 다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역시나 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천사님이 그렇게 날 환대해주신 것은, 내가 너무 겁먹고 움츠러들까 봐 긴장이라도 풀어주시기 위험이었겠지. 천사님은 너무너무 착해서 탈이니까.

    "너희한테 할 말이 있어! 난…!"

    "잠시만요. 구원 씨."

    각오를 다지고 앨리시아도 내 여자가 됐다고 선언하려고 한 바로 그 순간, 천사님이 내 말을 끊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사님이 사람 말을 중간에 끊다니. 차라리…잠깐.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천사님만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인가?

    "구원 씨. 우선은 순서대로 차례차례 사정을 설명해주시지 않겠어요?"

    천천히 타이르듯이 그렇게 말하는 천사님은, 역시나 사정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마을에 소문 같은 게…?"

    "내. 유명인이니까요. 그래도 자세한 얘기는 아직 몰라요. 소문이 사실인지도 알 수 없고요. 그러니까 구원 씨 입으로 듣고 싶어요."

    확실히. 앨리시아와의 관계 운운을 말하기 전에, 우선은 오늘 일어난 사건의 전말부터 설명하는 게 먼저일지도 모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우선 오늘 앨리시아와 있었던 일을 순서대로 설명했다.

    "…그러니까, 술에 취해서 그랬다?"

    앨리시아와 여관에 들어갔다는 얘기까지 하자, 드디어 굳게 다물어져 있던 사라의 입이 열렸다.

    "…네."

    "하아…그래서?"

    "…끄, 끝까지 해버렸습니다."

    "나도 알아 그 정도는!"

    앞에 있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리치면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사라의 모습은, 그냥 단순히 화가 나서 그러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뭔가 더…젠장. 역시나 그런 거겠지.

    "저…실례지만 레이가 어디에 있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방 침대에서 자고 있네."

    대답을 한 건 사라가 아닌 디아나였다. 이쪽도 얼굴이 붉은 건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이 내 의혹을 확신으로 변하게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그…같이 밖에 나가시지 않으셨습니까? 혹시, 혹시 도중에 말이지요."

    "어울리지 않는 존댓말은 그만두게. 확실히 밖에서 안내해주고 있었네만, 도중부터 레이 양의 상태가 이상하여 돌아왔네."

    "이, 이상하다고 하심…아니. 이상하다니?"

    존댓말은 괜히 더 거슬리게만 하는 것 같으니, 나는 원래 말투로 돌아오기로 했다.

    "자네도 만취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영향일 것으로 생각되네. 묘하게 기분이 고양된 채 제대로 걷지를 못하더구먼."

    다, 다행이다아아….

    디아나의 대답을 들은 순간, 바짝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쫙 풀려 버렸다. 무릎 꿇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마 바닥에 무너져내렸을 거야.

    진짜. 만약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일이 있었다면, 모처럼 날 생각해서 레이까지 데리고 나가준 사라랑 디아나한테 어떻게 사과의 말을 해야 할지. 물론 당사자인 레이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 그럼 그대로 침대에?"

    "…으, 음."

    어, 어라? 디아나 님? 그 반응은 대체 뭐죠? 왜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옆으로 휙 돌려 버리시는 거죠? 정말로 취한 레이를 침대에 데려다 주고 끝난 거 맞죠?

    "당신."

    "네? 아니. 응?"

    디아나에게 강렬한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자니, 갑자기 마틸다가 옆에서 끼어들어 왔다.

    오랜만에 핑크빛 분위기 하나도 안 풍기는 진지한 추기경님의 모습이었다.

    "앞으로 술은 금지에요. 당신이 그렇게 술이 약했다니."

    아니. 마틸다 너도 나랑 마셔 봤잖아. 나 딱히 그렇게 안 약해. 다만 앨리시아가 무식하게 센 거야.

    "…응. 물론이야."

    그렇게 변명할 수 있을 리도 없어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애초에 오해받는 게 슬플 뿐, 술 좀 못 마시게 된다고 슬퍼할 정도로 애주가도 아니니까.

    "정말로. 사라 씨한테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네요."

    "마, 마틸다! 전 별로 상관없잖아요!"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조금 풀린 건지, 마틸다는 마지막에 살짝 장난까지 가미해서 분위기를 풀어주셨다.

    크흑. 우리 성직자 콤비분들은 대체 왜 이렇게 마음씨가 넓은 걸까? 역시 담는 그릇이 크기 때문인가? 역시 우리 파티의 No.1과 No.2야.

    "아무튼 그래서!"

    불평을 하기는 했지만 술 얘기는 자기한테 불리하다는 걸 아는지, 사라는 더 물고 늘어지는 일 없이 곧바로 다시 시선을 내게 돌렸다.

    역시 용사야. 싸워야 할 때와 그러지 말아야 할 때를 완벽히 재단하고 있어.

    "술 때문에 실수해서, 레이나 우리한테 폐를 끼쳤을 것 같아서, 그래서 사과하는 거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냥 화내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이 그런 뜻으로 들리지 않았다.

    화내기는커녕, 반대로 사라가 그걸 바라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니."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마틸다의 배려로 살짝 분위기가 풀어졌지만, 그 배려에 의지해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뭐, 뭐!?"

    "물론 그것도 미안해.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야. 내가 너희한테 사과해야 하는 건…."

    "큭!"

    내가 앨리시아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고 한 순간, 무표정으로 날 가만히 보고 있던 바넷사가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구원님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지금은 바쁘니 다음에 다시 찾아오라고 하시게."

    메이드의 전달을 디아나는 단호하게 받아쳤지만, 그에 굴하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급한 용무입니다! 대마법사님! 부탁드립니다!"

    으, 으응!? 이, 이 목소리는 설마….

    "…들여보내게."

    디아나도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은 듯, 눈썹을 살짝 찌푸리면서 찾아온 손님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렇게 방에 들어온 손님은 방 한가운데에 무릎 꿇고 있는 내 모습을 힐끔 보더니, 그대로 내 옆까지 걸어와서는.

    쿵!

    자기도 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니들! 신입이 인사 올립니다!"

    …야. 앨리시아. 너 지금 뭐하는…파벌에 막 들어온 양아치가 조폭 형님들한테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뭐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야. 너 대체 여긴 왜 왔어? 혹시 진짜로 미리엘한테 쫓겨났어?"

    그래. 아까 여관에서 몸을 씻고 나와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 앞까지 어색하게 같이 걸어오고 어색하게 헤어진 앨리시아가 왜 여기에 있냐는 것이었다.

    어차피 별로 소용도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귓속말로 앨리시아한테 질문을 던져봤지만, 앨리시아는 내 노력을 완전히 허사로 만들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 관계를 우습게 보면 아무리 너라도 용서 안 해!"

    그러니까 소리 좀…다른 애들한테 다 들리잖아….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이마를 부여잡고 싶어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럼 여긴 왜 왔어?"

    "사정을 말하니까 루티아가 알려줬어! 네가 말한 준비가 대체 뭔지!"

    뭐, 뭐라고? 그게 왜? 알면 더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누님은 또 얘한테 무슨 바람을 불어넣은 거야!?

    "언니들! 이전까지 제가 보였던 싸가지 없는 행동, 전부 사과하겠습니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앨리시아는 다시 우리 애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이 자식이랑 같이 있는 게 질투 나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오!"

    "……."

    무릎 꿇은 채로 아예 바닥에 이마까지 박고 부탁하는 앨리시아의 터프한 사과에, 당연하게도 우리 애들은 전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나마 제일 빨리 회복된 건, 이 중에서 앨리시아와 가장 친분이 있는 레이첼 누님이었다.

    "애, 앨리시아 씨?"

    "응! 레이첼! 아니! 네! 언니! 부르셨습니까!"

    "그…언니라는 건 대체 뭔가요?"

    "앞으로 언니로 모시며 살겠습니다!"

    그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앨리시아는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당연하게 한다는 듯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 싫어요! 난 당신보다 나이도 어리거든요!?"

    그리고 그 말에 반응을 보인 건 다름 아닌 사라였다. 이 역시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부 반응이었지만.

    "나이는 관계없습니다! 무리에 먼저 들어온 사람을 언니로 모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앨리시아. 그거 일반적인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논리는 아닌 것 같아. 네가 무슨 무리 생활하는 야생동물이니?

    "무리라니…."

    "고깝게 보이시는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믿어주십시오! 앞으로는 정성껏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그런 건 잘합니다! 제발 받아주십시오! 받아주실 때까지 이 자리에서 절대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야. 야. 잠깐만."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앨리시아는 강하게 팔을 휘둘러서 말리려는 날 떨쳐냈다.

    "너야말로 가만히 있어! 이건 나와 언니들의 문제야!"

    아니. 그야 그렇지. 자기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한다. 멋져. 존경스러워.

    하지만 말이지. 이건 그냥 네 문제가 아니야. 동시에 내 문제이기도 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직 쟤들한테 말 안 했어."

    "…어?"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앨리시아가 무슨 말인지 이해 안 된다는 눈으로 날 쳐다봤다.

    "아니. 그러니까 널…그 있잖냐."

    "…지금까지 뭐 했어?"

    크윽. 이, 이 녀석…단세포 주제에 정곡을…여긴 여기대로 이런저런 할 말이 많았단 말이야!

    "그…얘들아? 섹스는 술에 취해서 했는데, 하고 보니까 아무래도 내 감정을 속일 수 없게 됐어. 그래서 얘도…."

    앨리시아의 행동을 보고 눈치 빠른 우리 애들이 상황 파악을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새삼 다시 내 결심을 얘기하자니 왠지 괜히 더 쪽팔린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솔직하게 자신의 지금 감정을 털어놨다.

    "부탁드립니다 언니들! 저희 관계를 인정해주십시오!"

    앨리시아. 의욕이 앞서는 건 알겠는데, 끼어들지 말아 줄래?

    "감정을 속일 수 없었다…인가요?"

    "응."

    "자네, 확실한가?"

    "응."

    마치 내 진심을 확인하는 것 같은 우리 애들의 시선. 그 시선을 견뎌내면서, 나는 굳은 각오가 서린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앨리시아가 우리 감정을 확인해주듯이 자기 왼손의 새끼손가락을 얼굴 높이까지 치켜들고는.

    "정말입니다. 언니들!"

    아니! 야! 그게 우리 감정을 제일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인 건 맞지만, 그걸 지금 보여줘 버리면!

    "!!!!!!"

    앨리시아의 새끼손가락에 시선이 간 순간, 우리 애들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래. 비교적 부드러운 반응을 보이던 천사님이나 레이첼 누님까지도.

    유일하게 마틸다만이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무슨 일이냐는 듯 우리 애들을 올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우리 애들은, 동시에 똑같은 말을 외쳤다.

    """""어째서 저 사람은 정상적인 곳에 해준 거야!?"겐가!?"건가요!?"겁니까!?"거니!?"

    …저걸 보고 제일 먼저 태클 걸 부분이, 거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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