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92화 (1,059/1,205)
  • 1092화

    부끄러워하려던 것도 잠시. 바로 내 안색이 나쁜 걸 확인하고는 자기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얘도 보기완 달리 참 남 챙기기 좋아한단 말이야. 아라크네 클랜 내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고, 애초에 내 동정을 떼준 것도 자기 나름대로 챙겨준 거였으니까 말이야.

    이런 때마저 그런 성격을 발휘하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내가 앨리시아한테 기댈 입장은 아니지.

    "아니. 너무 심하게 해서 네가 복상사한 줄 알았거든. 그래도 살아는 있네."

    "뭐 이 새끼…으흥!? 이, 이 새끼가…!"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해 앨리시아의 가슴을 잡고 적당히 주물주물 만지자, 앨리시아가 몸을 움츠리며 또다시 귀여운 목소리를 냈다.

    젠장. 이제는 진짜 진지해져야 할 때인데. 이런 때마저 반응해 버리는 나 자신이 싫다.

    "뭐, 아무튼 그거야. 그 뭐냐."

    뭐라고 운을 떼면 좋을지 모르겠다.

    너 이제부터 어쩔 거냐? 너도 이제부터 내 여자다? 아니. 하지만 그렇게 거부해놓고 술에 취해 섹스 한 번 한 다음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뭔가….

    "그래. 알았어. 인정하면 되잖아. 인정하면. 내가 졌다! 너 섹스 잘한다! 됐냐!?"

    "아니. 그게 아니라 말이지."

    "그게 아니면 또 뭐?"

    "그러니까…."

    "내가 졌다고 놀리려는 거면 각오해라. 이 앨리시아, 아무리 졌어도 프라이드까지 꺾이지는 않았어."

    프라이드가 꺾이지 않기는. 히익히익 울어댄 주제에 말은 잘해요. 아, 아니. 이게 아니라.

    이 녀석 설마 알면서 이러는 건가? 진짜로 그냥 술에 취해 일어난 해프닝으로 넘어가려는 거야?

    "…딱히 네가 책임감 느낄 필요 없어. 내가 억지로 끌고 온 거니까."

    내 표정에서 대충 넘어갈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앨리시아는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툭 내뱉었다.

    젠장. 저 표정을 보니까 또 아까 울던 모습이 생각나잖아.

    "야. 그 뭐냐. 너도 이제 알겠지만, 난 절대 네가 매력적이지 않아서 지금까지 거부했던 게 아니야. 오히려 넌 무척이나 매력적…."

    "갑자기 닭살 돋는 소리 하지 마 새끼야."

    "아, 아무튼 지금까지 거부해왔던 건 상황이 말이지. 너도 알잖아? 내가 주변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그래서…."

    그래. 앨리시아에게 호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건 절대 아니지. 오히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계속해서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호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앨리시아를 거부했던 건, 까놓고 말해서 우리 애들한테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 그래도 되는 걸까? 의도 한 건 아니지만, 앨리시아의 마음을 알게 된 이후로도 내 여자는 꾸준히 더 늘었다. 그러니까 앨리시아 한 명이 더 추가된다고 해서…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앨리시아한테 실례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다. 다른 요소는 다 배제하고, 내 마음에만 집중해 보자.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

    "됐어 새끼야."

    잠깐 말을 멈추고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있자니, 앨리시아가 그렇게 툭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 앨리시아."

    "됐다고 새끼야. 어쩌다가 섹스 한 번 했다고 네 여자가 된 것처럼 굴 마음 없어."

    앨리시아는 저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나랑 이어지고 싶어서 울고불고 별짓을 다 했던 녀석이니까.

    앨리시아는 내가 아직도 갈등하고 있는 걸 알고는 자기가 먼저 저렇게 말해 준 거다. 내가 더 갈등할 필요 없도록. 그런데도 나는….

    "시끄러워. 네가 없어도 난 있어. 너같이 좋은 여자를 쉽게 놔줄 것 같아?"

    나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래. 처음부터, 앨리시아의 마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부터 이랬어야 했다.

    나도 분명 앨리시아한테 감정이 있었는데, 상황 핑계를 대고 자신의 감정이 확실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면서 피해왔던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핑계도 댈 수 없다. 상황이야 내가 바꾸면 되는 거고, 내 감정이 사랑인지 우정인지…아까의 섹스로 확실해졌다. 떡정이 생겼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실은 시험 삼아서 한 번 써봤는데, 제대로 발동이 됐거든. 사도 임명이.

    눈앞에 떠오른 사도 인장 설정 창을 본 순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제대로 나도 감정이 있기 때문에 발동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엘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다른 이유로 발동되는 게 절대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 자신의 감정이 확실해졌는데, 뭘 더 망설일 게 있겠어?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놔주긴 뭘 놔줘! 난…."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줘."

    앨리시아는 동요하면서 그렇게 외쳤지만, 아마 너무 갑작스러운 말에 반사적으로 거부했을 뿐이겠지.

    날 좋아한다고 그렇게 매달렸던 애가, 아직도 미련이 남았다는 티를 그렇게 팍팍 냈던 애가, 아까는 그렇게 서럽게 울기까지 했던 애가 이제 와서 날 거부할 리가 없잖아?

    나는 앨리시아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무, 뭐?"

    "미리 말해두지만, 전처럼 거절하는 거 아니야. 제대로 준비할 시간을 달라는 거야. 이 이상 기다리게 하는 건 미안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내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널 맞이하러 갈게. 기다려줄 수 있지?"

    내 마음은 확실히 굳혔지만, 그래도 장애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특히 앨리시아는 내 동정을 빼앗아 갔다는 이유로 우리 애들이 엄청나게 경계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설득하려면 꽤나 애를 먹을 거다.

    이대로 무작정 데려가는 것보다는, 우리 애들을 설득하고 나서 데려가는 편이 더 낫겠지.

    "…지, 진짜로?"

    내 말이 진심이라는 걸 드디어 앨리시아도 깨달았는지, 앨리시아는 물기 섞인 촉촉한 목소리로 그렇게 반문했다.

    "진짜로. 뭣하면 증거라도 남겨줄까?"

    "…증거?"

    "그래."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어서, 앨리시아의 왼쪽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그리고 아까 열어둔 채로 닫지 않고 있었던 사도 인장 설정창을 조작해서, 앨리시아의 새끼손가락에 그 인장을 새겼다. 마치 반지를 끼는 것처럼 둥글게.

    "으흐으응?!"

    "내가 원래 살던 곳에서는 약속할 때 이런 식으로 새끼손가락을 걸고 맹세를 해. 그러니까 이 새끼손가락의 인장은 그 증거야."

    "……."

    내 설명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앨리시아는 그저 물끄러미 자기 왼손의 새끼손가락만 쳐다봤다.

    내가 예상한 것처럼 울음을 펑펑 터뜨린다든가 하는 극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었다.

    왜냐하면 앨리시아는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아마 아직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는 거겠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알았지?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반드시 널 데려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줘. 아, 그래도 혹시 아라크네에 있을 자리가 없어지면 그냥 바로 우리 저택으로 와도 돼."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나 해서 덧붙인 말에, 앨리시아는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아니. 너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내가 미리엘 그 녀석이 사고 못 치도록 살짝 그…그런 짓을 했거든. 그랬더니 그 녀석도 나한테 제대로 빠져 버려서 말이지. 아마 돌아갈 때쯤이면 너랑 나랑 같이 여관에 들어온 건 소문이 쫙 퍼져 있을 거 아니야? 미리엘도 그걸 알고 눈이 돌아가서 질투하면, 아라크네에 있기 불편해질 수도…."

    "미리엘은 그런 녀석이 아니야."

    아니. 그건 네가 너무 사람을 믿는 게 아닐까. 사람이라는 건 모르는 거예요. 네가 걔랑 나랑 둘이 있을 때 걔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못 봐서 그러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미리엘 그 녀석 상당히 위험한….

    "혹시 네가 갑자기 날 받아줄 결심을 한 것도, 그것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는 앨리시아는 마치 감정이 죽은 사람처럼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

    얘가 또 이상한 오해를 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아니. 그렇게 튕겨대던 놈이 갑자기 돌변해서 자기 마음을 받아준다고 하는 거니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의심될만한 상황이지만.

    "으, 응?"

    "내가 너랑 섹스하는 바람에 미리엘의 질투를 사서 있을 곳이 없어질까 봐?"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것도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확실히 그런 것도 앨리시아를 받아주기로 한 것에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내가 관련된 일로 앨리시아가 평생 몸담았던 아라크네 클랜에서 있을 자리가 없어진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니까.

    하지만 말이지 앨리시아. 그렇다고 해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전혀 없어.

    "야. 네가 아직 그 손가락에 새겨진 인장의 의미를 모르는 모양인데. 아까 그거 새길 때, 엄청 기분 좋지 않았어?"

    "…이, 이 새끼가 갑자기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벼, 별로…."

    "그거 나랑 너랑 둘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새기지 못하는 거야. 우리 애들 몸에도 하나씩 있어. 그거."

    "……."

    그렇게 말한 순간, 앨리시아가 다시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야. 울 거면 지금이야. 딱 지금 나한테 달라붙으면서 울며 기뻐하면 되는…."

    "노, 놀리지마 새끼야! 울긴 누가 울어!"

    "크헉…."

    앨리시아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날린 주먹은, 그대로 내 명치를 강타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레벨도 낮은 주제에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아, 아무튼 난 기다리면 되는 거잖아!?"

    "그, 그래. 그러니까…."

    "그럼 가!"

    "으, 응?"

    아니. 그러니까 보통 이럴 때는 울면서 기뻐해야 할 때잖아. 왜 갑자기 축객령을 내리는 거야?

    "가라고 새끼야! 준비한다면서!"

    "아니. 그게 지금 당장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너 혹시 울 것 같아서 나 쫓아내는 거야?"

    "됐으니까 꺼…."

    "그렇게는 안 되지. 자기 여자가 울려고 하는데 그냥 가는 남자가 어디 있어."

    "이, 이…보면 죽여 버릴 거야…."

    듣기만 해도 오싹한 말을 중얼거리면서, 앨리시아는 내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우는 내색을 안 하려는 건지, 소리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내 품에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차피 우는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것도 아니니, 그냥 소리 내서 울어도 될 텐데.

    게다가 이번에는 슬퍼서 우는 게 아닌, 기뻐서 우는 거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앨리시아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거겠지. 오늘은 그 생각을 존중해주자.

    그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나는 앨리시아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어 줬다.

    "다, 다녀왔습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머리부터 들이밀면서 저택으로 들어온 나는, 불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우선 현관으로 들어올 때 바넷사가 마중 나와주지 않은 것부터 불길해. 성격상 살갑게 맞이해주지는 않더라도, 웬만하면 얼굴을 비추는 게 바넷사였는데.

    아니야. 벌써 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날은 어두워져 있으니, 바넷사도 그냥 자느라 못 온…걸 리가 없지. 역시.

    불길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우선은 누구라도 좋으니 우리 애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보자.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저택 안으로 한걸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오셨습니까."

    "흐익!?"

    "……."

    아니. 바넷사야. 나도 안 어울리는 소리를 낸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차가운 눈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인기척이라도 좀 내지 그랬어. 놀랐잖아.

    …뭐, 역시 지금 이거 때문에 저렇게 보는 게 아니겠지만.

    "다녀왔습니다. 다른 애들은?"

    "이쪽입니다."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볼 셈이었는데, 바넷사는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건지 명확한 답변을 주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하지만 단서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다들 어디에 있냐고 물었는데 이렇게 망설임 없이 앞장선다는 건, 다 같이 모여 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런 시간에 다 같이 모여 있다는 얘기는 역시나 그런 뜻인가.

    "이곳입니다."

    바넷사가 멈춰선 곳은, 아니나 다를까 바로 내 방 앞이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아니. 이 경우는 사형대에 끌려가는 사형수가 더 적절한가. 아무튼 그런 기분으로, 나는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분명 아까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막상 행동으로 옮기려고 하니 이렇게나 발이 떨어지지 않다니.

    "나, 나보고 여길 들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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