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90화
"……."
미리엘의 방에서 나온 후, 말했던 대로 정문에서 기다리기를 십수 분. 좀처럼 나오지 않는 앨리시아를 찾으러 다시 안으로 들어가 볼까 고민하던 그 순간, 드디어 앨리시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선지 중무장 차림으로.
"뭐, 뭘 그렇게 쳐다봐 새끼야!? 불만 있냐!?"
"아니…너 아까는 조금 더 편한 옷 아니었냐?"
차려입으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어째서 중무장 차림인데? 어디 싸우러 가냐? 심지어 이 녀석, 등에 대검까지 메고 왔어.
"난 이 차림이 제일 마음 편해!"
응. 그건 보면 알겠어. 그래 보여.
하지만 말이야 앨리시아. 그렇게까지 마음 편한 차림을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부터 레스토랑에 갈 거잖아.
"그런 무기를 들고 있으면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걸."
"뭐!? 야! 햇병아리! 너 요금 좀 컸다고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그런 음식점이 어디 있어!?"
있어…. 많이 있어…. 대부분이 그래…. 여기가 아무리 모험가와 던전이 중심이 되는 도시라고 할지라도, 격식 있는 음식점들은 대부분 그래.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 가든가, 하다못해 호신용으로 보이는 한 손 무기를 차고 가는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대검을 메고 가도 괜찮은 곳은 아마 없을 거야.
그렇게 논리적으로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앨리시아는 자기주장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뭐라고 해도 난 이 차림으로 갈 거야! 누, 누가 너 같은 놈 취향에 맞춰서 귀여운 옷 같은 걸…!"
게다가 뭔가 이상한 오해 같은 것까지 하고 있고.
귀여운 옷이라니. 내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예전에 했던 장난을 설마 아직 신경 쓰고 있을 줄이야. 아니. 그보다 가지고 있는 거야? 귀여운 옷을?
"알았어. 그냥 가자."
말을 해도 설득은커녕 괜히 나만 더 나쁜 놈이 될 것 같아서, 나는 포기하고 레스토랑에나 가기로 했다.
대검 정도는 레스토랑 안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인벤토리에 맡아놓으면 되지. 갑옷은…뭐, 출입 거부는 안 당하지 않을까? 그렇게 빌자.
"이쪽이야."
예전에 레이첼 누님에게 식사 대접한다면서 소동을 일으킨 이후로, 근방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의 위치는 철저하게 조사해놓은 나다. 사실 내 입맛에는 고급 식당의 음식이나 우리 저택에서 바넷사의 진두지휘 아래 만들어져 나오는 음식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위치만 조사해 놓고 자주 가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고급 레스토랑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우선은 성이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도시의 중앙에 있는 던전. 그리고 그 던전 입구를 둘러싼 길드. 그리고 그 길드 주변이 모험가를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상점가가 있다면, 성 근처에는 관청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이 있는 구역이 있다.
내가 가려는 곳은 물론 그쪽이었다. 감사 인사 겸 식사 대접을 하는 자리니까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가게가 어울리겠지.
"자, 잠깐 기다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한 나였지만, 어째선지 앨리시아가 내 손목을 잡아채서 멈춰 세웠다. 그 손에는 앨리시아의 지금 감정을 나타내듯 어마 무시한 힘이 담겨 있어서.
"아, 아야! 부러져! 부러져!"
이제는 내가 레벨이 훨씬 더 높은 데도, 얘는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아, 미, 미아…짜, 짜식이 엄살은!"
게다가 앨리시아는 자각이 없는 건지, 내 등짝을 시원하게 한 대 퍽 때리기까지 했다.
아니. 자기 딴에는 자연스러운 척하려고 이러는 것 같기는 하지만, 너무 긴장해서 힘이 잔뜩 들어갔다고.
"갑자기 왜 멈춰 세운 건데?"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생명의 위기가 찾아올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 그래! 너, 식사 대접한다면서!?"
"…그런데?"
"그런데 왜 그쪽으로 가 새끼야!? 요즘 위에 잘 안 온다고 지리도 까먹었냐!?"
이건 대체 뭐라고 답변하면 좋은 걸까.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방향을 틀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다. 내 시야 구석에는 맵이 띄워져 있으니까.
"…저쪽에 레스토랑이 있으니까?"
그래도 일단 순순히 대답을 해주자, 앨리시아의 눈썹이 크게 움찔했다.
"레, 레스토라아앙?"
"그, 그런데."
뭐, 뭐야. 뭐가 문제라는 거야?
"그런 답답한 곳에 가서 뭘 먹으라는 거야! 사람 체하게 할 일 있어!?"
"어?! 아니. 하지만 감사 인사…."
"그런 건 됐어 새끼야! 어울리지도 않게!"
…어울리지도 않는다는 건 나도 백번 공감하지만, 그래도 생각해서 좋은데 데려가 주려고 한 사람한테 너무하지 않냐?
"따라와!"
은근히 상처받은 내 손을 잡아끌고 앨리시아는 내가 가려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 길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여기면 됐잖아! 여기면!"
그렇게 도착한 곳은 아니나 다를까, 모험가들이 모여 떠들썩하게 소란피우고 있는 술집이었다.
어쩐지 대검을 차고 나오면서 당당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음부터 이런 곳으로 올 생각밖에 없었군.
"그래. 가자. 가."
나는 그런 앨리시아에게 등을 떠밀리며 마지못해 들어가는 척했지만, 사실은 조금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나도 딱딱한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보다는 차라리 이런 곳에서 웃고 떠들며 먹는 게 성미에 맞고, 애초에 앨리시아를 대접하기 위한 자리다. 앨리시아가 편한 곳으로 가는 게 당연하잖아?
"주인장! 여기 맥주 두 잔이랑 적당한 음식 좀 골라줘!"
"야. 나 술은…."
"안 마신다고?"
"…마시면 되잖아."
젠장. 웬만하면 술은 마시고 싶지 않은데.
아니. 일단 주량도 약한 편은 아니고, 주정도 심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취하면 위험할 것 같잖아? 이래 봬도 성자니까.
나도 내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각하고 있는 만큼, 이 세계에 오고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술은 잘 안 마시게 됐는데. 하필이면 앨리시아랑 마시게 될 줄이야.
앨리시아 이 녀석, 딱 봐도 주량이 상당할 것 같단 말이지. 전에 술 마시고 나한테 매달렸을 때도 방안에 굴러다니는 술병 수가 장난이 아니었고.
뭐, 적당히 맞춰주는 척하면서 조절하면 되려나.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술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조절되는 게 아니었다.
젠장. 우리 애들이랑 마실 때는 다들 적당히 잘 조절했었는데. 한 입만 마셔도 혼자 취하는 사라만 빼면.
"뭐해 새끼야! 마셔! 이 정도도 못 쫓아와!?"
"뭐!? 이 성자님을 무시하면 곤란하지! 술 더 가져와!"
감사 인사라는 명목은 시작부터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어느새 술자리는 주량 대결 자리가 되어 버렸고.
"새끼. 네가 그러니까 아직도 햇병아리라는 거야! 다른 고추 새끼들은 모였다 하면 같이 떠들고 마시던데, 너한테는 한 명도 가까이 안 오잖아!"
"무슨 소리를! 나도 평소에는 이런 데 오면 더러운 사내새끼들이랑 부대끼면서 잘 지내거든! 오늘 딴 놈들이 사양하고 있는 건…그래! 너 때문이잖아!"
"내가 뭐!? 뭘 봐 새끼들아!? 구경났어!?"
"크아하하! 쫄은 것 좀 봐!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평소 행실이 얼마나 난폭하면 사람들이 다가오지도 못하냐!?"
"으읏…그러면…크으으윽! 시끄러워! 저 새끼들이 나 때문에 못 다가와도, 네가 햇병아리를 벗어났다는 증거는 안 돼! 이 햇병아리 새끼!"
"하핫. 누가 누구한테 햇병아리라는 거야? 예전의 구원 님이 아니라 이 말씀이야. 너 계속 옛날 생각 못 잊고 까부는데, 이제 나보다 레벨도 낮은 것이 햇병아리는 무슨. 내가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건 말이지…."
"어쭈!? 해봐! 해봐 그럼 새끼야!"
술 취한 놈들이 으레 그렇듯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필터 없이 내뱉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취한 우리는 그런 자각이 전혀 없었다.
성자와 거대 클랜의 간부가 당장에라도 한판 붙을 분위기가 되자 주변에 있던 모험가들이 썰물처럼 뒤로 물러섰지만, 우리는 그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못할 것 같냐? 내 성검에 박히면 정신도 못 차리고 히익히익 울어댈 년이…."
"핫! 전에도 그러고 10초도 못 버티고 찍 싼 조루 새끼가."
"뭐!? 조루!?"
"아니면 어디 한 번 증명해 보던가 새끼야! 여관으로 따라와!"
내 멱살을 틀어잡은 앨리시아는 식탁 위에 적당히 돈을 던져놓더니 그대로 성큼성큼 술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져 있었던 사람처럼 이동을 시작했다.
차가운 바깥 공기를 들이켜면 조금은 정신을 차릴 법도 하건만, 나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앨리시아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가기만 했다.
"자, 어디 한 번 해봐 새끼야!"
내가 조금이나마 제정신을 차린 건, 침대에 메다 꽂히는 익숙한 감각을 경험했을 때였다.
사실 익숙한 감각이라고 할 정도로 많이 겪어본 일은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살면서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몇 번이나 더 있었나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정도로 희귀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메다 꽂히는 감촉이나 내 몸을 받쳐주는 질 나쁜 이불의 감촉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 잠깐. 잠깐 기다려."
알콜의 영향으로 위아래도 제대로 분간 못 할 정도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감싸 쥐면서, 나는 일단 무작정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뭐 새끼야? 이제 와서 무서워졌냐!?"
하지만 그런 내 몸을 짓누르는 존재가 있었으니, 어느샌가 갑옷을 다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된 앨리시아였다.
"핫. 새끼.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은 있나 보지!?"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앨리시아. 그건 생리 현상이라고.
남자라는 생물은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눈앞에서 새끈한 미녀가 벗으면 일단 서고 보는 슬픈 생물이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적인 생리 현상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잠깐만 기다리라고!"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그 사실만큼은 알아챈 나는 손을 뻗어 앨리시아를 밀치려고 했지만, 내 손에는 물컹하고 탄력 있는 감촉만이 전해져올 뿐이었다.
젠장. 이거 아무래도 진짜로 큰일 날 것 같은데.
톡.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내 눈꺼풀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부딪히는 감촉이 느껴졌다.
"크흑…흐윽…."
갑자기 떨어진 물방울에 시야가 흐릿해진 눈을 비빈 다음 겨우 얼굴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한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앨리시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던 거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입술을 꽉 깨물며 버티고 있었지만, 전혀 소용없었는지 그 눈에서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나와 턱을 타고 내 얼굴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너…."
뭐라도 말해야 한다. 그런 사명감과도 같은 감정에 떠밀려 무작정 입을 열어봤지만, 뭐라고 말을 걸면 좋을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술에 취해도…취해도 난 안 되는 거야?"
그리고 그런 내게, 앨리시아는 격정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부딪쳐왔다.
"내가 난폭해서!? 여자답지 않아서!? 귀엽지 않아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술에서 확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몸은 알콜을 이겨내지 못하고 제어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정신만큼은 어느 정도 멀쩡해진 기분이었다.
난폭해서라니…그러고 보니 아까 취해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 녀석 설마, 아까부터 취하지 않았던 건가? 취하지 않은 채로, 내가 취해서 떠든 말을 전부 듣고 있었던 건가?
"앨리시아. 그런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난 이미 여자가…."
"거짓말하지 마! 다른 여자들은 잘만 만나는 주제에! 내가, 내가 제일 먼저 만났는데! 네 주위에 있는 여자들보다도! 미리엘보다도!"
"뭐, 미, 미리엘이 갑자기 왜…."
"내가 모를 줄 알아!?"
설마 이 녀석, 아까 미리엘이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 있었던 것도 눈치챘던 거야!? 아니. 하지만 오해야. 미리엘은 말 그대로 거기에 있기만 했지, 딱히 이상한 짓은 아무것도….
그런 변명이 순식간에 떠올랐지만, 제 상태가 아닌 머리로도 그게 얼마나 구차한 변명인지는 알고 있었다.
오늘만 우연히 그런 일을 안 했을 뿐, 결국 지속적으로 그런 짓을 한 것은 맞으니까.
물론 미리엘에게 그런 짓을 한 이유는 미리엘이 위험하기 때문에, 조교 하기 위해서 그런 거지만, 그게 앨리시아에게 변명이 되지는 않겠지.
"내가, 난 그렇게 여자로서…너한테…."
미리엘의 질투는 눈치챘으면서, 앨리시아의 질투는 눈치채지 못하다니.
자존감이 완전히 박살 나서 열등감으로 점철된 감정을 쏟아내는 앨리시아를 보면서, 나는 그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너 뭐하냐? 증명해 보라면서? 아니면 뭐야? 내 거대한 성검을 보니까 쫄았냐?"
이렇게 하는 게 맞는 판단인지는, 솔직히 말해서 모르겠다. 조금은 술이 깼다지만, 여전히 난 취해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저런 얼굴의 앨리시아를 거부하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