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89화 (1,056/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89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미리엘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던 나는 교차 검증을 해보기로 했다.

    뭐, 그 이후로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미 말을 맞춰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그 녀석은 거짓말 같은 거 잘 못 할 성격이기도 하고.

    "미리엘. 앨리시아를 불러줘."

    "…응?"

    내 부탁이 예상외였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오늘 처음으로 미리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짝 사라졌다.

    "어째서지?"

    정말 한순간이었고 이내 다시 미소가 돌아오기는 했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이 녀석, 설마 진짜로 뭔가 숨기는 게 더 있었던 건가?

    사실 앨리시아를 부르면서도 그렇게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정말로 앨리시아가 뭔가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내가 중2병을 부탁한 건 네가 아니라 앨리시아니까. 본인한테도 직접 얘기를 들어봐야지. 내가 직접 찾아가는 것보다 앨리시아를 여기로 부르는 게 더 빠르잖아?"

    "그렇군. 성자님은 철저하시군."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를 완전히 되찾은 미리엘은, 마치 놀리는 것처럼 그렇게 말한 후 상체를 위로 들이밀었다.

    하지만 책상 아래에서, 그것도 내 다리 사이에서 상체를 빼려면 당연히 그 몸이 내 몸에 밀착할 수밖에 없었고.

    "성자님. 정말로 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내 다리 사이에 자신의 가슴을 밀어붙인 자세가 된 미리엘은, 자신의 가슴 사이에서 바지 너머로도 단단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물건을 힐끗 눈짓하며 더욱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리현상이다. 신경 쓰지 마."

    "그럴 수는 없지. 이곳의 생리현상을 처리하는 것이 내 역할이니까. 그렇게 각인시킨 건 성자님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가슴골로 손을 가져가 검지로 원을 그리는 미리엘. 내 명령을 지키고 있다는 어필을 하고 싶은 건지 직접 만지지는 않았지만, 나한테만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도록 자기 가슴골 위로 원을 그리는 게 쓸데없이 더 야해 보였다.

    아니. 확실히 조교는 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지 않냐? 그곳의 생리현상 처리라니. 그렇게 말하면 너 자신을 육변…아, 아무튼! 난 그런 표현까지는 안 쓴 거 같은데!?

    "됐으니까 앨리시아나 불러. 너 그렇게 시간 끌면 끌수록 더 수상해 보이는 거 알지?"

    "소녀의 진심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다니. 성자님은 잔인하군."

    소녀는 누가 소녀라는 거야. 네가 아무리 액면가보다 어리다고 해도, 소녀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잖아?

    전혀 상처받지 않은 표정으로 상처받은 것 같은 말을 중얼거린 다음, 미리엘은 그 가슴을 더욱 내 다리 사이에 눌러왔다.

    젠장. 나도 모르게 물건이 반응해 버리잖아.

    "그러니까…."

    바지 너머로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탄력 있는 감촉에, 내 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의 속삭임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뭐해!? 당하고만 있을 거야!? 이 건방진 년을 빨리 혼쭐내주자고!

    안 돼요. 여기 오신 목적을 생각하세요. 그럴 필요 없으시잖아요?

    "나 바쁘니까 빨리해라."

    이긴 건 당연히 천사님이었다.

    이 녀석이랑 섹스 한 번 하는 것 자체는 사실 그렇게까지 저항할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게 아무래도 수상해서 말이지. 분명 앨리시아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이 야릇한 분위기를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바꾸기 위해 미리엘의 볼을 가볍게 꼬집고 흔들….

    "으흣!"

    으윽! 마, 맞다. 이 녀석, 그런 몸이었지. 이 정도 통증에도 느끼는 거냐.

    갑작스러운 쾌감에는 대비를 안 하고 있었는지, 미리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떨었다.

    내 다리 사이에서 가슴을 고간에 밀어붙이고 있는 자세에서 고개를 숙이니 당연히 그 얼굴은 위험한 곳에 닿게 됐고, 그 상태에서 몸까지 떠니까 물건에 느껴지는 가슴과 입술의 감촉이 바지 너머로도…제, 젠장. 천사님! 도와주세요!

    "하앗 하앗, 정말로…성자님은 잔인하시군."

    천사님이 내 간절한 기도를 들어준 건지, 아니면 그냥 볼을 꼬집는 정도로는 쾌감의 크기도 약했기 때문인지, 미리엘은 다시 곧장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자세는 전혀 바꾸지 않은 채 손만 책상 위로 뻗더니, 위에 있던 램프를 더듬더듬 만졌다.

    "앨리시아를 불러줘."

    비서실로 이어지는 통신 장치 같은 건가? 어쩐지 내가 정문에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찾아올 때도 항상 먼저 연락받은 것처럼 행동하더라니. 거대 클랜답게 별게 다 있군.

    뭐, 아무튼 이걸로 겨우 이 녀석이랑 말장난하는 것도 끝이야. 진짜 얘랑 대화하고 있으면 피곤하다니까. 나한테 조교 당한 주제에.

    "그러면 너도 이제 그만 나와."

    곧 앨리시아가 찾아올 거다. 미리엘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은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그 몸을 책상 아래에서 꺼내려고 했지만.

    "미안하군. 성자님."

    미리엘은 시원스럽게 미소 지으며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야. 잠깐만.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앨리시아 앞에서 나한테 조교 당한 모습이라도 보여주려고? 그래도 클랜장으로서 그런 모습은 남들한테 보여주기 싫은 거 아니었어?

    "움직일 수 없어. 아까 허리가 빠졌거든."

    무슨 소리야? 아까? 설마 아까 그 볼 살짝 꼬집은 그거? 그러니까 너 지금, 갑작스러운 쾌감으로 허리가 빠져서 못 움직이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그런 녀석이 뭘 그렇게 시원한 미소를 지으면서 태연하게 얘기하고 있는 거야!? 넌 항상 그런 식이니까 수상하다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차분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그런 난 일어날 테니까 네가 의자에…."

    "미리엘! 불렀어!?"

    미리엘을 일으켜 의자에 앉히려고 했던 나였지만, 그보다 먼저 노크도 없이 방에 들이닥친 사람이 있었다.

    "…안녕. 앨리시아. 빨리도 왔네."

    재빨리 미리엘의 머리를 눌러서 책상 아래로 집어넣은 나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앨리시아를 맞이해 줬다.

    나도 레벨이 레벨이니만큼 반사신경은 탁월하다고 자부하고 있다. 아마 미리엘의 모습은 보지 못했겠지.

    "아? 네가 왜 그 자리에…미리엘은?"

    역시나. 다행이다. 이대로 빨리 할 일 끝마치고 이 지긋지긋한 아라크네 클랜 하우스를 벗어나든가 해야지.

    그러니까 미리엘. 제발 그동안 밑에서 이상한 짓 하지 마라.

    "널 부른 건 나야.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지."

    의자를 앞으로 더욱 바짝 끌어당기면서, 나는 한 손을 미리엘의 머리에 얹은 자세 그대로 말을 이었다. 미리엘이 돌발 행동을 일으켜도 언제든 막을 수 있게 말이다.

    "…묻고 싶은 거?"

    "그래. 전에 내가 중2병을 우리 저택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잖아?"

    "중2병? 줄리안?"

    "그래. 걔."

    "…걔가 왜? 제대로 데려다줬잖아?"

    정직하고 신의가 있는 앨리시아다. 이 얘기를 꺼내면 뭔가 반응을 보일 줄 알았지.

    아니나 다를까, 중2병의 얘기가 나오자 앨리시아는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표정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진짜 몰라서 물어?"

    "…밤이 너무 늦어서 아침 일찍 데려다준 것뿐이야. 너같이 뻔뻔한 놈이랑 달리 우리는 대마법사님의 저택에 함부로 찾아가는 게 불편하다고."

    뻔히 보이는 거짓말 하지 마. 너 전에 내가 쓰러졌을 때는 잘도 찾아왔잖아. 같은 얘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내 무덤만 파는 꼴이니까.

    그나저나 역시 내 생각대로 말을 맞춰둔 모양이군. 미리엘이 제일 처음 했던 변명이랑 똑같은 변명을 하다니.

    게다가 마치 자기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 같은 말투다. 의리가 두터운 앨리시아니, 분명 미리엘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있는 거겠지.

    진짜로 앨리시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을 가능성은…미안하지만 없다고 본다. 아니. 바보 취급하는 게 아니라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쟤가 그런 성격은 아니잖아?

    "그래? 그럼 그사이에 별일은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말해."

    내가 계속 떠보는 것같이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앨리시아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여간 시원시원하다니까. 뭐, 저런 게 앨리시아의 좋은 점이지만 말이야.

    "아니. 미리엘한테는 조금 다른 얘기를 들어서 말이야. 너한테도 확인해 보려고."

    "다 들어놓고 뭘 더 확인하겠다는 거야. 미리엘의 말은 전부 사실이야. 내가 더 해줄 얘기는 없어. 너한테 안 좋은 얘기도 없었잖아?"

    앨리시아가 그렇게 내뱉은 순간, 미리엘의 몸이 한순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흐음."

    앨리시아한테 들키지 않도록 고민하는 척 은근슬쩍 고개를 숙여 아래쪽을 확인하자, 미리엘의 표정이 드물게도 흐려져 있었다. 저 표정은 뭐지? 죄책감?

    "나한테 안 좋을 일은 전혀 안 했다는 거군."

    "당연하잖아. 날 못 믿는 거냐!?"

    책임감도 출중한 앨리시아니, 미리엘이 중2병을 구슬리는 동안 앨리시아도 곁에서 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도 저렇게 자신만만하다는 건, 진짜로 날 배신하는 짓은 안 했다는 거겠지.

    그런데도 그랬다는 건…그리고 아까 그걸 생각해 보면…이거 사건의 전모가 점점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니. 믿어. 믿으니까 그날도 널 콕 집어서 부탁한 거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다시 한번 아래에 있던 미리엘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역시나. 아무래도 내 예상이 맞는 모양이군.

    "윽!? 나,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마 새끼야!"

    앨리시아는 전혀 눈치 못 챈 모양이지만.

    이 녀석은 가끔 야생의 감 같은 걸 발동시키는 주제에, 이런 건 또 둔하단 말이야. 아니. 둔한 게 아니라 사람을 너무 믿는 건가.

    "뭐, 아무튼 얘기는 잘 알겠어. 조금 멋대로 군 점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내 부탁을 제대로 들어줬다는 거군."

    "그, 그래! 그런데 이 햇병아리 새끼가 누굴 추궁하고 있는 거야!? 감사 인사는 못 할망정!"

    "감사라. 그래. 그러고 보니 식사 대접하기로 했었지? 지금 시간 돼?"

    움찔. 다시 한번 미리엘이 아래에서 반응을 보였다.

    너무 튀어 오르지 마라. 그러다가 머리를 책상에 박기라도 하면 들키잖아.

    "무, 뭐…!?"

    "그러니까 지금부터 식사하러 가자고. 마침 점심 먹을 시간이잖아. 시간 돼?"

    "시, 시간은…자, 잠깐만 기다려! 금방 다시 올 테니까!"

    방에 걸린 시계를 힐끔힐끔 보던 앨리시아는 황급히 정리할 일이라도 있는지 우당탕탕 방을 나섰다.

    "여기까지 다시 올 필요 없어.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저 모습을 보아하니 아마 없는 시간도 만들어낼 거다.

    앨리시아가 시간을 낼 거라고 확신한 나는, 앨리시아의 등 뒤로 그렇게 말해 줬다.

    그리고 앨리시아가 나간 후에 의자를 뒤로 빼니.

    "성자님. 앨리시아와 식사 약속도 하고 있었군. 이거 질투 나는걸."

    겨우 책상 아래에서 미리엘이 기어 나왔다.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는 여전했지만, 그 미소가 숨기고 있는 감정을 나는 드디어 읽어낼 수 있었다.

    "알아. 그러라고 말한 거니까."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나 가지고 놀다니. 성자님은 정말 나쁜 남자군."

    "벌이야. 아무리 질투 나도 그렇지. 자기 클랜원을, 아니. 친구를 괴롭히면 되겠어?"

    "……!"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다시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시원스럽게 자기 죄를 인정했다.

    "역시 성자님은 못 당하겠군."

    그래. 미리엘이 중2병을 아침까지 보내지 않은 또 다른 이유. 그건 바로 내가 앨리시아를 콕 집어서 부탁했다는 사실에 질투했기 때문이다.

    내 부탁을 완벽히 수행해내지 못하면, 그것만으로도 앨리시아에 대한 내 신뢰가 조금은 떨어질 테니까.

    뭐, 오래 잡아두지도 못하고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보낸 걸 보면, 아무리 질투심에 눈이 먼 미리엘이라도 친구에 대한 내 신뢰도를 왕창 깎아 먹는 짓은 할 수 없었던 모양이지만.

    아까도 앨리시아가 자기를 두둔해주자 미안한 표정을 지었었고.

    하지만 아무리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보내줬어도, 그런 이유로 미리엘이 중2병을 잡아둔 거라면 앨리시아는 어째서 눈치를 못 챘냐고? 미리엘의 질투심까지는 눈치 못 채더라도, 뭔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은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대답은 간단하다. 미리엘이 중2병에게 정보를 캐내어서,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리엘이 중2병을 잡아두려고 했을 그 당시에는 앨리시아도 의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내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니, 단순한 앨리시아는 곧장 그 의심을 접어 버렸겠지.

    그러니 아까도 내게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에 조금 찔린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안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던 거다.

    "그럼 나한테 당해낼 생각이었어?"

    "하핫. 그것도 그렇군."

    이번에도 시원스럽게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면서, 미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까 벌이야. 앨리시아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혼자 질투나 하면서 있어. 너한테는 효과적인 벌이지?"

    "성자님은 귀축이군."

    야. 자기감정을 들키고 인정하면서까지 시원스런 미소 짓지 말아 줄래.

    이렇게 질투까지 하는 걸 보면, 조교 때문이든 다른 이유 때문이든 분명 나한테 감정이 있는 건 맞는데 말이야. 그런데 왜 이 녀석은 맨날 이렇게 수상해 보이고 싶어서 안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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