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88화 (1,055/1,205)

1088화

아, 자기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구나.

하는 수 없지. 여기선 이 오빠가 멋지게 네 위기를 구해주는 수밖에.

"헤헤헷. 나랑 하는 게 그렇게 좋았어? 하루도 제대로 못 버틴다니, 어떤 느낌이햐악! 아파! 아파 사라야! 타임! 잠깐만!"

"절. 대. 안 봐줘!"

"끄아아악!"

"흥. 이런 변태는 내버려 두고 가죠!"

"네? 저, 저도…? 아…."

잔인하게도 아까 자기가 손바닥으로 때린 부분을 꼬집어서 더욱 극심한 고통을 준 사라는 내가 바닥에서 움찔움찔 떠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레이의 등을 밀며 함께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자네 괜찮은가?"

"안 괜찮아. 죽을 것 같아. 당장 힐링 섹스가 필요…."

"괜찮구먼."

그러니까 안 괜찮대도. 아까 사라도 그렇고 왜 내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어줄까. 디아나야. 난 매우 슬프다.

뭐, 장난은 이쯤 하기로 할까. 실은 나도 엄살을 피운 거지,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거든.

"사라가 못 보던 사이에 앙탈이 더 심해진 것 같아."

"쑥스러워서 저러는 것일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말하자, 디아나가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더니.

"아니거든요!"

사라가 고개만 들이밀고 그렇게 외친 후 다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사라야. 굳이 다시 문 열고 들어와서까지 부정하고 가야 했니?

"뭐, 좋아서 그러는 건 알지만 말이야."

혹시 또다시 사라가 돌아올까 싶었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 양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것일세."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대로 레이 양은 이 몸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할 일을 하라는 얘기일세."

"할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솔직히 말하자면,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바로 이해가 됐다.

하지만 모처럼 이렇게 돌아왔는데 처음부터 다른 일 때문에 혼자 행동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시치미를 뗀 거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연기가 우리 대마법사님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디아나도 아까 내가 반문하는 걸 들었으니까.

"이 몸들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말게. 자네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디아나…."

"괜찮네. 어차피 레이 양과는 한 번 자네 없는 곳에서 대화할 필요가 있었네."

"그건 또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후흥. 여자들만의 비밀이라는 것일세. 엿들으러 오면 안 되네?"

"그거야 알지만."

"음. 착하네. 착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덕에 이제는 자유롭게 내 머리를 만질 수 있는 디아나는, 귀엽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면 이 몸도 가보겠네. 방에서 나갈 때는 밖에 있는 메이드를 한 명 부르게. 아무리 저자가 손발이 묶여 꼼짝도 못 한다지만, 거동을 감시할 사람이 한 명은 필요하니 말일세."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내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더니, 자기도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디아나도 그렇고 아까 사라도 그렇고,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계산하고 행동한 건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진짜 난 아마 평생 쟤들은 못 당할 거야.

그런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나는 디아나가 말한 대로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야. 중2병. 이제 슬슬 그만 기절한 척 그만두고 일어나지?"

내 목소리에 중2병은 움찔하고 반응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기절한 척을 고수했다.

"야. 일어나 있는 거 다 알거든? 야."

"비겁한 놈에게 할 말은 없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쪼그려 앉고 놈의 뒤통수를 콕콕 찌르자, 놈은 겨우 고개를 들고 그렇게 내뱉은 후 다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할 말이 없기는. 지금 말했잖아.

내 성자 스킬의 위력에 놀라서 쫄은 건 줄 알았는데, 그냥 정정당당하게 안 싸워준다고 삐진 거였냐.

"그럼 수갑 풀고 다시 싸워주면 말할 거야?"

"다시 싸워주겠다는 건가!? 처음부터 난 믿고 있었어! 전쟁신님에게 힘을 받은 용사와, 걸레년의 힘을 받은 너! 우리는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것을! 비록 서로 믿고 싸우는 것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상대방과 진심으로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은 너도 나와 같을 것…!"

"아니. 싸워주겠다고는 안 했는데."

고개를 들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순식간에 자기 망상을 토해내던 중2병은, 내 짧은 대답에 다시 빛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이런 식으로 내 진심 농락하다니…더러운 걸레년의 종자다운 더러운 수법이야…."

야. 너무 눈에 띄게 실망하니까 괜히 내가 다 미안해지잖아.

뭐, 그래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런 걸 하나하나 전부 받아주면 끝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런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중2병은 특히나 더.

"애초에 다시 싸운다고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하다! 그 비겁한 술수만 쓰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전쟁신님에게 힘을 받은 내가 질 리가…."

"비겁한 술수라는 건, 내 스킬을 말하는 거지? 그건 내가 여신님께 받은 힘이야. 넌 마신한테 힘을 받은 모양인데, 자기는 그 힘을 쓰면서 내가 여신님께 받은 힘은 비겁하니까 쓰지 말라고? 그게 정정당당한 거야? 그냥 정정당당하게 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게 하고 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룰로 싸우자고 하지?"

"크, 크으으으!"

할 말 없으니까 괜히 울먹이지 마 이것아.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난 그냥 정당한 반론을 했을 뿐이라고.

이 녀석, 처음 봤을 때는 분명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뭐, 중2병이니까 그것도 전부 컨셉인 건가.

"제, 제, 제법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어디 서로 전력을 다해서 붙어보자!"

"참고로 말하자면, 나 너한테 스킬 쓸 때 일부러 위력 낮춰서 쓴 거다. 내가 전력을 다하면 너 한 방에 죽어."

"훗. 허풍 칠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내게 그흥기이이잇!"

직접 겪지 않으면 믿어줄 눈치가 아니어서, 나는 풀파워 성자의 손길을 발동하고 중2병의 이마를 가볍게 콕 찍어줬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중2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그래도 여자라는 걸 알고 나니까 보기에 좀 낫네. 남자인 줄 알았을 때는 진짜 보기 괴로웠는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언제까지 기절해 있을 셈이야? 모처럼 우리 애들이 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할 생각은 없다고.

"응흐응으읏!"

내가 다시 한번 그 이마를 손끝으로 콕 찍자, 중2병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흐아아…하아…대, 대체에 이게에…."

"봤지? 손가락 한 방에 이 정돈데, 내가 진심으로 널 만져대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 그만뎌어어!"

"그래도 정 나랑 싸우고 싶으면…."

"흐익! 그, 그먀안…!"

계집애처럼 울부짖기는. 아니. 뭐, 계집애지만.

바닥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해보지만, 아까의 쾌감으로 허리가 빠졌는지 상반신을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중2병. 그런 중2병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나는 그 몸을 똑바로 세워줬다.

손발이 묶여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하면 설 수는 있겠지.

"이대로 10초만 서 있어 봐. 그러면 풀어주고 원하는 대로 제대로 싸워줄게."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자, 아니나 다를까 중2병은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그야 그렇겠지. 허리가 빠졌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나는 중2병이 처음부터 서 있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야. 너 설마 무서워서 일부러 넘어졌냐?"

"나, 나르 모요카지 마라! 이, 이거슨…!"

"이것은 뭐?"

"…비거판 놈가 할 마른 업따…."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와 버린 건가.

아니. 그래도 조금 전까지의 대화가 완전히 무의미했던 건 아니다. 이걸로 중2병의 전투 의지가 완전히 꺾였으니까.

이걸로 편안하게 원하는 정보를 캐내야지.

"뭐, 좋아. 지금까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잔뜩 들어줬으니, 이제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할 차례야. 내가 널 아라크네 클랜에게 맡긴 게 밤. 하지만 네가 이 저택으로 옮겨진 건 아침.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비거판 놈가 할 마른…."

"그 말대로. 난 비겁한 놈이라서 말이야.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라면 아까 그 스킬을 계속 먹여주겠어. 기분 좋아 죽을 것 같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몸에 똑똑히 새겨주지."

"으크흣…!"

이대로 입을 다무는 건가. 허리를 떠는 걸 보니, 내 성자의 손길이 얼마나 위험한 스킬인지는 충분히 인지한 모양인데 말이야.

혹시 자기 같은 중요 인물을 그렇게 쉽게 죽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후우. 얘가 날 너무 우습게 보네.

콕. 콕. 콕. 콕. 콕. 콕.

"응흐으읏! 하으응! 흐이잇! 흥기잇!"

내가 그 이마를 사정없이 찔러주자, 중2병은 위험한 사람처럼 온몸을 떨면서 연속 절정을 경험하게 됐다.

진짜로 죽일 생각은 없지만, 이 정도 위협은 해줘야지. 너무 쉽게 물러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대답은?"

계속되는 쾌감으로 기절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입가에 타액까지 질질 흘리면서 축 늘어진 중2병을 내려다보며, 나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너무 친근하게 대해 준 게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사라를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사라처럼 차가운 척을 해보자.

"하아, 하아, 비, 비거판 놈가아…하아…할 마른…업따아…."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중2병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젠장. 이래선 혀가 풀려서 말투가 조금 귀여워진 것 말고는 처음이란 변한 게 전혀 없잖아. 성자의 손길을 연속으로 맞고도 이렇게 버티다니. 괜히 성자 스킬의 효과를 몸에 담은 채로 내가 있는 곳까지 쫓아온 게 아니라는 건가.

이렇게 되면 이제 이 녀석의 입을 열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래. 미리엘한테 했던 그 방법 말이다.

"…하아. 그래. 나중에 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포기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얘한테 미리엘한테 했던 그 방법을 똑같이 다시 쓰느니, 차라리 그냥 미리엘 본인한테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게 더 편하고 빠르잖아?

사실 이 중2병한테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 말고도 물어볼 것이 있어서 물고 늘어져 봤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건 나중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디아나의 말대로 밖에 있던 메이드에게 중2병을 감시하게 하고, 나는 저택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우리 애들한테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바넷사에게 들어보니 사라와 레이 둘이서 레이를 데리고 나갔다는 모양이다.

이 세계에 익숙해지게 하려고 거리 구경이라도 시켜주려는 걸까?

아라크네 클랜은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이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어서, 나는 곧장 미리엘의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녕. 성자님. 기다리고 있었어."

노크도 없이 바로 들어갔지만, 미리엘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내 다리 사이에.

"멈춰."

가져가서 입으로 내 바지를 벗기려고 했지만, 그전에 내가 그 머리를 잡아서 멈춰 세웠다.

이런 식으로 조교 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매번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러니 또 불편하네. 조교 효과가 풀리지 않았나 나중에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이렇게 조교 한 건데,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어.

"오늘은 됐어."

"성자님을 보는 것만으로 달아오르는 몸으로 만들어놓고 애태우기 플레이라니. 성자님은 너무 짓궂군."

시원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마라 이것아. 그러니까 네 말에 신용이 안 생기는 거야. 허벅지를 살짝 비빈 걸 보면, 몸이 달아올랐다는 건 분명 사실일 텐데도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어이없다는 심경을 내비친 다음, 나는 아까 미리엘이 앉아 있던 집무용 책상 앞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어째선지 미리엘이 책상 아래로 들어가더니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됐다고 했을 텐데?"

"하핫. 알고 있어. 성자님의 마음이 언제 바뀌어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뿐이야."

이 녀석, 나한테 조교 돼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즐기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이런 걸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녀석한테 조교 효과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곧 밝혀질 테니까.

"오늘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그래? 무슨 일이야?"

"몰라서 그래?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아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었지?"

내가 흘려들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 녀석은 분명 말했다. 마치 내가 올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하핫. 난 여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성자님을 기다리고 있어."

하여간 말은 잘해요.

특유의 무협지 주인공 같은 시원스러운 미소가, 지금은 왠지 능글맞은 미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묻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

"물론 짐작 가는 일은 있어. 하지만 성자님이 묻고 싶은 것이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인지는 알 수 없잖아?"

하지만 언제까지 그 미소를 유지할 수 있나 보자고.

"중2병. 바로 안 데려다줬지?"

"맞아."

허를 찌를 생각이었지만, 미리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로 빈틈을 보일 녀석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유는?"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 대마법사님들을 이런 일로 감히 깨울 수는 없어서. 아침까지 기다린 거야. 라고 말하면, 믿어주겠어?"

"아니."

"하핫. 역시 성자님은 못 당하겠군. 맞아. 실은 다른 목적이 있었어."

"말해."

"줄리안을 구슬렸어."

줄리안. 중2병의 이름이다. 나는 애널라이즈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이름을 이 녀석이 알고 있다는 건, 역시 본인에게 직접 들었다는 뜻이겠지.

"구슬려?"

"그래. 비스가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 줄리안은 자신을 그렇게 자칭했어. 하지만 줄리안은 진심으로 자기가 남자에 용사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

구슬린 방법을 물어볼 셈이었는데, 미리엘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엉뚱한 대답이 훨씬 내 구미를 당기는 대답이어서, 나는 미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뒤가 맞잖아?

아까 중2병이랑 얘기할 때도 묘하게 신경 쓰였거든. 마치 자기가 용사라도 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하는 게.

애널라이즈에 표시된 녀석의 직업에는 용사의 용자도 안 보였는데도 말이야.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줄리안은 용사를 직업이 아니라 선택받은 핏줄이 대대로 이어받는 호칭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그걸 이용해 줬지. 실은 나도 용사라고. 할머니의 이름 꺼내며 아버지께 배운 검기를 보여주니 바로 믿더군. 하핫. 순진한 여자야."

…아니. 네가 영악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뭐, 중2병이 순진하다는 건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그래서? 어떤 식으로 구슬렸는데?"

"나도 줄리안과 마찬가지로 성자에게 잡혀 온 거라고 했지. 그 이후로 성자에게 복종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도 했고,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도 했어."

"복종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핫. 물론 거짓말이야. 내가 성자님께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넌 의심스러워도 너무 의심스럽거든.

뭐, 지금은 자세히 파고들지 않고 넘어가 주겠지만. 우선은 얘가 뭐라고 하는지 얘기를 듣는 게 먼저지.

"주제넘을지 모르겠지만, 성자님으로서는 줄리안에게 정보를 얻는 게 힘들어 보였거든."

"그래서 네가 대신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연기까지 했다는 거냐?"

"그래. 덤으로 성자 밑에는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많이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저항하려 하지 말라고도 충고해 줬지."

아니. 야. 너 지금 칭찬해달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말이지, 걔 나한테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엄청 졸랐거든. 네가 해준 충고는 전혀 안 통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녀석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앞뒤가 맞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날 위해서 일해 준 거면, 어째서 바로 우리 애들한테 말해주지 않았지?"

그래. 이게 문제란 말이지. 그렇게 밤사이에 고생해서 정보를 알아냈으면, 바로 우리 애들한테 말해 줬으면 됐잖아?

그러면 우리 애들이 걔한테 정보를 캐내 보려고 고생할 일도 없었고, 내가 이 녀석을 의심해서 이렇게 찾아올 일도…잠깐만.

"성자님은 왜 그랬다고 생각해?"

"…내가 찾아오기를 바란 거냐."

"하핫. 역시 성자님은 여심을 잘 아는군."

여전히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미리엘은 은근슬쩍 내 허벅지 안쪽에 자기 뺨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까 네 미소는 너무 수상해서 말이 앞뒤가 다 맞아도 의심이 생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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