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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87화 (1,054/1,205)
  • 1087화

    내 한 마디에 바로 차가운 가면이 벗겨지고 말았다.

    생긴 것만 차갑지 바넷사처럼 무표정 유지도 잘 못 하면서 컨셉잡기는.

    "오랜만에 봤는데 오빠한테 인사도 안 할 거야?"

    "…다른 여자 뺨에 뽀뽀하면서 온 주제에."

    "에이. 그래도 아침에 사라 너 안 온 거 보고 바로 이렇게 찾아왔잖아. 좀 봐줘."

    "그 덩치에 애교부려봤자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 바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라는 은근슬쩍 내 쪽으로 다가와 살포시 품에 안겼다.

    나는 그런 사라의 턱을 받쳐 들고 그 입술에 살짝 입술을 얹었다가 뗀 다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왔어."

    "응. 다친 데는…."

    "요, 용사를…구슬리고 있어…."

    뭐, 그 달콤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야. 레이. 너희 세계에서 용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알겠는데, 굳이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잖아!

    "누, 누, 누가 구슬려진다는 거죠!?"

    "네, 네!? 그, 그게…."

    레이 너 진짜 나한테 빚 하나 크게 진 줄 알아라.

    도움을 청하는 레이의 눈빛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사라의 칼끝이 내 쪽을 향하도록 몸을 던졌다.

    "누구긴 누구야 너지."

    "무, 뭐!?"

    "왜? 이 오빠한테 구슬려지는 게 싫어? 못 보던 사이에 부끄럼이 많아…크허억!"

    보, 복부에 주먹이….

    "어…? 꺄악!? 괘, 괜찮아!? 나도 모르게 그만 저 사람한테 하던 대로…!"

    중2병…넌 대체 홀로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냐. 어쩐지 묘하게 사라 눈치를 본다 싶더니….

    "…안 괜찮아. 죽을 것 같아."

    "하아…다행이다. 정말 미안해."

    "안 괜찮다니까!"

    "미안해 오빠. 응?"

    야. 이럴 때만 오빠라고 하는 건 치사하지 않냐?

    젠장.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괜히 더 예뻐 보이니까 화낼 생각조차 안 들잖아.

    "자기도 모르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 사라 네가 중2병 감시를 전담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래도 처음에 심하게 반항할 때는 내가 제압했단 말이야."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사라는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심했어?"

    "당연하지. 성자 스킬은 왜 걸어놓은 거야? 그것 때문에 저 사람은 날 덮치려고 하고, 나도 저 사람이 남자인 줄 알았으니까 반쯤 죽…아무튼 아침부터 최악이었어."

    야. 너 지금 반쯤 죽였다고 말하려다가 말았지? 무서워 이것아.

    "미안. 미안. 제법 강한 놈이니까, 그런 식으로 해놓으면 제압하기 쉬울 것 같아서 그랬어. 아침부터 네 기분을 나쁘게 할 생각은…."

    잠깐만. 아침부터?

    "왜 그래?"

    갑자기 말을 멈춘 날 보고, 사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앨리시아가 저 중2병을 데려온 게, 아침이라고?"

    분명 내가 저 녀석을 맡긴 건…밤이었지?

    내 기억이 틀렸을 리가 없다. 아직 시간이 밤일 때 다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서둘렀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아라크네가 중2병을 맡고 있었던 밤부터 아침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답은 중2병이 전부 알고 있을 테지만, 이 녀석한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이 녀석도 실은 여자라는 모양이니, 내가 제대로 실력 발휘만 하면 못 들을 것도 없기는 하지만, 이런 때에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잖아?

    "야. 일어나 봐."

    "으흐읏…."

    그래도 일단 물어보기라도 하기 위해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는 중2병을 툭툭 건드려서 깨워봤지만, 놈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래선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겠군.

    "구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상당히 찝찝한 기분이기는 했지만, 나는 애써 그 기분을 억눌렀다.

    그래. 고작 밤부터 아침이야. 그 사이에 그놈들이 이 중2병을 데리고 뭘 할 수 있었겠어?

    사라한테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입을 안 열었다는데, 아라크네 클랜한테는 술술 입을 열어서 협력할 리도 없고 말이야.

    지금은 그런 것보다, 내 여자가 더 중요했다.

    "그보다 사라. 이쪽은 레이야. 디아나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지? 레이. 이쪽은…."

    "본처인 사라에요."

    내가 설명할 것도 없이, 사라는 자기가 먼저 레이아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평범한 반응이군. 손을 내밀면서 내뱉은 말은 별로 평범하지 않지만 말이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사라도 자신이 레이보다 갑의 위치에 있다는 걸 각인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거다.

    얘가 이래 봬도 그런 성격은 아니거든. 자기가 본처라고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입장인 디아나 레이아가 있을 때가 아니면 전혀 하지 않으니까.

    아마 자기 나름대로 장난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거겠지.

    나로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장난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누가 본처라는 겐가!?"

    "저요."

    "본처는 이 몸일세!"

    …디아나야. 이왕이면 조금 더 어른스러운 대응을 하자. 실제로 어른이니까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구원을 제일 처음 만난 건 저예요!"

    "흥! 누가 먼저 만났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세!"

    "섹스도 제일 먼저 했거든요!?"

    "후흥. 사라 양은 그걸 먼저 했다고 주장할 셈인가? 자네에게 한 것은 의료행위일세. 의. 료. 행. 위."

    "의료행위 아니었거든요!? 디아나가 봤어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네! 제대로 된 행위를 따지자면 저자가 눈을 뒤집고 덮쳐 들은 이 몸과 한 섹스야말로 진정한 첫…."

    "디아나도 스킬 연구 목적으로 쳐들어가서는 자기가 꼬신 거잖아요!"

    "꼬신 적 없네! 저자가 순수하게 이 몸의 미모를 보고…!"

    오랜만에 보는 사라와 디아나의 본처 자리다툼은 전에 없이 치열했다. 치열한 만큼 둘은 진심으로 다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는 내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니. 둘이 날 두고 다투는 게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냥 저걸 보니까 진짜로 얘들 곁으로 돌아온 실감이 들어서 말이야.

    하지만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볼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나 혼자뿐이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나랑 같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이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전혀 다른 감상을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야."

    "응?"

    "저기…여, 여기는 원래 이렇게 성적으로 개방되어서 섹…."

    아니. 속삭이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가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사라와 디아나가 우리가 정답게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포착하고 말았다.

    원래 저렇게 싸우면서도 나랑 레이아가 둘이서 좋은 분위기가 되면 바로 견제했으니까 말이야. 말다툼하면서 주변을 견제하는 게 습관화된 건지도 모른다.

    "거기! 치사한 짓 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런 전개가 익숙한 건 우리뿐이지, 레이한테도 이런 전개가 익숙한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사라가 가진 용사라는 위명에 기가 눌려 있던 레이는, 사라의 지적에 깜짝 놀라서 목소리를 드높이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섹스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 아, 아앗…!"

    "무…!"

    "뭣…!"

    자기 실수를 깨달은 레이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심한 정신적 타격을 입은 사라와 디아나는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무릎을 털썩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 한마디로 용사와 대마법사를 한 번에 물리치다니. 레이 이 녀석. 보기보다 제법이잖아? 과연 배틀마스터야.

    "디, 디아나…저, 저희는…."

    "이, 이 몸들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구원한테 물든 건가요!?"

    "저자에게 물든 것인가아!?"

    "그건 왜 내 탓으로 돌려 이것들아! 그냥 너희가 발랑 까진 거잖아!"

    심지어 이 녀석들, 하모니 했어! 아까까지 그렇게 둘이서 투닥투닥 싸우고 있었던 주제에! 진짜 얘들은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하여간 진짜. 애초에 치사한 짓은 또 무슨 치사한 짓을 했다고 그래. 레이 얘는 그런 거 할 성격도 못 된다고."

    뭐, 따지고 보면 우리 천사님도 그런 거 할 성격이 아니지만. 실제로도 치사한 짓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사라랑 디아나가 둘이 노니까 남은 우리끼리 얘기하다 보니 좋은 분위기가 된 거였고.

    "흥. 구원은 이상한 곳에서 둔한 면이 있으니 모르는 거야."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둔하기는 또 뭐가 둔하고. 맨날 너희랑 표정과 눈짓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건 기억 안 나니?

    "음. 어젯밤에 레이 양이 말하지 않았는가. 히이익! 잘못했어요! 다른 여자 따위 다 물리치고 혼자 독점하려는 생각 같은 거 안 했어요! 라고 말일세."

    …그거 지금 레이 흉내 낸 거냐? 용케도 그 긴 대사를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 그 좋은 머리를 쓸데없는 데에 쓰기는.

    디아나의 말은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고르기 힘들 정도로 태클 걸 곳이 많았지만, 나는 제일 먼저 여기부터 태클 걸기로 했다.

    "야. 사라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흐으으응…."

    느, 늦었다. 사라가 엄청 차가운 눈으로 레이를…아니. 저건 차가운 눈이 아니잖아? 저건 대체 무슨 표정이야?

    "레이 씨라고 했죠?"

    "네, 네엣!?"

    레이 이 녀석은 이 녀석 대로 엄청 기죽었네. 괜찮아. 사라도 딱히 잡아먹으려는 건 아닐 거야. 아마도.

    "당신 구원하고…큭…!"

    왜, 왜? 왜 또 갑자기 날 노려봐? 난 또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알 수 없는 사라의 행동에 잠깐 위축…아니! 위축되지는 않았어! 그냥 영문을 알 수 없어 궁금증이 더해졌을 뿐이지!

    아무튼 그랬던 나지만, 이어지는 사라의 다음 행동과 말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가, 같이 안 자봤어요?"

    살짝 뺨을 붉히면서 또다시 날 노려보는 사라.

    그런가. 아까 레이가 한 말 신경 쓰고 있는 거구나. 그런 말을 들어 놓고 또 섹스 얘기를 하게 됐으니까.

    그런데 사라야. 그게 날 노려볼 일이니?

    "네? 자? 아아…야. 저 사람…세, 섹스…말하는 거지…?"

    게다가 사라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레이는 귓속말로 내게 그런 귓속말까지 하는 바람에, 사라의 수치심은 더욱 증폭됐다.

    아까처럼 디아나랑 다투고 있던 것도 아니고, 이렇게 우리한테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귀가 좋은 사라가 귓속말을 못 들을 리가 없으니까.

    "대, 대답이나 해요!"

    "해, 해봤어요!"

    얘들 진짜 뭐 하는 거야? 한쪽은 수치심에 떨면서, 한쪽은 공포에 떨면서 섹스 얘기를 하고 있다니. 진짜 내가 말하고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대마법사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듯 내게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독점할 생각을 했다고요? 이 변태를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사라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디아나가 뭘 노렸던 건지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사라와 레이의 공감대를 형성해서 사이좋아지게 하려는 계책이겠지. 중간에 내가 희생양이 되기는 하지만, 내 여자들의 관계가 원만하게 되기 위함이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혹시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계산하고 그런 말을 꺼낸 거였다면, 아니. 분명 그렇겠지. 디아나는 역시 머리가 좋고 어른스럽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디아나야.

    "아…크흠. 흠. 그, 그게 말이지 사라야."

    사라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 레이를 대신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뭐야."

    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뭔가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째려보지 마라. 그 짐작, 아마 정답이지만 말이야. 하여간 감은 엄청나게 좋다니까.

    "그…말이지. 저쪽에서 지내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생스러운 일이어서 말이지."

    "본론만 말해."

    "레이 얘랑 잘 때는 대부분 실비아랑 같이…아따가!"

    "이, 이 변태가 진짜!"

    "며, 몇 번…! 몇 번 안 잤어!"

    찰싹찰싹 등을 노려오는 사라의 손바닥을 회피하며 필사적으로 변명해 봤지만, 사라는 용서가 없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가차 없이 내 등짝에 파고든 사라의 손바닥은 순식간에 날 녹다운 시켰고, 사라는 쓰러진 날 발치 아래에 두고는 당당하게 외쳤다.

    "이 변태가 진심으로 하면 하루도 제대로 못 버텨요! 그런 걸 매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점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요!"

    …아니. 사라야. 뭐, 날 공유하자는 그 마음가짐은 정말 기쁜데 말이야. 그거 그렇게 당당하게 외칠 말이니?

    "…으, 으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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