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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86화 (1,053/1,205)

1086화

하지만 아무래도 디아나의 의견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넌 왜 내 등에 달라붙어 있냐.

"이런 곳에서 비행 마법을 쓰고 있으면 이 몸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가."

아니. 여전히 마법사들한테 인기 폭발해서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건 알겠다만, 그러면 그냥 평범하게 걸으면…아니다. 됐다. 그냥 업혀 있어라.

"음. 좋은 마음가짐일세."

내가 자세를 고쳐서 제대로 업어준 게 마음에 들었는지, 디아나는 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얘 지금까지 유독 내 등에 업혀 있으려고 했던 게, 스킨십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걷기 귀찮아서 그랬던 건 아니겠지?

"그럼 구원 씨. 다녀올게요."

아무튼 굳이 우리까지 신전에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디아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사실 겸사겸사 레이도 사제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안 한 건 아니지만. 아니. 여신님의 마나에 영향을 별로 안 받아도, 섹스로 레벨업을 할 수 있게 되면 편할 것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그 생각은 바로 그만뒀다.

어차피 사도 임명을 하면 섹스로 레벨도 올릴 수 있겠지.

아직 그렇다고 확정된 건 아니지만, 나는 묘하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제가 되는 것만으로도 그게 가능한데, 사도 임명으로 불가능할 리가 없어. 사도 임명은 여신님이 전쟁신 세계 공략을 위해 적극 추천했던 스킬이니까.

"응. 이따가 봐."

손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레이아와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짧은 키스를 해주고 간 마틸다에게 인사를 하며, 나는 새삼 감회에 젖었다.

이따가 보자니. 우리 애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그럼 우리도 가자."

목적지는 저택…이지만, 그전에 우선 레이첼 누님한테 짧게라도 얼굴을 비쳐야 했다.

"그러면 저녁에 봐요."

이지적인 미모와 대비되는 귀여운 동작으로 손을 흔드는 누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안내 데스크를 빠져나왔다.

아쉽게도 레이첼 누님과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길드장의 딸이라고 특별 취급당하기를 원치 않는 누님인데, 내가 누님 앞에서 판 깔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때문에 누님과는 던전 귀환 수속이 진행되는 동안 짧은 인사만 몇 마디 나누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도 디아나가 아침에 레이아와 마틸다를 데려오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상황 설명을 해줬는지 내가 더 부연 설명을 할 필요는 없어서, 짧은 인사만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면 충분했지만.

그래도 역시 감정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구미호 마을로 내려오는 애들하고는 매일 반지로 대화도 하고 가끔 얼굴도 보고했지만, 레이첼 누님하고는 진짜 오랜만인데 인사도 길게 못 하다니.

"하아…."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길드 건물을 나오니, 옆에서 레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얜 또 왜 이래? 아무리 레이첼 누님이 살갑게 대해 줬다지만, 처음 보는 누님과 대화 몇 마디 못하고 간다고 아쉬워할 성격도 아니잖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레이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힐끔 이쪽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봤다.

길드의 앞 광장은 각양각색의 모험가들과 그들을 상대로 한 장사꾼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런가. 전쟁이 일상인 세계에서 살다 온 레이는 이런 평화로운 광경이 익숙지 않은 건가.

사실 아래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곳을 직접 본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직접 살다 온 레이로서는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 이걸로 레이가 이 세계에 더 좋은 인상을 가져준다면, 나로서도….

"너…눈 높다는 말 진짜였구나."

무슨 생각 하나 싶었더니, 고작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거야!? 설마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감회가 새로워진 게 아니라, 그냥 거리에 있는 사람들 외모 평균치를 스캔한 거였다니!

진짜 이 녀석은 어떻게 이렇게 무슨 생각하는 건지 알기가 힘든 거야!? 심지어 감정 공유까지 되고 있는데!

"음. 레이 양도 잘 알고 있구먼. 이자가 원래…."

"너까지 뭘 맞장구치는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얼굴만 보고 너희를 좋아한 줄 알겠다."

"음?"

내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디아나가 한차례 몸을 움찔 떨더니 어깨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어서 내 뺨에 자기 뺨을 바짝 밀착시켰다.

"으으으음?"

방금 자기도 좋아서 움찔한 주제에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놀리기는. 레이처럼 감정 공유가 안 된다고 해서, 내가 네 마음도 못 읽을 것 같냐?

"내가 너희를 좋아하는 건, 그냥 예뻐서 그런 게…."

"아…."

이대로 놀림거리가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쳐 주려고 했지만, 하필 또 그 타이밍에 레이와 눈이 맞아 버렸다.

야. 잠깐만. 지금 이건 디아나를 맞상대하려고 그런 거니까!

"으읏…!"

제, 젠장! 아, 아니야! 난 안 부끄러워! 레이 얘가 아무리 부끄러워해 봤자, 나만 안 부끄러우면 연쇄 지옥에 빠질 일은 없어! 난 안 부끄러워!

"으음? 자네, 부끄러운 겐가? 뭔가 말이라도 해보게. 응? 으응?"

"시, 시끄러워. 확 후드 벗겨 버린다."

"그, 그만두게!"

계속 뺨을 문지르며 장난치는 디아나의 머리 쪽에 손을 가져다 대자, 디아나는 두 손으로 황급히 자기 후드를 누르면서 고개를 뒤로 뺐다.

훗. 이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 기세를 몰아 반격까지 하고 싶지만, 덕분에 연쇄 지옥에 끌려가지는 않았으니 봐주기로 하지.

"다녀오셨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적당히 레이에게 거리도 구경시켜주면서 저택으로 돌아가니, 집사님이 현관에서부터 우리를 마중해 줬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우리가 도착하고 튀어나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다. 줄곧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응. 오랜만. 아 참. 여기는 레이. 레이 이쪽은 내 여자 중…."

"집사인 바넷사입니다."

"야. 너 진짜 이러기냐?"

"…농담입니다. 구원 님의…도 겸하고 있습니다."

…얘 지금 부끄러워서 얼버무린 거 맞지? 내 뭘 겸하고 있는 건데!? 애인이라고 왜 확실히 말을 못 해!? 아니. 그보다.

"너 왜 말하면서 한발 물러섰냐?"

"…특별히 이유는 없습니다."

"설마 자기가 지금 집사가 아니라 내 여자라고 하면,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물러난 건 아니지?"

"……."

"왜 거기서 대답을 안 해!?"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넌 농담이 농담으로 안 들린다고! 아오 진짜 오랜만에 보니까 더 적응 안 되네.

하지만 말이지. 이쪽에는 널 컨트롤할 수 있는 치트키가 있다고!

"디아나. 집사가 계속 장난만 치잖아. 뭐라고 한 마디 꾸중이라도 해줘."

"음? 자, 자네, 지금 지위로 바넷사를 찍어누르려고 하는 겐가아!?"

크윽. 디아나. 너도 바넷사 편이었냐…! 그리고 눈 동그랗게 뜨고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네가 그런 표정 지으면 연기라는 걸 알아도 괜히 죄책감이 생긴단 말이야!

"…그냥 사라한테 안내나 해줘."

주종이 쌍으로 장난을 거니까 벌써부터 진이 빠지네.

아니. 뭐, 바넷사 성격에 이런 식으로 얼굴 보자마자 장난부터 친다는 건, 그만큼 오랜만에 날 봐서 기쁘다는 뜻이겠지만 말이야. …그런 뜻 맞지?

"야. 너 말이야."

저택에 들어와서 다시 둥둥 떠다니는 디아나와, 앞장서서 안내하는 바넷사. 그 둘의 뒤를 따라 지하로 걸어가는 도중, 레이가 몰래 내게 귓속말을 해왔다.

"응?"

"너…여기서는 조금 인상이 다르네?"

"그래?"

아래에서나 여기서나 별로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적진 한가운데도 아니고 우리 애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마음이 풀어져서 평소보다 더 편하게 행동하는 건 있지만.

"응. 혹시…잡혀 살아?"

크헉. 이, 이 녀석…비밀 얘기하는 척하면서 이런 암습을…. 괘, 괜찮아! 밤에는 내가 다 이기니까! 낮에 좀 잡혀 사는 게 무슨 문제…아, 아니! 잡혀 사는 것도 아니야!

"그러면 나도…."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건지, 레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마 아까 디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에 뺨이라도 비비면서 놀리려는 모양이지만.

"쪽."

"으히읏!?"

내가 먼저 그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해버리자, 화들짝 놀라서는 뒷걸음질 쳤다.

훗. 감히 누굴 놀리려고.

"넌 가서 일반 상식이나 더 키우고 와라."

"어,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곳에는 처음 오니까!"

아니. 이쪽 세계의 상식만 가지고 얘기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두 손으로 자기 뺨을 가리고 빨개진 모습이 귀여워서 봐주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자마자 뭘 보여주는 거야? 뭐야?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어느새 도착한 지하실 저편에서 한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말이야.

"오, 사라야. 오빠가…."

"드디어 만났군. 걸…하아, 여신의 개."

지금부터 레이랑 대면시켜야 하는데, 시작부터 기분이 안 좋으면 잘 풀릴 일도 잘 안 풀린다. 일단 사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황급히 앞으로 나선 나였지만, 그런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용사를 구슬렸는지는 묻지 않겠어. 하아, 원흉을 제거하면, 하아, 결국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니까."

바로 중2병이었다. 뒤쪽에서 레이가 "요, 용사…?"라고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지금은 잠시 놔두자.

저 중2병, 폼이란 폼은 다 잡은 말투로 말하고 있는데 말이야. 방금 여신님한테 걸레라고 하려다가 사라 눈치 보고 말 바꿨지?

"각오는 되어 있겠지? 하아, 여신의 개. 하아, 그때는 네 더러운 술수를 간파해내지 못해, 하아, 당했지만, 하아, 내게 같은 방법은 두 번 통하지 않아."

"너 저번에 나한테 당한 게 두 번째잖아."

설마 처음 만났을 때는 도망갔으니 당한 게 아니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다시 만났을 때 눈에 핏발까지 서서는 성자 스킬에 고통받고 있었으면서.

"세 번은, 하아, 통하지 않아."

…인정하는 자세는 보기 좋다만, 너무 태세 전환이 빠른 거 아니냐?

"적의 개라지만 날 두 번이나 곤란하게 한 강적. 하아, 이런 삭막한 지하실에서 마무리를 짓기에는 아까운 상대지만, 하아, 이것도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겠지. 하아, 자, 여신의 개! 성자 구원! 각오해라!"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아서 외치는 중2병을 보고, 나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사라야. 쟤 아까부터 하아하아 거리면서 뭐라고 하는 거야? 바닥에 엎어져서는."

"나한테 묻지 마. 저 사람 좀 이상하니까."

마치 더러운 거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중2병을 내려다보면서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난 사라는, 그대로 뚜벅뚜벅 내게 걸어왔다.

"저런 것보다. 야. 구원. 너…."

"저런 것이라니! 용사! 설마 날 두고 하는 말인가!? 하아, 하아, 적의 손에 타락해서는 전쟁신 님이 가르쳐주신 긍지마저 잊어버린 것인가!? 하아, 어서 이 수갑을 풀고 나와 성자 구원의 정정당당한 결투를…!"

"풀어 줄 리가 없잖아. 바보 아니야?"

"요, 용사아아아!"

사라가 차가운 말투로 그렇게 내뱉자, 중2병은 상처받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야. 상처받은 건 알겠는데 왜 날 쳐다보냐? 그렇게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봐도 안 풀어줄 거다.

뭐, 그래도. 계속 하아하아거리는 것도 듣기 불편하니까.

"응흐으읏!?"

가볍게 성자의 파동을 한 방 날려주자, 안 그래도 손발이 묶여서 엎어져 있던 중2병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신음했다.

그래. 이렇게나마 조용하니까 좀 낫네.

하지만 사라는 그런 중2병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레이 앞에 멈춰 섰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전에 말한 그?"

그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레이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중2병의 말로 사라가 용사라는 걸 알아낸 레이는 살짝 기가 죽은 표정으로 사라의 시선을 마주 봤고, 사라는 그런 레이를 더욱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야. 너 혹시 컨셉질하는 중이냐?"

"커, 컨셉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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