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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84화 (1,051/1,205)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84화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숨결로 간질이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속삭임 소리가.

하지만 귓가에서 들려오는 건 아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건 조금 더 아래. 안 그래도 작은 속삭임 소리는 내 귀까지 닿기 전에 뭔가에 막힌 것처럼 희미하게 울려서, 나는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눈도 뜨지 않고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괜찮겠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럴 리도 없고, 너도 이렇게 반응해주고 있고."

목소리와 동시에 하반신 쪽에서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물건이 콕콕 찔리는 느낌까지 났다.

그 갑작스러운 감각에 반사적으로 물건을 움찔움찔 떨자,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짝 안도감이 섞였다.

"응. 그렇지?"

그러니까 걔는 별개의 지성을 지닌 생명체가 아니라니까….

드디어 사건의 전모가 보이기 시작한 나는, 이불을 살짝 들어 올려 그 안을 엿봤다.

"뭐하냐 너?"

"꺅! 인사하고 있었단 말이야! 갑자기 끼어들지 마!"

인사는 무슨. 너야말로 내 물건이랑 비밀 얘기하지 마.

하아…. 하는 수 없지. 얘하고 만큼은 웬만해선 낯부끄러운 분위를 만들고 싶지 않지만,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야. 레이."

"으, 응?"

"어제 디아나를 봤으니 너도 알겠지만, 난 상당히 눈이 높아. 웬만한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머리를 쥐어짜서 최대한 부끄럽지 않은 표현으로 완곡하게 돌려 말해 봤지만, 아무래도 레이는 내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젠장.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는 일이잖아. 왜 그걸 눈치 못 채는 거야.

"…그런 내가, 넌 내 여자로 하겠다고 결심한 거야.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냐?"

"…아…으, 으응…."

그런 쪽으로 아예 생각을 안 해서 눈치채지 못한 것뿐, 레이도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놓고 말했는데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레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부끄러운지 자기 눈앞에 있는 내 물건을 괜히 콕콕 찌르면서.

으윽. 젠장.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이 녀석까지 부끄러워하니까 감정 공유로 심장이…. 이래서 이 녀석하고 만큼은 부끄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너도 충분히 예쁘고 매력적이라는 얘기야."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다. 아예 못을 박아둘 생각으로,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설프게 끝내면 오늘 다른 애들을 만나고 다시 기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넌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데. 어젯밤에 나 너랑 잔 거 알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사실 디아나가 같이 자주라고 보낸 거고, 나도 사도 임명을 시험해 볼 생각도 겸해서 레이랑 같이 잔 거지만.

참고로 사도 임명은 또다시 실패했다. 도중까지 콘돔을 끼고 하다가, 레이가 지나친 쾌감으로 정신을 잃은 타이밍을 노려 콘돔을 빼고 안에 싸는 노력까지 감수했는데.

"아, 알았으니까 그만해!"

아무튼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내가 꿋꿋이 할 말을 계속하자, 결국 먼저 버티지 못하게 된 레이가 손을 뻗어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으으으…."

내 얼굴을 마주 보기도 부끄러운지, 레이는 두 눈을 꼬옥 감아 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아도,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내 존재감까지 지울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레이는 지금 내 다리 사이에 있었고, 심지어 손을 뻗어 내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거다. 아무리 팔을 쭉 뻗어도 레이의 얼굴은 내 물건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내 존재감에서 레이는 눈을 감아도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더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부끄러운 감정이 해일처럼 레이로부터 내게로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내 감정과 만나며 더욱 증폭되어서는 내게서 레이에게로 전해져갔고, 또 그게 배의 크기가 되어 내게로 돌아온다.

끊을 수 없는 연쇄 작용에 나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용해주겠어! 어차피 사도 임명을 위해서는 또다시 부끄러운 말도 해야 하잖아? 나중으로 미뤄서 또 이런 경험을 하느니, 이번 기회에 한 번에 전부 다 끝내주겠어!

"레이, 난 이렇게나 널 좋아해! 넌 어때!?"

비록 내 목소리는 레이의 손에 틀어막혀 제대로 된 말을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으으읍 거리는 소리만으로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손바닥에 닿은 입술 감촉으로 해석한 건지, 용케 내 말을 이해한 레이는 손바닥을 더욱 내 입술에 밀어붙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묵비권을 행사하려는 모양이지만, 그렇게는 안 돼.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경험을 하고 있는데, 너 혼자 빠져나가게 둘 것 같아? 난 반드시 내 목적을 완수해주겠어!

나는 레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껴서는, 그 몸을 위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얼굴이 정확히 내 얼굴과 마주 보게 되는 위치까지.

그래도 레이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어서 나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그시 그 얼굴을 바라봤다.

진짜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아까 내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니다.

진짜 예쁘긴 예뻐. 지금껏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다고 착각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레이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자니, 레이도 뭔가 안절부절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끌어당겨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대체 뭘 하는 건지 불안하겠지.

꼭 감고 있던 레이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슬그머니 눈을 떴고, 나와 제대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으읏…! 대,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지나친 부끄러움에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레이는 내게 투정을 부렸다.

원하는 거라. 그야 뻔하잖아? 간단해.

"대답."

이번에도 레이의 손에 막혀서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아까 그 긴말도 알아들은 레이다. 이번에도 제대로 알아들었겠지.

"이, 이 세계는 원래 이렇게…아, 아니야! 너도 부끄럽잖아!? 너 자기만 부끄러운 말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지!?"

얘가 웬일로 또 날카로운 말을 하네. 그런 마음도 없는 건 아니야. 없는 건 아니지만, 목적이 그것만은 아니거든.

나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레이의 얼굴만을 쳐다봤다.

"으, 으으…또, 또 장난치는 거지…? 꼭 말로…우으…."

이제는 피부색이 아예 빨간색이 된 것처럼 달아오른 레이는 시선을 피했다가 힐끔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시선을 피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 나도…좋아는…하는데…."

그런 말과 함께, 이마를 내 어깨에 파묻고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듯이 바들바들 떨었다.

제, 젠장. 이거 상상 이상으로 부끄럽잖아.

아니. 이렇게까지 절절히 서로의 마음이 느껴지는데 그놈의 사도 임명은 왜 안 되는 거야!?

설마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문제가 아니라, 또 히든 퀘스트니 뭐니 하는 게 문제인 건가!? 그거라면 레이를 바프라의 수하들에게서 구출해 준 시점에서 달성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말해…."

필사적으로 딴생각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해봤지만, 이 사악한 다크 엘프는 날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부끄러움의 늪에 잠기면서 내 다리를 끌어당기다니. 내가 했던 짓을 그대로 갚아주겠다 이거지?

"무, 무슨 말을…?"

"뭐라도!"

떼쓰지 마 이것아!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아니. 내가 시작한 거니까 내가 뭐라도 말해야 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그…서, 서로 같이 좋아하는 걸…."

"으으으읏!"

야. 부끄러움에 발버둥 칠 거면 애초에 이런 걸 시키지를 마! 나도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아니. 그렇다고 널 안 좋아한다는 건 아니…으악! 젠장! 누가 좀 도와줘!

레이와 둘이 같이 몸을 밀착시킨 채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 부끄러움의 구렁텅이는 절대 혼자 탈출하는 게 불가능해.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둘 다 부끄러워 죽을 거야.

똑똑.

"구원 씨?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가요?"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문 너머로 우리에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거다.

말해두지만, 내 이름으로 말장난한 거 아니다. 저 엔젤 보이스를 어떻게 감히 내 목소리와 비교하겠어.

"아, 아니! 일어났어! 레, 레이! 나갈 준비!"

"으, 응!"

튀어 오르듯이 서로에게서 떨어진 우리는, 일단 주섬주섬 옷부터 챙겨입었다.

방을 나갈 때까지도 얼굴이 화끈화끈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 문제는 방을 나가자마자 곧바로 해결됐다.

"구원 씨!"

"당시이인!"

미소 짓는 천사님의 얼굴이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옆에서 마틸다가 달려들어 내 몸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 뭉클한 감촉은 내 가슴을 메우고 있던 부끄러움을 밀어내듯이 내 가슴에 밀착해왔고, 레이는 레이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부끄러움을 잊은 듯 보였다.

드, 드디어 이 연쇄 부끄러움 지옥이 끝났다. 역시 성녀님과 추기경님이야. 예로부터 지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성직자가 제일…아니. 이건 별로 상관없나.

"이제는 언제든 오갈 수 있다면서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마틸다는, 눈을 반짝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처럼 키스 세례를 퍼붓지는 않는군. 레이 앞이라고 자제하고 있는 건가?

"아, 응. 맞아. 디아나한테 들었어?"

"네!"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들을 데려온 것뿐만 아니라, 설명까지 미리 끝냈다니. 걷기도 싫어서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주제에 성실하잖아.

아니. 그냥 우리가 늦잠을 잔 건가. 어제도 결국 잠이 든 시간은 엄청 늦었으니까.

"그러면 이분이 그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마틸다에요."

역시나 레이를 신경 써서 자제하고 있었던 건지, 마틸다는 다시 한번 가볍게 입술을 맞춘 후 내게서 떨어져서는 레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전 레이아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네? 아, 레이에요…."

"어머, 비슷한 이름이네요."

"그,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둘이 이름 비슷하구나. 이미지가 전혀 달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눈치 못 채고 있었어.

아무튼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면서 살갑게 레이를 맞이해주는 천사님이었지만, 레이는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쟤 또 레이아랑 마틸다의 미모에 기가 눌린 건가?

"야. 레이."

"아앗…으, 응…괜찮아…."

내가 나서서 신경 써주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조금 전 그 대화가 생각났는지, 레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아까보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거다.

어색한 느낌이 사라진 건 다행이지만, 모처럼 벗어난 지옥에 다시 한발 걸친 기분이었다.

네가 그러면 나까지 상태 이상해지니까 제발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런데 둘만 데려왔어? 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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