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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083화 (1,050/1,205)
  • 1083화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하네. 다이애나 텔루나라고 하네. 편하게 디아나라고 부르게."

    공동전선을 구축해 날 구박한 후, 디아나는 인자한 표정으로 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럴 때 보면 역시 제일 어른인 게 티가 난단 말이지. 오늘도 디아나가 여길 지키고 있었던 건, 나로서도 레이로서도 참 운이 좋은 일이었다.

    "앗, 네에…. 저야말로…. 레이 바프라라고 해요…."

    하지만 디아나의 그런 어른스러운 태도에도, 레이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손을 잡아 악수는 했지만, 움찔움찔 거리는 게 상당히 위축된 모습이었다.

    장난이라고 넘어가기는 했지만, 레이도 눈치가 없는 게 아니니까 대충 느꼈겠지. 내가 한 말에 거짓은 없다고.

    "그렇게 위축될 필요 없네. 자네도 같이 지내면서 알았겠지만 이자가 하는 말은 태반이 장난일세."

    "너무해. 아까 한 말에 거짓말은 하나도…."

    "자네는 가만히 있게!"

    내 머리에 또다시 딱밤을 한 대 먹인 후, 디아나는 주먹이 아픈지 입으로 호호 불면서 다시 레이를 향했다.

    "앞으로 같은 남자를 두고 고생할 사이 아닌가. 더군다나 같은 엘프일세. 잘 지내보세나."

    "에, 엘프?"

    "음. 자네는 순혈 다크 엘프라고 들었네만, 아니었는가?"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저기…디아나…님도…?"

    레이 이 녀석, 나한테는 너너 야야 거리면서, 디아나한테는 님까지 붙이는 거 봐. 진짜 단단히 겁먹었구나?

    "님은 필요 없네. 그렇구먼. 이 몸도 순혈 엘프일세. 여길 보게. 이 몸도 귀가 길지 않은가?"

    헬레나 때문에 후드를 벗을 수는 없어서, 디아나는 후드 너머로 자신의 귀를 매만지며 그 길이를 어필했다.

    "그…그렇군요."

    자신과 같은 엘프라는 말을 듣고 조금은 마음이 놓였는지, 레이의 표정이 아까보다 조금은 편해졌다. 편해졌다고 해도, 어색한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역시 디아나야. 사람 접하는 법을 잘 알고 있어. 저게 바로 연륜에서 나오는….

    "자네. 지금 이상한 생각하지 않았는가?"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해?!"

    깜짝이야! 왜 마음대로 사람 속마음을 읽고 그래? 오랜만에 내가 하는 생각을 읽히니까 이거 적응 안 되네.

    "흐으음. 수상하구먼."

    "진짜라니까. 그냥 내가 사는 세계에서는 엘프랑 다크 엘프는 사이가 안 좋다는 게 거의 공식 같은 거였거든. 둘이 같은 엘프라면서 화기애애한 게 신기했을 뿐이야."

    "흠? 그런가? 딱히 사이 나쁠 이유가 없는 것 같네만."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였다. 전쟁신 쪽은 어떤지 몰라도, 이쪽은 모든 종의 화합을 추구하는 섹…대지의 여신님을 믿는 쪽이니까. 종이 다르다고 해서 사이가 나쁘거나 할 일이 없지. 다크 엘프도 그냥 피부색만 다를 뿐 같은 엘프라는 건가.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대충 디아나와의 얘기는 일단락된 것 같은데, 이제 어쩔까? 마음 같아서는 위로 올라가서 다른 애들도 빨리 만나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밤이 늦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우선 제일 중요한 일부터 확인할까.

    "그런데 레이."

    "으, 응?"

    "몸은 좀 어때? 괜찮아?"

    "몸?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니. 너도 미약 얘기를 들었으니 알겠지만, 여신님의 마나는 전쟁신 쪽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효과가 있거든. 여기 일대는 전부 여신님의 마나가 감싸고 있으니까."

    "흐, 흥분…!"

    흥분했다고 하면 내가 이 자리에서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아는 건지, 레이는 두 팔로 자기 몸을 감싸 안고 은근슬쩍 뒤로 한발 물러났다.

    안 잡아먹는다 이것아.

    "농담 아니라 진지하게 확인해 보려는 거야. 그래서 어떤데?"

    "…으, 으읏…. 조, 조금은 그게…."

    "레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야. 진짜 중요한 일이니까 확실히 대답해. 흥분되면 흥분된다고 당당하게…아야! 아파. 디아나."

    "거짓말하지 말게! 아픈 건 이 몸의 손이네!"

    아니. 그야 아프다는 건 거짓말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돌머리 같잖아. 너무해.

    "자네는 정말인지…정말로…."

    게다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디아나는 내 머리 위에 턱을 얹고 내 뺨을 좌우로 꼬집기까지 했다.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고 사람 머리에 마음대로 턱을 올리기는. 뭐, 귀여우니까 상관없지만.

    "이자의 말은 무시하게. 그래서, 실제로 몸은 어떤가?"

    디아나. 그래선 내가 한 말이랑 별반 다를 거 없는 것 같은데.

    "조금…고양된 느낌이에요."

    야. 레이. 왜 디아나한테는 순순히 말하냐. 혹시 너희 지금 나 따돌리는 거야?

    아무튼 레이의 반응을 봐서는,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야 그렇지. 디에른 가문도 미약을 만들기 위해서 여신님의 마나를 응축한다고 했었으니, 그냥 평범하게 대기에 있는 마나에 닿은 것 같기고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다.

    "흠. 이곳 사람들과 마찬가지라는 겐가. 그렇다면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을 것 같구먼. 위로 올라가도 문제…이런. 자네를 잊고 있었구먼. 자네는 어떤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디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일단 헬레나를 향해서도 질문은 던졌지만, 말 그대로 형식상 던진 질문에 불과할 거다. 진짜로 뭔가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겠지.

    "네헤…? 아…저, 저도 괜찮아요…."

    그랬을 텐데, 어째선지 헬레나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 여자, 호수에 발만 담갔을 때도 미약 효과를 강하게 받지 않았던가?

    "으음? …자네. 저 처자는 레벨이 어떻게 되는가?"

    혹시 자기 때문인가 싶었는지 후드를 더욱 푹 눌러쓴 디아나는, 그래도 헬레나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내 뺨을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왜 내 뺨을…헬레나는 쓰레온 때문에 데려온 거라고.

    "혹시 레벨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어?"

    "음. 이 몸도 저 정도로 심한 경우는 본 적이 없네만. 후우. 우선 저 처자의 문제부터 해결해야겠구먼. 이 몸을 따라오게."

    그렇게 말하고 디아나가 데려간 곳은, 이 집의 지하였다. 중앙에 보이는 저건…소형 마나 변환기인가?

    "레벨이 낮은 처자들을 위해 준비한 장소일세. 이곳에 있으면 괜찮을 걸세. 이미 한 번 달아오른 몸은 식혀줄 필요가 있네만."

    "이런 게 왜 이 집에?"

    "이 몸들도 이곳에서 지내며 많은 일들이 있었다네."

    골치 아프다는 디아나의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니, 얘들도 얘들 나름대로 고생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아무튼 그러면 일단 헬레나 씨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좋겠네. 쓰레온. 너도 같이 있을 거지? 둘이서 있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얘기라도 해보는 게 어때?"

    어차피 헬레나의 달아오른 몸을 식혀주려면 섹스도 해야 할 테니까. 라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도 남의 여자 상대로까지 섹드립을 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아, 아아…그렇군."

    쓰레온의 태도는 믿음직스럽지 못했지만, 뭐, 자기들끼리 알아서 하겠지.

    "그럼 우리는 일단 위에 가 있는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여기서 더 있어봤자 헬레나의 인내심만 시험하게 될 테니, 우리는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후우. 밤이 늦었으니 이 몸들도 오늘은 우선 쉬는 게 좋겠구먼. 레이 양도 피곤하지 않은가?"

    그렇게 말하면서, 디아나는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날 만나기 전에는 언제나 후드를 푹 눌러쓰고 다니면서 모든 마법사를 상대로 숨바꼭질까지 했던 디아나지만, 그래도 답답한 건 답답한 모양이다.

    "네? 아, 아뇨. 그런…."

    "괜찮네. 숨길 거 없네. 저쪽 방이 비었으니 들어가 쉬게."

    "…네에."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결국 디아나가 주는 압박감을 이기지는 못했는지 레이는 터덜터덜 힘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 디아나는 딱히 압박 줄 생각도 없어 보였고, 레이 혼자 괜히 압박감을 느낀 것 같지만 말이야.

    "굳이 레이까지 방으로 들여보내고 둘만 남는다라. 디아나. 이건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도 되지?"

    "안 되네."

    디, 디아나가 나한테 철벽을 치고 있어. 어찌 이런 일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낭군님 낭군님 하면서 귀엽게 다리를 벌리던 디아나는 대체 어디에….

    "기, 기억을 왜곡하지 말게! 이 몸이 언제 그랬는가!"

    "뭐, 농담이고. 그래서 진짜 의도가 뭐야? 난 원래 당장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지금 시간을 생각하게. 이 시간이면 다들 자고 있을 걸세."

    뭐,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단순히 밤이 늦었으니 빨리 자자는 생각만 있는 건 아니잖아? 굳이 레이를 먼저 방으로 보낸 거니까 말이야. 뭔가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는 거 아니야?

    "음. 자네가 조금 전 한 말 말이네만."

    "응? 무슨 말?"

    "이 몸들에게 다시금 허락받기 위해 왔다는 말 말일세."

    "아, 응. 그게 왜?"

    "다른 이들 앞에서는 하지 말게."

    "응? 왜? 디아나 좋아했잖아?"

    "음. 자네 마음은 기뻤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닐세. 레이 양이 불쌍하지 않은가."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이, 디아나는 한숨과 함께 내 코끝을 가볍게 잡고 흔들었다.

    "불쌍해?"

    "자네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이 몸들은 싫어도 레이 양을 평가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되네. 구경거리가 아니지 않은가. 레이 양이 얼마나 불편하겠는가."

    "아…."

    "자네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여전히 감정 공유 때문에 평소만큼 신경 쓰기 힘든가?"

    "아니…."

    딱히 감정 공유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거다. 굳이 원인을 찾자면 아까 성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기 때문이겠지. 어떻게 해서든 빨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 마음이 앞서는 바람에 레이의 감정을 생각 못 한 거다. 레이랑 감정 공유까지 되고 있는 주제에.

    그렇게 깨닫고 보니, 레이의 불편한 감정이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까지는 디아나와 같이 있다는 사실에 들뜬 나 자신의 감정에 덮어져서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다.

    "괜찮네. 자네가 신경을 못 쓰는 만큼 이 몸들이 신경 써주면 되는 일이니. 내일 아침 일찍 이 몸이 가서 다른 이들을 불러오겠네. 한꺼번에 전부 만나는 것보다는, 우선 절반 정도 나눠서 만나는 것이 레이 양도 부담이 덜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도 아까 했던 표현은 삼가게. 평범하게 자네의 여자들끼리 얼굴 보는 자리라고 생각하게."

    그렇게 말하면서, 디아나는 괜찮다는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원래라면 디아나는 내가 다른 여자를 더 데려온 것에 화를 내야 하는 입장인데, 오히려 이런 식으로 내 실수를 감싸주기까지 하다니.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내가 참 여복은 타고난 거 같아. 난 진짜 우리 애들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

    "디, 디아나…."

    "후훗. 이제는 어리광인가? 옳지. 옳지."

    감동한 내가 그 가슴에 달라붙자, 디아나는 자연스럽게 내 머리를 끌어안고 뒷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크윽. 역시 디아나의 연륜에는 언제나 도움…."

    "연륜이라고 하지 말게."

    "아, 아니. 지금 건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지 말게."

    "…네."

    그, 그렇게 싫니? 디아나의 나이가 얼마나 많든, 난 정말로 신경 안 쓰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런 걸세. 그럼 가보게."

    "응? 가봐? 설마 나랑 따로 자려고?"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면 레이 양을 데리고 와서는 혼자 자게 할 셈이었는가? 이 몸은 괜찮으니 오늘은 레이 양과 있어 주게."

    "크윽! 디아나아아!"

    "이런이런. 어리광쟁이가 다 됐구먼."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리광을 다 받아주는 디아나였다.

    진짜 우리 대마법사님은 최고야.

    아무튼 그렇게 디아나의 배려를 받아들여서, 나는 레이와 같이 잠을 자기로 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먼저 방에 들어와 있던 레이는 당연하다는 듯 잠을 자고 있지 않았다.

    "먼저 자도 됐는데?"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이 녀석, 아까까지는 기죽어 있었으면서 나랑 둘만 되는 순간 다시 살아났군. 멘탈이 튼튼한 건지 약한 건지 모르겠다니까.

    "그런데 저 사람 진짜 뭐야?"

    "응? 말했잖아.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대마법사…."

    "그게 아니라!"

    답답하다는 듯 이불을 팡팡 때리면서, 레이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쳤다.

    "왜 저렇게 예뻐?! 설마 네 여자라는 사람들은 다 저렇게 예뻐?!"

    "…너 설마 기죽은 이유가 그거였냐?"

    어쩐지 드래곤이니 뭐니 하는 오해가 풀리고도 계속 디아나를 대하는 게 어색하다 싶기는 했는데, 설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당연하지! 세상에서 나보다 예쁜 사람은 없는 줄 알았는데!"

    "……."

    "무, 뭐야 그 침묵은?!"

    아니. 뭐…확실히 매력 수치만 놓고 보면 전쟁신 세계에서 널 이길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기본적으로 전쟁신의 사람들은 여신님의 사람들보다 매력 가중치가 적은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엘프족은 타고난 매력 수치나 가중치가 장난 아닌 느낌이니까.

    디아나만 봐도, 매력이랑 전혀 상관없는 직업만 가지고 있는데 매력 수치가 항상 레벨 한계치까지 찍혀 있잖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다니.

    "실비아도 있잖아."

    당장 실비아만 놓고 봐도 매력 스탯이 레이보다 높을 텐데?

    아니. 레이의 세부 스탯은 아직 모르지만, 레이는 아직 250레벨이 안 되는 만큼 스탯의 한계치가 낮으니까 말이야.

    물론 매력 스탯은 다른 스탯과 다르게 그 수치가 모든 걸 판가름할 만큼 절대적인 건 아니어서, 실비아와 레이 중 누가 더 예쁜지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갈리겠지만.

    중요한 건 레이가 실비아를 무조건 미모로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건 이상하다는 얘기다.

    "그 호모는 지금까지 여자로 안 봤단 말이야!"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실비아도 여자야 이것아!"

    진짜 무슨 얘는 생각이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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