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82화 (1,049/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82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호수에는 여신님의 마나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나나 쓰레온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레이나 헬레나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들어오자마자 바로 발정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나는 물의 정령을 불러 넷의 몸을 빠르게 아래로 밀었다.

    그냥 얕은 곳에서도 가능은 했지만, 앞으로 할 변명을 생각해 보면 역시 제일 밑바닥에서 하는 게 좋겠지.

    평범한 수영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속도로 잠수해 내려간 우리는, 곧 호수의 제일 밑바닥에 닿을 수 있었다.

    사실 평범하게 밑바닥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는데. 그도 그럴 게 여신님의 마나가 느껴지는 곳이니까 말이야.

    바닥에 구멍이라도 뚫려서 6계층의 비밀 장소 같은 곳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칼데라호답게 상당히 깊군. 이 정도면 누구도 여기까지 올 생각은 못 하겠어.

    "으…여기서 뭘 할 셈이야?"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레이가 내 마스크에 마스크를 맞대왔다.

    최대한 빨리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레이는 벌써부터 살짝 숨이 달뜬 것처럼 보였다. 벌써부터 이러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으니까.

    "뭐, 보고 있어."

    나는 바닥에서 최대한 평평한 부분을 찾은 후, 인벤토리에서 소형 텔레포트 마법진을 꺼냈다. 그래. 구미호 마을과 이어져 있는 그거 말이다.

    텔레포트 마법진은 주변 마나를 여신님의 마나로 바꾸지 않으면 작동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쓰기에는 상당한 제약이었지만, 이 호수는 원래부터 여신님의 마나가 녹아들어 있는 곳이다. 이걸 써도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겠지.

    거기에 만약 의심하는 사람이 나오더라도, 변명거리는 충분히 만들어뒀다.

    나는 바닥에 마법진을 설치하고, 곧바로 작동시켰다.

    이걸로, 이제 언제든 이쪽과 저쪽을 오갈 수 있어. 굳이 밤시간에 구애될 필요도 없고, 저쪽에서 우리 애들이 이쪽으로 건너오는 것 또한 가능해진다.

    물론 아직 여자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인식을 바꾼 게 아닌 만큼 우리 애들을 데려올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애초에 불가능한 거랑 가능한데 안 하는 건 차이가 크니까 말이야.

    앞으로 있을 변화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나는 주변 마나가 완전히 여신님의 마나로 바뀌고 텔레포트 마법진에 불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마치 마나 변환기를 작동하기 전부터 이미 주변 마나 전부가 여신님의 마나였던 것처럼, 텔레포트 마법진은 곧바로 작동을 시작했다.

    이상하다? 분명 전에 썼을 때는 이렇게 빨리 작동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금 의구심이 생겼지만, 지금은 그 의구심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우선시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자."

    나는 쓰레온에게 눈짓을 한 후, 레이의 손을 잡고 그대로 텔레포트 마법진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리의 몸은 물속에서 시원한 공기 속으로 옮겨졌다.

    "뭐, 뭐야!? 뭐야 이거!? 여기는!?"

    "말했잖아? 우리 세계로 데려다줄 거라고."

    설마하니 공간 이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계하는 레이에게, 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그럼 여기가…?"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여긴 구미호 마을이니까, 아직 여신님의 세계는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런 우리의 뒤를 이어서 쓰레온과 헬레나도 이쪽으로 건너왔고, 텔레포트 마법진이 작동하면서 변한 마나의 흐름을 느낀 거겠지.

    "이게 무슨…자네. 그 처자들은?"

    디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여전히 몸을 공중에 둥둥 띄운 채로.

    어제 그런 식으로 나한테 기습을 당해서 이제 안 그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공중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몸 움직이는 게 싫은 걸까?

    "아, 디아나. 이 둘은…."

    나는 레이와 헬레나를 디아나에게 소개해 주려고 했지만, 나보다 빨리 디아나에게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다.

    "히이익! 잘못했어요! 다른 여자 따위 다 물리치고 혼자 독점하려는 생각 같은 거 안 했어요!"

    마치 디아나한테 잡아먹히기라도 할 것처럼 내 뒤로 숨으면서 외치는 레이.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드디어 아까부터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이 하나 풀렸다.

    어쩐지 내 여자 중에 용사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엄청나게 겁먹어서는 만나기 싫어하는 눈치더라. 독점이라니. 너 그런 생각 하고 있었냐?

    "…그런가. 그 처자가."

    디아나 역시도 그런 레이의 모습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눈치 빠른 디아나가 저런 말까지 듣고도 상황 파악을 못 할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레이. 참고로 말하자면, 얘는 용사가 아니야."

    "…뭐?"

    일단 그렇게 말해주자, 레이는 한순간 움찔하고 몸을 떨더니 곧바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방금 전에 내 뒤로 숨었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 그런 건 진작 말해야지! 깜짝 놀랐잖아! 하긴, 이런 꼬맹이가…."

    야. 용사만 아니라고 했지, 네가 그렇게 막 나가도 좋은 사람이라고는 안 했는데. 걔가 그래 봬도 너보다 훨씬 연상이야. 게다가 용사에 버금가는, 어쩌면 용사보다 더 강할 수도 있는 대마법사님이라고.

    황급히 설명을 덧붙여주려고 했지만, 내가 입을 움직이는 것보다 디아나가 마법을 쓰는 게 조금 더 빨랐다.

    "흠."

    "꺄악?! 뭐, 뭐야?! 뭐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디아나의 가벼운 손짓에 레이의 몸은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라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됐고, 반대로 땅에 내려온 디아나는 그런 레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폴리모프 마법을 썼다.

    야. 디아나. 너 그 옷차림으로 성인 모습이 되면 어떻게 해?! 그런 모습은 내 앞에서만 해! 내 앞에서만!

    나는 황급히 디아나의 어깨에 로브를 둘러줬고, 디아나는 그런 내게 슬쩍 눈웃음을 짓더니 레이의 턱을 잡고 얼굴을 요리조리 돌리며 살펴봤다.

    "흐음. 자네. 이 처자는 원래 이렇게 건방진가?"

    표정은 평소보다 조금 차가웠지만, 그 대인배인 디아나가 고작 꼬맹이라는 말 한마디 들었다고 화낼 리가 없었다. 그냥 조금 기선 제압이라도 하려는 게 아닐까?

    "걔가 자란 환경이 특이해서 원래 분위기 파악을 잘 못 해."

    오히려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는 건 레이의 반응이었다. 저렇게 디아나가 자기를 물건 살피듯 살펴보고 있는데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못 하다니.

    용사는 이 전쟁신의 세계에서도 특별한 존재니까 그렇다 쳐도, 그게 아니면 쟤가 저런 상황에서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닌데?

    "으으…드, 드래곤…?"

    아, 과연. 폴리모프 마법을 보고 이번엔 또 드래곤이라고 착각한 건가. 디아나의 말에 따르면 드래곤은 단일 개체로는 최강의 종족이라는 모양이니까 말이야. 무서워할 만하지.

    그나저나 쟤는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지? 하여간 상식 수준을 가늠할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드래곤도 아니야."

    "뭐야 진짜! 헷갈리게…."

    "참고로 말하자면, 걔가 저기에 있는 용사 놈보다 강하다."

    "여, 여신은 싸움 같은 거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어떻게 여신 쪽 사람이 용사보다 강한 거야!?"

    이번에는 재빨리 보충 설명을 해주자, 레이는 이제 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나한테 그렇게 말해 봤자 소용없는데 말이야.

    "디아나. 설명할 테니까 우선 걔 좀 놔줘. 너도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잖아?"

    "음. 그렇구먼."

    역시나 딱히 괴롭힐 생각은 없었는지, 디아나는 곧장 레이의 몸을 내려줬다. 그리고 폴리모프를 풀더니, 또다시 자신의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이왕 땅에 내려왔으니 그냥 있지.

    "우리가 여기에 온 건…."

    "잠깐 기다리게. 그보다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지 않은가?"

    "응? 아, 다녀왔어."

    "이, 이런 것이 아니라 말일세!"

    인사와 함께 가볍게 입을 맞춰주자, 디아나가 얼굴을 붉히며 공중에서 파닥거렸다.

    모처럼 조금 위엄있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래선 다 허사로 돌아갔군.

    "그럼?"

    "이 처자가 그 처자인 걸 알겠네만, 그러면 저기 있는 저 처자는 누구인가?"

    그렇게 말하면서 디아나가 가리킨 쪽에는, 뺨을 붉힌 채 황홀한 표정으로 디아나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헬레나의 모습이 있었다.

    잠깐만. 저 모습 설마….

    "아…."

    혹시나 해서 로브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 씌워서 디아나의 얼굴을 가리자, 그제야 헬레나는 정신이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렸다.

    역시 매료 상태였잖아. 진짜 매력 수치가 너무 높아도 문제긴 문제야.

    그나마 예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디아나의 몸을 탐하려고 하지는 않은 건, 동성이라서 그런 건가?

    "저 사람은 저쪽 세계에서 만난 쓰레온의 짝이야."

    "호오. 그런가. 잘됐구먼."

    "가, 감사합니다."

    우와. 쓰레온 저놈 디아나 앞에서는 얌전한 거 봐. 우리 애들이 자연스럽게 대해서 잊기 십상이지만, 이런 거 보면 진짜 디아나가 대단하긴 하단 말이야.

    "음? 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보고 있자니, 내 시선을 느꼈는지 디아나가 다시 시선을 내게로 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새삼 우리 대마법사님의 위엄이 새삼 느껴져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겐가. 아무튼 계속 서서 얘기하는 것도 그렇구먼. 일단 움직이세."

    그렇게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 다음 의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나는 일단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나 방법, 그리고 저쪽의 사정 같은 얘기를 디아나에게 들려줬다.

    "흐음. 과연. 그런가 그런가. 후흥. 자네도 귀여운 구석이 있구먼. 그렇게 이 몸의 제대로 된 허락이 받고 싶었는가?"

    요게요게 하는 느낌으로, 디아나는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콕 찌르며 미소 지었다.

    아니. 딱히 디아나의 허락만을 위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뭐, 굳이 부정할 필요도 없겠지.

    "응! 잘했지? 디아나 누나. 나 더 칭찬해 줘."

    "자네. 자네한테 귀여운 척은 안 어울린다네."

    "크헉…."

    내가 일부러 눈까지 반짝이면서 애교를 부려줬건만, 디아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내 애교를 튕겨냈다.

    이, 이 녀석…아무리! 아무리 사실이라고 해도! 말이 지나치잖아! 그리고 거기! 너희들! 웃지 마!

    "후흥. 농담일세. 삐지지 말게."

    내 마음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힌 주제에, 디아나는 이제 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줬다.

    "안 삐졌어."

    젠장. 이게 또 위로가 되니까 문제란 말이지. 이래서 반한 사람이 손해라는 얘기가 나오는 건가.

    아무튼 이렇게 농담까지 하는 걸 보면, 디아나는 내가 허락을 받기 위해 레이를 데려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사실 아무 말 없이 레이를 데려와 버리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지만, 이 정도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군.

    아마 레이가 시작부터 얼빠진 짓을 한 것도 도움이 됐겠지. 비명까지 지르면서 내 뒤에 숨는 모습은, 화를 내려던 사람도 어이가 없어서 맥이 빠질 정도로 바보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저기…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그렇게 내가 내심 흡족해하고 있자니, 레이가 디아나의 눈치를 보면서 슬며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응? 뭔데?"

    "결국 이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야?"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디아나한테만 레이의 소개를 하고, 레이한테는 디아나의 소개를 제대로 안 했군.

    "설명해주지. 이분으로 말하자면 여신님 세계에서 모든 인간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살아 있는 전설! 모든 마법은 다이애나 텔루나로부터 나왔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의 대마법사! 그 위에 아무도 존재할 수 없다는 찬사를 담아 지고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지고의 대마법사…."

    "펴, 평범하게 하게! 평범하게!"

    이렇게 말하면 레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서 일부러 말을 한껏 부풀린 나였지만, 아니. 부풀린 건 아닌가. 전부 사실이기는 하니까.

    아무튼 그렇게 설명하고 있자니, 디아나가 내 머리에 콩하고 꿀밤을 먹이며 부끄러워했다.

    쳇. 디아나가 아니라 레이를 놀리려고 했던 건데. 하는 수 없지.

    "그냥 대마법사야. 너랑 마찬가지라 내 여자니까 언니라고 생각하고 잘 지내."

    "어, 언니?"

    아까 말할 설명만으로 충분했는지 한껏 위축된 모습으로, 레이는 디아나의 쪽을 힐끔 들여다봤다.

    헬레나 때문에 여전히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지만, 조그마한 몸집의 실루엣은 감출 수 없는 디아나의 모습을.

    이런 모습을 한 사람이 언니라는 사실을 믿기 힘든 거겠지. 하지만 말이야 레이.

    "얘가 이래 봬도 나이가 2천…."

    "나, 나이 얘기는 왜 하는 겐가!"

    윙크하면서 가볍게 입을 열자, 곧바로 디아나의 딱밤이 날 응징했다.

    물론 여전히 디아나의 딱밤은 내게 데미지를 전혀 주지 못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흐뭇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2, 2천…역시 드래곤…."

    게다가 내 계획대로 레이까지 제대로 겁을 먹어서, 상황은 더욱 재미있게 흘러갔다.

    "아니. 디아나는 드래곤이 아니야."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겉으로 전혀 드러내지 않고, 나는 오히려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래?"

    "그래. 뭐, 드래곤을 수하로 두고 있기는 하지만."

    "히익…!"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네. 아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지만 말이야.

    아무튼 레이 얘도 은근히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자네! 이 몸을 이용해서 장난치지 말게!"

    조금 더 놀려줄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자니, 옆에서 디아나가 내 머리에 콩닥콩닥 어택을 날려댔다.

    "뭐야. 디아나. 내가 디아나 대신 레이를 괴롭혀서 삐졌어? 괜찮아. 네 포지션을 뺏길 걱정은 안 해도 돼. 디아나는 디아나대로 나중에 듬뿍 괴롭혀줄…."

    "그, 그런 말이 아니지 않은가아!"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혹시 정곡을 찌른 건가?

    역시 디아나도 나한테 괴롭혀지는 걸 은근슬쩍 즐기고 있었던 거야!

    "뭐어?! 너, 너 또 날 가지고 논 거였어?!"

    게다가 레이는 레이대로 또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줘서, 내 입꼬리는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레이를 여기 데려온 보람이 느껴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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