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64-1081화 (1,048/1,205)
  • 어색하다. 무지막지하게 어색하다.

    마을에서 아침을 마치고 다시 마차에 탄 지금. 실비아와 레이 사이에 앉은 나는 양옆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분위기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구원 님? 왜 그러십니까?"

    게다가 이 미묘한 분위기를 나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모양이라, 괜히 더 불편한 기분이었다.

    실비아도 레이도 남 앞에서는 말이 없는 타입이니까 말이야. 둘 다 조용히 있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볼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거다. 심지어 갑옷에 투구까지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더욱더.

    사실 마차 안이니까 딱히 투구까지 쓸 필요는 없고, 실제로 실비아와 레이를 빼면 아무도 투구를 안 쓰고 있지만, 다들 이상하다고는 생각 안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만은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 같이 섹스한 것 때문에 어색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어. 결국 도중부터 폭주해서 셋 다 실컷 즐겨 버렸거든.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어색할 일인데, 아침에 그런 일까지 있었던 거다.

    그런 일이 뭐냐고?

    아침에 눈을 뜬 레이가 당연히 해야 할 아침 인사를 위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와 내 다리 사이에 파고든 다음, 내 물건에 키스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문제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잠이 덜 깨 비몽사몽하고 있던 레이는 그만 중요한 걸 못 보고 지나치고 말았던 거다. 아무리 이불 속이 어두웠다고 하더라도, 보지 못하면 안 되었던 것을. 바로 나랑 실비아가 습관적으로 삽입한 채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내 물건에 키스하려고 했으니 당연히 그 입술은 실비아의 하반신 쪽 입술과 제대로 키스를 해버렸고.

    "흐야아악?!"

    "꺄아아악?!"

    나는 가까이서 동시에 들려온 두 개의 커다란 비명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이르게 됐다는 얘기다.

    진짜 불편해 죽겠네. 특히 레이 너. 계속 나한테까지 이 미묘한 기분 전염시킬래? 설마 감정 공유 때문에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맛보게 될 줄이야.

    아니. 물론 이렇게 된 원인이 나한테 있었다고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하필 사이도 안 좋은 애들 데리고 3P를 했다는 자각은 있으니까.

    하지만 나도 그냥 욕망에 눈이 멀어서 저지른 행동은 아니라고. 진짜로 둘 사이를 조금이라도 개선시키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구원 님?"

    "…왜?"

    "아침부터 묘하게 조용하십니다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 호랑이 머리가 계속 불렀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가. 실비아랑 레이는 조용히 있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야.

    "아니. 그냥 좀 졸린…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아니라 딴생각하고 있었어!"

    야! 레이! 난 그냥 졸린다고 한 것뿐이잖아! 딱히 옆에 있는 얘랑 섹스하느라 잠을 못 잤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왜 그렇게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건데?! 네가 그러면 나까지 전염되니까 진짜 그만둬!

    "생각…말입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 호랑이 머리는 내 광신도에 가까운 놈이라는 점이었다.

    평소에는 그거 때문에 짜증만 나지만,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단 말이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던 말을 얼버무렸는데 태클 한 번 걸지 않다니.

    "그래. 신."

    "네? 아, 네! 형님!"

    넌 또 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냐. 혹시 어젯밤 얘기라도 해줄 줄 알고 기대했냐? 안 해줄 거다.

    "너희 가문의 주술 말인데. 꽤나 종류가 다양하지? 그 걸레년의 추종자들을 상대하는 주술."

    그러고 보니 그렉이나 듀크한테는 신네 가문 얘기를 제대로 한 적 없다는 걸 깨닫고, 나는 은근슬쩍 뒤에 보충 설명을 붙였다.

    둘 다 꽤나 놀란 모양이군.

    "네! 물론입니다!"

    여신님의 신자들을 상대하는 주술을 전승하는 가문. 그 타이틀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 건지, 신은 드물게도 어깨를 쫙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봤자 자기 가문 대신 여자를 택한 놈이지만. 아니.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야. 오히려 좋잖아? 같은 남자로서 그 점만은 인정해 줄 만하다고 생각해.

    "저…형님?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하지만 그 당당한 태도도 잠시. 신은 다시 어깨를 움츠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러니까 유리한테 잡혀 살지.

    "문제…뭐, 문제라면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 주술 중에, 섹스를 아예 못 하게 하는 주술이 있거든. 여자한테 걸어서 보이는 남자마다 전부 사랑에 빠지게 하고, 그 대상이 된 남자는 전원 발기불능이 되어 버리는 주술."

    즉, 마틸다가 걸린 그 저주이다.

    사실 신네 집안에 그런 집안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저주가 바로 이것이었다. 계속 물어보고 싶었지만 좀처럼 기회가 없어서 말이야.

    아마 그렉이나 듀크도 신네 집안 설명을 듣자마자 그 저주부터 떠올랐겠지.

    안 그래도 유명한 저주이고, 저주받은 추기경이 성자를 만나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로 더욱 유명해진 얘기다. 그런 얘기를 저 둘이 모를 리도 없으니까.

    내 얘기를 듣자마자, 둘도 듣고 싶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태연하게 반응하지 못한 놈이 하나 있었으니.

    "뭐어어어어어?!"

    …야. 쓰레온. 넌 대체 뭐가 문제냐? 넌 이 새끼야 신네 집안 얘기도 은사모 모임에서 나랑 같이 들었잖아! 왜 제일 먼저 들은 새끼가 방금 전에 들은 두 놈도 깨달은 사실에 놀라고 있는 건데! 저건 진짜 싸움만 좀 할 줄 알지 완전…어휴. 저러니까 쓰레온이지.

    "뭘 그렇게 놀라. 너도 나랑 같이 얘기 들었잖아. 까먹고 있었냐?"

    하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나는 꾹꾹 눌러 참고 그렇게 얘기해 줬다.

    이 쓰레기 하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어.

    "구, 구원 님이 그 주술을 어떻게?"

    신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꽤 놀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혹시 말하면 안 되는 얘기였나?

    "용사니까. 용사의 목적을 생각해 보면, 그 정도는 알아두고 있어야지. 저 바보는 까먹은 모양이지만."

    "그렇습니까. 역시 용사님은 다르군요. 완전히 잊힌 주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쓰레온의 행동까지 커버하면서 대답하자, 신도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문에는 아직 그 주술도 전승되고 있는 거야?"

    주술 거는 법을 알면, 푸는 법도 알 수 있을 거다.

    물론 마법 같은 거랑 연이 없는 나는 설명을 들어봤자 이해 못 하겠지만, 만약 직접 설명을 들을 수만 있다면, 다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디아나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상당히 기대하며 던져본 질문이었지만.

    "…아니요. 아쉽지만."

    아쉽게도 돌아온 대답은 부정이었다.

    "어째서?"

    "형님께서 이해 못 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걸레년의 추종자들을 상대할 최강의 주술. 차라리 다른 주술이 실전되더라도 이 주술만은 전승되었어야 했다.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죠."

    마틸다한테 걸린 그 저주, 최강의 주술이었구나. 어쩐지 교황청에서도 못 풀고 고생하더라니. 물론 내 덕분에 이제 거의 다 풀었지만.

    "그래."

    그런 속마음을 숨기고, 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희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격동의 시대에서 저희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쓸 수 있는 주술이 우선이었으니까요. 아니. 지금도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걸레년의 추종자들에게만 쓸 수 있는 반쪽짜리 주술은, 자연스럽게 잊혀 버리고 말았죠."

    이제야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 그 저주, 여신님 쪽 사람한테만 걸리는 거였어?!

    그럼 설마 나한테 저주가 안 걸렸던 것도, 성자 파워 같은 게 아니라…아니. 그래도 일단 여신님께 힘을 받았으니 나도 여신님 쪽 사람으로 분류되는 건가? 그럼 역시 저주에 안 걸린 건 성자 파워로?

    …뭐, 아무렴 어때. 중요한 건 나한테 안 걸린다는 거지.

    "잊혀진 것치고는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말하자, 신은 제대로 봤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실은 저희도 그 저주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가문에 내려오는 고문서를 뒤지시다가 발견하고는 그 저주의 무한한 가능성을 깨닫게 됐죠."

    "무한한 가능성?"

    "네. 형님도 아시다시피 현재 세계는 세 개의 거대한 세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바프라, 비스, 그리고 플리투스. 이 중에서 섹스를 엄격히 금지하는 세력은 저희 바프라뿐입니다. 그러니 만약 그 고대의 저주를 부활시키고 다른 세력에게도 걸 수 있게 개조만 할 수 있다면, 그것만 성공한다면 저희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신은 드디어 자기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우리의 당면 계획은 은사모를 통해 콘돔 섹스의 멋짐을 알려 바프라를 뒤집어엎는 것.

    섹스를 못 하게 하는 저주라는 건, 그 계획에 정면으로 반하는 존재였다.

    "그, 그러니까 말이죠. 여러분. 혀, 형님? 형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한 말씀 해주십시오! 그 저주가 걸레신을 상대로 얼마나 멋진 활약을…."

    "그래서, 저희 가문은 저주를 개량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아무한테나 다 걸 수 있게."

    "제, 제가 집에서 나올 때까지는 개량은커녕 아직 완전한 복원도 못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희 가문은 사람들은 겉으로만 아닌척할 뿐, 실은 다들 섹스에 관심 있다. 너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나도 그 말을 믿고 이렇게 같이 가주는 건데 말이야."

    "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믿어달라고 해도 말이야. 섹스 못 하게 하는 저주를 뿌려대려는 사람들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실은 섹스에 관심 있다니. 너무 앞뒤가 안 맞잖아?

    모든 사람이 듣고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줄 수 없다면, 아무래도 이거 계획을 바꿔야만 할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신이 마차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내 다리에 매달리며 외쳤다.

    "어차피 우리도 못 하는 거면 남들도 못 하게 한다! 그런 심보로 시작한 일입니다! 자식인 제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습니다! 분명 저희 편으로 끌어들이고 당신들도 마음껏 섹스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런 시답잖은 저주 연구 따위! 당장 그만둘 겁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 가문을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형니이이이임!"

    ……이거,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는 거야?

    무슨 자식이 자기 부모를…아니. 그보다 무슨 심보가…아니다. 그만두자.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신은 성공했다는 거다. 섹스 못 하는 저주를 뿌려대려는 사람들이 실은 섹스에 관심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것도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게.

    "아…응…그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어색하게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왠지 얘네 가문, 내가 상상했던 거랑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아무튼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점심 식사를 위해 한 번 멈춰 서고, 또다시 마차 안에서 덜컹거리며 이동.

    중2병의 습격 같은 트러블도 없이 평탄한 여행길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좌우에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계속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느니, 아예 둘이 말싸움이라도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괜히 그랬다가 레이 이 녀석이 말실수해서 실비아의 성별이 탄로 나면 그건 그거대로 또 골치 아팠다.

    결국 저녁 식사를 위해 마차가 멈출 때까지, 나는 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미묘한 분위기에 둘러싸인 채 다른 놈들과 실없는 얘기나 해야 했다.

    그리고 드디어 저녁 시간. 준비를 위해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나는 화장실 핑계를 대고 그림자 이동으로 한참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이동했다.

    실비아와 레이 사이에 내가 없으면 무슨 일이 터질지 불안하기는 했지만, 레이는 몰라도 실비아는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그리고 난 꼭 이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혼자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온 이유. 물론,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통신용 반지의 마력이 드디어 전부 회복된 거다.

    "얘들아! 들려?!"

    우선 바람의 정령으로 주변에 바람의 방벽을 세워 소리가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고, 나는 곧바로 반지를 가동시켰다.

    "음. 자네인가. 잘 들리네."

    혹시 우리 애들이 아직도 전원 위에 있으면 최악이다. 전에 실비아한테 그랬던 것처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제대로 대화를 하기도 전에 반지의 마력이 다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 불안감도 조금 있었지만, 다행히도 그런 걱정은 필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반지의 마력이 회복되기 무섭게 바로 통신을 시도한 이유.

    "디아나! 어떻게 됐어? 내가 보낸 그놈, 잘 받았어?"

    그 이유는 당연히, 이 확인을 위해서였다.

    아니. 물론 앨리시아는 믿지만 말이야.

    "음. 잘 받았네. 그런 시간에 그 처자들이 찾아와서 조금 놀랐네만."

    그리고 이 역시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그렇지. 앨리시아가 어떤 여잔데. 의리로 똘똘 뭉친 앨리시아가 내 부탁을 소홀히 했겠어?

    디아나의 그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나는 겨우 몸에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그래서 괜찮았어? 그 중2병, 깨어나자마자 덤벼들거나 하지 않았어?"

    디아나의 목소리만 들어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는 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나는 일단 문제없는지 확인했다.

    "중2병?"

    "응. 그놈 왠지 말투가 쓸데없이 거창하고 이상하잖아?"

    "…오오!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구먼!"

    마치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한 디아나의 반응. 그 반응에 나는 미약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냥 대충 말 몇 마디만 들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디아나가 간과하다니.

    "눈치 못 채고 있었어?"

    "음.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좀처럼 없었으니 말일세. 눈을 뜬 이후로 지금까지 쭉 침묵을 지키고 있다네."

    그건 이상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보통 기절하고 나서 눈을 떴을 때 전혀 모르는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으면,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려고 하지 않나?

    처음 놈을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면, 내 성자 스킬에 눈이 돌아가지 않는 이상 제법 여유로운 성격일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거기가 어딘지도 묻지 않고?"

    "음. 그러기는커녕 자신이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도 이해하고 있는 느낌이었네. 이쪽과 말도 제대로 섞기 전에 행동부터 하더구먼."

    "행동?"

    "덤벼들기도 했고, 도망가려고 하기도 했네."

    "잡았지?"

    "물론일세. 사라 양이 마나를 듬뿍 담은 화살로 위협 사격을 하자 깜짝 놀라서는 도망갈 의지도 꺾여 버린 모양이네. ‘이, 이 시리도록 푸르른 힘은…!’이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더구먼. 그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입을 닫아 버렸네만."

    걔는 깜짝 놀랐을 때도 그렇게 일일이 거창한 수식어를 붙여가며 말한대? 하긴. 내 성자 스킬에 눈이 돌아갔을 때마저도 그랬으니 당연한가.

    아무튼 입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는 건 상당히 골치 아팠다. 처음 만났을 때도 날 습격했을 때도 나불나불 잘만 떠들던 놈이 설마 묵비권을 행사해 버릴 줄이야.

    "그래. 여기에서도 한 번밖에 못 만나본 마인이니, 정보를 얻어내고 싶은데."

    분명 놈은 뭔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내 감이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막상 잡아가도 입을 안 열면 소용이 없었다.

    역시 내가 직접 가서 성자 스킬로 고문해야 하나? 아무리 예쁘장하게 생겼어도 사내새끼한테 성자 스킬을 쓰면서 즐기는 취미는 없지만, 정보를 캐내려면 어쩔 수 없지.

    문제는 이쪽도 일이 있는 만큼 당장 갈 수는 없다는 거지만.

    "그래도 아예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닐세."

    내 목소리에서 고민하는 기색이 느껴졌는지, 디아나가 날 위로해주듯 그런 말을 했다.

    위로하는 것치고는 왠지 목소리에서 주저하는 느낌이 났지만.

    "무슨 말이야?"

    "음. 그것이 말일세. 여신님의 마나가 마신 쪽 사람의 성적 흥분을 북돋는다는 것이 명백해졌네. 구미호의 특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네. 그치도 이쪽의 마나에 적응이 안 되는 듯 똑같이 흥분하더구먼."

    아…응. 뭐, 헬레나도 포션을 마시고 그렇게 됐었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디아나도 이게 딱히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는 건 알기 때문에 그렇게 주저했던…아니. 잠깐만 기다려 봐. 그 중2병이 흥분했다고? 성적으로? 우리 애들이, 절세 미녀들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아까…분명 덤벼들었다고 했었지?

    "그 새끼가 혹시 너희 덮치려고 했었어?!"

    "음. 뭐, 일단은…."

    "그 새끼 거기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해! 내가 지금 당장 가서 그 새끼 대가리를…!"

    "진정하게!"

    머리에 피가 올라서 당장 그림자 이동을 시도하려고 한 나였지만, 디아나가 냉정한 목소리로 그런 날 제지했다.

    "하지만 디아나!"

    "이 몸들이 당했을 리 없지 않은가. 다가오기도 전에 사라 양에게 따귀를 맞고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기절했네."

    …아니. 걔 일단 마인에, 레벨도 전투력도 상당한…사라야. 넌 대체 얼마나 강해지려고 그러니? 설마 도망치려다가 사라의 화살 보고 쫄은 것도, 그전에 이미 따귀 한 대를 맞아서 그런 거였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용서가 안 돼! 더러운 사내새끼가 감히…!"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사라의 힘에 살짝 전율이 일어난 나였지만, 아무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특히 사라는 과거의 일 때문에 그런 건 질색을 하는데, 또다시 사라한테 그런 경험을 하게 하다니!

    다시 한번 분노를 불태우며 그 중2병을 박살 내기 위해 그림자 이동 준비를 하려 했던 나였지만, 이번에도 디아나가 날 제지했다.

    "음? 자네 모르는가?"

    이번에는 냉정한 목소리가 아니라, 뭔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뭘?"

    "성자 스킬도 썼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중2병한테? 그야 썼는데. 그게 왜?"

    "그런데 왜 남자라고 생각하는 겐가?"

    "……."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나는 디아나가 대체 뭘 이상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잠깐만. 아니. 생각해 보니까 내 성자 스킬에 당해서 바지를 적실 때, 남자치고는 좀 많이 젖은 것 같기도….

    "아, 아니! 하지만 그놈 목에 볼록하게! 목소리도 저음이었고! 가슴도 없고!"

    "가슴은 상관없지 않은가!"

    "지, 진정해. 디아나. 넌 그냥 신체 나이 때문에 없…작은 것뿐이잖아. 크면 커질 거잖아. 그런데 그 중2병은 이미 다 컸잖아. 그래서 한 말이지. 네가 그렇게 화낼…."

    "화 안 냈네! 이 몸은 실비아 양을 대신해서 말해 준 것뿐일세!"

    …지금도 화내고 있잖아. 그리고 디아나. 너 은근히 실비아한테 너무하지 않냐?

    아무튼 디아나 덕분에, 나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내가 방금 한 말이, 레이가 끝까지 실비아를 남자로 의심하면서 한 말과 거의 똑같다는 것을.

    아니! 잠깐만! 그래도 실비아랑은 조금 다르잖아?! 나는 그놈 맨 목을 봤다고! 실비아처럼 목 앞에 장치를 달고 옷으로 덮은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울대뼈가 그렇게 도드라질 수 있지?!

    "아, 아무튼 그럼 목에 튀어나온 울대뼈는?"

    "…사라 양의 따귀를 맞고 쓰러질 때, 입에서 뭔가를 뱉어내더구먼."

    "뭔가라니…설마!"

    "음. 아무래도 목 안에 장치를 넣고 있었던 모양일세."

    설마 실비아보다 더 완벽한 남장 중이었다니!

    "그럼…혹시 밑에도?"

    "밑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네."

    뭐야. 그런 것도 안 하고 남장이라고 하고 다닌 거야? 훗. 우리 실비아 발끝도 못 쫓아올 수준이잖아.

    …난 대체 뭘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거지.

    "설마 벗겨 봤어?"

    "그럴 리가 있겠는가. 사라 양이 발로 밟아봤네."

    사라야…. 아니. 그때는 아직 성별도 확실하지 않을 때였고, 갑자기 덮치려고 들었던 놈이니까 사라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만.

    "…그, 그래. 나중에 사라한테 전해 줘. 진짜 남자였으면 포상으로 생각하는 놈도 있으니까 앞으로 그런 짓은 자제하라고."

    "그런 것인가? 세상은 넓구먼."

    "…나도 요즘 절실히 느끼는 중이야."

    레이의 말에 따르면, 비스는 여자를 아예 애 낳는 기계처럼 생각하고 사랑은 남자끼리 동성애를 즐기는 게 당연한 세계라고 하니까 말이야. 진짜 세상은 넓어. 너무 넓어서 문제일 정도로.

    …우리 지금 무슨 얘기하고 있었더라?

    "아무튼 그러면 그 중2병은 지금 조용히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 거야?"

    "이 몸이 여기 오기 전까지는 그랬네."

    여기? 아, 구미호 마을을 얘기하는 건가. 통화가 이렇게 지속되고 있다는 건, 디아나는 지금 구미호 마을에 있다는 얘기니까.

    하지만 그렇다는 건….

    "중2병은 그리로 안 데려간 거야? 위에 있으면 계속 발정 상태잖아?"

    "그렇기는 하네만, 만에 하나라도 관리가 소홀해져 풀려나면 위험해지니 말일세. 저택에 감금해두는 것이 제일일세. 물론 저택에서도 감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네만."

    "아, 그래서 오늘은 디아나만 얘기하는 거야?"

    "음. 이 몸은 자네와의 대화를 위해 대표로 혼자 내려왔다네."

    어쩐지 아까부터 이상하더라. 원래는 누가 통화를 받든 곧 다른 애들을 모아서 다 같이 대화하는데, 오늘은 계속 디아나 혼자만 얘기했으니까.

    아무래도 다른 애들은 저택에서 중2병을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면 우선 계속해서 감시하며 정보를 얻어내려고 해줘. 내 생각이 맞다면, 마인이라는 건 분명 어떤 식으로든지 용사랑 관련이 있는 종족이니까. 아, 그리고 그 녀석 갑자기 바람을 휘감으면서 모습을 감추는 이상한 기술을 쓰니까 조심하고."

    하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통화를 중2병 얘기만 하다가 끝내기는 아쉬웠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반지는 마력이 다해가는 듯 점멸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해야 할 말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음. 알겠네."

    "나도 최대한 빨리 그쪽으로 갈 기회를 만들 테니까."

    "자네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조심하게."

    "응. 사랑해."

    "이 몸도 사랑하네. 낭군님."

    그래도 반지의 마력이 완전히 다하기 전에 달달한 속삭임 정도는 나눌 수 있었던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

    나는 아쉬운 마음에 불이 완전히 꺼진 반지를 한동안 응시하고서, 다시 마차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구원 님. 오늘은 식사를 마친 후 이대로 쭉 수도까지 가려고 합니다만."

    어느새 식사 준비는 다 끝나서, 나는 여전히 어색한 실비아와 레이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이로스 아저씨가 부담스럽게 얼굴을 들이밀며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하는 건 상관없지만, 제발 얼굴 좀 들이밀지 마.

    "응? 안 자고?"

    "네. 도중에 하룻밤을 묵을 마을도 없고, 이대로 가면 아침까지는 수도에 도착할 수 있으니, 그곳에서 수면을 취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나쁘지 않네."

    원래는 오늘 밤도 실비아와 레이를 데리고 이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줄 생각이었지만, 수도에 일찍 도착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선택이었다.

    따로 방을 받으면 거기서 실비아와 레이를 데리고 풀어줘도 되고, 본격적으로 신네 집으로 향하기 전에 틈을 봐서 위에 다녀와도 되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러니까 얼굴 들이밀지 말라고! 왜 이렇게 가까워! 저리 치워!

    "프리움의 성문에서 소란을 일으킨 이인조. 바프라에게 그들의 조사도 명받았습니다만,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 안면에 주먹이라도 한 방 먹여줄까 진심으로 고민하던 내게, 케이로스는 뜻밖의 말을 해왔다.

    이 아저씨, 역시 파란한테 들은 건가.

    혹시 내가 용사라는 걸 은사모 아저씨들이 묘할 정도로 쉽게 수긍한 것도, 그 성문에서의 소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 그보다 지금, 바프라한테 조사를 명받았다고 했지?

    확실히. 성문에서의 소란을 피운 날과 이 아저씨가 은사모 모임을 위해 찾아온 날짜. 그리고 프리움에서 수도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 바프라의 직속 부대라는 놈들은 당연히 도착하자마자 바프라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바쳤을 테니까.

    그래서 마침 프리움에 용무가 있는 이 아저씨를 불러 조사를 명했다는 얘기인가.

    "…수도 방향으로 이동한 흔적이 있다. 그렇게만 보고해. 다른 건 일절 모른 체하고. 자칫하면 네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때 놈들의 마차를 습격하면서, 대놓고 섹스에 빠진 걸 눈치챘다는 티를 팍팍 냈으니까 말이야.

    만약 그 흔적을 케이로스까지 알게 됐다는 의심을 품으면, 놈은 분명 케이로스도 제거하려 할 거다.

    "걱정 감사합니다.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수도로 향했다는 말을 하면 바프라는 분명…."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겠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30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한 레이가 납치당했으니까 말이야.

    안 그래도 지금 눈이 제대로 돌아가 있을 텐데, 레이가 수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들으면 아예 자기가 손수 찾아 나서려고 할지도.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는 거기에 없을 테니까."

    사실은 케이로스의 집에서 조금 묵으면서 위에 들렀다가 오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군. 도착하자마자 곧장 산 위에 있다는 신네 가문으로 향해야겠어.

    "그리고 놈이 이상 행동을 보이면, 나중에 놈의 정체를 폭로할 때 도움이 될 거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그렇게 말하자, 케이로스 아저씨도 무슨 말인지 이해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좋은데 말이야. 비밀 얘기 끝났으면 얼굴 좀 치우지?

    케이로스의 말대로, 날이 밝아올 무렵에 마차는 수도에 도착했다.

    케이로스는 일단 쪽잠을 자고 점심 즈음에 본성으로 보고하러 간다는 모양이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느긋하게 있을 수 없었다.

    이 아저씨가 움직이기 전에 미리 모습을 지우는 게 안전하겠지. 그를 위해 마차 안에서 불편하게나마 잠은 자뒀다.

    그래서 케이로스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거리로 나서려고 했지만, 한가지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니까 너희 집이 저 산 위에 있다는 거지?"

    "…네."

    성이 등지고 있는 커다란 산. 그 산의 정상에 있는 호수 주변에 디에른 가문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다.

    성이 등지고 있는 만큼 상당히 높고 경사가 가파른 산이었지만, 물론 우리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 파티의 신체 능력으로 저 정도 산도 못 올라가겠어?

    문제는 저 산이 위치상 성을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하는 만큼, 출입이 상당히 까다롭게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뭐, 신도 그냥 오자고 한 건 아닐 테니까, 뭔가 생각이 있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면 갈 수 있는데? 출입은 철저히 통제된다면서?"

    "…그게 말이죠 형님."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째선지 신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매우 좋지 않은 예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모른다고 하지 마라. 우리 너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새, 생각해 보니 저는 언제나 프리 패스여서…."

    "넌 수배 중이라 함부로 얼굴도 못 까고 다니잖아! 프리 패스는 얼어 죽을…! 아니지?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거 아니지? 뭔가 생각이 있어서 오자고 한 거지?"

    "혀, 형님."

    "야 진짜 너 그러지 마라. 응?"

    "죄, 죄송합니다."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해 봤지만, 신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어져 버렸다.

    …골치 아프다. 왜 하필 구미호 산에서 내려왔을 때 처음 만난 놈이 이놈이어서. 나 진짜 이런 놈을 믿고 가야 돼?

    "진짜로? 진짜 모른다고?"

    이 생각 없는 새끼! 이 새끼 자기 가문 설득 가능하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그, 그건 아닙니다! 자신 있습니다! 믿어주시오! 데려다주시기만 하면 확실히…."

    "그러니까 그 데려갈 방법이 없다는 거잖아!"

    아니. 침착하자. 침착해.

    이놈이 하는 짓은 마음에 안 들지만, 확실히 디에른 가문을 설득하는 건 우리에게도 엄청난 메리트가 있었다.

    단순히 대여신님 전용 주술을 쓸 수 있는 가문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성의 방어를 위해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되는 산. 그 산의 정상에 자리 잡은 가문이라는 건, 바꿔 말하면 그만큼 엄청난 신임을 얻고 있다는 얘기도 되니까.

    게다가 놈들은 지금 바프라한테 미약까지 만들어주고 있다고 하니,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뭐, 일단 저 산에 침입할 방법부터 찾지 않으면 전부 소용없는 얘기지만.

    젠장. 나 혼자였다면 침입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

    "여러분."

    어쩌면 좋을지 다 같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있자니, 갑자기 케이로스가 찾아왔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케이로스? 잔다면서?"

    "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바프라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내가 바프라한테 쫄아서 그런 건 아니다. 옆으로 곁눈질하니, 레이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직 얼굴을 마주친 것도 아닌데도 이 정도 공포라니.

    감정 공유 때문에 나까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대로 말려들 수는 없었다. 나는 레이의 손을 잡아주면서, 최대한 차분해지려고 노력했다.

    "…찾아오고 있다는 건, 아직 오진 않았다는 거지? 어떻게 오는 걸…아니. 갑자기 여긴 왜 온대?"

    젠장. 레이야. 진정 좀 해라. 나까지 머리가 안 돌아가잖아.

    "제 도착 소식을 듣고 바로 성을 나선 모양입니다. 아마…."

    그런가. 성문에서 난동을 피우고 레이를 납치한 놈들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인가. 성안에서조차 좀처럼 모습을 안 보였다는 녀석이 직접 성 밖으로 행차까지 하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눈이 돌아간 모양이군.

    "우리가 숨을 장소는 있어?"

    한 세력의 주인이 직접 행차하는 거다. 당연히 혼자 오지는 않겠지.

    게다가 목적이 목적이다 보니, 전에 만났던 그 직속 부대인지 뭔지 하는 놈들도 같이 올 확률이 높았다.

    그놈들과 마주치게 되면 우리 파티 대부분이 위험해진다. 레이는 물론이고 프리움의 성문에서 난동을 피웠던 실비아나 쓰레온. 미끼용으로 잡혀간 적 있는 헬레나까지도.

    "네. 지붕 아래에 몇 년은 쓰지 않은 창고가 있습니다."

    "아니. 저택 안은 위험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닐 가능성이 있어."

    "설마 그렇게까지…."

    처음에는 믿기 힘들다는 눈치였지만, 아마 은사모 모임 때 얘기했던 바프라의 진짜 모습을 상기해낸 거겠지. 케이로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지하 수로는 어떻습니까?"

    "지하 수로?"

    "네. 근처에 수도 지하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수로로 통하는 입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상당히 위험한 곳입니다만, 여러분이라면…."

    과연. RPG에서 성에 잠입하거나 성에서 탈출하거나 할 일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흔한 설정의 그거 말이지. 이해했어.

    "문제없어. 안내해."

    "네! 집사!"

    바프라가 자신을 찾아오는데 케이로스가 직접 움직일 수는 없었겠지.

    우리는 바프라가 도착하기 전에, 초로의 집사에게 안내를 받아 저택 근처에 있는 수로로 통하는 건물에 도착했다.

    이곳도 케이로스의 관할인 건지, 우리와 마찬가지로 케이로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의 경비병들이 건물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당연히 집사의 얼굴을 아는 건지 경비병들은 아무런 의문 없이 우리를 통과시켜줬고, 집사는 건물 안에서도 몇 겹의 문으로 철저하게 막혀 있는 지하 수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여기가…지하 수로?"

    "네."

    이게 마지막 문이라는 듯 유난히 두껍고 큰 철문 너머에는 야간 투시 스킬을 가진 나조차도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로 간신히 여기가 지하 수로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이건…왜 지금까지 관리가 안 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은 분위기로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러면 여러분.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하 수로로 들어서자, 집사는 거대한 철문을 닫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시야는 완전한 암흑으로 물들게 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흐르는 물소리에 희미하게나마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몬스터로군. 쓰레온."

    "문제없어. 이따위 어둠. 내 앞에서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아!"

    아니. 야. 누가 갑자기 용사다운 말 하래? 너한테 어둠이 문제 되는지 아무도 안 물어봤거든? 너 지금 헬레나 앞이라고 폼 잡는 거지?

    "마나를 읽고 그곳을 공격하면…어, 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쓰레온은 계속해서 똥 폼을 잡으며 검을 빼 들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내가 먼저 다 잡았거든.

    자기가 아무리 용사고 아무리 빨라 봤자 이런 어둠 속에서 나보다 더 빠를 수는 없지.

    "아니. 싸우는 건 됐고. 검에 마나나 불어넣고 있으라고."

    "뭐? 갑자기 왜?"

    "해 보면 알아."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지만, 쓰레온을 일단 시킨 대로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검에서 거의 하얀 색에 가까운 푸른 빛이 쏟아져 나와, 사방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그대로 앞장서."

    "횃불 대용이었냐!"

    "어쩔 수 없잖아. 달리 쓸만한 게 없으니까."

    나는 주변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강해지니까, 일부러 빛을 비추는 도구 따위 안 들고 왔다고. 애초에 던전에서는 그런 물건 필요도 없으니까 디아나도 만들어두지 않았고.

    "그리고 날 위한 게 아니야. 우린 괜찮아도 다른 놈들이 안 보일 거 아냐. 제수씨가 발 헛디뎌서 수로에 빠지면 너 어쩌려고?"

    "누가 제수…!"

    "어머, 제, 제수씨라니…부끄러워요."

    "끄으응!"

    거품을 물고 반박하려 했던 쓰레온이었지만, 헬레나가 뺨을 감싸며 좋아하자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댔다.

    훗. 이런 건 빨리 부르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그럼 가자."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여기 입구도 케이로스의 관할인 이상, 바프라가 여기까지도 조사할지 모를 일이니까. 어디든 좋으니 멀리 이동해 있지 않으면.

    "그나저나 이해할 수 없네. 이 수로는 수도 지하 전체에 깔린 거잖아? 그런 데에서 이렇게 몬스터가 득실대는데 어째서 이렇게 방치하고 있는 거지? 위험하잖아?"

    또다시 습격해온 몬스터를 물리치면서, 나는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놨다.

    아무리 그래도 몬스터랑 만다는 빈도가 너무 잦았다.

    심지어 몬스터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었다. 약한 놈도 4계층 수준은 됐고, 강한 놈은 6계층의 몬스터에도 밀리지 않을 수준이었으니까.

    덕분에 레이와 헬레나, 신과 유리는 전투에 도움이 거의 안 돼서, 기존 파티 멤버들만으로 몬스터를 상대해야 했다.

    전쟁신 쪽 놈들이 전투에 도움이 안 돼서 여신님 쪽 파티 멤버만으로 싸운다니. 아이러니하다.

    "통일 전쟁의 영향이에요."

    아무튼 그렇게 불평하고 있자니, 뭔가 알고 있다는 듯 유리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리리안 플리투스가 세계를 통일한 그 전쟁인가."

    "네. 그래요."

    찍었는데 맞았다. 다행이다. 플리투스라는 이름을 대고 있는 우리가 모르면 의심할까 봐 찍은 건데.

    "이 수로는 그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라고 해요. 하지만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전쟁 기간 동안 몇 번이나 뺏고 뺏기는 것을 반복하면서 수로를 관리할 여력이 없어졌죠."

    그사이에 몬스터가 들끓게 됐다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물론 지금도 전쟁 중이지만, 그래도 지금은 그냥 요충지 정도가 아니라 수도잖아? 전쟁에서 지지 않는 이상 뺏길 일도 없는 수도. 다시 관리할 생각은 안 한 거야?"

    "물론 했죠. 다만…."

    유리는 잠깐 말을 멈추더니, 뭔가 괴물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뭐야? 왜? 왜 갑자기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자리 잡은 몬스터가 너무 강해서 포기했어요. 이런 어두운 곳에서 이런 수준의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전력을 대규모로 투자하느니, 그 전력을 전쟁에 돌리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죠. 여기 몬스터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처리하다니. 당신들이 이상한 거라고요. 심지어 지치지도 않았죠?"

    …아니. 그러니까 그런 괴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보지 마라니까. 어쩐지 아까부터 레이도 신도 헬레나도 눈빛이 이상하더라니. 그런 뜻이었냐.

    어쩔 수 없잖아. 4계층에서 6계층까지 몬스터 수준이 골고루 섞여 있으니까, 그냥 6계층을 돌파하는 것보다 쉽단 말이야. 우린 그냥 여신님이 내려주신 과제대로 6계층을 착실히 통과하고 온 죄밖에 없다고. 게다가 이것도 전력이 많이 약화된 거야. 만약 여기에 우리 애들까지 있었으면, 이런 수로 따위.

    "아, 아무튼 유리 넌 여기 정보가 좀 있는 것 같다?"

    "저희 가문도 다른 쪽 입구의 방비를 맡고 있으니까요."

    아, 그래. 신네 가문 얘기만 나와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유리 얘도 괜찮은 집 자제였지.

    "그러면 혹시 이 수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알아?"

    "어디로 이어지다니요? 이곳은 수도 지하 전체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바프라의 직속 부대가 수도까지 올 때 배를 타고 프리움에서 내렸던 것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듯,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강은 프리움 근처의 넬슨강이었다. 이 근처에 달리 강 같은 건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런 거대 수로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건, 달리 어딘가에 수원이 있다는 뜻이 되잖아. 즉, 대체 이 물은 어디서 흘러나온 거냐는 얘기다.

    "아, 그건…."

    디에른 가문이 있는 산꼭대기에는 거대한 칼데라호가 있다고 했다.

    거기에 살짝 희망을 걸고 해본 질문이었지만, 유리는 거기까진 모르겠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 순간.

    "산으로 이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이 희망을 얻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

    "혀, 형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 네 말을 계속 믿어야 하나 고민돼서."

    "믿어주십시오!"

    내 단호한 대답에, 신은 상처받은 표정으로 외쳤다.

    사내새끼가 그런 표정 지어봤자 내 마음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지만.

    "이번엔 확실해?"

    "네! 확실히 산에 있는 폭포에서 지하로 이어진 입구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꾸엑!"

    이 새끼가 장난하나.

    나는 신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일단 산이 있는 방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럼 왜 때렸냐고? 그냥.

    그렇게 산이 있는 북쪽을 향해 걷기를 어느새 한나절. 바깥 하늘도 이 지하 수로와 마찬가지로 새까맣게 물들었을 시간. 우리는 드디어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아니. 사실 막다른 길 자체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때마다 조금 돌아가서 다른 방향으로 가면 다시 길이 나왔거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북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이미 전부 다 지나왔다. 여기보다 더 북쪽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막다른 길입니다."

    물론 맵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걸 알 길이 없으니, 여기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냥 막다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러면 또 갈림길까지 돌아가야 하겠군요."

    "갈림길…가보지 않은 곳이 있었던가?"

    심지어 던전 탐험 때 맵퍼 역할도 할 수 있는 그렉이나 듀크까지 저런 말을 할 정도니, 이 지하 수로가 얼마나 미로처럼 되어 있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유리는 그냥 몬스터가 강해서 지하 수로 정리를 포기했다고 말했지만, 실은 몬스터보다 이 구조가 더 문제였던 거 아니야?

    나도 맵을 볼 수 없었으면 평생 여기에 갇혀서 못 빠져나갔을 정도라고.

    "너, 너희들! 설마 길을 까먹었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쫄기는."

    "누, 누가 쫄았다는 거야! 안 쫄았어! 여차하면 위를 뚫고 나가면 되니까!"

    …아 그러세요. 하여간 마인이라는 새끼들은 왜 하나같이 다…아, 사라야! 넌 빼고! 네 욕하는 거 아니야! 뭐만 하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한다든가, 그런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등짝 스매시 맞을 때도 절대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아무튼 갈 수 있는 길은 다 가봤어. 훨씬 남쪽에서부터 빙 돌아가는 길이 있지 않은 이상, 여기가 수로의 최북단이야."

    진짜 쓰레온 저놈 말대로, 천장이라도 뚫고 올라가 볼까?

    잘하면 산 위로 나갈 확률도 있을 것 같기는…아니. 하지만 확실하진 않잖아. 산으로 가기 전에 일단 성이 있잖아. 만약 위를 뚫고 나갔는데 거기가 성안이면, 그보다 더 최악의 상황도 없었다.

    젠장. 위쪽 지도도 미리 완성해놨으면 지금 여기가 어디 아래인지 확실히 알았을 텐데.

    뭐, 성이나 산 쪽까지 가보기는커녕 도시 안쪽도 제대로 돌아다닐 시간이 없었지만.

    "저…형님?"

    어쩌면 좋을지 생각에 잠겨 있자니, 신이 내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왜?"

    "일단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신의 눈은 명백히 유리를 신경 쓰고 있었다.

    확실히.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양이었지만, 유리는 지금 다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니. 유리뿐만이 아니다. 이쪽 세계의 멤버들 모두가 피로감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말하는 사람이 기존 파티 멤버들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중부터는 이 녀석들도 전투에 참여했거든.

    갈림길 옆이나 이미 지나온 길, 심지어 물속에서도 갑자기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을 전부 상대하기에는, 기존 파티 멤버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으니까.

    결국 헬레나를 제외한 모두가 전투에 참여하게 됐고, 이렇게 상시 긴장 상태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전투하는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는 셋은 하루 만에 진이 다 빠졌다는 거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세계라고는 하지만, 좋은 집 자식들인 신이나 유리가 그런 가혹한 환경을 겪어봤을 리도 없으니까. 물론 바프라의 목적을 위해 애지중지 자란 레이 역시도 마찬가지고.

    그나마 헬레나는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전투랑 연이 없는 저레벨 일반인, 온종일 걷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렇게 할까."

    자기가 힘들어서 쉬자고 한 거였으면 또 한 대 쥐어박아 줬겠지만, 자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써서 꺼낸 말까지 구박할 수는 없지.

    나는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여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신. 산에서 지하 수로로 이어지는 문을 봤다는 건 확실해?"

    시각은 이미 밤이었지만, 아직 이런 곳에서 자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웬만하면 오늘 중으로 이 어둡고 습해서 기분 나쁜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가볍게 야식을 먹으며 대화를 시도했다.

    "확실합니다! 어렸을 때 한 번 본 것이 전부입니다만,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너 아까는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같은 느낌이 어쩌고 하지 않았냐?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

    "네. 산 중턱에 거대한 폭포가 하나 있습니다. 저희 가문에서 수행용으로 자주 쓰죠."

    "너 수영 못한다고 하지 않았냐?"

    분명 전에 배 밑바닥에 매달려올 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데.

    "하하핫. 형님. 어렸을 때부터 바위 위에서 물벼락을 맞으며 자라는데 물에 들어가서 놀고 싶겠습니까?"

    몰라 새끼야.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네가 수영하기 싫어하는 이유 따위 아무도 안 궁금해.

    "물론 폭포의 수압을 견뎌내지 못하고 빠진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빠진 적도 있는 거냐. 그러면서도 끝까지 수영을 안 배웠다고? 이건 뚝심 있다고 칭찬해야 하는 건지, 고집만 세다고 구박을 해야 하는 건지.

    "아예 폭포 밑 호수의 밑바닥까지 처박힌 적도 있을 정도죠."

    생사가 걸린 문제였잖아! 좀 배워 새끼야!

    "아, 설마 그때?"

    아무튼 신의 썰풀이에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는지, 유리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그래. 그때. 5살 때였나? 유리는 옆에서 엉엉 울고."

    "웃을 일이 아니잖아! 진짜 죽을 뻔했으면서!"

    "아니야. 웃을 일이야. 유리의 그 우는 얼굴을 보고 난…."

    …이 연놈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지금 내 앞에서 소꿉친구 어필하면서 깨소금 뿌리는 거야? 누군 여자친구 없는 줄 알아?!

    "레이! 자, 컴 온!"

    두 팔을 활짝 펼치며 레이를 끌어안으려고 해봤지만, 레이는 아무 말 없이 얼굴을 붉히며 은근슬쩍 엉덩이를 뒤로 뺐다.

    야! 왜 여기서 부끄러워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빼 버리면 나 혼자 이상한 놈이 되잖아! 평소에는 별로 부끄러움도 없는 성격이면서 왜 이런 쪽 얘기만 나오면 부끄러워하는 거야!

    젠장! 실비아가 남장만 안 하고 있었어도! 부비부비 만지작만지작 행복사 시켜주는 건데!

    "으햐으…."

    갑자기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을 바르르 떠는 실비아를 곁눈질하면서, 나는 눈앞에서 염장을 질러대는 연놈들을 방해…아니. 계속해서 필요한 정보를 듣기로 했다.

    "크흠! 크흐으으음!"

    진짜야. 필요한 정보를 듣기 위해서 이러는 거야. 다른 마음은 전혀 없어.

    "아, 형님.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 호수 밑바닥에 처박혀서 머리를 다친 게 수로 입구를 본 거랑 무슨 관계가 있냐?"

    "머리를 다치지는…하지만 그렇습니다. 제가 수로 입구를 본 건, 바로 그때였습니다."

    "…무슨 말이야?"

    "그 호수 밑바닥에서, 아침에 지나온 그 철문과 비슷한 모양의 문을 봤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드디어 이 수로에서 직접 산으로 빠져나갈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무식한 놈은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얘기를 했는지 전혀 눈치도 못 챈 모양이었지만.

    "…호수 밑바닥에서 봤다고?"

    "네."

    "그 호수, 상당히 깊지? 빠져 죽을 정도라고 했으니까."

    "물론입니다."

    "혹시 네가 본 문에 구멍 같은 건 없든?"

    "네? 글쎄요. 워낙 오래전 일인 데다가, 저는 빠져 죽을 뻔해서 정신이…으음. 오? 오오! 생각해 보니까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형님이십니다! 어떻…으그악!"

    "거기가 이 수로의 수원이잖아 이 무식한 새끼야!"

    참다못한 나는, 결국 신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길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가 처음부터 그 말만 했으면 지금까지 이렇게 모든 길을 들쑤시며 다닐 필요도 없었는데! 그냥 옆에서 물이 흐르는 방향의 반대쪽으로만 따라갔으면 충분했는데! 이 새끼가 당당하게 문을 봤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계속 멀쩡하게 지상에 뚫린 문만 찾고 있었잖아!

    마음 같아서는 몇 대 더 쥐어박아 주고 싶었지만, 그러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나는 몸을 돌려서 막힌 길의 옆쪽, 물이 콸콸콸 흘러나오고 있는 거대한 배수구를 쳐다봤다.

    내 예상이 맞다면, 저 구멍으로 들어가 배수로를 따라가다 보면 저놈이 빠져 죽을 뻔했다는 그 호수의 바닥으로 도착할 수 있을 거다.

    좋아. 그렇다면.

    "일단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내가 가서 확인하고 오지."

    인벤토리에서 수중 호흡용 마스크를 꺼내 멋지게 장착하고, 나는 곧바로 배수구에 다이빙했다. 그리고 수영 선수보다도 멋진 자유형 폼으로 멋지게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앞으로….

    "…형님? 뒤로 밀리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닥쳐어어! 안 돼! 이럴 순 없어! 내가 지금까지 최강의 용사로서 얼마나 멋진 이미지를 잘 쌓아놨는데! 똥폼이라는 똥폼은 다 잡아놓고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어!

    나는 곧바로 자세를 자유형에서 접영으로 바꿨다.

    우오오오! 힘을 내라 내 허리! 섹스로 단련된 허리 근육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거다!

    "오오! 형님이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후하핫! 봤냐! 이게 나야! 이게 내 허릿심이라고! 마치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은…그래 연어다! 연어를 떠올리는 거야! 작은 몸으로 폭포도 거슬러 올라가는 그 힘! 나는 연어다! 연어가 되는 거야! 입안에 넣으면 살살 녹는 새먼핑크의…푸흐읍! 안 돼! 잠깐 타임! 지금껀 실수야! 잘못 생각했어! 어쩔 수 없잖아! 음식으로밖에 못 만나봤으니까 연어 하면 그런 이미지밖에 안 떠오른다고! 안 돼! 웃어서 힘이 빠진…!

    "혀, 형님이 다시 뒤로! 역시 용사의 힘도 대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한 겁니까!"

    옆에서 중계하지 마 이 쓰레기 새끼야!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자, 잠깐! 뭐야 이거! 뭐야 이 부끄러운 감정! 레이! 레이 너 지금 내가 쪽팔린 거야?! 그런 거야?!

    제,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조금 멋없지만!

    그림자 이동!

    배수구 저편의 심연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국 스킬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말해두지만, 난 물살에 진 게 아니야. 그냥 조금 더 편한 방법이 있으니 그걸 택했을 뿐이지. 그런 바보 같고 의미 없는 싸움, 굳이 할 필요도 없잖아?

    수단은 상관없어. 난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해. 그게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고, 그게 내 룰이야.

    설령 다른 이들이 멋없다고 비웃고 손가락질할지라도, 나는 나만의 길을 나아간…응? 뭐야 이거?

    필사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그림자 이동을 반복하고 있자니, 갑자기 배수로의 느낌이 확 변했다.

    내 몸을 뒤로 밀어붙이던 거센 물살이 갑자기 사라지고, 아니. 아예 주변에 물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뭔가 공기가 축축한 느낌은 들지만….

    한발자국 걸음을 옮겨보니, 바닥에 물컹한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서 벽을 짚어보니, 그 역시도 마찬가지로 배수로의 딱딱한 벽과는 다른 물컹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비유하자면, 마치 입안 쪽의 말랑말랑한…자, 잠깐만! 이거 설마!

    황급히 뒤를 돌아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눈앞은 이미 지그재그 모양의 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거, 설마 이빨인가?

    "야! 열어! 열라니까?! 아저씨! 여기 아직 사람 안 내렸어요!"

    이빨로 추정되는 벽을 있는 힘껏 두들겨봤지만, 이놈은 전혀 타격이 없는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성자의…! 아니! 혹시 이 녀석이 그 배수구 밖으로 나온 상태라면, 밖에는 신이! 하여간 그 새끼는 인생에 도움이 안 돼요! 여기까지 오는 중에도 성자 스킬을 못 써서 얼마나 답답했는데!

    좋아! 해주겠어! 감히 날 삼켰다 이거지!? 내가 그림자 이동으로 입속에 자진해서 들어온 거라고?! 상관없어! 나한테는 그게 그거야!

    어디 뱃속에서 미친놈이 날뛰는데도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우오오! 구원 촙! 구원 부레 찌르기! 비기! 심장 폭발!"

    꾸에에엑!

    정체 모를 몬스터의 몸속에서 보이는 내장기관을 마구잡이로 공격하며 다니고 있자니, 사방이 진동하는 느낌과 함께 안쪽에서 갑자기 거대한 물살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역한 냄새의 물살에 휩쓸려서, 나는 그대로 박을 빠져나왔다.

    다만 몸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와중에 제대로 그림자 이동을 쓸 수도 없어서, 그대로 배수로의 물살을 타고….

    촤아아악!

    "오, 형님!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배수구에서 빠져나오는 타이밍에 몸을 비틀어 그 옆쪽 바닥에 히어로 랜딩 자세로 멋지게 착지하니, 앞에서 날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훗. 뭐 그렇지. 하지만 다시 한번 가서 확인해 볼 것이 있어."

    "야. 저기 앞쪽에 거대한 몬스터의 기운이 느껴지던데. 너 설마 졌냐?"

    닥쳐 쓰레온! 넌 새끼야 몬스터가 있는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생각해 보면, 여기는 4~6계층 수준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이다. 그런 곳에서 만난 보스급 덩치의 몬스터라고 하면, 당연히 그 수준도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6계층의 주인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싸우면 나 혼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도와줄까?"

    하지만 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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