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59화 (1,043/1,205)
  •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9화 >

    "우선 네가 저 녀석을 데리고 마을 중앙의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가. 그다음 사람 눈이 없는 타이밍을 봐서, 내가 놈을 위쪽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거야."

    여기 놔두면 문제가 일어날 것이 확실한 위험 종자를 끌고 가주겠다는 거다. 이 녀석이 아무리 저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돕지 않을 수는 없을······.

    "그냥 네가 저 남자도 데려가면 되잖아."

    "······."

    그래. 내 사정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 놓으면서 저 중2병한테는 저 남자라고 해주냐? 차라리 나도 남자라고 불러라. 전에는 그랬잖아? 남자! 남자! 하고.

    "나는 다른 사람한테 얼굴을 보일 수 없어?"

    "왜? 우리 마을 사람들한테는 정체를 숨길 필요도 없잖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 녀석도 내 사정에 대해 대략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평소에는 우리 애들이 여기서 지낸다고 하니까, 얘기 정도는 들었겠지. 전에 보니까 친해 보이기도 했고.

    정작 구미호들이 날 노리는 걸 우리 애들이 무척이나 경계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눈치지만.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굳이 내 입으로 설명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이 꼬맹이는 또 잠깐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기어코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해냈다.

    "······너 자뻑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이, 이 꼬맹이가······! 자기도 내가 준 쾌락을 못 잊고 있는 주제에!

    오냐. 알겠다. 너 잘 걸렸다. 오늘은 말릴 레이아도 없는데, 어디 한번 천국에 올라가 봐라.

    나는 곧바로 성자의 손길을 발동시키고, 이 꼬맹이의 뺨을 꼬집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뻗으려던 바로 그 순간.

    "으윽······크흑······나는······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본 기분이······흥히아으으윽!"

    갑자기 중2병이 일어나려고 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손을 그쪽으로 뻗을 수밖에 없었다.

    이 꼬맹이는 운도 좋지. 어쩜 이렇게 내가 본때를 보여주려고 할 때마다 방해가 들어오냐.

    "그래서."

    성역 선포만으로도 기절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중2병이, 성자의 손길을 맞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모처럼 씻겨준 바지가 다시 축축해지는 걸 미묘한 기분으로 바라봐준 후, 나는 다시 리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가 어쨌다고?"

    "히익! 아, 아무것도 아냐!"

    중2병을 한방에 절정 기절시킨 손을 들이민 것이 상당히 효과적이었는지, 리사는 기겁을 하며 내게서 멀어졌다.

    훗. 처음부터 그럴 것이지.

    "그럼 부탁한다."

    "으으······."

    기절한 중2병의 몸을 던져주자, 리사는 엄청 싫은 표정을 지으며 그 몸을 건네받았다.

    야. 너무 싫어하지 마라. 나도 구미호족 애인이 있는 몸으로서 별로 이런 말 하고 싶지는 않지만, 구미호에게 정액은 오히려 환영할 만한 거 아니냐? 이왕 협력해주는 거니까 아예 그 바지에 스며든 정액을 흡수할 기세로 가자고.

    "하지만 너, 눈에 띄기 싫은 거지? 이 남자 이대로 옮기면 엄청 눈에 띌 텐데······."

    젠장. 그것도 그런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어떻게······아, 그렇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팔찌를 꺼낸 다음, 중2병의 손목에 채웠다. 나이는 물론, 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리게.

    대략 5, 6살 정도의 꼬맹이가 된 중2병의 몸에 로브까지 둘러서 외모를 감추고, 리사에게 건넸다.

    "자, 이제 됐지?"

    "으, 으응······이거라면······. 아까처럼 중간에 깨면 어떡해?"

    왠지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2병을 받아든 리사는, 그래도 역시 중2병이 무섭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까 너무 심하게 겁을 줬나.

    "그땐 내가 모습을 드러날 걸 각오하고서라도 다시 기절시킬 테니까 걱정 마. 넌 나만 믿고 가면 돼."

    "으, 응······."

    고개를 끄덕인 다음, 리사는 중2병을 안아 들고 그대로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 은신을 사용한 내가 바짝 쫓아갔다.

    가는 도중 구미호들을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로브에 감싸인 채 리사의 품에 안긴 중2병이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는지 다들 별말 없이 가볍게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갔다.

    좋아. 이거라면 안 들키고 텔레포트 마법진을 쓸 수 있겠어.

    "그러고 보니 말이야."

    "히익!"

    은신을 쓰고 있는 내 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지, 내가 말을 걸자 리사는 꼬리털까지 바짝 세우며 몸을 떨었다.

    "뭘 그렇게 놀라냐."

    "아, 아무도 없는데서 갑자기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오니까 그렇잖아!"

    과연. 은신 쓴 상태로 말을 걸면 상대방은 그런 느낌인 건가.

    뭐, 별로 관심 없지만.

    "넌 저 집에 뭐하러 왔었냐? 우리 애들 없는 건 알고 있었잖아?"

    "그······."

    뭔가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지, 리사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대로 날 외면해 버렸다.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그런지, 내게서 고개를 돌리려는 것치곤 미묘하게 방향이 어긋났지만.

    "얘 좀 봐라. 수상하네. 집이라도 털러 왔었냐?"

    "사람을 도둑 취급하지 마!"

    "그럼 왜 왔던 건데?"

    "도, 도착했어! 자, 여기면 되지?!"

    쳇. 운 좋은 녀석.

    너무도 수상한 반응에 더 추궁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이런 데서 허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까부터 레이가 느끼는 불안감이 심상치 않은 수준이거든. 이러다가 또 나까지 레이의 감정에 휘둘려 버리겠어.

    "그래. 잘 있어라."

    주변을 확인 후 은신을 풀어서 중2병을 건네받고, 나는 누가 보기 전에 재빨리 텔레포트 마법진에 올라탔다.

    이제 저택으로 가서 우리 애들한테 이 중2병을 맡기고,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위험하겠어.

    "음? 성자님?"

    작아진 중2병의 몸을 한 손으로 들고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정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우연이 다 있군. 설마 이런 곳에서 이런 시간에 성자님을 만날 줄이야."

    별로 놀라지도 않은 것처럼 그렇게 말한 후, 미리엘은 자연스럽게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으악! 너 뭐 하는 거야?!"

    내 바지에 얼굴을 들이밀려고 하는 걸 보고, 나는 황급히 몸을 뺐다.

    "응? 그야 물론 성자님이······."

    "장난도 좀 선 봐가면서 쳐라!"

    이게 지금 남들 다 듣는 데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면 진짜 심각한 거라고! 알아?!

    그야 이렇게 행동하도록 조교 한 건 나지만 말이야. 너도 눈치라는 게 있고 상식이라는 게 있으면 알 거 아니야! 이런 건 둘만 있을 때, 방 안에 있을 때만 하자고!

    나는 필사적으로 미리엘의 행동을 장난으로 얼버무리려 했고, 다행히도 미리엘 역시 그런 내 말을 받아줬다.

    "하핫. 그런가. 성자님이라도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군."

    뭐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야. 너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도 한 짓이 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 그럴 때도 아니고 말이다.

    "그나저나 성자님이 이 시간에 혼자서 무슨 일이야?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 모양인데."

    "너야말로······아, 있었구나. 안녕."

    미리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해서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지금 보니 그 뒤에는 다른 간부들도 나란히 서 있었다.

    5계층의 거점 경비를 맡은 지니를 제외한 간부진 총출동이라.

    얘들 또 다 같이 모여서 어딜 가려고······.

    "······안녕하냐."

    아니. 그보다 앨리시아. 너 표정이 좀 무섭다?

    미리엘이 아까 한 그건 장난이라고······역시 대충이나마 사정을 아는 앨리시아한테 그런 변명은 안 통하나.

    "그래서?"

    "응? 뭐가 그래서?"

    "성자님이 여기에 혼자 있는 이유."

    "별로 아무······큭!"

    왠지 미리엘한테 이 중2병을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얼버무리려고 한순간, 갑자기 엄청난 감정의 홍수가 몰려왔다.

    레이 그 녀석······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설마······.

    "성자님?"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미리엘을 무시한 채,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빨리 내려가서 확인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이 중2병을 저택까지 배달할 시간은 없어. 그렇다면······.

    "앨리시아!"

    "어, 어엉? 나?"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앨리시아는 조금 전까지 보여줬던 험악한 표정을 버리고 얼빠진 대답을 들려줬다.

    "부탁이 있어!"

    "뭐, 뭔데?"

    "이 녀석을 우리 저택에 좀 보내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중2병을 미리엘한테 맡기는 건 위험했다.

    하지만 앨리시아라면, 미리엘이 날 찌르려고 했을 때도 몸을 던져서 막아줬던 앨리시아라면, 부탁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 어린애?"

    "그래. 아, 그리고 이것도. 내용물은 확인하지 말고 부탁할게."

    나는 인벤토리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서, 간략하게 사정을 적은 다음 그 쪽지를 중2병의 로브 안에 쑤셔 넣었다.

    사실 이런 쪽지 같은 걸 눈앞에서 보여주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우리 애들한테 사정 설명은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의리가 두터운 앨리시아라면 내 부탁대로 정말 쪽지의 내용을 안 볼 수도 있다는 그 미약한 가능성에 거는 수밖에 없지.

    "미안한데 믿을 건 너밖에 없어서 그래. 부탁 좀 해도 될까?"

    "그, 그래라."

    마지막으로 그렇게 한 번 더 부탁을 하자, 앨리시아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럼 부탁 좀 할게! 그럼 난 이만!"

    아까부터 요동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나는 황급히 텔레포트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앨리시아."

    텔레포트 마법진의 빛에 휘감겨 사라지는 구원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본 후, 미리엘은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날. 구원이 미리엘을 설득하고, 미리엘이 더는 6계층 이후를 넘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다음 해방된 바로 그날.

    그날부터 묘하게 미리엘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앨리시아는 왠지 모르게 눈치채고 있었다.

    그 미리엘이 자신의 목적마저 포기하고 던전의 심층에 향하는 것을 포기하는 건 이상하다든가,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아니. 물론 그것도 이상하지만, 앨리시아로서는 그것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바로 구원을 대할 때 보여주는 미리엘의 태도 말이다.

    구원을 바라보는 눈빛. 그 이름을 부를 때 미묘하게 톤이 높아지는 목소리. 지금껏 보여준 적 없는 느낌의 미소.

    이런 걸 여자의 감이라고 하는 걸까? 평소라면, 미리엘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상대가 구원이 아니었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있던 앨리시아로서는, 낮은 톤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미리엘의 목소리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구원은 뭔가 급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급할 때에, 구원이 기댄 것은 다름 아닌 앨리시아 자신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믿을 건 너밖에 없다는 구원의 그 말에 앨리시아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바꿔 얘기하자면, 선택받지 못한 미리엘의 기분은······.

    "그 아이, 넘겨줄 수 있겠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미리엘은 앨리시아를 향해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일단 앨리시아를 질투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원래부터 자기 속내를 감추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미리엘이다. 정말로 자기 속내를 감추려고 한다면, 앨리시아로서는 미리엘이 질투하고 있는 건지 그렇지 않은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무, 뭐 하려고."

    "귀엽게 생긴 아이니까. 한번 안아보고 싶어서."

    거짓말이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앨리시아라도 그 정도쯤은 간파해낼 수 있었다.

    "너도 방금 들었잖아? 그 녀석은 나한테······."

    "앨리시아. 너도 날 의심하는 거야?"

    한순간, 미리엘의 검은 감정이 몸 밖으로 흘러나온 것 같았다.

    "그, 그게 아니라······! 미리엘! 너······!"

    "하긴. 그런가. 그때도 날 믿지 못해서 자기 몸을 던졌을 테니까."

    "아, 아니······!"

    그 얘기를 꺼내버리면 앨리시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건 구원을 위해 아라크네 클랜 전원을 배신하는 행동이었고, 그 때문에 미리엘은 평생 쫓던 꿈마저 포기하게 됐다.

    하지만 그러고도 미리엘은 한 번도 앨리시아를 책망한 적이 없었다. 책망한 적은 없었지만, 역시 앙금이 남아 있지 않을 수는 없었던 건가.

    "아, 안아 보고, 대마법사님네 저택으로 갈 거지?"

    "물론이야. 앨리시아도 알잖아? 난 성자님한테 거스를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거든."

    "······자. 여기."

    구원. 미안. 그래도 번 안게 해주는 것 정도는 괜찮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앨리시아는 품에 있던 아이를 건네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역시 앨리시아야. 그럼 갈까?"

    원래 목적인 텔레포트 마법진이 아닌, 반대편.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방향으로, 미리엘은 발걸음을 옮겼다. 앨리시아에게 건네받은 아이를 단단히 품에 안고.

    아무래도 앨리시아에게 아이를 다시 돌려줄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저, 저택으로 가는 거지?"

    "물론이야."

    너무 곧바로 대답이 나와서, 왠지 모르게 더 신뢰가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앨리시아는 다시 한 번 미리엘을 추궁했고.

    "대, 대마법사님네 저택으로 가는 거지?"

    "앨리시아."

    "뭐, 뭐야."

    "이런 밤중에 찾아가는 건 대마법사님께 실례가 아닐까? 우선은 우리 저택으로 돌아가자."

    역시나 미리엘은 구원의 부탁을 곧장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뭐?! 미리엘! 하지만 그 녀석은······! 너도 알잖아. 나 이런 약속 제대로 못 지키는 거 엄청 싫어한다고! 응? 내 얼굴을 봐서라도······."

    평소 같았으면 힘으로라도 빼앗으려고 들었겠지만, 지은 죄가 있는 앨리시아는 미리엘에게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물론 잘 알지. 나와 앨리시아 사이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아침이 되면 제대로 전해 줄 거야."

    그리고 그런 앨리시아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 미리엘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여줬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9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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