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057화 (1,041/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7화 >

실비아와 레이 사이의 일도 해결되고 나서, 우리는 다 같이 식당으로 왔다.

아니. 해결됐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나. 결국 도중에 내가 끼어들어서 흐지부지된거지 둘 사이에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이야.

덕분에 날 사이에 두고 양옆에서는 계속 묘한 침묵만 감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얘들한테 신경 써 줄 상황도 아니었다.

식당에는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앞으로 3일 더······."

"네. 정말 아쉽지만 그렇습니다. 회의라는 명분이 있다고는 하나, 저희도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는 위치에 있는지라."

아니. 난 아쉽다는 뜻으로 한 말 아닌데. 오히려 아저씨들은 빨리 가서 물밑작업이나 해줬으면 좋겠어. 어제 그렇게 했으면 됐지 뭘 3일이나 더 남아서 난교 파티를 하려고 그래?

거기에······.

"그래.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는 본성에서 일한다고 했지?"

"케이로스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어제 본성에서 일한다고 했던 아저씨한테 말을 걸자, 아저씨가 이름을 밝혀왔다.

아저씨 이름 따위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그러면 돌아갈 때는 곧장 그쪽으로?"

"네. 그럴 예정입니다만."

"그럼 같이 가지."

내가 듣기에도 얻어 타고 가자는 말을 참으로 뻔뻔하게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저씨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본성에 가실 생각이십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신네 집안, 디에른이라고 했던가? 거기에 가려는 거지만. 어차피 근처에 있는 거잖아?"

"네에······뭐······."

언젠가 신한테 자기 집이 수도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아서 한 말이었지만, 어째선지 아저씨는 확실히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뭐지? 수도에 있는 게 아닌 건가?

"하지만 디에른 가에는 무슨 용무로? 혹시······."

"그래. 이왕이면 그쪽 사람들도 설득하러."

"디에른 가를 말입니까. 그 가문 사람들이 쉽게 설득당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만."

신한테도 대충 얘기를 들었으니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그런가. 신이랑 친한 이 아저씨들도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니.

"그런 모양이더군. 하지만 나도 생각 없이 가는 건 아니야. 신하고도 얘기를 좀 나눴거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가보려는 거야."

"흠. 확실히 디에른 가문을 포섭할 수 있다면 그보다 든든한 일도 없지요. 그러면 수도로 가는 건 신도 같이 가는 겁니까?"

"신뿐만 아니라 전부 다 같이. 그래서, 같이 좀 얻어 타고 가도 될까? 남한테 얼굴 보이면 위험한 녀석들이 많으니까, 부담된다면 거절해도 상관은 없지만."

"아뇨. 그렇다면 더더욱 제 사병으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 안전하겠지요. 도중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얘기가 진행되어서, 그 이후로 3일 후. 광란의 난교 파티가 끝나고, 우리는 드디어 바프라의 수도로 향하게 됐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그 광란의 난교 파티에 안 꼈다. 내가 미쳤다고 그 지옥을 또 구경하러 가겠어? 아저씨들의 끈질긴 초대가 있기는 했지만, 레이를 핑계로 전부 거절했다.

모여서 사랑 얘기나 떠드는 아저씨들답게 남의 연애사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지, 레이랑 있으면 순순히 물러나 줘서 말이야.

덕분에 실비아는 계속 혼자 방을 써야 했고, 결과적으로 실비아와 레이의 관계도 전혀 진전이 없는 채 3일이 흘러 버리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은사모의 모임이 끝나고, 우리는 모두 케이로스 아저씨의 사병들이 입는 갑옷을 걸쳐 입었다.

이거라면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도 전혀 의심받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바프라가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레이나, 쫓기는 몸인 신과 유리. 그리고 성문의 소동으로 얼굴이 팔린 실비아와 쓰레온까지. 숨어다녀야 할 사람이 많은 우리 파티가 여행하기에는 이보다 더 안전한 방법도 없었다.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야. 헬레나 씨는 기다리게 하는 게 안전하지 않냐?"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는데······."

"왠지 두근두근하네요! 저, 이렇게 마차 타고 여행하는 거 처음이에요!"

우리 파티에 헬레나까지 껴있다는 사실이었다.

순박한 시골 처녀 같은 미소가 보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게 해주기는 했지만,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면 역시 안 어울린단 말이지.

냉정하게 말해서, 짐덩이 하나를 안고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도 레이가 좋아하니까 헬레나가 있는 게 아예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저 미소를 보고 어떻게 놔두고 오냐!"

몰라 새끼야. 나한테 묻지 마. 네 여자니까 네가 알아서 관리해야지.

"아무튼 산에는 절대 못 데려간다. 진짜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때는 얌전히 케이로스 아저씨네 집에서 기다리고 있게 하자고. 도착 전까지 꼭 설득해라."

"······아, 알았어."

아무리 여자에 눈이 먼 쓰레온이라도 일단 여기 온 목적이나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지, 녀석은 드물게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산이라고 하는 건 다름이 아니다.

바프라의 수도는 제법 큰 산을 등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디에른 가문의 저택은 그 정상에 세워져 있다는 모양이다.

디에른 가가 수도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아저씨들의 표정이 묘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뭐, 던전을 탐험하며 여기까지 내려온 우리가 이제 와서 산 좀 타는 것 가지고 힘들어할 이유도 없으니, 별로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아무튼 수도까지는 위험한 일도 없을 테니, 편하게 가기로 할까."

케이로스의 사병 차림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당연하게도 우리가 마차 밖을 호위하며 걸을 일은 없었다.

우리는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이 마차 안에서 편하게 있으면 그만이다.

"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떠나려니 아쉽군요."

"왜? 며칠 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냐?"

"아뇨.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저곳 사람들에게도······."

그런 건가. 신과 유리의 눈치가 보이는지 말을 아꼈지만, 나는 그렉이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요 며칠 잘 안 보인다 싶었더니, 그렉은 듀크랑 같이 마을에서 정보 수집이라고 할까, 특유의 친화력을 살려서 마을 사람들이랑 어울리고 있었다고 한다.

안 그래도 동성 동업자 간의 유대감이 두터운 남자 모험가고, 그렉은 음유시인이라는 직업도 있어서 더욱 친화력이 좋으니까 말이야. 남자들만 모여 있는 도시에서 사람들이랑 친해지며 정보를 모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뭐, 일반인들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야. 어차피 여기나 수도나 일반인들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디에른 가의 일이 끝나면 거기서 실력 발휘를 하라고."

"네! 믿어주십시오! 이 그렉! 구원 님을 위해서라면······!"

"얼굴은 들이밀지 말고!"

안 그래도 투구 때문에 답답해 죽겠는데! 이 호랑이 놈은 심심하면 얼굴을 들이밀어서 후덥지근한 분위기를 뿜어댄다니까.

"그보다 신."

"네, 넵! 형님!"

"그렇게 긴장하지 마. 자신 있다면서?"

"네! 무, 물론 있습니다!"

"그럼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당당하게 있어. 그보다 조금 듣고 싶은 게 있는데. 너희······."

콰아아앙!

어차피 수도까지는 마차 타고 편하게 있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완전히 긴장을 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기운이 지근거리까지 도달할 때까지 반응을 못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기운을 느낀 순간, 이미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의 옆면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완전히 뻥 뚫려 버린 쪽의 창가에 타고 있는 게 다름 아닌 실비아였다는 사실이었다.

우리 기사님은 이런 때에도 절대 긴장을 풀지 않거든.

기운이 쏘아져 나온 쪽으로 눈을 돌리니, 거기에는 제대로 기운에 반응해서 방패를 앞으로 내세우고 있는 실비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마 저게 아니었다면 마차는 한쪽 면만 뻥 뚫리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이 났겠지.

"누, 누구냐?!"

"어떤 놈이 감히 케이로스 님의······!"

갑작스러운 습격에 물론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차도 덩달아 난리가 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 마차 이외에는 아직 습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아 보였지만.

그도 그럴 것이, 습격자는 단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역시 여기에 있었군."

그리고 그렇게 주변이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묘하게 똑똑히 울리는 목소리가 내 귀로 들어왔다.

뭐지? 이 묘하게 부드러운 목소리는?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 같았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알 수 있어. 이 몸의 떨림이, 이 심장의 고동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어."

수십 명이 지키고 있는 마차를 단신으로 습격한 주제에, 놈은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묘한 연극조의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이 떨림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역시 네 피가 필요한 모양이군. 오늘 밤은 붉은 달의 밤. 그 피로 대지를 물들인다고 하더라도, 이 고요한 밤의 풍경을 해치는 일은 없겠지."

연극조라고 할까, 살짝 많이 안타까운 느낌의 중2병······중2병? 거기에 부드러운 목소리? 아, 저, 저놈 설마······.

부스스한 머리나, 시뻘겋게 핏줄이 선 눈알. 더러운 차림새까지.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전혀 달라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혹시 그 녀석인가?

"잠깐 멈춰!"

놈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케이로스의 사병들을 멈춰 세운 다음, 나는 황급히 마차를 내려섰다.

"구원 님? 왜 그러십니까?"

"내가 아는 놈이야. 보다시피 조금······문제가 있는 놈이라서 말이야. 미안하지만 먼저 가고 있어. 난 이 녀석과 얘기 좀 한 다음에 따라갈게. 상관없지?"

내 예상이 맞다면, 놈의 목적은 나 하나다. 내가 남아준다고 한다면, 다른 놈들은 그냥 보내주겠지.

"······좋겠지. 기회를 주지. 10을 셀 동안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그리고 역시나 그 예상은 맞았는지, 놈은 나와 마차를 잠시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

"괜찮으니까 하라는 대로해 줘. 얘는 내가 따끔하게 혼을 낼 테니까. 케이로스 아저씨도 알 거 아니야?"

아저씨 사병들이 한 다스로 덤벼봤자 이 녀석한테는 상대도 안 된다는 것쯤은.

"괜찮겠지요. 가자."

내가 생략한 뒷말을 케이로스 아저씨는 확실히 이해했는지, 아저씨는 잠시 이쪽을 바라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 하지만······."

"가자고 했다."

"네, 넵!"

나랑 말할 때와 달리 카리스마 넘치는 케이로스 아저씨의 호통에, 우물쭈물하던 병사들은 결국 다시 자기 위치로 돌아가 마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이게 무슨······."

물론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비아! 레이 그 녀석 붙잡아!"

"네!"

"뭐······으으음! 으읍! 으읍!"

그마저도 실비아를 시켜서 제압시켰다.

레이야. 안 그래도 여자인 게 들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지는 세계에서 소리 지르려고 하지 마라. 넌 실비아처럼 목소리 바꾸는 장치 같은 것도 없는 주제에.

"혼을 낸다라······재미있군."

아무튼 그렇게 마차를 보내고 다시 이 중2병 쪽을 바라보니, 놈은 끈적한 미소를 지으면서 웃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이상했어. 이러니까 내가 바로 눈치를 못 챘지.

이 중2병, 원래 뭔가 조금 더 산뜻한 느낌의 중2병 아니었어? 같은 중2병이기는 해도, 왜 이렇게 말투나 인상이 달라진 건데? 그동안 딸을 너무 많이 쳐서 머리가 이상해진 건가?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미안한걸.

"네놈 따위가? 더러운 창녀의 개 주제에 기어오르지 마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놈은 갑자기 폭탄 발언을 던졌다.

아니. 폭탄 발언이라고 할까, 역시 눈치채고 있었구나. 내가 여신님의 사자라는 거.

뭐, 성자 스킬을 직격으로 맞고, 심지어 그걸 풀지도 못한 채 한참 동안 달고 살았던 거다. 그러고도 눈치를 못 챘으면 그게 더 이상했겠지.

진짜 다른 놈들을 먼저 보내놨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어.

"그래. 그래. 미안. 미안하다. 풀어주면 되지?"

어쩌면 놈은 내가 겁먹길 바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그도 그럴 게, 미안하지만 난 인간 상대로 최강이니까.

"아니. 푸는 건 나다. 이 왼발에 담긴 흑염룡을 해방해, 네놈의 심장을 꿰뚫······흥히이이잇!"

보통 흑염룡을 해방시킨다고 하면 팔 아니냐? 왜 또 다리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우선 가볍게 성역 선포부터 해줬다.

다른 스킬은 빗나갈 우려가 있으니 일단 판부터 깔 셈이었지만, 아무래도 놈에게는 이 성역 선포만으로 충분한 모양이었다.

뭐, 오랫동안 몸에 내 기운을 달고 살았으니까 말이야.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겠지.

오히려 아까까지 멀쩡하게 말을 하고 있던 게 더 신기할 수준이었다.

인정할게. 넌 잘 버텼어. 칭찬해 줄게.

고간을 잡고 바닥에 엎어진 채 엉덩이를 움찔움찔 떠는 중2병을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57화 > 끝


0